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고집 안동선비의 뿌리를 찿아서(1)-
정소성(소설가, 단국대명예교수)
아래 글은 최근 있었던 동연회(재경 안동지역 교수 모임)의 옥산 서원, 도계서원, 임고서원 탐방에 참여했던 한 사람으로, 필자 자신과 참석하신 분들의 일종의 뿌리찾기를 시도해본 것이다. 호주제 폐지등 가치관의 혼돈 속에서 우리는 과연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아야 하나.
옥산서원은 중종조의 명현 이언적의 위패를 모시고 향사하는 서원이고, 도계서원은 선조 광해군 조의 민중시인 노계 박인노를 배향하는 서원이고, 임고서원은 충절의 표상 포은 정몽주를 모시는 서원이다.
지난 4월 11일 회원으로 가입해 있는 동연회에서 이들 세 서원의 탐방에 나섰다. 모여서 별달리 하는 일은 없고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가끔 저녁이나 먹고는 불이나케 헤어져 버린다. <동연회 통신>이라는 이름의 소식지 같은 잡지를 발간하였다. 오십대가 두서너 명 있으나, 대부분이 6, 70대여서 그야말로 노인들의 모임이다.
나는 원래 안동 사람이 아니다. 나는 봉화 상운 사람이다. 그러나 안동 규수에게 장가를 들었거나, 안동이 외가인 사람도 자격이 있다면서 권하는 바람이 가입하였다. 하기야 나의 고향인 봉화 상운면은 안동과의 사이에 예고개라는 고개 하나만을 두고 있고, 생활권이 봉화가 아니라 안동이다. 아내가 풍산김씨인데다가 아내의 외가가 바로 안동지역 최대 성씨의 하나인 진성이씨이기 때문이다. 진성이씨라면 바로 그 유명한 퇴계 이황의 성씨이다. 진성이씨는 조선조 500년간 58명의 문과급제자를 냈다.
처음에는 시들하여 별로 잘 참가도 하지 않았으나, 날이 갈수록 이상한 흥미와 재미가 생기고 알 수 없는 신기로움도 있는 것처럼 느껴져 자주 참석한다.
내가 이런 느낌을 가지게 된 동기란 것은 작년 초겨울에 있었던 이 모임의 안동, 영해, 평해지역 탐방에 참가하고 나서였다. 나는 안동은 몇 차례 가보았지만, 영덕과 영해, 평해는 처음 길이었다. 거기에서 나는 바닷가에 위치해 있던 고색창연한 한 마을, 괴시리라는 조금은 듣기 기이한 마을을 보고서 나는 깊은 충격을 받았다. 천년의 세월 속에 파묻힌 듯한 바닷가에 고즈넉히 흩어져 있는 이 마을은 전부 기와집들이었는데, 기와에는 이끼와 침묵이 끄으름처럼 까마득히 묻어 있었다. 무슨 영화의 촬영세트장도 아닐텐데 어쩌면 이런 마을이 아직도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것일까, 정말 깊은 충격을 받은 적이 있었다.
나는 그 여행을 하고 난 후부터 이 모임이 조금은 색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한문으로 시를 지어 흥겹게 읊어대는, 조금은 시대착오적인 분들이 킬 타임하기 위해 만든 모임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모임은 다른 모임이 가지지 않는 그만의 독특한 분위기와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인간의 오만가지 물질적 동물적 본능을 너무나 교묘하게 자극하는 갖가지 물질과 인간사가 넘쳐나는 이런 세상에, 노후의 여유를 즐기기 위해 떠나는 여행의 행선지를 이런 케케묵은 서원탐방으로 계속하는 것부터가 조금은 예사로운 일은 아니다. 한문께나 하는 회원들은 그래도 서원의 탐방을 조금은 어깨를 으쓱거릴 일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거창한 서원이라 해서 가봤자 비슷비슷한 옛날의 정형적인 고건물 몇채가 을씨년스럽게 서있기가 고작일 것이다.
그러나 을사보호조약으로 나라가 일본에게 먹혔을 때 가장 많은 자결자가 난 곳이 바로 안동지방이다. 구체적으로 70 여명의 자결자 중에서 열명이 안동인이었다. 그리고 가장 많은 의병대장이 난 곳 또한 안동지방이다. 세상이 수상하여 못가진자, 못배운자, 소외된자가 오히려 떠받들리는 세상이다. 그러나 조선 500년을 지켜온 양반계습도 언제나 경원과 경멸의 대상이기만 것은 절대 아니다. 그들이 있었기에 대쪽같은 지조가 있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유례가 없는 조선 양반문화를 꽃피울 수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총무가 보내는 이번 여행의 안내서를 보고, 거기에 포은 선생을 모시는 임고서원이 있는 것을 알았다. 나는 그야말로 한문에는 까막눈 비슷하지만 그래도 포은 선생은 나의 직계선조가 아닌가. 그분을 모시는 서원을 방문한다는데야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 여행은 안동출신 거대 방산기업인 주식회사 풍산 초청으로 이루어졌다. 이런 큰 기업이 자신의 고향에 있고 그리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바람직한 일이다.
풍산 측에서는 부회장인 유목기 씨가 나와서 안강공장까지 동행하였다.
화창한 늦은 봄의 태양광선이 거대한 휘장처럼 온 산천에 끝 간데 없이 드리워져 있었다. 노인들의 모임답게 차안은 조용하기만 했다. 한문으로 시를 지어 읊조리는 한문의 대가들이 근엄한 표정을 하고 좌석에 깊이 몸을 내리고 있었다. 그분들 옆에 앉은 사모님들은 오랜만의 여행이라 그런지 웬지 기분들이 좋아보이는 듯했다.
조선시대에는 고급 벼슬아치들의 부인들에게도 훈작을을 내렸는데, 남편이 1품 즉 의정 이상의 부인에게는 정경부인을 내렸고, 2품 이상의 부인에게는 정부인, 3품 이상 즉 당상관의 부인에게는 숙부인의 훈작을 내렸다.
지금 뻐스를 탄 연세가 높으신 부인네들은 남편이 한문시를 읋조리며 일생을 사신 탓일까 웬지 정부인이나 숙부인의 분위기가 조금은 풍기는 것만 같았다.
나는 전번 여행에서 차멀미가 나서 고생을 한 경험이 있어서 이번에는 염치불구하고 앞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내 옆자리에 앉은 아내 풍산김씨(김갑영)는 강의까지 미루고(공주대 사대) 이번 여행에 참가하였다. 남편 성씨의 원조상을 배향하는 서원을 방문한다고 해서일까.
풍산김씨로 역사에 뚜렷한 이름을 남긴 사람은, 일본 동경의 천황궁 이중교에 폭탄 세개를 던진 김지섭 의사가 있다. 원래 신라시조 김알지의 후손들로, 중시조 김문적은 신라 마지막 경순왕의 12대 손이다. 김문적의 12대 손 김의정이 가솔을 이끌고 안동, 봉화, 예천에 이거하여 살았다. 그래서 풍산김씨는 안동에 세거하는 4대 김씨중 하나가 되었다. 안동김씨, 의성김씨, 광산김씨, 풍산김씨가 그들이다.
