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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政爭에 눈먼 정치, 국가 안보 위기도 아랑곳 않는가/ 조선일보

鶴山 徐 仁 2013. 11. 28. 19:01

[사설] 政爭에 눈먼 정치, 국가 안보 위기도 아랑곳 않는가

 

 

입력 : 2013.11.28 03:01

 
괌 미군 기지에서 이륙한 미국 B52 폭격기 두 대가 26일 중국이 방공(防空)식별구역으로 설정한 동중국해 상공을 1시간가량 누빈 뒤 기지로 돌아왔다고 미국 국방부가 밝혔다. B52는 핵무기 탑재가 가능한 전략 폭격기이다. 방공식별구역은 타국의 군용 항공기가 이 구역에 들어올 경우 방어 조치를 취하기 위해 임의로 설정한 구역이다. 미국 국방부 대변인은 "오래전에 계획한 통상적 훈련 비행"이라고 했지만 중국이 일방적으로 선포한 방공식별구역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미국의 의지를 무력시위로 보여준 것이다.

중국 국방부 대변인은 27일 B52 폭격기의 비행경로와 비행 지역 등을 상세히 설명하면서 "미국 항공기를 즉각 식별해 비행의 전 과정을 지켜봤다. 중국은 관련 구역을 유효하게 통제할 능력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B52 폭격기가 자신들이 선포한 방공식별구역에 들어오면서 사전 통보 절차를 밟지 않은 것에 대해선 아무 설명도 하지 않았다. 요 며칠 새 미·중·일이 방공식별구역 설정을 놓고 벌이는 실력 행사는 미·일과 중국 어느 쪽에서든 한 발자국만 더 나아가면 언제 어떤 사태를 불러올지 예측하기 힘든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대한민국 앞에 유례가 드문 복합적 초대형 외교 안보 위기가 다가오고 있다.

그런데도 이 나라 정치 중심부에서 이 상황에 관해 우려를 표명하거나 국민적 단합과 범국가적 대비(對備)를 주장하는 목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 대한민국을 향해 무슨 파도가 밀려오고 있는지 알려고 하는 노력조차 하지 않고 있다.

여야는 1년 넘게 2007년 노무현·김정일 정상회담 발언록과 국가정보원 댓글 의혹 등을 놓고 다투고 있다. 우리 국회는 지금껏 한·미·일 3각 동맹과 중국 사이에서 이 나라가 점차 선택을 재촉받는 상황으로 몰려가고 있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한 적도 없다. 한국 경제는 삼성전자를 뺀 한국 기업 전체가 실적 부진으로 허덕이고 있다. 사상 최대 국제수지 흑자 기록의 뒷면에는 일자리를 찾지 못해 거리를 헤매는 100만 넘는 청년 실업 문제가 도사리고 있는 현실도 이 나라 정치인들에겐 관심 밖의 일이다.

지금 한국 정치에선 대화와 타협으로 정국을 풀어가려는 합리적 세력이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새누리당 황우여 대표와 민주당 김한길 대표가 얼마 전 회담을 갖고 정국 타개책으로 '여야 4인 협의체'를 만들어 거기서 야당이 요구해 온 국정원 댓글 사건 등에 대한 특별검사 임명을 논의하는 방안을 협의했다. 이 회담 후 황 대표는 황 대표대로, 김 대표는 김 대표대로 두 당의 다수 세력인 친박과 친노로부터 각각 집중포화를 맞았다. 정당 대표들이 타협안을 찾으려다가 당내 강경파의 공격에 시달리다가 결국 손을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 또 벌어진 것이다.

정치권이 1년 가까이 대결과 재대결, 분열과 재분열을 이어가자 종교계와 다른 사회 집단들까지 여기에 끼어들고 있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을 비롯한 일부 종교계 인사들은 연일 지난해 대선은 불법·부정선거라고 주장하면서 박근혜 대통령 사퇴를 요구하고 있다. 여기에 맞서 우파 단체들은 곳곳에서 '종북(從北) 규탄 집회'를 벌이고 있다. 양쪽 극단(極端)의 주장들이 활개를 치면서 합리적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변두리로 밀려나고 있다. 가급적 극단적인 논리로 한편으로는 상대편을 공격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진영을 단결시켜 대결과 마찰의 불씨를 더 키울 궁리만 하는 세력들이 점점 더 힘을 얻어가고 있다.

이래서는 국가적 위기 앞에서 정치 리더십이 제대로 발휘될 수 없다. 이제 합리적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제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대통령은 그간 국정원 댓글 의혹 논란에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일부 사제들의 북한 연평도 포격 두둔과 대통령 사퇴 주장이 여론에 의해 심판받는 와중에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맞대응하기도 했다. 어떻게든 존재감을 과시하고 싶어 안달이 난 정의구현사제단은 "분열을 야기하는 일을 용납·묵과하지 않겠다"는 대통령 발언을 보고 자신들의 주장을 세상에 더 크게 알릴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대통령과 대통령을 보좌하는 여권 핵심은 이제 지금의 정국을 둘러싼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볼 필요가 있다. 안보 문제를 비롯한 국가적 과제가 국내 정치와 뒤섞여 버리는 상황을 최소화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헌법에 규정된 내년도 예산안 처리 시한(12월 2일)이 나흘밖에 남지 않았고, 올해 말까지 예산안을 처리 못하면 준(準)예산을 편성해야 하는 초유의 비상사태를 맞게 된다. 대통령과 여권 핵심은 소규모 대결이 대규모 대결의 방아쇠를 당기는 상황으로 번지지 않게 정치력을 발휘해야 한다.

야당은 그간 작년 대선 때 불거진 이슈들을 붙잡고 장외투쟁과 국회 태업(怠業) 같은 강경 투쟁으로 일관해 왔다. 그 결과 민주당 지지율은 새누리당의 절반에도 못 미치고 아직 출범도 하지 않은 '안철수 신당'에까지 밀리는 상황을 맞았다. 야당은 국민이 가장 관심 없어 하는 사안에 전력을 집중해온 그간의 노선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미·중·일의 방공식별구역을 둘러싼 대립과 갈등에서 한반도는 위기의 본(本)무대는 아니다. 그러나 주변 강대국들의 첨예한 각축(角逐)이 한반도로 밀려오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다. 정치 리더십이 지금부터 여기에 어떻게 대비해 나가느냐에 따라 나라의 운명이 갈릴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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