민은기의 클래식 비망록
높은 열기로 달아올랐던 총선이 끝났다. 직업 정치인들뿐 아니라 다양한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 국민의 선택을 받았다. 이들의 다양한 경험과 시각이 나라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리라. 비례대표 제도의 취지도 바로 그것이라 하니까. 그러나 음악계 인사들 가운데 정치를 하는 사람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우리나라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다. 역사를 통틀어 유명 음악가 중에서는 아마 베르디가 유일할 것이다.
정치적 투쟁 직접 나선 적은 없어
주세페 베르디. [사진 사회평론]
베르디는 통일 전후 이탈리아에서 그 누구보다 사랑을 받았던 정치인이었다. 베르디는 주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파르마 공국의 대표로 추대되었으며, 통일 후에는 이탈리아 초대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는 2년 만에 정계를 은퇴하고 다시 작곡가의 삶을 살았다. 사심이 없는 사람이어서 일까. 정계를 떠난 후에도 그는 대중들에게 늘 좋은 모습으로 기억되었고 통일 이탈리아의 첫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에 의해 종신 상원의원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하지만 베르디가 처음부터 정치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가 정치에 눈을 뜨게 된 과정은 오히려 우연에 가깝다. 그 시작은 베르디가 28세에 작곡한 오페라 ‘나부코’였다. 오페라 ‘나부코’는 사랑과 배신에 관한 내용이었으나 청중들은 베르디의 작곡 의도와는 전혀 다른 이유로 이 작품에 열광했다. 당시 오스트리아의 지배 아래 있었던 이탈리아인들이 노예로 전락한 히브리 백성들의 처지에 격하게 감정이입을 했기 때문이다. 특히 고국을 그리며 부르는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꿈이여, 금빛 날개를 타고 가라’는 이탈리아인들 속에 잠자던 저항 의식을 깨워 그들의 심장을 뜨겁게 달구었고, 이후 이탈리아 통일 운동 리소르지멘토를 대표하는 노래가 되었다.
‘나부코’는 베르디가 이전 작품의 실패와 자식과 아내의 잇따른 사망으로 실의에 빠져 지내다가 어렵게 마음을 다잡고 만든 곡이다. 하지만 무명에 가깝던 베르디의 ‘나부코’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었던 데에는 그 시기 최고의 프리마돈나 주세피나 스트레포니의 도움이 컸다. 그녀가 ‘나부코’에서 아비가일레 역을 선뜻 맡아주었기 때문이다. ‘나부코’를 통해 예기치 못한 대성공을 경험한 베르디는 이제 본격적으로 애국적 주제의 대본을 골라 작곡하기 시작했다. 1차 십자군을 소재로 한 ‘롬바르디인’, 잔 다르크 이야기인 ‘조반나 다르코’를 비롯하여, 이때 베르디가 무대에 올린 ‘에르나니’, ‘알치라’, ‘아틸라’, ‘군도’, ‘해적’ 등은 모두 애국적 작품들이다. 이들은 날로 뜨겁게 타오르던 이탈리아인들의 통일에 대한 열망에 기름을 붓는 효과를 냈고 베르디의 인기도 크게 치솟았다.
오페라 나부코 장면. [사진 사회평론]
그리고 1848년. 유럽 전체가 혁명의 열기에 휩싸였을 때 밀라노에서도 민중봉기가 일어나 오스트리아군을 도시에서 몰아내는 이른바 “영광의 5일”, 친퀘 조르나테가 이루어진다. 이때부터 베르디는 이전에 사용하던 은유적이고 암시적인 서사를 버리고 애국적 감정을 격정적이고 직설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청중들은 더 뜨겁게 베르디에 열광했다. 로마에서 초연된 ‘레나노 전투’는 리허설 때부터 이미 관객들로 객석이 가득 찼고, 극 중에서 “신성한 조약으로 이탈리아의 모든 아들이 하나로 뭉칠 것이다”라고 서약하는 장면에서는 청중의 감동이 절정으로 치달아 “베르디 만세, 이탈리아 만세”를 외쳤고 공연장은 광란의 도가니가 되었다.
이제 베르디는 단순한 작곡가가 아니라 정치가로 인식되었고, 그의 오페라에 대해 검열이 시작되어 대본 수정을 요구당하는 일이 많아졌다. 그렇다고 그가 정치적 투쟁에 직접 나섰던 것은 아니다. 그는 혁명이 일어났을 때 대부분 파리에 머물고 있었고 “영광의 5일” 때에 한 번 밀라노에 왔지만, 밀라노가 오스트리아군에 의해 다시 점령당하자 바로 파리로 돌아갔다. 당시 베르디는 파리에서 스트레포니와 살고 있었다. 과거 최정상급의 가수였던 그녀는 잦은 출산과 무리한 출연으로 건강과 목소리를 잃었고 파리에서 살롱을 출입하며 지내고 있었는데, 베르디를 만나 연인 사이가 된 것이다.
