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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심은 경멸하면서 ‘대한민국’은 이용해 먹는 사람들

鶴山 徐 仁 2022. 11. 27. 13:47

사회아무튼, 주말

 

애국심은 경멸하면서 ‘대한민국’은 이용해 먹는 사람들

 

[아무튼, 주말] [노정태의 시사哲]

영화 ‘국가대표’와 태극 마크
월드컵과 ‘통 큰’ 애국주의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입력 2022.11.26 03:00

 

 

 

일러스트=유현호

 

 

일곱 살에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 1970년생 차헌태(하정우). 동생과 함께 입양되어 새로운 인생을 살았다. 스키를 잘 타서 고등학생 시절 미국 주니어 알파인 대표팀 선수로 활약할 정도였지만,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에 시달리다가 결국 백수로 살고 있다. 그의 유일한 희망은 단 한 번이라도 생모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한국에 왔다.

 

그런 헌태에게 자꾸 따라붙는 사람이 있다. 어린이들을 가르치며 근근이 먹고사는 스키 코치 방종삼(성동일). 전북 무주가 미국의 솔트레이크시티와 동계올림픽 유치 경쟁을 벌이는 중인데, 한국은 대중적 동계 스포츠도 얼마 없고 대표팀도 쇼트트랙 등 몇 종목으로 한정되어 있어서 불리하다. 자기들끼리 싸우고 와해되지만 않으면 다행일 것 같은 급조된 인원에게 태극 마크를 붙이고 국가대표로 세운다. 김용화 감독의 영화 <국가대표> 줄거리다.

 

헌태는 전 미국 국가대표. 국적이 미국이다. 엄밀히 따지면 한국인도 아니다. 게다가 애국심은커녕 원한을 가득 품고 있다. 달라붙는 종삼에게 독기 어린 표정으로 내뱉는다. “내가 말했잖아요. 찢어버리고 싶다고, 대한민국. 나 미국 갈 때 동생이랑 나랑 삼천만원에 팔았어요, 한국이. 그런데 나 버린 나라에 다시 국가대표, 웃기는 거 알죠?” 종삼은 대답한다. 국가대표가 되어 금메달을 따면 유명해져서 엄마를 금방 찾을 수 있다. 나라에서 아파트도 한 채 준다. 아주 노골적인 제안이다. “그러니까 너도 이용하라고, 대한민국.”

 

애국심이란 무엇일까? 우리 한국인에게 애국심은 익숙하면서도 낯선 개념이다. 반도체와 K팝의 성공에 어깨 으쓱해지지 않을 한국인이 누가 있겠는가. 전통적으로 애국과 충성을 강조하는 보수 진영뿐 아니라, 국가를 벗어난 사고를 중시하는 진보 진영에 속하는 이들도, 다른 나라 사람들에 비하면 애국심이 투철한 편이다. 그렇다 보니 마치 물고기가 물에 대해 생각하지 않듯 한국인은 애국심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미국은 사정이 다르다. 이민자들이 만든 나라이기 때문이다. 의식적으로, 지속적으로, 애국심을 강조해 왔다. 그런데 미국의 전후 세대, 이른바 ‘베이비부머’들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했다. 미국은 자랑스럽지 않다. 그 엄청난 힘을 바탕으로 세상을 지배하면서 온갖 악행을 저지르기 때문이다. 특히 지식인이라면 애국주의에 휩쓸리지 말고 세계 시민주의 관점을 취해야 마땅하다. 이는 미국의 진보 지식인들이 가진 표준적 세계관이 되고 말았다.

 

<철학 그리고 자연의 거울>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등의 저서로 잘 알려진 미국의 좌파 철학자 리처드 로티가 그 흐름에 반기를 들었다. 1994년 2월 13일 자 뉴욕타임스에 “애국심 없는 학계”(The Unpatriotic Academy)라는 칼럼을 기고한 것이다. 그가 볼 때 미국의 강단 좌파는 모순에 빠져 있었다. 모든 가치를 존중해야 한다면서 애국주의만은 가차 없이 경멸하고 있다. “좌파에게는 문제가 있다. 애국심이 없다는 것이다. ‘다양성의 정치’라는 이름 아래 그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나라를 기꺼이 여기려 들지 않는다. 그들은 국가적 정체성이라는 관념과 국가적 자부심이라는 감정을 부정한다.”

