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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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武器/ 조갑제닷컴

鶴山 徐 仁 2014. 7. 26. 19:01

 

 

 

 

이스라엘은 왜 가혹하게 대응하는가?

 

 

한번의 敗戰도 허용할 수 없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趙甲濟   

이스라엘은 핵폭탄을 수백 개나 가진 核강국이다. 날아오는 미사일이나 로켓을 90%의 확률로 요격, 파괴할 수 있는 '철의 돔'이란 방어망도 있다. 그럼에도 가자 지구의 하마스 세력이 도발한다고 쳐들어가고 폭격을 한다. 너무 약한 상대에게 너무 가혹한 대응을 하는 게 아닌가 생각될 정도이다. 이런 이스라엘의 행태엔 이유가 있다.
  
   유태인은 머리는 좋지만 尙武(상무)정신은 약했다. 유럽에서 수시로 집단 학살당한 이유도 자위력이 약했던 점과 관계 있다. 유태인이 만든 이스라엘은 상무정신이 강하다. 그래서 이스라엘에 사는 유태인과 다른 나라에 사는 유태인은 다르다고 한다. 이스라엘 유태인은 국가를 만들고 여러 차례 전쟁을 통하여 이를 지켜내는 과정에서 유태인들의 나쁜 민족성을 극복하여 새로운 사람들로 거듭 태어났다는 것이다. 머리는 좋지만 尙武정신이 약하여 유럽에서 동네북처럼 핍박을 당하던 민족이 일단 국가를 세우고 군대를 건설하니 독한 사람들로 변했다. "우리의 운명은 우리가 결정한다. 우리가 믿을 사람은 우리밖에 없다. 安保(안보)는 절대로 남에게 의존하지 않는다"는 게 이스라엘의 맹세이다. 이런 결연한 다짐은 이스라엘의 보통사람들조차 영웅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한국인 또한 조선조 이후 文民(문민)전통이 강하고 尙武정신이 약하였다. 그 결과는 國力의 쇠퇴와 식민지화였다. 1948년 국민국가를 만들고 國軍(국군)을 건설한 이후 한국도 이스라엘처럼 용맹한 국가로 변해갔다. 李承晩(이승만)-朴正熙(박정희)-全斗煥(전두환)-盧泰愚(노태우)로 이어지는 약 40년간의 대한민국 역사는 군사문화가 지배적인 역할을 한, 民族史上(민족사상) 예외의 시기였다. 1993년 이후 정권이 文民 지배로 돌아가자 예외의 시대는 끝나고 통상의 시대로 돌아갔다. 문제는 민족사의 통상이란 것이 국방을 외국에 맡겨놓고 政爭(정쟁)에 몰입하는 변태적 권력투쟁이라는 점이다.
  
   이스라엘은 군대와 민간 부분이 一體化(일체화)되어 있는 반면에 한국은 군대가 민간부분으로부터 소외되고 정치인들, 특히 親北(친북)좌경 정치세력으로부터 공격당하고 있다. 군사적 전통이 취약한 국군 지휘부는 좌경화된 문민세력에 굴종적 모습을 보이면서 自主(자주)국방 의지와 전쟁의지를 스스로 약화시켰다. 국민들도 미국에 安保를 맡기고 웰빙 생활에 탐닉하는 모습이다.
   반면 북한정권은 경제적, 외교적 위기 속에서도 이스라엘처럼 자주국방 노선을 견지하면서 핵무기를 개발, 남북관계에서 주도권을 잡고 있다. 천안함과 연평도에서 북한군의 공격을 받고도 제대로 응징하지 못한 한국은 이스라엘과 반대의 길을 걷는 나라처럼 보인다.
   한국과 이스라엘의 가장 큰 차이는 자주국방 의지의 有無(유무)이다. 필자는 그 원인을 여러 모로 생각해봤는데 결론은 이러하였다. "국가 지도부의 死生觀(사생관)과 청렴성이 관건이다." 私生活(사생활)이 깨끗한 지도자만이 위기 때 목숨을 걸고 결단을 내릴 수 있다. 인간은 생활이 복잡하면 복잡하게 생각한다. 국가 지도층의 소박한 삶이 중요한 것은 그래야 용기가 생기기 때문이다. 깨끗한 만큼만 용감해질 수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軍은 독창적인 조직과 交戰(교전)수칙 및 전쟁敎理(교리)를 발전시켰다. "이스라엘은 단 한번의 전쟁도 질 수 없다"는 게 기본이다.
  
  
   이스라엘군이 장병들에게 가르치는 交戰수칙(Code of Conduct)은 다음과 같다.
  
   1. 군사 목표에 대하여서만 군사적 행동을 한다.
   2. 군사력의 사용은 비례적으로 한다.
   3. 이스라엘 軍이 허용한 무기만 사용해야 한다.
   4. 항복한 敵(적)에겐 공격하지 않는다.
   5. 훈련을 받은 사람만 포로를 신문할 수 있다.
   6. 병사들은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체포된 사람들의 인간적 존엄성을 존중해야 한다.
   7. 敵軍(적군)에게도 치료를 해주어야 한다.
   8. 약탈은 완전히 불법이므로 절대로 금지한다.
   9. 종교적, 문화적 유적지와 문화재를 존중해야 한다.
   10. 국제구호활동가들의 재산과 차량은 보호해야 한다.
   11. 이 수칙을 위반한 행위에 대하여는 보고해야 한다.
  
   이스라엘 국방군의 전쟁 敎理(Doctrine)는 이렇다.
  
   1. 이스라엘은 단 한 번의 전쟁도 질 수 없다.
   2. 전략적 단계에선 방어적으로 임한다. 우리는 영토적 야심이 없다.
   3. 정치적 수단과 신뢰할 수 있는 억제 태세를 유지, 전쟁을 회피한다.
   4. 擴戰(확전)을 예방한다.
   5. 전쟁의 결과를 신속하게, 결정적으로 확정짓는다.
   6. 테러와 싸운다.
   7. 戰死傷者(전사상자)를 최소한으로 유지한다.
  
   한국도 단 한 번의 전쟁도 질 수 없는 나라이다. 북한정권의 무자비성, 공산주의의 非(비)인간성, 그들이 가진 核 및 생화학 무기의 파괴력을 고려하면 한국은 단 하나의 실점도 허용할 수 없는 나라이지만, 중국이 싫어하니 미국과 협력하는 미사일방어망을 만들어선 안 된다고 주장하는 야당이 있는 나라이다. 實戰(실전)배치 단계에 있는 北의 核미사일을 앞에 두고도 "우리가 살아야 합니까, 죽어야 합니까"를 중국에 묻고 있는 격이다. 이런 집단이 국가 지도부를 이루고 있는 한국은 생존 자체가 기적이고 요행이다.

 

 

 

 

럼스펠드에게 멍청한 질문을 한 여기자 수준의 安保 전문가들

 

趙甲濟   

軍 고위직 출신이나 안보 전문가들이란 사람들 입에서 이런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우리가 미국과 협력하여 미사일 방어망을 만들어도 실익이 별로 없다. 중국이나 북한에서 쏜 미사일이 미국으로 날아가는 것을 막거나 사전에 탐지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한국에 떨어지는 北의 미사일을 막는 데는 효과가 크지 않다."
  
   1950년 6월에 트루먼 행정부 사람들이 이런 이기적 생각을 가졌더라면 한국은 赤化되었을 것이다. 트루먼 대통령의 결단으로, 많은 미국의 젊은이들은 '알지도 못하는 나라의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들을 구하라는 조국의 부름에 응하여' 한국 戰線으로 갔다. 연인원 180만 명 참전, 5만4000명이 죽고 10만 명이 다쳤다.
  