김의정은 벼슬이 첨정에 이르렀으나, 아비되는 김양진은 연산군 3년에 별시문과에 합격하여 출사하였고, 중종 때 형조좌랑, 이조참판, 경주부윤, 전라.황해도 관찰사, 대사간, 동지돈녕부사, 충청도관찰사, 동지중추부사등을 역임한 중신이었다. 사후 안동 묵계서원에 제향되었다. 마누라쟁이가 왕족의 후손이라니, 나는 언제나 아내에게서 왕족 냄새가 날까봐 경계한다.
즐거운 질주가 계속되었다. 중앙선이 뚫려 경상 좌도의 교통이 한결 좋아져 버렸다. 옛날에 비하면 어디 간다고 할 수 없을 정도이다. 금방 어디론가에 가서 닿아 버리는 통에 오히려 조금 싱거워져 버린 감이 있다.
한 시에 풍산 안강공장에 다달았다. 우선 거대한 공장부지에 압도되었다. 공장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들었다. 잘 차린 음식이었다. 공장 안을 견학했는데, 결과적으로 대단히 안심이 되었다. 어떤 불상사가 터지더라도 이 공장 덕택으로 우리는 적을 물리칠 수 있으리라는 믿음같은 것이 생겼다. 세계3위의 방산공장이라고 한다.
이 공장을 세운 창업주 유찬우씨는 풍산유씨인데, 서애 유성룡의 후손이다. 우리는 유성룡은 선조 조의 명재상으로 알고 있으나, 그는 달리 대단한 전략가였다. 그가 이순신과 권율을 발탁하여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끌었지만, 그가 그들 두 영웅을 알아볼 수 있었던 데는 그만한 병(兵)에 대한 안목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후손이 이런 방산업체를 이룬데에는 조상의 그런 병사에 대한 안목을 물려받았음에 틀림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각기 대단히 특별난 존재같지만 버릇과 피를 속이지 못하면서 자신의 운명의 채바퀴를 돌릴 뿐이다. 요사이 말로 한다면 인간은 DNA와 Y염색체로서 찍어낸 듯이 조상의 피를 받아 태어난다고들 한다.
창업주는 유명을 달리하였고, 그 아들이 대를 이었는데, 미국의 부시대통령 가와 그렇게 가깝다고 한다. 이번 노무현 대통령의 방미도 이분이 마련하였다고 신문은 보도하였다. 이 공장에서 만드는 여러 가지 병기들이 부당하게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짓밟는 무리들을 쳐부수는데 일조를 했으면 좋겠다.
서울대학교 사대에 재직 중인 류안진 교수는 전주류씨이고, 이인화라는 필명으로 소설을 쓰는 이화여대 류철균 교수가 전주류씨이다. 전주 류씨는 구월산 문화현을 본관으로 문화류씨의 한 분적으로 8대에서 갈렸다. 그러나 풍산류씨의 경우는 문헌상으로 문화류씨와의 관계가 부정확하다고 한다.
경기대학교 교수인 김대원 화백의 동양화 한 폭이 증정되었다. 김 교수는 안동김씨로 알려져 있다. 그는 최근 고향 안동에 화실을 장만하였는데, 전번 여행길에 회원들을 초청하여 보신탕을 먹게 한 적이 있어서 기억되었다.
공장을 배경으로 촬영을 하고 경주 양동마을로 떠났다. 양동마을은 회재 이언적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그가 이조판서를 지낼 때, 노모를 모시는 고향의 동생을 위해 지어주었다는 고옥이 남아 있었다. 93세의 수를 누리시고 돌아가신지 2년이 흘렀으나 나의 노모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고향을 떠나 서울 객지생활을 한 탓에 내가 모시지 못하고, 동생녀석이 이어서 시집간 누님이 모셨기 때문이다.
대구에서 올라온 영남대학의 이장우 교수가 설명을 했다. 중국 문학에 정통한 그는 머리에 내려앉은 백발 탓인가 이상하게 주변에 알 수 없는 위엄같은 것을 뿌렸다. 이장우는 삼보컴퓨터 이용태 회장의 실제인데, 작년 겨울에 이 모임이 방문하였던 영해 괴시리 마을에 본관을 둔 재령 이씨 이다. 이용태회장은 재경 안동민 향우회의 회장을 맡고 있었다.
재령 이씨는 중중 때의 명신 이현일의 존재로써 그 성가를 유지하고 있다. 과거에 급제하지 않았던 현일이지만 덕행과 학문으로 임금의 일곱 번의 간청을 받고서야 벼슬에 나갔던 인물이다. 당시 조대비상복 문제로 서인의 송시열과 맞섰던 인물이 영남학파의 거유 이휘일, 이현일 형제였다. 이 다틈에서 이겨 정권은 남인인 영남학파로 옮겨왔고(기사환국), 이어 갑술환국으로 다시 서인에게로 넘어갔다. 이것이 남인이 조선조에서 정권을 잡은 마지막 기회였다. 이후 남인은 완전히 몰락의 길을 걷는다. 이현일의 부 이시명과 아들 상일, 휘일, 현일, 고일 그리고 손자 재와 정을 <칠산림>이라 하여 영해 괴시리 마을에 고택이 보존되어 있었다.
영해 괴시리마을, 5백년 역사가 꿈꾸듯이 머물러 있는 고색창연한 고옥들의 마을이다. 조선양반의 삶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어, 알 수 없는 회환과 아울러 급속히 빨려들어가는 먼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느끼게 된다.
요즘들어 나의 눈에 영어나 불어에 정통한 사람보다도 한문에 정통한 사람이 더 돋보이는 것은 왜일까.
나는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45억 명 이상이라는 인간들 중의 하나라는 사실에 무게를 실어야 할까. 역시 이 땅덩어리 위에 살다가 죽어간 그 수많은 인간들의 죽음의 한 켜일 뿐이라는 사실에 무게를 두어야 하는 것일까. 나는 마누라와 두 아들을 거느리고 친구와 직장동료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평범한 한 인간일 뿐인가. 아니면 영일정씨 지주사공파에서 포은을 중시조로 하는 포은 1파 22대 손이라는 사실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인간의 삶은 생시의 것인가 사후의 것인가.
이번 여행은 이상하게도 나의 이런 평면적인 삶에 수직적인 존재감각, 즉 나는 어떤 피의 한 흐름의 마디에 불과하다는 의식을 불현듯 키우게 한 계기가 되었다.
서양의 철인들이나 문인들은 집요하게 존재론에 붙잡히는 경향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존재에 필연성을 부여하던 신의 존재를 부인함으로써 실존주의를 신봉하게 되었다. 실존주의란 사르트르의 말대로 <존재가 본질에 앞선다.>는 철학사상이다. 이 말은 혈통이나 족보로 이어지는 가보보다가는 <지금><여기>에 존재하고 있는 나 자신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양인들은 좀처럼 자신의 존재론에 붙잡히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존재와 죽음을 자연의 한 현상으로 치부하고 조용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사당과 족보에 모셔놓은 자기 성씨의 한 매듭으로 자신을 가늠하여 거기에 한 켜를 더 보태고는 숨을 거두는 것을 본다. 즉 그들은 운명의 수용론자들이다.
이들에게는 그야말로 <본질>이 <실존>에 앞서는 것이다.
