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카시즘 [McCarthyism]
미국 위스콘신주(州) 출신의 공화당 상원의원 J.R.매카시의 이름에서 나온 말
1950년 2월 “국무성 안에는 205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다”는 매카시의 폭탄적인 연설에서 발단한 것이다. 1949년 이래 수년에 걸쳐 매카시가 상원의 비미(非美)활동특별조사위원회를 무대로 하여 행한, 공산주의자 적발 추방의 선풍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냉전이 심각해지던 상황에서 전통적인 미국자본의 시장이던 중국의 공산화와 잇달아 발생한 한국의 6 ·25전쟁 등 공산세력의 급격한 팽창에 위협을 느낀 미국국민으로부터, 그의 주장이 광범한 지지를 받았다.
매카시즘이 먼저 공격목표로 삼은 것은 중국정책에 영향력이 컸던 외교관, 국무성 및 중국통 정치학자 오언 래티모어, 국제법학자 제삽 등이었는데, 대통령 H.S.트루먼도 공산주의자에게 약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당시 국무장관 J.F.덜레스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매카시즘의 공포에 떨었고, 그 때문에 미국의 외교정책이 필요 이상으로 경색된 반공노선을 걷게 되었다. 유력한 정치가나 지식인들도 매카시즘에 두려움을 느끼고 그에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매카시는 육군에 도전한 것이 치명상이 되어서 마침내 1954년 상원의 사문결의(査問決議)에 의하여 실각하였다. 매카시는 히틀러와는 달리 아무런 비전도 가지지 못하였으나, 보기 드문 선동가였다. 그가 미국의 대외적 위신이나 지적(知的) 환경에 끼친 손해는 막대한 것이었다.
1950년대 미국에서 일어난 반공사상(反共思想). 50년 2월 미국 공화당 상원의원 조지프 레이먼드 매카시가 국무부의 진보적 성향을 띤 100여명에 대해 추방을 요구했으며 많은 지도층 인사를 공산주의자로 몰아 공격했다.
동서냉전이 강화되는 가운데 미국사회를 휩쓸었던 이 초보수적(超保守的)인 정치적 흐름을 당시 상원 국내치안분과위원장이었던 그의 이름을 따서 ‘매카시 선풍’이라 부른다.
2차대전이 종결되고 미국과 소련간의 연합국 동맹이 분열되면서 사회주의 진영과 식민지 민족해방운동 세력의 급속한 성장에 직면해 체제보존의 위기를 절감한 지배층의 보수강경 분파가 전시 총동원체제로부터 전후(戰後)체제로 순조롭게 체제를 재편성하고 헤게모니의 기반을 다지고자 의도적으로 일으켰던 이 ‘공산주의자 사냥’은 미국 국내외로부터 심지어 당 안에서도 격렬한 비판에 부닥쳐 국제관계에서의 긴장완화와 더불어 점차 스러졌고 매카시는 54년 분과위원장직에서 해임됐다.
그 후로도 골드워터 공화당 대통령후보로 대표되는 보수주의의 흐름은 간헐적으로 지속돼 ‘신(新)매카시즘’이라 불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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