   동맹국에 도움이 되는 것은 우리한테도 도움이 된다. 동맹이란 同業관계인데, 동업자에게만 도움이 되고 나한테 돌아오는 것은 없다고 해서 그를 외면한다면 동맹도 동업도 유지될 수 없다. 우리가 손해를 보더라도 동맹국을 도와야 동맹국도 같은 처지에서 우리를 도울 것이다.
  
   도널드 럼스펠드 전 美 국방장관은 가장 젊은 나이에 국방장관이 된 기록(포드 대통령 시절)과 가장 늙은 나이에 국방장관이 된 기록(부시 2세 시절)을 가진 사람이다. 그는 9.11 테러 이후 아프가니스탄 및 이라크 전쟁을 기획하고 지휘하였다.
  
   그가 3년 전에 내어놓은 회고록 '아는 것과 모르는 것들'엔 한국과 관련하여 감동적인 에피소드가 소개되어 있다.
  
   그는 국방장관 시절에 집무실 벽에 한반도의 밤을 찍은 인공위성 사진을 붙여놓았다. 휴전선 남쪽은 환하고 북쪽은 캄캄하다. 평양에서만 희미한 불빛이 보인다. 럼스펠드는 한국의 젊은이들이 미군과 유엔군의 희생 덕분에 그런 풍요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고 지적하면서 2003년 訪韓 때 있었던 일을 소개하였다.
  
   서울에 도착한 그는 용산의 전쟁기념관을 방문, 헌화하였는데, 고등학교 시절 레슬링을 같이 한 딕 오키퍼의 이름을 戰死者 명단이 적힌 벽면에서 확인하였다고 한다. 오키퍼는 한국전선에 참전하였다가 1953년 7월27일 휴전 하루 전에 戰死하였다.
  
   당시 한국 국회는 이라크 파병 문제로 토의를 벌이고 있었다. 서울이 내려다 보이는 건물 꼭대기 층에서 럼스펠드에게 다가온 한 젊은 한국 여기자가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왜 우리가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아서 이라크에 한국의 젊은 남녀들을 파견, 죽고 다치도록 해야 합니까?"
  
   이 질문이 자신의 감정을 건드렸다고 한다. 친구 오키퍼 생각도 났다. 그는 여기자에게 이렇게 反問하였다고 한다.
  
   "50년 전 미국은 왜 지구 반 바퀴나 돌아서 이 나라에 그들의 젊은 남녀들을 보내야 했나요?"
  
   <우리는 화려하고 높은 서울의 빌딩숲, 자유 한국인의 근면성과 기술을 보여주는 증거물을 내려다 보았다. 저 풍요는 다른 사람들의 용기와 희생을 통하여 한국인들에게 다가온 것이다. 나는 생동하고, 자유롭고, 번영하는 도시가 보이는 窓을 가리키면서 말하였다. "저게 바로 나의 答(답)입니다.">
  
   이 여기자에겐 다행하게도 럼스펠드는 멍청한 질문을 한 이의 이름을 밝히진 않았다. 이런 여기자 수준의 자칭 안보 전문가들이 많다. 3류 장사꾼에도 미치지 못하는 계산법이다.

 

 

 

 

深層진단/대한민국의 '조직붕괴' 현상

 

 

대통령이 국가적 진실 수호를 포기하고 선동된 여론을 따라가면 세월호처럼, 브라질 축구 팀처럼, 나폴레옹 3세처럼, 3군단처럼 '조직붕괴'를 맞을 수도 있다.

 

趙甲濟   

趙甲濟(조갑제닷컴 대표)
  
   집토끼의 반란
  
   지난 6월25일 청와대 자유게시판은 전날 사퇴한 文昌克(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와 관련, 朴槿惠(박근혜) 대통령을 직설적으로 비판하는 글로 뒤덮였다. 지지를 철회한다는 내용이 많았다. KBS 등의 왜곡보도와 선동된 여론에 굴복한 대통령에 대한 배신감과 절망감이 묻어나는 글들이었다.
   보수층의 朴 대통령 비판은 좌파의 비판과는 차원이 다르다. 공동체의 안전을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게 보수세력이고 이들이 대통령의 주된 지지층이었다. 이들이 비판을 넘어서 반대로 돌아서면 정권이 불안정해진다. 군대에서 사병이 사령관을 욕하는 것과 장교가 비판하는 것은 성격이 다르듯이.
   '이제 진정한 여론이 어떤 건지 알게 될 것입니다'라는 제목으로 글을 쓴 안은정 씨는 보수지지층을 '집토끼'에 비유하였다.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은 이제 법과 원칙이란 가소로운 말은 쓰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껏 어떤 여론을 살폈는지 모르겠지만 이제부터 진짜 숨어 있던 여론을 알게 될 것입니다. 보수 지지자들이 집토끼라 생각해서 무시해도 될 거라 생각했다면 이제부터 집토끼들이 화가 나면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십시요.>
   임미숙 씨는 '전교조보다 의리 없는 대통령'이란 제목의 글에서 <어제 처음으로 민주당하고 전교조가 부러웠습니다>란 말로 시작했다.
   <그들은 자기 조직에 충성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한 명이든 두 명이든 死活(사활)을 거는데, 대통령은 진실을 코 앞에 놔두고 도망가기에만 바빴습니다. 김종훈, 안대희, 문창극은 대통령이 제대로 보호해 주지 못해서 모두 낙마한 겁니다. 하이에나한테 뜯기든 말든 내버려 두고 방관하는 자세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젠 방송에 나오는 대통령 모습도 보기 싫고 뭐 하나 다 가식으로 느껴지고 모든 게 엉망입니다. 대통령이 보수에 던져준 이 충격파 상처가 대통령 임기 내에 아물 것 같지 않습니다. 이젠 더 이상 보수는 대통령의 팬클럽이 아닙니다. 거짓에 항복하고 왜곡된 여론에 항복하는 대통령의 낮은 수준을 어제 자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지방선거에서 새누리는 마음에 안 들지만 대통령을 생각해서 새누리를 찍은 사람들이 엄청 많을 겁니다. 저도 그 중의 한 명이였습니다. 새누리가 무너지면 대통령이 무너지니 그것만을 막아 보겠다고 온 집식구가 투표장으로 향해 새누리를 찍고 왔습니다. 그래서 배신감이 백 배 더 드는 겁니다. 집토끼들이 나가면 집에 다시 들어올 것 같습니까? 한번 배신감을 가지면 그 상처가 쉽게 아물지 않는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더 잘 알텐데 왜 문창극 후보를 버리셨습니까? 당신의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온 겁니다. 그것도 51.6%가 당신한테 준 권력입니다. 51.6%의 국민을 바보로 만드니 좋습니까? 속 시원합니까? 나라의 국익보다 진실보다 대통령의 인기가 더 중요합니까? 이 상처가 언제 아물지 모르겠지만 지금 이 시각부터 대통령과 새누리에 대한 관심 일체 끊을 겁니다.>
  
   원한과 경멸
  
   곽종은 씨는 <문창극 후보가 자진사퇴의 형식을 취했지만 청와대가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면서 이렇게 썼다.
   <저는 문창극 전 총리 후보자의 온누리교회 강연 동영상 전부를 시청하였습니다. 그 결과 종교가 없는 제가 온누리교회에 다니고 싶어질 정도로 깊은 감동을 받았고 그 강연은 흠을 잡기가 힘든 것이었음을 제 양심을 걸고 말씀드립니다. 이런 애국자를 청문회에 세울 수 없다면 그 누구를 청문회에 세우려 하십니까! 청문회를 통과해서 꼭 총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민주적 절차에 따라 청문회까지는 가야 그게 정상입니다. 이런 일 하나 정상화로 만들지 못하는 청와대가 무슨 '기본이 바로 선 국가를 위한 비정상의 정상화'를 이야기하십니까? 그러니, 청와대 홈페이지 메인화면 우측 배너 '기본이 바로 선 국가-비정상의 정상화' 배너 당장 내리십시오 !>
   한국 보수층의 정치적 판단 기준은 헌법, 사실, 國益(국익)이다. 그들 눈에는 朴 대통령이 선동세력으로부터 국가적 진실을 수호할 수 없는, 그러면서도 자신의 인기에 집착하는 사람으로 비치기 시작한 것이다. 《군주론》의 필자 마키아벨리는 지도자가 피해야 할 점이 두 개 있다고 했다. 경멸을 받는 것, 그리고 원한을 사는 것. 대통령 중심제에서 대통령이 지지자들로부터 이 정도의 본질적 비판을 받는다는 것은 '조직붕괴'의 前 단계가 아닌지 주의해야 할 일이다. 집토끼의 반란은 산토끼의 도주와는 성격이 다르다.
   세월호 사고와 KBS의 편파 방송 파동을 겪으면서 한국에선 '국가적 진실'을 담보하는 두 개의 기준이 무너졌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대통령의 권위와 보수언론의 신뢰성이 그것이다. 보수언론마저 선동에 합세하고, 대통령이 이에 굴복한 때문이다. 이런 흐름은 국민들이 기댈 곳을 좁히고, 외교와 안보에도 나쁜 영향을 끼칠 것이다.
  