나는 불문학을 전공한 사람으로 일생 그놈의 잘 되지도 않는 불어를 끌어안고 씨름을 하였다. 내가 프랑스에서 태어나서 한 십년 그곳에서 자라나지 않는 한 나의 불어 실력이란 백날이 흘러도 별 수가 없을 것이 뻔하다. 죽을 고생을 하여 종이쪼가리 한 장을 받고 귀국하여 대학에 얼굴을 내밀었으나 불어에는 자신이 없다. 작년이던가(2010) 앙드레 말로 학회 회장이란 자가 한국펜클럽 초청으로 서울에 와서 통역을 의뢰받았는데, 즉석강연통역이란 적어도 10년은 그 나라에 체류하지 않았다면 할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회에서는 영어를 요구하니 외국어 교수로서 흉내라도 내어야 하겠기에 영어 공부에도 일생의 상당한 시간을 털어넣었다. 그러자니 영어도 불어도 국제수준으로 구사할 수 있는 정도가 되지 못하고, 겨우 말귀 알아듣고 대답하는 정도에 머물고 말았다.
인생을 이런 외국말 놀음으로 허비한 것은 아니다. 나는 내 기질과 성향 성격이 가르치는대로 소설을 쓰기 시작하였다. 늙으막에 가서 나는 이 피의 흐름의 세계에 눈과 귀가 트였고, 그것은 어느면 조금은 내가 여기 동연회라는 낯선 단체에 가입하여 그 회원들을 자주 만나고 여기 안동지방으로 서너 번 여행을 한 영향이었을지도 모른다.
성씨를 따지고 관향을 따지고 누대를 따지고, 조상을 제향하는 서원과 사당을 따지는 이들이 처음에는 참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웬지 고리타분하고 빛바랜 짓으로만 여겨졌던 것이 사실이다. 나는 인간에게는 실존만이 있고 어떤 본질도 별 가치가 없다는 서양철학에서 근원한 현대 프랑스문학을 공부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서 나는 여기 수직적인 인간 존재의 인식에 깊은 철학이 스며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뻐스는 조금 더 달려 옥산서원에 다달았다. 옥산서원은 중종 조의 중신 회재 이언적을 배향하는 곳이다. 이언적은 이와 기 이전에 도덕을 표상하는 태극이 있다고 주장했던 철학자이다. 그의 이런 도 사상은 동시대 성리학자들의 깊은 존경을 받았다.
회재의 일생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뭐니 뭐니 해도 희락당 김안로이다. 김안로는 퇴재 김흔의 아들로 문과에 급제한 후 입사하여 승차를 거듭하여 호당에 들어갔으나 권신 남곤에게 쫓겨났다. 그러나 기묘사화 후 이조판서로 승진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남곤 심정의 탄핵을 받고 귀양을 갔다. 그러나 그는 기적적으로 복권하여, 심정 축출에 성공하였다. 이어 남곤마저 사사케 하는데 성공하였으니 그의 정치적 역량을 알만한다. 그후 자신에 대한 비판세력이었던 경빈박씨와 복성군을 사사케 하였다. 그의 벼슬은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다. 이 때 그는 자기에게 복종하지 않던 이언적, 이행, 정광필을 귀양보냈다. 이어 문정왕후를 폐하려다가 실패하였다. 왕의 노여움을 풀길이 없었다. 그는 결국 귀양지에서 사사되었다. 아들이 왕의 딸과 결혼하여 연성위가 되었다. 이언적과 김안로의 초기관계는 이러하다.
이언적은 생원으로서 문과에 급제하여 입사하였고, 장령, 밀양부사를 거쳐 사간이 되었다. 그러나 끊임없이 정사를 조작하는 김안로 일파에 무관심함으로써 그들의 미움을 받아 숙청되었고, 경주 자옥산으로 들어가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후 그는 김안로 일파가 패망하자, 다시 기용되었으며 전주부윤을 거쳐 형조판서, 한성판윤이 되고, 좌찬성으로서 원상의 반열에 올랐다. 그는 명종이 죽자 위사공신3등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사직에 별로 득되는 일을 한 것이 없다 하여 끝까지 사양하였다 한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판중추로 내려 앉았다.
그후 대윤 소윤 싸움에 말려들어, 결국 평안도 강계로 귀양가서 7년만에 죽었다. 적지에서 많은 저술을 남겼다.
조선시대 학자가 귀양을 간다는 것은 정치를 멀리하고 독서와 집필에 전념할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한다는 뜻도 된다. 그 대표적인 학자가 다산 정약용이다. 회재 역시 귀양을 가지 않았더라면 그많은 저술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회재에게는 정부인이 낳은 아들 하나와 서자 하나가 있었다. 아들이 양동마을을, 서자가 옥산서원이 있는 독락마을을 맡았다. 그러나 회재가 귀양을 갔을 때, 적지에 따라와 지극정성으로 보살피고 회재가 적지에서 죽었을 때, 3개월이 걸려 아비의 시신을 관에 넣어 고향으로 운구한 자는 서자였다. 그 때 회재의 시신을 담은 관에 매어 어깨에 멜 수 있도록한 긴 대나무 작대기 두 개가 옥산 서원에 남아 있다. 후손들은 서자를 위해 큰 사당을 지어 기리고 있다. 회재의 정부인도 몰 시 서자에게 많은 재산을 허락하였다.
옥산서원은 또한 국보인 삼국사기 덕정본이 소장되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우리 나라 삼국시대를 증언하는 유일한 서책인 삼국사기를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옥산서원의 중요성을 알만하다. 삼국사기의 내용을 거짓이 많다고 우겨대면서 삼국사기 말살책을 쓰는 일본학계의 작태가 빨리 멎었으면 좋겠다. 삼국사기가 있는 한 그들은 자신들이 문화민족임을 증명할 수는 없으리라.
이름 모를 산새소리는, 피어오르는 봄기운을 타고 천년의 정적이 서리 서리 재인 깊은 산골짜기로 퍼져가는데, 허약한 아내를 데리고 육순의 나이에 여기를 찾은 백면서생의 마음은 한없이 숙연하였다. 좀더 창작에 골몰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가슴을 터지도록 메워져 왔다. 인생을 헛산 것같은 생각이 이즈음 왜 이렇게도 절실할까.
일행중 숭실대 이준오교수는 예안이씨이고, 단국대 이광복 교수와 경찰대학의 이조원교수는 고려 삼은의 하나인 목은 이색의 후손인데 한산이씨이다. 목은의 고택 유지가 괴시리 마을 가까운데 있었으나, 후손 이광복 교수의 만류로 가보지 않았다. 고택의 유지는 발견되었으나, 당대 고려 하대의 양반가의 집의 구조를 몰라 복원을 미루고 있다고 했다. 목은의 후손들로는 사육신의 한 사람인 이개가 있고, 토정비결의 저자 이지함이 있고, 조선말의 독립운동가 이상재가 있다. 며칠전 경기도 연천에 목은 영당이 있다고 하여, 숭의전을 보러 가는 길에 찾아 보았으나 찾지를 못한 일이 있었다.
