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미 대통령이 다음 달 12일 열기로 한 미·북 정상회담을 취소한 지 9시간 만에 북한이 회담 개최를 요청하는 입장을 발표했다. 북은 전례없이 공손한 태도로 "아무 때나 어떤 방식으로든 마주 앉아 문제를 풀어나갈 용의가 있다"고 했다. "(김정은 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과 만나면 좋은 시작을 뗄 수 있을 것이라며 준비에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고도 했다. 미·북 정상회담이 일방적으로 취소됐음에도 북이 이런 식의 입장을 밝힌 것은 이례적이다. 전문가들은 북이 판문점 도끼 만행 이후 가장 저자세라고 한다. 허세를 부리고 있지만 궁지에 몰려 있는 것이다.
트럼프는 회담을 취소하면서 북의 '극도의 분노와 공개적인 적대감'을 거론했지만 이는 표면적인 이유일 뿐이다. 회담 취소의 진짜 이유는 북이 물밑 협상 과정에서 '애매한 비핵화'를 고집해 25년간 해 온 '핵 사기' 행각을 다시 하려 한다는 의구심이 트럼프 행정부 내에서 커졌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트럼프는 김정은과 회담에서 과거의 핵 문서와 다를 게 없는 합의문이 나올 경우 미국 내 반발로 당장 11월 중간선거에서 고전할 수밖에 없다.
트럼프는 회담 취소라는 충격 요법을 통해서라도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하고, 되돌릴 수 없는 핵폐기)를 전제로 하는 단기간 내 비핵화를 반드시 관철하려 하고 있다. 트럼프가 25일 시사한 대로 다음 달 회담이 되살아나더라도 이 핵심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트럼프는 언제든, 어떤 방식으로든 판을 깰 것이다.
북의 태도는 핵 포기를 결단했다고 보기엔 이상한 구석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아직도 '핵폐기'가 아니라 '핵군축'이라는 용어를 고집한다. 자신들이 핵보유국이란 것이다. 풍계리 핵실험장을 폐쇄하면서 당초 약속까지 어기고 핵전문가들은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핵을 버린다면서 무엇을 왜 감추나.
김정은은 지금이라도 '빠르면 6개월, 길어도 2년' 내의 CVID 핵폐기 결단을 내리고 새로운 발전의 길로 나서야 한다. 그렇게 되면 한·미와 국제사회는 미·북 수교, 종전선언, 평화협정, 제재해제, 경제 지원에 기꺼이 나설 것이다. 그토록 두려워하는 정권 붕괴도 막을 수 있다.
그러지 않고 끝까지 핵 사기극을 벌이겠다면 또 다른 '고난의 행군'을 각오해야 한다. 공식 경제가 무너져 주민들 장마당에 90%를 의존하고 있는 김정은 정권이 이를 버텨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김정은이 한국 정부를 상대하듯이 미국을 다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본인이 직접 나서 '단기간 내 CVID 핵폐기'를 선언해 남북 모두에 새 길을 열어주길 고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