   히딩크의 관찰
  
   월드컵 준결승전, 브라질-독일戰(전) 축구 중계방송을 보면서도 '조직붕괴'라는 말이 생각났다. 브라질 팀은 개인기는 뛰어나도 조직 윤리가 무너졌다. 군대든 회사든 축구팀이든 모든 조직은 지도력과 팀웍을 바탕으로 조직의 성공(승리, 돈벌이 등)을 목표로 한다. '조직붕괴'가 일어나면 '조직윤리'가 무너져, 上下(상하) 구분이 사라지고, 정상적인 思考(사고)가 마비되며, 개별적으로 행동한다. 세월호 사고도 배가 급히 기우니 선장과 선원들의 조직윤리, 즉 職務(직무)의식과 지휘계통의 작동이 정지된 경우이다. 한국-알제리 축구戰의 전반에서도 한국 팀은 '조직붕괴'의 현상을 보였다. 홍명보 감독은 지도력을 포기한 듯한 표정이었다. 조직 붕괴를 막을 책임은 지휘관에게 있다. 지도자는 어려울 때를 위하여 준비된 사람이다. 모두가 잘 나갈 때는 지도자가 필요 없다.
   히딩크 감독은 2002 월드컵 후, "한국 선수들은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잘할 때와 못할 때의 차이가 크다"는 평을 했다. 히딩크 감독이 지휘할 때 한국 팀은 어이 없이 지는 경우가 없었다. 한국선수들의 단점을 보완, 조직붕괴를 막았다는 이야기이다.
   한국군은 6·25 남침이란 기습을 받았지만 조직붕괴는 없었다. 후퇴는 했지만 부대 단위의 집단 투항이 없었다. 인천상륙 작전으로 北進(북진)이 시작되자 북한군은 조직이 붕괴, 부대 단위로 항복했다. 한국전 때 주한미국대사였던 존 J 무초는, 1971년 1월과 2월, 워싱턴에서 ‘역사 기록을 위한 肉聲(육성) 증언’ 프로그램에 응했는데, “그날 한국군은 기습을 당하고도 참으로 잘 싸웠다”고 말했다. “한국군의 조직적인 저항과 戰線(전선)의 暴雨(폭우)가 한국을 구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호의 선장은 '이승만級'이라야
  
   그는 李承晩 대통령에 대하여는 비판과 칭송을 섞었다.
   <李 대통령은 아주 머리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45년간 한국의 독립이란 한 목표를 위해 달려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한국인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었고 이것이 그의 정치적 강점이 되었습니다. 그는 의지의 인간이었습니다. 그는 독립투사로 단련된 성격을 국가원수가 되고나서도 바꿀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이성적일 때는 훌륭한 역사적 이해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아주 高次元(고차원)의 시각에서 복잡한 세계 정세를 정확하게 이해했습니다. 감정적으로 되면 그는 독립투사 시절의 본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한국인의 생존과 자신의 생존에 집착했습니다. 그는 의심이 많았습니다. 그는 매우 복잡한 인물이었으나 위기 때 일처리를 잘 했으며 자신의 뜻을 고급 영어로 잘 표현했습니다. 그의 영어는 글과 말 무엇이든지 유창했습니다. 그는 제퍼슨類의 민주주의자임을 자랑했습니다. 이 분야에 대한 그의 레토릭은 미국인들을 사로잡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외국인 부인(注: 프란체스카 여사)이 그에게 큰 영향력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국군은 기습을 받고도 '조직붕괴'를 겪지 않았다. 지휘계통이 살아 있어 후퇴할 망정 부대 단위로 항복하지 않았다. 첫날부터 미군이 곧 도우러 올 것이란 소문이 돌았고, 李承晩(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절대적 신뢰가 있어 恐惶(공황)상태에 빠지지 않았다.
   李 대통령은 75~78세 사이에 전쟁 지도자 역할을 했다. 그 나이에도 국내외의 敵對(적대)세력-때로는 미국 정부-와도 싸우면서 정권을 유지하고 국가의 방향타를 놓지 않았다. 무초의 평대로 생존의지가 강하고, 어려울 때 일처리를 잘했으며, 아주 高次元(고차원)의 시각에서 복잡한 세계 정세를 정확하게 이해한 덕분이었다. 핵무장한 북한정권, 이들을 추종하는 종북세력, 國力 팽창기의 중국, 전쟁할 수 있는 나라되기를 선언한 일본, '아시아로의 중심 이동'을 정책화한 미국. 그 사이에서 핵무장을 포기한 한국이 있다. 荒天(황천)항해를 각오해야 하는 대한민국호의 선장은 '이승만級'이라야 하는데, 선원들(보수층)에게도 신뢰 받지 못한다면?
  
   3軍團 와해
  
   모든 사고는 군사적 용어로 설명한다면 '기습'이다. 예고되지 않는 장소에서 예고되지 않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브라질 축구팀이 7분 안에 네 골을 먹은 것이나 세계최강의 육군을 갖고 있다고 평가되던 프랑스가 1940년 5월 히틀러의 독일군으로부터 '아르덴느 기습 돌파'를 당하자 6주만에 항복한 것은 기습 상황에서 지도력이 마비된 탓이다.
   기습을 받는 등 불리할 때도 잘 싸우는 군대로는 영국군, 독일군, 일본군을 친다. 오랜 군사문화, 지휘관의 솔선수범, 강인한 민족성, 평소 훈련이 모인 결과일 것이다. 한국군은 남침 기습을 당하고선 무너지지 않았지만 1951년 5월 동부전선의 중공군 대공세 때는 3군단 2개 사단이 와해된 적이 있다.
   5월17일 새벽에 두 사단의 유일한 退路(퇴로)가 지나는 오마치 고개가 중공군에 우회 점령되었다. 3군단 소속 2개 사단 약 2만 병력과 수백 대의 차량이 전방 방어선을 포기, 현리 부근으로 집결했다. 밀려든 병력과 차량으로 폭 5m도 안 되는 좁은 길이 심한 교통체증을 빚었다.
   9사단 28연대 副연대장이던 염정태 중령은 이렇게 말했다.
   “유일한 후퇴로가 막혀버려 我軍(아군)이 중공군의 포위망에 들어갔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현리 부근에 모여 있던 장병들 사이에는 공포감이 확산되었습니다. 밤이 오고 오마치 돌파에 실패하자 순식간에 집단적인 공황 상태가 빚어졌어요. 아직은 중공군이 현리 쪽으로 집중사격을 하고 있지 않았는데도 장병들은 뿔뿔이 방대산으로 기어올라 철수하기 시작했습니다. 지휘체계가 무너져버린 것은 적의 공격 때문이 아니라 공포감 때문이었습니다."
   ‘영천 會戰(회전)의 영웅’ 劉載興(유재흥) 당시 3군단장은 17일 오후 현리로 비행기를 타고 와서 작전명령을 내린 뒤 군단 사령부로 돌아갔다. 포위망 속의 장병들은 이 비행기를 바라보면서 “야, 군단장이 우리를 버리고 도망간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공황 상태에 빠진 2개 사단은 싸워보지도 않고 방대산(해발 1436m)을 타고 후방으로 달아나기 시작하면서 흩어지고 지휘체계는 마비되었으며 조직이 와해되어 버렸다. 군대가 群衆(군중)으로 변했다.
   지휘체제가 무너지면 사단장이나 이등병이나 개인으로 돌아가 자신의 體力(체력)만 믿고 제 살길을 찾아간다. 보고체제나 통신도 마비된다. 장교들은 붙잡힐 때를 대비해 계급장을 떼버린다. 옥수수를 먹고 있는 사병에게 허기진 장교가 좀 달라고 해도 거절당한다. 군악병은 나팔이 무겁다고 버리고 갔다. 심지어 시계도 무겁게 느껴져 풀어던져 버렸다. 중화기도 버렸다. 높이 1000m가 넘는 산과 계곡, 강을 건너서 남쪽으로 사흘간 달아나는 과정에서 중공군의 매복, 요격, 추적을 받은 양 사단 약 2만 명 중 6000명 이상이 戰死(전사), 餓死(아사), 부상, 실종되었다.
   5월18일, 미군은 국군이 현리에 버리고 간 수백 대의 차량과 대포들을 폭격하여 불태워버렸다. 5월23일 유엔군은 반격을 개시, 失地(실지)를 회복했다. 화가 난 밴플리트 미 8군사령관은 국군 3군단을 해체하여 9사단을 미 3사단에, 3사단을 국군 1군단에 배속시켰다.
  