목은은 포은 정몽주와 이우당 이경(하빈이씨)과 아주 가까운 친구였다. 특히 이우당은 포은의 숭배자였다고 적고 있다. 이우당은 단국대학교 고 이재철교수의 조상으로, 들어가도 나라 걱정 나가도 나라 걱정하는 분이라는 뜻으로 이우당이라는 호를 지었다고 한다.이성계의 쿠데타에 반기를 들고 두문동으로 숨은 72현의 지도자였다. 이우당의 문집인 <이우당실기>가 아득한 후손 재철에 의해 번역되어 출판된 것은 특기할만한 일이다.
안동 사람들은 예안 이씨를 잘 모른다. 안동이라 하면 진성이씨 집성촌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퇴계의 후손들이다. 예안 이씨 중에는 여러 상신들이 배출되었으나, 역시 세종조의 명 무신겸 발명자 이천을 들 수 있다. 그는 함경도 도절제사로 야인을 쳐서 엄청난 실지를 회복하였고, 휘하의 장영실과 함께 혼천의, 자격루, 간의등 천문기기와 진천뢰같은 대포를 발명하였다. 무신으로 판중추원사, 보국숭록대부에까지 올랐으며, 1977년 태릉 육군사관학교에 그 정신을 기리기 위한 동상이 건립되었다. 현대인으로는 문법학자 이희승선생이 예안이씨이다.
이준오교수는 불문학자인데, 기이하게도 한국에 <랭보 연구소>를 건립하여 여러 권의 연구서를 발간하였다. 일본에서도 없는 일인데, 이 연구소는 완전히 국제수준이며, 프랑스인 교수들도 여기에 논문을 발표할 지경이다.
일행중 이동한 충북대학의 교수는 그야말로 진성이씨이다. 여행에 참여는 하지 않았으나 이화여대 이동렬 교수도 진성이씨이다. 두분 다 한문과 서예의 대가이다. 역시 여행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이화여대 이동원 교수도 진성이씨이다. 나의 집사람과 외6촌간이다.
강원대 황재국교수는 한문학과 교수답게 한문과 서예의 대가이다. 한문을 보면 어떤 글이건 그 자리에서 한글로 즉각 번역을 하신다. 번역이 아니라 한문을 한글로 읽는다. 우리 모두 놀라면 황교수 하는 말은 언제나 똑 같다. 지난 겨울여행 때 평해황씨 시조를 모신 사당을 참배하였다.
"그것도 몰라. 그것 가지고 먹고 사는데..."
이언적은 여주 이씨인데, 여주 이씨에는 민족사에 찬란한 세 개의 별을 탄생시켰다. 그 첫 번이 고려조의 명현 이규보이다. 고려조의 이퇴계라 할 수 있는 분이다. 고려시대 문집의 집성본인 <동국이상국집> 56권을 남겼고 지금도 영인본으로 계속 출간되고 있다. 조선전기의 성리학자 회재 이언적이 둘째이고. 셋째가 조선 하대의 실학자 이익이다.
세조 때의 명 병판 여주이씨 이계손에게 영일정씨 규수(포은공의 장손 설곡공 보의 네째따님)가 시집을 갔으니, 경주 영천을 아울러 선비의 지조와 자세 그리고 구체적으로 성리학을 중심으로 한 학문의 기틀을 놓은 포은가와 무관하지 않다.
회재의 조선사 속에서의 위치는 무엇보다도 그의 철학이 퇴계 이황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이다.
옥산 서원 관람을 마친 후 경주 보문단지에 마련된 숙소로 가서 여장을 풀었다. 방 한칸을 배정받았으나, 윗층에 서너살 남자아이가 있는 가족이 들었는지 온밤 쿠르릉거려서 도무지 잠을 잘 수 없었다.
오래간만에 먼 여행을 한 아내는 발도 씻지 않고 그대로 쓰러져 잠을 잤다. 웬 여자가 저렇게 모양새가 없단 말인가. 이런 명승지에 왔으면 밤새 술도 마시고 대화의 기회를 가져야 하지 않나!
새벽에 일어나 보문단지 일대를 산보하였다. 아내도 잘 따라주었다. 무취미가 취미인 남편을 만나 일생을 사막처럼 살자니 얼마나 갑갑할 것인가. 나는 술도 담배도 자동차운전도 골프도 고스톱도 모른다. 책이나 보고 글이나 쓰는 골수 꽁생원이다. 여자들은 이런 사람을 참으로 지겨워하는 것만 같다. 별것도 아닌 인생을 왜 좀더 재미있게 살지 못할까 생각하는 것만 같다. 자격지심일까. 문제는 이 별수 없는 인생을 별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야기된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인생이지만 그러나 뭔가 별것이 있는 것만 같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동료들은 누구도 새벽산보를 나오지 않았다. 다들 늦게 취침한 모양이었다.
풍산에서 제공한 아침을 먹고 도계서원으로 향했다. 도계서원은 노계 박인로를 배향하는 곳이다. 조선시대 삼대 가사시인이라 하면, 역시 송강 정철과 고산 윤선도, 그리고 노계 박인로를 든다.
그러나 송강의 시는 뭔가 조금은 조정과 왕을 향해 읊조리는 고위 신하다운 냄새를 지우지 못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님>이란 죄다 임금을 말한다. 그리고 고산의 시는 벼슬을 잃어버린 신하의 자연으로의 귀환의 탄성이 스며들어 있는 것 같다.
노계는 사서삼경을 독파한 학자 출신도 아니었다. 임진왜란을 발로 뛴 말단 병사 출신의 무골이었다.
그러나 노계의 시는 말단 병사로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정유재란을 겪은 시인의 고단한 삶의 그늘과 가난한 왕조 백성의 삶의 물살이 그대로 배어 있다.
경주의 한 산촌에서 태어난 그는 32세까지 밭 매고 꼴 치는 농부였다. 이해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는데,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오는 왜군을 보고 다만 기가 찰 따름이었다. 이웃 마을에 사는 정세아(영일정씨 제2파 선무랑공파)라는 젊은이가 의병을 일으킨다하여 참여하였다. 정세아군의 기습작전으로 처음으로 왜군이 조선병에게 패배를 맛본다. 노계는 여기서 혁혁한 공을 세운다.
왜란이 끝나고 그의 나이 39세에 그는 무과에 급제한다. 조선조 무과 급제자 명단에 그의 이름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왜란시 공적을 인정받아 음직으로 한 급제가 아닌가 한다.
39세라 하면 혈기가 빠져버린 그야말로 불혹의 나이인데, 무슨 수로 그가 무과에 급제를 하였겠나.
박인로는 몰락한 양반의 후손이라 그래도 글을 짓고 한문을 할 수 있었다. 그는 가난하지만 기가 죽지 않고 당대의 명현들을 찾아 다녔다. 그의 명시 <태평가>는 그가 종군한 경상좌도병사 성윤문 막하에서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서 병사의 청을 받고 지은 시이다.
무과 급제후에야 벼슬다운 벼슬을 받았다. 수문장, 선전관을 거쳐 거제도 조라포 만호로 봉해졌다. 41세 때 한음 이덕형을 찾아 갔다가 <조홍패가>를 지었다. 그가 차려주는 홍시를 보니 돌아가신 노모가 생각나서 먹을 수가 없다는 시이다. 45세 때는 통주사가 되어서 <선상탄>을 지었다. 51세 때는 경기도 광주 용진강 가의 사제에서 노니는 한음 이덕형을 찾아가, 그 유명한 <누항사>를 지었다.