 

미국은 처음부터 다양한 종교와 문화를 지닌 이민자들이 만든 나라다. 다원주의(pluralism)를 사회 근간에 깔고 있다. 하지만 1990년대 미국 대학가를 휩쓴 것은 “미국의 전통적 다원주의가 아닌, 이른바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라는 새로운 운동이다.” 마틴 루서 킹 목사는 흑인도 백인도 모두 같은 미국인이라는 믿음을 잃지 않았다. 반면 좌파는 그러지 않다. 애국주의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면서 인종, 성별, 성 정체성 등 다양한 차이만을 부각한다. “조국에 대한 자부심을 거부하는 좌파는 그 나라의 정치에 영향을 끼칠 수 없고, 결국 경멸 대상이 되고 말 것이다.” 이 칼럼을 확장하여 1998년 <미국 만들기>(Achieving Our Country)를 펴낸 로티는 트럼프의 당선을 예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우리를 생각해 보자. 대한민국은 미국과 달리 단일한 정체성을 지닌 민족국가였다. 오늘날은 저출산, 고령화, 이주민 증가를 경험하는 중이다. 다원주의, 심지어 다문화주의에서도 배울 건 배워야만 할 절박한 상황이다. 피부색, 언어, 관습 등으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통 큰 애국주의가 필요하다. 올바른 사고를 정립하고 그 위에 더 큰 대한민국을 만드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정치다. 대한민국은 조국에 대한 자부심을 거부하는 좌파가 정치에 영향을 끼치는 나라다. 국정을 좌지우지하기도 한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150여 명이 목숨을 잃는 비극이 벌어지자 안전을 위한 토론장을 여는 대신 유가족 동의 없이 명단을 공개하며 집회를 빙자한 저주의 굿판을 벌인다. 해외 순방을 나간 대통령 전용 비행기가 추락하라고 기도하는 성직자들만 해도 기막힌데, 그런 세력이 주도하는 집회에 야당 정치인들이 얼굴을 비친다. 그러면서 세금으로 월급 받고, 몇몇은 변변한 소득도 없이 자녀를 해외 유학까지 보낸다. <국가대표>에서 종삼이 내뱉은 말이 귓전에 쟁쟁 울리는 것 같다. “그러니까 너도 이용하라고, 대한민국.”

 

어울리지 않게 태극마크를 단 ‘국가대표’들 생각은 달랐다. 하나같이 이 사회에서 소외당하고 버림받은 존재다. 눈 쌓인 슬로프에서 뛰어본 적도 없는 그들이 메달을 따고 군 면제를 받는 것은 허황된 꿈이다. 스스로도 잘 알지만 기꺼이 국가대표의 짐을 짊어지고, 사비를 들여 올림픽에 나간다. 왜? 이유는 간단하다. “아무도 안 하려고 하니까, 아무도.” 나라가 책임져주지 않는 사람들이 두 팔 걷어붙이고 나라를 책임지려 드는 이 대책 없는 사랑, 그것을 우리는 애국심이라 부른다.

 

월드컵 조별 예선이 한창 뜨겁게 진행 중이다. 이제 두 경기가 남았다. 자신들이 정권을 잡지 못했다는 이유로 나라 망하라고 악쓰는 그 추한 목소리를 몽땅 덮어버릴 수 있도록, 국가대표 축구팀과 우리 스스로를 위해, 한마음 한뜻이 되어 ‘대한민국’을 외쳐보자.

 


鶴山 ;

한국 사회의 쓰레기 정치꾼들의 전형적인 추태를 누가 막을 수 있을까요? 그 해답은 이미 모두가 알고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