   6사단의 奮戰
  
   6·25 남침 때 춘천을 지키던 제6사단(사단장 金鐘五)은 압도적 戰力을 가진 북한군 2개 사단의 기습을 받고도 사흘간 버티었다. 국군의 退路(퇴로)를 수원에서 끊어 섬멸한다는, 북한군의 전략을 못 쓰게 만들었다. 춘천에서 북한군의 南進(남진)을 3일간 저지한 것이 한국을 살렸다는 주장이 있다.
   당시 6사단 소속 중대장이었던 李大鎔(이대용) 씨는 1975년 월남이 赤化(적화)될 때 정보부 소속 공사로서 교민들을 탈출시키고 잔류, 5년간 감옥살이를 한 뒤 생환한 분이다. 그는 6사단이 기습을 당하고도 버틸 수 있었던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첫째, 有備無患(유비무환)의 원칙에 충실했다. 북한군 동향이 심상치 않다고 판단한 연대장의 지휘하에 壕(호)를 파기 시작했다.
   둘째, 공세적 방어로 대처했다. 6·25가 나기 전에 38선상에서 인민군과 전투를 해 보았고 자신감이 생겼다. 인민군이 몰려내려 왔어도 겁을 먹지 않았다. 西北(서북) 청년 출신들이 많아 적개심이 대단했다.
   셋째, 砲兵(포병)의 화력 효과가 컸다. 인민군은 사람이 없는 곳에도 무작정 포를 쏴대었던 반면, 우리 포병부대는 전선의 가장 가까운 곳에까지 가서 포격을 했다.
   넷째, 연대장(林富澤 중령)의 지휘통솔력이 탁월했다. 평소 사병들을 인간적으로 대우하고 따뜻하게 보살폈는데 전투가 벌어지자 후방으로 빠져 지휘하는 것이 아니라 최일선에 나와 독려했다. 존경하는 연대장이 포탄이 쏟아지는 戰場(전장)에 의연히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사병들의 士氣(사기)는 백배 올라갔다.
   다섯째, 地形(지형)의 유리함을 최대한 이용했다."
  
   프랑스 군의 조직붕괴
  
   가장 센 군대는 지휘관이 미국인, 참모는 독일인, 병사는 일본人인 군대라고 한다. 가장 약한 군대는 지휘관이 중국인, 참모는 일본인, 사병은 이탈리아인이란다. 물론 우스개이다.
   프랑스는 문화대국일 뿐 아니라 군사강국이었고 군사적 천재 나폴레옹을 배출한 나라이지만 戰史(전사)를 읽어보면 기복이 심하다. 나폴레옹 군대처럼 영웅적으로 싸우는가 하면 英佛(영불) 백년 전쟁(1415년 아진코트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3분의 1밖에 안되는 英軍에 대패, 1만 명을 잃었다), 普佛(보불)전쟁,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다수 병력을 갖고도 무너졌다. 모든 조직붕괴는 지도층이 위기를 만나 공황 상태에 빠질 때 일어난다.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아날 구멍이 보인다는 속담에 진리가 있다.
   나치 독일군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한 달 뒤인, 1939년 10월 독일 참모본부의 정보참모부 西部課(서부과)는 프랑스군의 행태를 이렇게 분석했다.
   <프랑스 군인들은 감정적인 영향을 많이 받는다. 전쟁의 목표가 분명하고 이해할 수 있을 정도가 아니면 그들은 임무를 수행하더라도 열심히 하지는 않는다. 이 경우 피해를 크게 보면 부대는 내부로부터 흔들리게 된다. 반면, 프랑스군은 설득력 있는 말을 들으면 쉽게 士氣(사기)가 高揚(고양)된다. 국토를 지키는 전쟁에서는 항상 열정적으로 격렬하게 싸운다. 프랑스군의 핵심적 문제점은 너무 조심한다는 것이다. 대담한 작전으로 큰 전과를 거두는 것보다 안전성을 항상 우선시킨다.>
   1939년 12월에서 1940년 초에 걸쳐 독일군 정보참모부 西部課는 프랑스-영국 연합군이 독일의 主攻(주공)이 벨기에 북쪽으로 향할 것이라 믿고 主力 75개 사단을 벨기에 쪽 국경지대로 집결시키고 있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이 主力 가운데는 프랑스의 기계화 사단과 자동화 사단의 거의 전부가 포함되어 있었다.
   히틀러는 원래 1940년 1월17일에 프랑스를 기습하려고 하였다. 작전 개시 며칠 전 이 작전문서의 일부를 갖고 가던 장교가 탄 비행기가 악천후로 벨기에 지역에 불시착하였다. 장교는 문서의 일부를 불태웠으나 나머지는 벨기에 군에 넘어갔다. 히틀러는 작전계획이 누출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여 공격을 연기했다.
   원래 작전계획은 제1차 세계대전 때의 프랑스 침공 작전과 거의 같았다. 슐리펜 계획이라 불리는 이 작전의 핵심은, 서부전선의 우익에 主力을 집중시켜 벨기에를 돌파하고 프랑스의 옆구리를 강타한 다음 거대한 좌회전을 하여 파리를 포위한다는 것이었다. 만슈타인, 구데리안 등 독일의 몇몇 장군들은 처음부터 히틀러에게 슐리펜 계획의 반복 사용에 반대했다. 히틀러는 이런 반론을 무시했다가 공격이 연기된 상황에서 작전계획을 再考(재고)하게 되었다. 主攻의 방향을 바꾸고 주력군을 전차부대로 변경했다.
  