53세 때 <독락당>을 지었으며, 57세 때 울산 초정으로 한강 정구를 찾아가서 종유하고, 대구 동촌 소유정을 노닐다가 <소유정가>를 지었다. 67세 때 병자호란이 발발하였으며, 70세 때, 경상도 관찰사 이명에 의해 용호위 부호군에 임명되었다. 75세 때 이명을 기리는 <영남가>를 지었다. 76세 때 경주 산내 노계곡으로 은거하였으며, <노계가>를 지었다.77세 때, 여헌 장현광을 찾아 가서 종유하고 <입암 29곡>과 <입암별곡>을 지었다. 82세 때 영천 도천에서 죽었다.
여기 나오는 여헌에 대해서 잠시 언급하면, 인동장씨로, 한번도 과거를 보지 않은 명현이었다. 그는 서애의 추천으로 재사로서 입시하여 보은현감을 잠시 지냈다. 그러나 그는 광해군 때 군수 사헌 지평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으며, 인조 집권시 지평 장령 집의 공조참의 이조참판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으며, 인조 10년 공조판서도 사퇴하였으며, 이듬해 의정부 우참찬 지중추부사도 모두 사퇴하였다. 그러나 그의 학문에 감복한 유림에서는 그의 현직을 계속 밀었다. 그러나 그는 어떤 공직도 달가와하지 않았다. 나라가 청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동해안의 입암산에 들어가 죽었다. 고결한 현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를 만나러 77세된 노계가 동해안 입암산으로 찾아간 것이다.
노계는 밀양박씨인데, 조선 500년에 큰 인물을 배출하지 못했다. 원상은 한 사람도 없고 판서도 거의 없을 지경이다. 다만 조선 하대의 실학자 박지원과 박제가의 이름이 눈길을 끈다.하지만 밀양박씨의 원조가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임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동행인들이 영천으로 나가는 뻐스에 올랐으나 나는 얼찐거리다가 도계서원 관리인이 늦으막하게 내어놓은 노계 시가의 목판본을 보았다. 틀림없이 보물이거나 문화재일텐데, 이런 엉성한 서원에 보관하고 있을까 걱정스러웠다. 아니나 다르랴,
"많이 도적맞아 버리고 이거 밖에 없십니더!"
"도적을 맞다니요?"
"쥑일놈들이지요..."
조상의 귀한 문화재가 허무하게 사라지고 있었다. 인간사가 한낱 꿈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귀한 것이 아니던가. 인간에게는 분명히 뭔가 영원하고 귀한 것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구잡이로 살수만은 없지 않은가. 여기에 나같은 옹고집장이의 단조로운 삶의 준거같은 것이 있다.
영천으로 나가 서세루에 올랐다. 서세루는 일명 조양루라고도 한다. 밀양의 영남루, 진주의 촉석루, 안동의 영호루, 여기 영천의 조양루를 일컬어 영남 4대 누각이라고 한다.
서세루에 오르니 저멀리 북쪽으로 보현산이 보였다. 나의 어린 시절의 성장지이다. 나는 보현산 아래 자천면에서 국민학교에 입학하였다. 6.25 사변 중이었다. 아버님은 당시 자천 지서 주임으로 있었고, 보현산빨치산 부대 토벌대장을 맡고 있었다. 지서는 무슨 서양 중세 때의 석성처럼 거대한 토성을 쌓아 방벽을 쳤었다. 시도 때도 없이 쳐들어오는 보현산 빨치산을 격퇴하기 위해서 였다. 아버님 정연철부대는 이들을 잘 막아 내었으나, 막상 영천에서 지원군부대가 당도하고 미군이 당도하던 그날 지서는 함락되고 말았다. 지서의 함락을 예견하신 아버님의 지시로 우리는 지서 안에 있던 관사를 벗어나 농가에 가 있었기에 죽임을 면할 수 있었고, 아버님은 적에게 체포되어 끌려가던 날 밤 바로 저기 서세루 앞으로 흐르는 강의 상류 양안으로 걸린 다리 위를 지나갈 때 어둠을 이용해 다리 밑으로 뛰어내렸다. 칠흑같은 어둠이 산간에 깔려 있었기에 빨치산들은 도망자에게 정확한 사격을 할 수 없었다. 끌려가면 어차피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 것은 자명한 일이었기에 필사의 도망을 결행하신 것이리라.
이튿날, 미군부대가 들어와서 읍내는 회복되었지만, 빨치산이 후퇴한 보현산 루트에는 눈이 패이고 다리가 짤려나가고 머리통이 으깨어진 면장 소방대장 우체국장 교장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아버님의 뒤를 따라 같이 강물 속으로 뛰어들어 살아난 박종인이란 용원이 있었다. 나는 이 사람을 이태 전인가 청량리에서 열렸던 재경 영천군민대회에서 우연히 만났다. 용원이라 함은 정식 경찰은 아니고 임의적으로 경찰에 들어와 도와주는 마을 청년들이었다. 나는 무조건 자천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어떤 사람이 나의 어깨를 치더니 어느 구석지로 데리고 갔다. 지독한 연세의 노인이었다.
"나를 몰라보겠능교?"
"무구신지요?"
"내가 교수님이 알라 때 업고 다니고 안그랬능교! 피난 갈 때 내 등에 업히갖고 가셨잖능교!"
"피난이라이?'
나도 몰래 영천말이 튀어나왔다.
"지서가 무너진다고 주임어른이 우리를 내보냈잖능교와!"
"알겠구마!"
"주임님은예?"
"돌아가신지 이십 육년이 되었구마."
"아이고 이 세월..."
70세가 넘어 보이는 백발의 노인은 통곡을 했다.
내 나이 여섯 살이었으니 분명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마구 부등켜 안고 잔디밭을 딩굴었다. 노인의 앙상한 뼈가 내 가슴 속에서 격한 율동으로 흔들렸다. 그날 우리는 목이 빠져라 술을 마시고 헤어졌다.
"저기 서세루 앞으로 흐르는 물이 어디서 오는 줄 아시능교?"
누군가가 엉뚱한 말을 했다.
"아마 보현산에서 발원한 금호강 줄기가 아닐까요?"
누군가가 아는 척을 했다.
"아이구마. 저 물이 바로 우리 안동 임하댐에서 파이프로 흘러온 기구마."
환경학자인 김원교수이다. 서울시립대학교 부총장 출신이다. 의성김씨이다.
안동에 사는 김씨라 해서 다들 안동김씨가 아니다.
지금 동행한 회원들 중에서 김씨가 많지만 안동김씨는 김경동 교수와 김부동 교수, 경희대 김무성교수, 목원대 김대일 교수, 그리고 명지대 김위현 교수, 서울대 김광억교수등이다. 김경동 교수는 미국 남부의 하바드라고 하는 명문 듀크대학과 서울대를 거쳐 정년을 맞았고 지금은 카이스트 교수로 재직중이다. 김부동교수는 서울산업대학에, 김위현 교수는 명지대학에 봉직하시다가 정연을 맞았다. 김광억교수는 현직으로 서울대에 재직중이다.