그녀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온 베르디는 그녀와의 관계를 못마땅해 하는 가족 친지들로부터 냉대를 받았지만 두문불출하며 오직 작곡에만 전념했고, ‘라 트라비아타’를 비롯해 ‘리골레토’, ‘일 트로바토레’, ‘시칠리아의 저녁기도’와 같은 걸작들을 쏟아냈다. 이 시기 그의 작품에서는 애국적인 요소가 빠진 대신 등장인물 개개인의 복잡한 성격과 심리가 세밀하고 낭만적으로 묘사되었고 관객들에게 내면 깊은 감동을 선사했다. 청중들은 베르디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그의 작품들은 이탈리아는 물론 유럽 전역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이제 그는 정치와 전혀 관계가 없어진 듯 보였다.
그러나 인생은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법. 10년 만에 군중은 베르디를 다시 정치적 무대로 소환한다. 1859년 2월 로마에서 베르디의 ‘가면무도회’ 초연이 있었는데, 환호하던 관객들이 일제히 비바 베르디를 외치며 거리로 뛰쳐나오는 일이 벌어졌다. 그리고 로마 시내 곳곳에 비바 베르디라는 벽보가 나붙기 시작했다. 단순한 우연일까, 아니면 운명일까. 베르디의 이름 다섯 자 VERDI는 ‘이탈리아의 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만세’라는 뜻의 Viva Vittorio Emanuele Re D’Italia의 첫 글자와 같아서, 베르디를 연호하는 것 자체가 곧 통일 운동의 선봉장이었던 에마누엘레를 중심으로 이탈리아를 통일하자는 외침이 되었다.
따라서 통일 후 이탈리아인들이 베르디를 영웅으로 추앙한 것은 이미 예견된 일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베르디 자신이 정치가가 되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그저 오래전부터 존경해 오던 카부르 수상의 “이탈리아를 건국하려면 국민들의 상상력에 강력한 영향을 미칠 베르디의 예술적 천재성이 필요하다”는 간곡한 요청을 물리치지 못했을 뿐이다. 국회의원이 된 베르디는 통일 전쟁의 희생자를 위한 모금 활동에도 열성적이었고 의회에 빠지지 않고 출석도 했었지만 카부르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자신의 적성에 맞지 않는 정치를 할 의미도 인내심도 없다며 정치계를 떠났다.
‘아이다’ 대성공 뒤 농부의 삶 살기도
주세피아 스트레포니. [사진 사회평론]
음악계는 베르디의 귀환을 환영했다. 즉시 공연 요청이 쇄도했는데 공백 기간이 무색하게도 몇 달 만에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황제 극장에서 이루어진 ‘운명의 힘’ 초연에서 큰 환호와 함께 알렉산드로 2세로부터 훈장과 거액의 하사금까지 받았다. 이듬해 파리와 런던에서는 처음 도전하는 그랑 오페라 장르인 ‘동 카를로스’를 성공적으로 무대에 올렸다. 이어서 전 세계를 놀라게 한 대작을 내놓았는데, 바로 수에즈 운하 개통을 기념하여 이집트 부왕이 위촉한 오페라 ‘아이다’였다.
이집트 왕실에서 예산을 아끼지 않은 덕분에 ‘아이다’의 무대는 웅장하기 그지없었으며 의상과 배경은 화려함을 넘어 환상적이기까지 했다. 카이로 초연에서 대성공을 거둔 ‘아이다’는 밀라노 라 스칼라극장 공연을 시작으로 이탈리아 전역으로 퍼져 나갔으며 가는 곳마다 엄청난 찬사를 받았다. 심지어 나폴리 공연에서는 열광한 청중들이 베르디를 태우고 가두행진을 벌였다. 이 성공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아이다식 성공’이란 신조어가 등장하기도 했다.
70세가 된 베르디는 ‘아이다’의 놀라운 성공을 뒤로하고 농부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하지만 16년 만에 이탈리아 오페라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는 걸작 ‘오셀로’를 들고 나와 세상을 다시 놀라게 했다. ‘오셀로’를 초연한 라 스칼라의 객석은 전 세계에서 몰려온 예술계, 문화계의 저명인사들로 가득 찼고 극장까지 가는 모든 길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공연이 끝나자 관객들이 베르디가 묵고 있던 호텔로 몰려가서 그가 발코니에 나올 때까지 갈채와 환호를 보냈으며 새벽까지 떠나지를 않았다. 그 이후 자전적 성격의 오페라 부파 ‘팔스타프’를 내놓는 노익장을 과시한 후 베르디는 88세를 일기로 영면에 들었다.
베르디의 장례식은 그의 유언에 따라 검소하게 치러졌다. 그러나 밀라노 시민들 모두가 거리로 나와 운구 뒤에서 ‘노예들의 합창’을 따라 부르며 베르디의 마지막 길을 함께했다. 그는 천생 예술가였고 어쩌다 정치가였다. 두 모습 다 사람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으니 그 성공의 비결이 궁금하기만 하다. 아마도 우리네 정치가들에게 부족하다고 하는 진정성과 공감 능력 때문이 아닐까.
민은기 서울대 음악학과 교수. 서울대학교에서 음악이론을 전공하고 파리 소르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1995년부터 서울대 음악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음악과 페미니즘’ ‘독재자와 음악’ ‘대중음악의 역사’ 등을 주제로 여러 권의 저서를 출판했으며 최근에는 『난생 처음 한번 들어보는 클래식 수업』 시리즈를 집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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