   창조적 도박이 무너뜨린 무사안일 군대
  
   1940년 5월10일 히틀러는 변경된 계획에 따라 공격을 개시했다. B집단군이 네덜란드, 벨기에로 쳐들어가자 프랑스 영국 연합군은 기다렸다는듯이 主力軍(주력군)을 벨기에로 北上(북상)시켰다. 독일군은 B집단군이 主攻인 것처럼 위장했다. 그 사이 10개 기갑사단을 핵심으로 한 진짜 主力인 A집단군이 벨기에 남쪽의 아르덴느 숲 지대를 지나 프랑스 국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프랑스군은 현지시찰도 제대로 하지 않고서 戰車(전차)가 아르덴느 숲지대를 통과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했으나 독일군은 쉽게 통과했다. 길가의 나무를 베어 길에 걸쳐 놓기만 해도 기갑부대의 통과에는 시간이 많이 걸렸을 것이다.
   프랑스군의 정찰기가 대부대의 이동을 탐지하고 상부에 보고했으나 무시당하고 말았다. 그 방향으로 대부대가 기동할 리가 없다는 선입감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 프랑스군 지휘부였다.
   구데리안 장군이 지휘한 독일 기갑군단 선봉은 5월13일과 14일 뮤즈江을 渡河(도하)하여 프랑스 세단으로 건너왔다. 취약한 프랑스 방어군의 저항은 분쇄되었다. 프랑스군 지휘부는 이 지역으로 主攻이 들어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허약한 부대만 골라서 배치했던 것이다.
   프랑스의 레이노 수상은 1870년 普佛전쟁의 패전에 이어 두 번째로 세단이 돌파당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경악했다. 그는 5월15일 처칠 영국 수상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는 졌습니다"라고 울먹였다. 레이노 수상은 격전 중인 데도 최고사령관인 가믈렝을 웨이강 장군으로 교체했다. 웨이강은 中東(중동)에서 불려와 실전에 임하는 데 이틀을 까먹었다. 그 사이 프랑스군은 돌진하는 독일 기갑군단에 대한 전략을 수립도, 집행도 못하여 반격 타이밍을 놓쳤다.
   독일 기갑군단은 후속 부대가 도착하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渡河와 진격을 계속했다. 기갑부대는 보병부대의 지원이 없으면 敵陣(적진)에서 고립될 수도 있지만 롬멜, 구데리안처럼 상상력이 뛰어난 장군들의 임기응변에 의해 기갑군단의 진격은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1주간 계속되었다.
   독일 기갑군단은 뮤즈강 도하 1주일 만에 도버해협에 도착함으로써 英佛(영불) 연합군의 주력을 북쪽으로 포위하고 얼마 되지 않는 프랑스 예비병력을 남쪽의 파리 방향으로 고립시키는 데 성공한다. 대혼란에 빠진 프랑스의 200만 大軍(대군)은 불과 6週(주) 만에 궤멸된다.
   아르덴느 돌파전이라고 불리는 이 작전은 한니발의 칸나에 전투와 함께 세계전사상 가장 뛰어난 우회 기습전으로 꼽힌다. 독일군의 성공에는 프랑스군 지휘부의 무사안일주의를 간파한 독일의 정보부서, 안전보다는 모험과 속도를 중시한 롬멜, 구데리안 등 창의적인 장군들의 역할이 있었다.
   프랑스군 지휘부는 당시 프랑스 사회의 분위기를 반영하듯 수세적이고 관료적이며 책임회피적으로 대처하다가 찬스를 놓치고 기습을 허용하였던 것이다. 독일의 전격전 思考(사고)와 프랑스군의 진지전 思考의 대결에서 이긴 쪽은 새 戰法(전법)으로 모험을 감행한 독일이었다.
  
   "무식하면 용감할 수 없다"
  
   기습을 당하거나 사고를 당하였을 때 조직붕괴가 일어나지 않으려면 지휘체제가 살아 있어야 한다. 상관의 명령이 먹혀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한국전 때 가장 잘 싸운 지휘관으로 평가 받는 李秉衡 장군(2군 사령관 역임)은 生前(생전) 인터뷰에서 이런 경험담을 털어놓았다.
   “저는 전투를 통해 적나라한 인간본성을 관찰하면서 그동안 알려진 풍문과 달리 제대로 교육받은 사람이 용감하게 싸운다는 사실을 인상깊게 체험했습니다. 배우지 못한 사람은 염치가 없고 자기 가족만 생각합니다. 그들은 ‘내가 죽으면 우리 가족은 어떻게 될까’ 하는 염려 때문에 살려고 발버둥칩니다."
   “부하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주는 것이 전투에서 이기는 최상의 비결이더군요. 이런 사실을 부하들이 이해하면 전투에 임하는 자세가 활기차고, 용맹해지며, 자신들의 생명을 바쳐 지휘관을 보호하려는 행동을 하더군요.
   행군 도중에 도로에 나무가 쓰러져 있을 때 부비트랩이 설치되었는지 조사하기 위해 제가 앞으로 나가려면 병사들이 먼저 뛰어가 처리합니다. 지휘관과 병사들이 혼연일체가 되어야만 병사들이 흔쾌히 죽음의 언덕으로 돌진해 가는 용기가 생기는 겁니다.”
   “인간은 위기에 닥쳤을 때 자신의 경험이 그대로 표출됩니다.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군사적 판단을 해야 할 때 軍 경험이 없는 국군통수권자나 정치인들이 어떤 판단을 할 수 있을까요. 軍 경험이 없는 인사들이 우리 사회 지도부를 구성할 때 국가안보에 심각한 부담을 안게 됩니다.”
  
   愛國이란 이웃을 사랑하는 정신
  
   “愛國이란 국가의 주체인 국민, 즉 이웃을 사랑하는 정신입니다. 선진국들은 수많은 전쟁을 통해 국가관과 전쟁관을 길러왔습니다. 전투에서 부상한 戰友를 살리기 위해 업고, 메고 死地(사지)를 탈출하면서 평상시에는 느낄 수 없는 진한 우정과 우애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는, 武士통치의 역사발전단계를 거쳐온 선진국들과 경쟁하려면 국민정신교육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말했다.
   “영국은 산업혁명을 계기로 국민을 산업 노동자와 군인으로 양성하기 위해 그들의 의식수준을 騎士道(기사도)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교육에 전념했습니다. 일본도 마찬가지였어요. 明治維新(명치유신) 지도부는 사무라이 제도를 폐지하고 선진국의 근대국가제도를 모방하여 국민정신교육을 강화했습니다. 그들은 가장 먼저 사범학교를 세워 사무라이를 교사로 양성해 평민을 사무라이 정신으로 끌어올리는 교육을 시켰습니다. 日帝시대 교사들이 칼을 차고 교단에 선 이유는 자신이 사무라이 출신임을 나타내기 위해서였죠.”
   “전쟁기념관을 건립할 때의 逸話(일화)입니다. 6·25의 재조명을 위해 미국 러시아 일본 중국 등 참전국 학자들이 모여 심포지엄을 연 적이 있습니다. 전쟁문학을 전공한 미국의 윌리엄스 교수가 날카로운 지적을 하더군요. 미국의 전쟁문학은 영웅을 설정하여 그의 활약과 교훈을 전해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의 전쟁문학을 분석해보니 내용이 천편일률적이라는 데 놀랐다고 하더군요. 전쟁에서 주인공이 얼마나 고생했고, 고통을 받았으며 비참했는가를 나열하는 수준이었다는 겁니다. 영웅을 만들지 못하고, 전쟁을 개인적인 고통으로 해석, 이를 혐오하는 이유는 국가 지도부가 평민을 양반화하는 국가관 교육을 게을리 했기 때문입니다.”
  