모임에 참가하지는 못했지만, 서초구청 앞 출발지점까지 나와서 배웅을 한 김재은 교수는 김경동 교수의 가형으로, 이 모임의 어른이다. 이화여대 교무처장 출신으로 알려져 있는 대표적인 안김 인사이다. 언제나 자상한 인품으로 후배들을 대해 존경을 받는다.
김용직교수는 광산김씨이고, 인하대학교 정치학과의 김용호교수도 광산김씨이다.
김원교수와 이 모임의 좌장인 고려대학교 명예교수이신 김종길 교수, 고려대학교 김봉구 교수,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인 김식현교수는 의성김씨이다. 김종길 교수는 영어와 한문에 아울러 해박한 국내 유일한 학자이다. 교수님이 영어로 번역하신 한국시집은 영미인들도 그 시어의 아름다움에 놀란다고들 한다. 교수님의 한문실력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의성김씨로 일반인들의 뇌리에 남아 있는 역사적 인물로는 김안국, 김성일, 김동삼 등의 인물이 있다. 김안국은 여씨향약이라는 저술로 후세인들이 기억하고 있으며, 학봉 김성일은 임진왜란 때 경상도병사로 순직한 명신으로 기억하며, 김동삼은 독립군 대장으로 기억하고 있다.
안동김씨는 조선조 하대의 대표적 벌족이다. 15명의 정승과 35명의 판서, 6명의 대제학, 3명의 왕비를 배출하였다.
안동김씨의 시조는 고려초기의 김선평으로, 김선평은 권행, 장길과 함께 안동(신라시대 고창군) 지방의 호족이었다. 이 때 왕건과 견훤이 이 지방에서 일대 접전을 벌였는데, 위 세 사람이 왕건을 도와 승리하였다. 이 고창전투로 왕건군의 우세가 지속되었다. 그래서 김선평 권행 장길은 벽상공신이 되어 인물이 도화되어 보존되었다. 그리고 이들이 각기 안동 김씨, 안동 권씨, 안동 장씨의 시조가 되었다.
모임에 참석치 못했으나 단국대학교 권용우 교수가 안동권씨이다. 안동권씨는 조선 초기의 양촌 권근이 뛰어난 학자였다. 태종 조의 권중화, 명종조의 권철, 헌종조의 권돈인 등 세명의 영의정을 배출한 대성이다. 그리고 민족사에 가장 뛰어난 인물은 권철의 아들인 권율장군이다. 300명의 군사로, 왜군 정예부대 3만명을 무찌른 그의 기개와 전략은 만고에 빛나고 있다.
이순신은 전공에 맞는 대접을 받지못했으나, 권율은 도원수가 되었고, 한성부 판윤과 비변사 당상을 역임하였고,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는 행운을 누렸다.
안동김씨의 인물로는 병자호란 때 척화파, 김상용 김상헌 형제 정승이 있고, 현종 숙종년간의 명 부자 정승 김수환과 깁창집이 있다. 둘 다 당쟁에 몰려 사사되는 불운을 겪었다.
김조근은 김창집의 현손인데, 정조대왕의 고명을 받아 순조 즉위후 국정을 전담하였다. 김조근의 딸이 순조의 비가 되고, 김문근의 딸이 철종비가 됨으로써, 이후 60년간 대원군 집권때까지 김조근, 아들 김좌근, 김흥근 김병학 김병기 김병시등 10촌 이내의 안동김이 계속 영의정에 올랐다. 안동김의 세도정치의 중심인물은 김좌근으로, 세 번이나 영의정에 올랐다.
방랑시인 김병연이 안김이고, 일제하의 인물로는 김옥균과 김좌진이 안김이다.
이번 안동 방문시 안동독립운동기념관을 방문하였는데, 북로군정서의 김좌진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 기이하게 생각했다. 서로 군정서의 일송 김동삼은 크게 클로즈업되어 있었다. 김좌진은 그 유명한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끈 전설적인 인물이다. 백야(김좌진)는 분명 본관은 안동이지만, 고향이 안동이 아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충남 홍성에서 백야의 생가터가 있어서 문인모임에서 참배한 적이 있는데, 생가지가 홍성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조선 하대의 안동김의 득세는 외척으로서 기연하는 것이기에 조선 중기 김상용 김상헌이나 김수환 김창집같은 덕망을 역사에 남기지 못했다.
광산 김씨는 조선 조 500년에 아주 중요한 두 사람의 인물을 배출하였으니 그 한 사람이 사계 김장생이고, 다른 한 사람이 서포 김만중이다. 광김은 안김과는 달리 권력을 잡아 세도를 누렸다기보다는 학자와 명유를 배출한 성씨이다.
조선 500년을 지배한 학문은 성리학이었고, 성리학의 요체는 예학이다. 예학은 성리학의 시작이요 맺음이라고 할만하다. 조선 예학의 최고봉에는 김장생과 그의 아들 김집이 버티고 있다. 사후 두 부자는 <동국18현>에 추앙되었는데, 문묘에 배향되는 영광을 누렸다. 문묘라 함은 공자를 모시는 사당이다. 왕도 김장생에게 예학에 대해 자문을 구할 정도였다. 인조가 자신의 아비를 원종으로 추증하는 것에 대해 사계의 의견을 구했는데, 사계는 절대반대하였고 결국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굳은 예학자로서의 절개는 조선 성리학의 귀감이 되었다.
<동국18현>에 추앙되어 문묘에 배향된다 함은 본인과 가족은 물론 자자손손 긍지가 되며 그 이상의 영광이 없을 지경이다. 온백성이 장소와 때를 넘어서 영원히 추앙하는 성현의 위치에 오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조에서 한 가문에서 두 사람이 문묘에 배향된 사람은 김장생. 김집과 은진 송씨 가문의 송시열과 송준길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부자가 같이 배향된 것은 김장생. 김집 뿐이다.더군다나 송시열과 송준길은 사계(김장생)의 문하생들이다.
광산김씨는 조선조에 7명의 대제학을 배출하였는데, 전부 사계의 후손들이다. 조선조 500년 역사에 대제학을 7명 이상 배출한 가문은 광김 이외에 전주 이씨와 연안 이씨가 있을 뿐이다.
가문의 영광을 다룰 때 영상의 배출보다도 대제학의 배출이 어느면 더욱 돋보이는 수가 있는데, 대제학이란 정치권력보다는 예와 학문을 다루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문묘에 배향된 성현 18위는 다음과 같다. (반 시계방향으로 좌편부터)
최치원, 정몽주, 정여창, 이언적, 김인후, 성혼, 조헌, 송시열, 박세채,(좌편)
송준길, 김집, 김장생, 이이, 이황, 조광조, 김굉필, 안향, 설총(우편)
광김 가문에서 특출한 또 한 사람의 인물은 서포 김만중이다. 그는 국문학을 고루한 사대주의에 입각한 한문문학에 버금가게 끌어올린 국문학의 비조이다. 서포는 <구운몽>과 <사씨남정기><서포만필>을 남겼는데, 하나같이 언문으로 쓰여진 국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어서 놀라울 정도이다. 영어공용어 주장이 판을 치는 이런 세상에 우리는 서포의 주장에 귀를 기우려볼만하지 않을까. <서포만필>에서 서포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어찌 중국의 글과 말만이 능하다고 하겠는가. 지금 우리 나라의 시문을 보면 스스로의 말을 버리고 다른 나라 말을 배우고 있다. 가령 그것이 십분 비슷하다고 하더라도 이는 오직 앵무새가 흉내내는 것과 다름이 없다. 거리의 아낙이나 초동이 서로 흥얼거리는 노래가 비록 천하고 속되다 하더라도 참됨과 거짓을 논할진대 사대부들의 이른바 한문으로 지어진 시부 따위는 도저히 함께할 바가 못되는 것이다..."