   철저히 비겁하거나 철저히 용감하거나
  
   기습 남침을 당하고도 춘천을 사흘간 지켜내 반격의 시간을 벌게 했던 6사단의 19연대는 북한군의 탱크를 육탄으로 저지하기 위하여 특공대까지 모집했다. 지원자가 30여 명이나 되었다. 獨子(독자), 기혼자, 老부모를 모셔야 하는 사람을 빼니 11명이었다. 선임자는 趙達珍(조달진) 일병. 그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죽느니 장렬히 싸우다 죽으면 그래도 祖國(조국)을 위해 뭔가 했다는 보람은 안고 죽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지원했다. 해방되기 전까지 日本(일본)에서 자라 나라없는 설움을 톡톡히 겪은 것도 한 이유였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연대장이 특공대원들에게 화랑 담배 한 개피와 위스키 한 잔을 주었다. 遺骨(유골)을 대신하기 위해 손톱과 발톱, 머리칼을 잘라 하얀 종이에 싼 다음 이름을 새겨 연대에 남겼다. 트럭에 올라 말고개로 향하는데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얘기를 꺼내는 대원은 아무도 없었다. 술기운이 오르면서 얼굴이 빨갛게 달아 올랐다. '이게 마지막인가' 하는 생각에 자꾸 고개는 하늘로 올라갔다. 슬펐다. 하지만 '갈 길은 이 길뿐'이라고 다짐하니 후회는 되지 않았다."
   이 특공대는 북한군 戰車(전차)에 올라가 수류탄을 안으로 집어넣는 식으로 공격, 여러 대를 파괴하였다.
   "말고개에서 육탄 돌격대를 한 이후로는 계속 특공대로 남아 다이나마이트를 몸에 걸치고 다녔다. 전쟁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갈수록 힘이 들어 한번은 전투 중에 四肢(사지)를 허공에 대고 뻗었다. 총알에 맞아 후송되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총알은 비켜가기만 했다. 옆에 있던 분대장은 고개를 들자마자 그만 총에 맞아 죽고 말았다. '싸우는 게 내 운명이구나' 싶었다."
   이대용 씨는 이렇게 덧붙였다.
   "수년간 많은 전투를 해보니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인간의 유형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철저히 비겁해서 절대로 先鋒(선봉)에 나서지 않고 후방에만 남아 있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아예 목숨을 내놓고 敵陣(적진)으로 뛰어드는 사람이었다."
  
   敗戰을 부른 '엠스 전보 사건'
  
   국가단위에서 가장 큰 '조직붕괴'는 국군통수권자이기도 한 최고 지도자가 외교적, 전략적 誤判(오판)을 할 때 일어난다. 과대망상증이나 인기주의에 휩쓸리면 최단기간에 국가를 전쟁이나 亡國(망국)으로 몰고가는 것이다.
   1870년 초, 독일의 프러시아 王家(왕가,호헨쫄렌)에 속한 레오폴드 王子(왕자)는 혁명으로 공석이 된 스페인 왕위의 계승자가 되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 제국은 舊敎(구교)국가인 스페인과 新敎(신교)국가인 프러시아의 연대를 걱정하여 레오폴드의 王位(왕위) 계승에 반대하였다. 필요할 경우 전쟁도 불사한다는 암시까지 주었다. 7월 레오폴드는 왕위 계승 의지를 포기하였다. 이는 비스마르크가 이끌던 프러시아 정부의 외교적 패배로 비쳐졌다.
   프랑스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過慾(과욕)을 부린다. 프러시아 왕가의 굴복을 요구한 것이다.
   프랑스 외무장관(Duc de Gramont)은, 駐(주)프러시아 프랑스 대사(빈센트 베네데티)에게, 프러시아 왕으로부터 '다시는 우리 집안에서 스페인 왕 후보를 내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라는 훈령을 보냈다. 7월13일, 프러시아의 빌헤름 1세는 휴양 중이던 엠스에서 산보를 하고 있었다. 프랑스 대사가 접근하여 본국의 메시지를 구두로 전했다. 빌헤름 1세는 정중하게 대사의 제안을 거절했고, 두 사람은 다소 냉랭하게 헤어졌다.
   왕의 비서가 두 사람의 대화를 적어 베를린의 비스마르크 수반에게 알렸다. 이는 '엠스 전보'로 유명해진다. 비서가 작성한 보고문은 이러했다.
   <국왕 폐하께서 이렇게 써 주셨습니다. "베네데티 백작이 산책로에서 짐을 가로막더니 성가시게 하는 태도로, '짐은 호엔쫄렌 家門(가문) 왕자의 (스페인 왕위) 계승에 관해 다시는 동의하지 않을 것을 보장한다'는 내용을 본국에 전보로 보내도록 윤허해 달라고 요구했음. 그런 식의 약속은 옳지도 가능하지도 않은 만큼, 이 요구를 단호히 거절하였음. 물론 짐은 그에게 '짐은 아무 소식도 듣지 못했고, 짐보다 당신이 파리나 마드리드를 통해 더 잘 알고 있을 테니, 우리 정부가 그 문제에 관여하지 않았음은 잘 알 것'이라고 말했음.
   (장관 중 한 명의 조언을 받으신) 국왕 폐하는 상기 요구사항에 대해 더 이상 베네데티 백작을 만나시지 않겠다 하시고, 이 문제에 대해 백작이 이미 파리로부터 전달받은 것과 같은 내용을 폐하께서 (레오폴드로부터) 확인받으셨으니 대사에게는 더 이상 할 얘기가 없다고 부관(adjutant)을 통해 전달하도록 명하셨음. 폐하는 각하(비스마르크)께서 이번 베네데티 백작의 새로운 요구사항과 이를 거절한 사정을 우리 대사들과 언론에 알리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음.>
  
   선동된 여론을 따라가다가
  
   비스마르크는 이 電文(전문)을 짜깁기 하여 언론에 공개했다.
   <스페인 왕국 정부가 프랑스 제국 정부에 호헨쫄렌의 왕자가 (왕위 계승을) 포기하였다는 통보를 했다는 뉴스가 나온 후, 프랑스 대사는 (빌헤름 1세) 폐하께서, 앞으로 영원히, 호헨쫄렌 家門 사람이 스페인 왕의 후보가 되려고 한다면 이를 허락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는 전보를 파리로 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하였다. 폐하는 이에 대사를 재차 접견하는 것을 거부하고, 副官을 통하여 더 할 말이 없다는 뜻을 대사에게 전했다.>
   프랑스 통신사 아바(Havas)는 비스마르크의 발표문을 번역하면서 중요한 왜곡을 했다. 통신은 대사의 다소 무례한 요구를 '질문'이라고 오역했다. 부관(adjutant)이라는 단어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쓰는 바람에 프랑스 사람들은 자기 식으로 해석했다. 프랑스에서 adjutant는 하사관이지만 독일에선 고급 장교이다. 통신사의 왜곡이 프랑스의 많은 신문에 실렸다.
   프랑스 사람들은 빌헤름1세가 프랑스 대사와 조국을 모욕했다고 흥분하게 되었다. 이 보도가 나온 날은 하필 프랑스 혁명 기념일인 7월14일이었다. 감정적인 프랑스인들은 거리로 몰려나와 "프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라"고 요구하였다. 이런 反프러시아 정서는 언론을 통하여 베를린으로 전달되어 이번엔 프러시아 사람들을 화나게 만들었다. 이것은 비스마르크가 노린 바였다.
   그는 독일통일을 완수하기 위하여는 반드시 프랑스와 결전을 벌여야 한다고 판단,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대중영합적인 나폴레옹 3세, 언론의 왜곡 선동, 이성을 잃은 군중의 흥분이 내심 전쟁을 바라던 비스마르크에 걸려 든 것이다. 프랑스가 먼저 전쟁을 걸어오니 프러시아로서는 피해자 입장에서 외교적 대응을 하기가 쉬웠다.
   외교를 內治에 이용한 인기영합주의자 나폴레옹 3세는 군사적 승리를 확신하였을 뿐 아니라 오스트리아, 러시아, 영국도 프랑스 편을 들어줄 것이라고 오판하였다. 나폴레옹 3세는 身病(신병)으로 막상 전쟁 개시엔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워낙 여론이 들끓으니 할 수 없이 7월19일 프러시아에 선전 포고하였다. 당시 프랑스 인구는 4000만 명을 육박했지만 프러시아는 2400만 정도였다. 다수 유럽 나라들도 프랑스의 승리를 점쳤다.
   1870년 9월1일 세단에서 나폴레옹 3세와 휘하 군대 10만 명이 프러시아의 참모총장 大몰트케 장군이 이끄는 20만 대군에 포위당하였다가 항복했다. 普佛(보불)전쟁이라고 불리는 이 전쟁에서 승리한 프러시아는 독일의 수십 개 연방국가를 통합하여 통일독일제국을 건설한다.
   세단에서 프랑스군 사령관은 항복 교섭을 하면서 비스마르크에게 이렇게 간청했다고 한다.
   "프랑스軍이 명예롭게 항복하도록 해주시오. 우리는 무기를 갖고 편제를 갖추어 퇴각하고, 다시는 프러시아 군대와 싸우지 않겠소. 이렇게 해야만 장차 우리 두 나라 사이에는 원한과 복수전이 없을 것이오."
   비스마르크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아는가. 프랑스는 지난 2세기 동안 우리 독일을 서른 번이나 침략하였다는 것을. 당장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비스마르크는 독일군이 파리를 포위하고 있던 기간에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프러시아 王 빌헤름1세를 독일帝國의 황제로 추대하는 대관식을 거행했다. 독일민족으로서는 통쾌한 복수의 상징적 행사였지만 프랑스로서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독일이, 이듬해 프랑크푸르트 조약을 통해서 알자스와 동부 로렌 지방을 프랑스로부터 빼앗아 간 것은 크나큰 후유증을 남겼다. 알자스는 주민이 원래 독일 사람들이었지만 로렌은 프랑스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곳이다.
   자존심이 상한 프랑스는 그 뒤 사사건건 독일과 敵對(적대) 관계에 설 수밖에 없었다. 독일과 대항하려는 유럽의 모든 국가는 일단 프랑스와 손잡으려고 했다. 프랑스-독일의 리턴 매치는 불가피하게 된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의 불씨는 알자스 합병에서 이미 예비된 셈이다.
  
   핵개발 카드를 공식 포기한 대통령
  
   지난 7월초의 중국 시진핑(習近平) 주석 訪韓(방한)은 국내정치에서 보여준 朴槿惠 식 포퓰리즘이 외교에 적용될 때 親中反日(친중반일) 외교노선을 넘어 親中反美로 흐를 위험성을 노출시켰다. 朴槿惠(박근혜) 한국 대통령과 習近平(시진핑) 중국 주석의 공동성명엔 한국의 安保(안보)와 國益(국익)에 심각한 피해를 끼칠 수도 있는 대목이 있었다.
   <양측은 한반도에서의 핵무기 개발에 확고히 반대한다는 입장을 재확인하고, 한반도 비핵화 실현과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 유지가 6자회담 참가국들의 공동의 이익에 부합되며, 관련 당사국들이 대화와 협상을 통하여 이러한 중대한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 하였다.>
   가장 중요한 문장에 北核(북핵)이란 말이 없다. 核을 개발하지 않고 있는 한국을 끌고 들어가 <양측은 한반도에서의 핵무기 개발에 확고히 반대한다는 입장을 재확인>이라고 했다. 북한뿐 아니라 한국의 핵개발도 반대한다는 뜻이다. 한국은 국제사회가 北의 핵무기 개발을 저지하지 못하고 미국의 핵우산 보장 약속도 믿을 수 없게 되면 국가생존 차원에서 NPT(핵확산금지조약)를 탈퇴하고 자위적 핵무장을 선언할 권리가 있다.
   核미사일을 實戰(실전)배치한 敵(적)의 공격으로 국가가 망하지 않고 국민이 죽지 않으려면 마지막 수단으로 자위적 핵무장을 해야 하는데, 이는 일종의 자연법적 권리라고 할 것이다. 중국, 일본, 미국, 러시아로 하여금 "우리가 北의 핵개발을 막지 못하면 한국이 핵개발을 할지 모른다"고 생각하게 해야 우리의 외교에 힘이 붙는다.
   미국 정부도 중국을 압박할 때 "중국이 북핵 해결에 협조하지 않으면 일본과 한국이 핵무장을 할지 모른다"고 말해 왔다. 그런데 대한민국 대통령이 중국 주석에게 우리의 가장 중요한 北核 해결 카드 하나를 바친 꼴이 되었다. 국제관계에서, 특히 공산국가에 대하여 무엇을 안 하겠다고 하는 것은 가장 下手(하수)의 외교이다.
   李承晩(이승만) 대통령은 닉슨 미국 부통령에게 "공산주의자들이 한국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나라라고 생각하도록 만들어야 미국에도 유리하다"고 충고한 적이 있다. 닉슨은 그 뒤 공산권을 상대하면서 늘 이 충고를 염두에 두었다고 회고록에 썼다. 전쟁범죄의 前科(전과)가 있는 집단이 이미 핵미사일을 實戰배치하였거나 實戰배치가 임박한 상황에서 그 피해 당사자가 가장 유효한 (아마도 유일한) 대응책인 자위적 핵개발 포기를 선언한 것은 국가 생존권의 포기이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북한의 후견자와 손 잡고 "우리는 대한민국의 핵개발을 확고히 반대한다"고 선언한 꼴이다. 강도를 어떻게 잡을 것인가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왜 피해자(한국)가 "앞으로 우리는 경비원을 두지 않겠다"고 약속하는가?
  
   미국 전술 핵무기 재배치 카드도 포기
  
   '한반도에서의 핵개발 반대'에 이어 '한반도 비핵화 실현'이란 말이 또 나왔다. 박근혜 대통령은 오마바 대통령과 한 공동선언에선 '북한의 비핵화'라고 하더니 중국과 한 선언에선 '한반도 비핵화'라고 한다. 외교부에 물으면 '한반도 비핵화'는 '북한의 비핵화'를 의미한다는 해명을 한다. 한국인의 國語(국어)실력을 조롱하는 말이다. 안보외교상 가장 중요한 단어를 상대에 따라 지조 없이 쓰면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한반도 비핵화'란 말을 통해서 朴槿惠 대통령은 北核 대응의 또 하나 유력한 카드를 버렸다. 북한이 핵미사일을 實戰배치한 상황에서 한국이 취할 수 있는 대응책은 자위적 핵개발, 미국 전술핵 재배치, MD(미사일 방어망) 건설 등이다. 1990년대 초 미국은 휴전 이후 한국에 배치하였던 전술핵무기를 철수시켰다. 한국의 일부 전문가들은 "우리가 핵개발을 하지 못한다면 철수한 미군 전술핵을 한국에 재배치하도록 요구해야 한다" "재배치한 전술핵에 대한 공동사용권도 가져야 한다" "전술핵 재배치를 거부하면 핵개발을 하겠다고 해야 한다"는 등의 주장을 한다.
   敵이 핵미사일을 實戰배치한 뒤, 발사단추를 누르면 10분 안에 핵폭탄이 수도권 상공에서 터지는데, 우리는 대응 핵도, 미사일방어망도 없는 무장해제 상태이다. 이러한 조건에서 '미국의 전술핵 재배치'는 미국의 핵우산 제공 약속을 믿게 하는 유일한 대응책이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朴 대통령은 '한반도 비핵화'를 중국에 약속, 이 카드를 버렸다. '한반도 비핵화'에는 한국에 미국의 핵무기를 재배치하지 않는다는 뜻이 포함된다고 봐야 한다. 북한이 그런 목적으로 만들어낸 용어이고, 중국 또한 그런 뜻으로 쓰는 데 대한민국 대통령이 동의한 것이다.
  