서포는 남해에 유배중 적소에서 죽었으며, 그의 작품은 증손 김춘택에 의해 한문으로 번역되었다.
임진왜란의 명장 김덕령장군도 광김이다. 그는 이몽학의 난을 평정하다가 내통했다는 무고로 장사되었으니, 참으로 역사는 알다가 모를 일이다.
의성김씨는 조선조 500년간, 96명의 문과급제자를 내었는데, 이 숫자는 경주 김씨, 광산 김씨, 연안김씨, 김해 김씨, 청풍김씨 다음으로 많은 숮자이다.
"네에? 무신 소린교?"
"영천에 물이 없다케서 임하댐 물을 파이프를 묻어 땡기 쓰고 있습니더. 영천 사람들 임하댐물 없으마 다들 목말라 죽십니데이."
"와 저기이 우리 물이로구나. 내(나의) 물이로구나..."
" 내 물...내 물... 내 물..."
다들 한바탕 웃어댔다.
일행중 시종 별 말이 없이 묵묵히 걷기만 하는 연세대학교 신명순 교수는 평산 신씨이다.최근 이 학교의 부총장을 지냈다고 한다. 평산 신씨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은 역시 고려건국의 공로자 신숭겸 장군을 들 수 있다. 현대사의 큰 인물인 해공 신익히가 평산신씨이다.
또 다른 무언의 인물은 인하대학교의 강관원 교수를 들 수 있다. 진주 강씨로, 강감찬 장군의 성씨이다. 진주 강씨는 진주지방의 대성으로, 강씨 하씨 정씨(영일 참의공파)가 이 지방 3대 토성이다.
진주강씨는 원래가 조선족 최고의 무골성씨이다. 수나라 양제의 30만 대군을 요동 임류관에서 전멸시킨 강의식장군이 진주강씨이고, 해동의 제일 명장 감강찬 장군 역시 진주 강씨이다. 그러나 나의 이런 선입견에는 걸만지 않게 강 교수는 너무나 말이 없고 얌전하시기만 했다. 하기야 조선초의 명문장 강희안 강희맹 형제가 역시 진주 강씨이고 보면, 점잖고 사색하는 피의 흐름도 있는 모양이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날씨가 청명할까. 나는 웬지 울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나의 이런 마음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일행에서 이탈하여 그 아득한 옛날, 적어도 50년도 더 전에 전쟁의 포화 속에서 떠나버린 저기 자천으로 시간여행을 해보고 싶었지만, 아내를 데리고 온 터라 그나마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그 후 아버님은 신녕지서 금호지서를 두루 섭렵하시고, 고향인 영주로 올라가셨다가, 이어 김천으로 가시고, 마지막으로 대구로 가셨다. 나는 그때마다 국민학교를 전학다녀야만 했다. 내가 그 길고 긴 국민학교 전학 행각을 마감한 것은 대구 삼덕국민학교에서 였다.
영천 읍내에서 임고서원이 있는 임고면 양항리까지는 뻐스로 3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비행기를 타고 수평의 삶을 주로 산 나는 내 삶의 깊이를 헤어려볼 수 있는 역사의 현장 즉 지나가 버린 세월의 거대한 더미 앞 즉 축적되어진 수직의 삶 앞에 드디어 서게 된 것이다.
나는 사실 내가 포은 선생의 후손이라는 것 이외에는 내 존재의 깊이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지만 여기 영천 임고면에 포은 선생을 배향하는 서원이 있는 것도 처음 알았다.
용인 어디에 묘소가 있다는 말만 들었지 한번도 가본 적도 없었다.
변명을 할 자격이 없겠지만, 나의 서울 생활은 나의 조상들과 그리고 나의 혈족과 완전히 유리된 삶이다. 아직까지 내 동생들과 사촌들은 봉화와 대구 그리고 부산에 흩어져 살고 있다. 그런데다가 나 역시 연구와 강의 그리고 해외여행 소설 집필로 눈코뜰 새 없이 바쁘니 혈족이 거의 살고 있지 않는 고향 봉화를 찾을 기회란 거의 없다시피한 실정이다.
언젠가 <월간조선>에서 나의 고향이 봉화라 해서 기자와 사진기자와 함께 고향 봉화를 찾아갔으나, 사실 길을 잘 몰라 민망한 적이 있었다. 나는 고향 봉화군 상운면에서 산 적이 없었는데, 기자가 상운면 장터에서 막걸리 마시는 사진을 찍자고 하여 참으로 난감했었다.
봉화는 나의 고향이라기 보다 부모님의 고향이다. 아주 일찍이 여기를 떠나버렸던 것이다. 객지를 떠도는 아버지를 따라다니면서 성장했다.
연세 높으신 다른 회원들이 나의 이름을 불러대었다. 이분들은 벌써 내가 영일을 본관으로 하는 정씨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듯했다. 황재국교수가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교수, 분향하고 재배하시오!"
"포은은 우리 한민족의 충절의 표상같은 분이야. 고려 조선 양조에 떠받들리는 분은 포은뿐이야!"
"포은이 있어 점필재가 있고, 점필재가 있어야 회재가 있지. 회재 없는 퇴계가 있나! 퇴계없는 우암도 어렵고!"
한문의 대가들은 한마디씩 던지면서 고옥 높다란 벽면에 붙어 있는 한문 시가들을 읽고 있었다. 서원이란 본래 선현을 제사 지내는 사(祀)와 젊은이들을 교육하는 제(薺)의 기능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나는 구두를 벗고 위패 앞으로 올라갔다. 나는 지금 내가 올라가고 있는 데가 사우인지 제사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설마하니 지금 여기서 학생을 가르칠 턱이 없으니 아무래도 사우인 듯했다.
벌씩 김용직 교수가 사당으로 올라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용직 교수는 한시를 지어 읊조릴 정도의 한문 실력을 갖춘 분이다. 진정 변하지 않은 안동인의 면모를 그대로 간직한 학자가 있다면 아무래도 향천 김용직 선생이 아닌가 한다. 우리 두 사람은 분향하고 재배하였다. 아마도 영정이 걸려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작년말인가, 김경동선생과 김용직 선생이 학술원 회원으로 뽑혔다. 동연회라는 모임으로 봐서는 커다란 경사가 아닐 수 없었다.
아내가 재빠르게 재배하는 나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웬지 모르게 참으로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줄 떨어진 세파드처럼 황야를 마구 쏘다니다가 허기를 못이겨 옛주인의 집으로 다시 돌아온 기분같은 것을 나는 느꼈다.