   6자 회담이란 사기극
  
   중국이 주도한 6자회담은 北核을 저지하는 데 실패하고 北이 핵무장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벌게 해주는 데는 성공했다. 北核 저지를 위한 강제수단을 배제한 회담이었기 때문이다. 벌써 11년이 흘렀다. 이번 韓中 정상(頂上) 공동성명은 또 다시 <관련 당사국들이 대화와 협상을 통하여 이러한 중대한 과제를 해결해야> 운운했다. <양측은 한반도 비핵화 실현을 위하여 관련 당사국들이 6자회담 프로세스를 꾸준히 추진하며>라고 합의하기도 했다, 北이 핵미사일을 實戰배치하는 단계에서도 아직 한국 대통령이 이 絶體絶命(절체절명)의 문제를 대화와 협상을 통해서만 해결하겠다고, 北의 후견세력에 약속했다. 미국과 일본조차도 北核 제거에 대한 한국의 국가적 의지를 의심하게 될 것이다. 피해 당사국이 이렇게 소극적인데 北의 핵무기로부터 크게 위협을 느끼지 않는 나라들이 대신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겠는가?
   한국으로 시진핑을 초대하여 이뤄진 회담에서 왜 박근혜 대통령이 이런 저자세로 일관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언론은 시진핑이 北核 반대를 확고히 했다고 왜곡, 미화한다. 北核 北자도 안나오는 공동성명을 親中的(친중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한국인의 오랜 對中(대중)사대주의 根性(근성)이 좌익득세와 맞물려 되살아나면서 자유와 번영의 생명줄인 韓美동맹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고, 박근혜 대통령이 그런 흐름을 가속화시키고 있다는 느낌을 확실하게 주는 공동성명이었다.
   중국은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국가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아래와 같은 문장을 굳이 넣을 필요가 있었는가?
   <중국측은 세계에 하나의 중국만이 있으며, 대만은 중국 영토의 불가분의 일부분임을 재천명하였다. 이에 대해 한국측은 충분한 이해와 존중을 표시하고(후략)>
  
   日의 집단자위권 행사를 반대하면 韓美동맹 균열
  
   미국은 일본의 집단자위권 행사를 적극적으로 지지한다. 한국 정부도 공식적으로는 한번도 반대한 적이 없다. 그런데 朴 대통령은 시진핑의 페이스에 말렸는지 기존의 정부 방침과 다른 발언을 했다. 한·중 頂上(정상,박근혜-시진핑)은 7월4일 서울 성북동 가구박물관에서 오찬을 함께 하면서,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헌법 해석 변경에 대해 여러 나라가 우려하고 있고, 일본 국민의 절반 이상이 자위권 확대에 반대하는 상황에 주목하면서 일본 정부가 자국민의 지지도 받지 못하는 정치를 지양하고 평화헌법에 부응하는 방향으로 방위안보정책을 추진해야 한다는 데 뜻을 모았다>는 것이다.
   고위 외교관 출신의 한 인사는 이런 평을 했다.
   "시진핑은 립서비스만 하는데 한국 언론이 너무 미화한다. 중국은 북한의 핵문제를 해결하는 데 성의가 없다. 일본의 집단자위권 행사는 한국에 得(득)이 된다. 우리의 주권을 침범할 가능성도 없다. 우리가 싫으면 얼마든지 한국 영토 내에서의 집단자위권 행사를 거부할 수 있다. 즉, 유리한 경우만 골라서 취할 수 있다. 한국 대통령이 중국 주석과 함께 집단자위권을 비판했다니! 藥(약)과 毒(독)을 구분 못하고 있다. 정말 이 나라는 큰 일이 났다."
   일본이 동북아에서 집단자위권을 행사하는 경우는 거의가 동맹국인 미국이 중국이나 북한의 공격을 받을 때이다. 일본엔 한국에 있는 유엔군 사령부의 후방 기지가 있고, 한국이 북한의 공격을 받을 때 일본에 있는 미군 기지로부터 함정과 전투기가 발진, 한반도에서 작전을 펴야 한다. 이때 일본이 미군을 도우려면(즉, 한국을 도우려면) 집단자위권 행사가 필요하다. 그런 권한이 없다면 미군뿐 아니라 한국군의 對北(대북) 작전이 원활하게 되지 않아 우리는 안보상 피해를 본다.
  
   대한민국 대통령의 일본 집단자위권 행사 비판은, 敵(북한정권)의 후견세력인 중국 편에 서서 동맹국 미국을 간접 비판하는 모양새였다. 미국의 눈에는, 중국의 심부름꾼 역할에 충직한 것으로 비쳐질 가능성이 있다. 韓美동맹이 약해지면, 미사일방어망도 안 만들고, 핵무장도 하지 않는 한국을 중국이 계속 존중해줄까? 朴 대통령은 지금 國力(국력) 이상의 외교를 하고 있는 것 같다. 殘高(잔고) 이상의 어음을 발행하면 부도가 나듯이 國力을 넘어선 강경책을 펴면 외교적 不渡(부도)가 나는 수가 있다.
   朴 대통령은 납치자 문제를 둘러싼 日北(일북) 접근도 비판하였는데, 韓日관계가 좋았더라면 일본의 그런 일방적 對北(대북)접근은 한국의 양해 없이는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反日(반일)외교의 무력함을 드러낸 점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UN헌장도 세계 모든 국가들은 집단적 자위권이 있다고 인정하고 있다. 한국이 UN에 가입할 때 헌장을 준수할 것을 약속했으므로 일본의 집단자위권을 논리적으로 반대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박근혜가 나폴레옹 3세의 외교적 파퓰리즘을 닮는다면?
  
   헨리 키신저는 《외교》라는 책에서 普佛전쟁으로 몰락한 나폴레옹 3세에 대하여 <여론에 민감한 그는 그의 인기를 유지하기 위하여 외교정책을 오락가락 하게 만들었다>고 혹평했다. 반면 비스마르크는 '독일 통일'을 목표로 놓고 여론을 이용, 냉정한 외교를 했다. 엠스 전보 사건에서 보듯이 나폴레옹 3세는 여론을 따라갔지만 비스마르크는 여론을 만들었다. 善惡 평가는 달리 할 수 있으나 김정은, 시진핑, 아베가 국가이익을 중심으로 한 외교와 전략을 펴고 있다는 데는 異見이 없을 것이다. 朴槿惠 대통령은? 그가 나폴레옹 3세처럼 國益보다 자신의 인기나 여론(또는 감정)을 더 重視(중시)한다면 시진핑, 김정은, 아베한테 이용당하고 한국은 외교적 부도 사태를 각오해야 할 것이다.
   세월호 사고는 풍랑이 없는 평온한 바다에서 일어났다. 조각배가 아니라 큰 배였다. 뒤집어지는 데 불과 100분 정도 걸렸다. 船社(선사)의 돈벌이 위주의 안전 무시 경영, 감독기관의 결탁, 增築(증축)에 의한 무게중심의 上向, 화물 過積(과적), 固縛(고박) 부실, 평형수 줄이기, 이에 따른 복원력의 약화, 자격 없는 선장과 선원들, 대피 훈련 부족 등의 요인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축적되어가다가 10도 정도의 變針(변침)으로 이들 모든 요인들이 결합되어 폭발한 결과였다.
   대한민국號에서도 이런 顚覆(전복) 요인들이 쌓여가고 있음은 확실하다. 국가지도부의 무책임과 무능력, 종북반역 세력의 준동, 선동언론의 발호, 국회의 反국가적 행태, 좌편향 국사 교과서, 공무원 집단의 기회주의, 대통령의 인기주의 외교 등이 어떤 외부 요인에 의하여 직렬로 연결되어 폭발한다면 세월호처럼 넘어갈지도 모른다. 그때 새누리당 정권이 이준석 선장처럼 행동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는가?
   高地戰에서 勝敗(승패)는 8부 능선에서 지휘관이 일어서면서 "돌격!" 명령을 내릴 때 몇 사람의 부하가 행동을 같이 하느냐에 의하여 결정되었다고 한다. 평소 부하들을 아끼던 지휘관일수록 성공률이 높았다. 정권 지지층이 대통령에 대하여 배신감을 품기 시작한 대한민국에선 그런 결단의 순간이 닥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할 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