그러나 나는 얼떨결에 재배를 하느라고 조금의 희사금도 올리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니 이것이 참으로 후회스럽다. 조상을 섬기는 혈족들의 수고를 위해서라도 한 십만원은 놓았어야 하지 않았을까. 생전처음 시조 조상 영정 앞에 선 놈이 빈손이었다니 역시 불충하기 짝이 없는 녀석이었다. 조상께서 나는 너같은 녀석을 후손으로 둔 적이 없다고 호령하실 것만 같다.
서원 측에서 내어놓는 <포은 정몽주 선생 사적집>을 한권 받았다. 나는 귀가 후 이 책을 정독하는데 일주일이 걸렸다. 참으로 많은 것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이 책 안에는 포은 선생의 영정 한 폭이 들어 있었는데, 동네 표구집에 갖다맡겼다.
내가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된 포은 선생에 대한 사항 중에서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것만 추려서 몇가지만 적어 보려 한다. 포은공의 진면목을 아는데 참고가 될까해서 이다.
포은은 무엇보다도 출중한 한문실력을 갖추었다. 누구도 흉내낼 수 없었다. 이것은 어떤 역사적 인물을 언급할 때 항용 하는 소리가 절대 아니다.
그는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3장으로 되어 있는 과거장에서 그는 3장 다 장원을 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리고 그가 명나라에 갔을 때 말이 통하지 않아 글을 지어 의사를 소통하였는데, 그가 쓰는 문장이 너무나 아름다워 도저히 중국의 학자들이 당해내지를 못하였다고 한다. 그야말로 진정 중국의 사서삼경을 제대로 해석하는 조선의 학자라고 칭송하였다.조선의 기라성같은 성리학자들이 자신들의 학문의 비조로 누구나 포은을 꼽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목은 이색, 퇴계 이황, 고봉 기대승, 사계 김장생, 하서 김인후, 서애 유성룡, 율곡 이이, 점필재 김종직등은 입을 모아 포은을 동방이학지조로 추승하고 있다. 선조 조의 명현이며 퇴계의 후학인 지산 조호익은 이런 말을 하였다.
"일찍이 듣자하니 주자의 사서집주가 우리 동방에 유행하였는데, 그 뜻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오직 포은 선생만이 그것을 정미하게 분석하여 해설하였다. 마침내 상국 운봉호의 호병문의 사서통이 전래되어 포은 선생의 논설이 모두 그와 부합되었다. 이에 비로소 당시의 사람들은 포은선생이 도학에 깊은 것에 탄복하였다."
포은은 성리학에 정통하였으므로 누구보다 부모에 효도하였다. 아버지 일성 부원군이 졸하였을 때 그는 여막을 짓고 3년 동안 시묘하였으며, 어머니 변한국부인이 졸하였을 때도 하루도 모자람이 없는 3년 시묘를 하였다. 그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원나라와 수백년간 교유한 관계로 당시 사회에서는 부모 탈상을 일년 혹은 100일에 하는 풍조가 유행하고 있었다. 그는 태산같은 심지로 부모의 묘를 도합 6년이나 지켰던 것이다. 사람들은 포은의 효도에 다들 혀를 내둘렀다.
그의 이런 효심은 결국 국가에 대한 충절로 승화하였다.
그리고 포은은 내직의 명신일 뿐만 아니라,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희대의 외교관이었다. 그는 중국을 두 번이나 왕래하여 두 나라간의 현안을 절묘하게 해결하였으며, 일본을 일년이나 체류하면서 역시 두 나라 간의 현안을 쉽게 해결하였다.
포은은 공민왕21(1372)년에 서장관으로 지밀직지사 홍사범을 따라 명나라를 다녀왔다. 명 태조가 촉나라를 멸한 것을 축하하기 위한 행차였다. 가을에 돌아오는 길에 바다 가운데 떠있는 허산에서 광풍을 만나 배가 뒤집히게 되었다. 정사 홍사범은 익사하고 다른 수십명의 사람들도 다 익사하였다. 오직 포은만 겨우 살아 무인도에 오르게 되었다. 마침 지나가는 중국 배가 있어서 구원을 요청한 바, 소식이 명나라 조정에 알려졌다. 명태조 주원장은 그 영특한 조선의 젊은 사신을 기억하고 즉시 구원배를 보냈다. 명나라 조정으로 입조한 포은은 이듬해까지 유하다가 후한 대접을 받고 귀국하였다.
명이 건국하였을 때 고려 조정에서는 양파로 갈라졌다. 명을 따르자는 파와 원을 그대로 섬기자는 파가 그것이다. 친원파로는 당시의 권신인 이인임이 있었다. 그는 적극적으로 친원정책을 주장하였다. 그래서 공민왕이 살해되고, 명의 사신이 피살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포은의 적극적인 주장으로 사신을 미리 보내 백배사과함으로써 전화를 막았다. 그러나 과거의 관계 유지를 원하는 원의 청을 들어주기를 단호히 거부하는 포은은 이들 친원파의 가시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한때 포은은 언양으로 귀양을 간 적도 있었다.
귀양에서 돌아온 포은은 일본으로 건너가(1377) 군자지도로써 그들을 교화하고 끝내는 스승으로 떠받들려 일년 이상 체류하면서 사서삼경을 강의하였으며, 귀국시에는 그들이 잡아가둔 먼저간 사신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일본에서 돌아온 포은은 드디어 정당문학에 올랐다. 그의 앞에 거칠 것이 없었다. 그러나 명과의 관계가 순조롭지 못했다. 계속해서 조정에 친원파가 가시지 않았는데다, 명 건국시 약조한 세공물을 제대로 보내지 않았다. 양마 5000필, 금 500근, 은 5만냥을 5년 동안 제대로 보내지 않았다고 해서 사죄하러 찾아온 사신 홍상재 김보생들을 볼기를 쳐서 명나라 빈촌으로 귀양을 보내 버린 것이다. 마침 명고황제의 생일을 맞아 성절을 축하하러 보내야 할 판인데 홍상재 경우가 있어서 누구든 가고자 하는 사람이 없었다. 상태가 홍상재 때보다 더욱 악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우왕이 밀직부사 진평중을 지명했으나, 진은 겁을 집어먹고 칭병하여 집에 칩거하면서 많은 노예와 전답을 실권자 임견미에게 주어 자신을 빼고 포은을 보낼 것을 간청하였다. 임견미의 의견을 들은 우왕은 포은을 지명하였다.
"경은 임무를 다할 수 있겠는가?"
"임금의 말이라면 불구덩이 속으로라도 들어가야 합니다. 어찌 소신이 거절을 하오리까! 다만 한가지 걱정이 있습니다."
"무슨 걱정인가?"
"개경에서 남경까지 팔천리인데 발해만에서 바람을 피하기 위해 10일은 보내야 함으로 최소한 90일은 걸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60일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걱정입니다."
"으음 어쩔 작정인가?"
"잠을 자지 않고 밤낮으로 걸어보겠나이다."
"으음...잘 해보게나!"
포은은 그길로 귀가도 하지 않고 길을 떠났다. 그는 말 위에서 잠을 자면서 길을 채촉한 결과 명태조 생일날 바로 새벽에 남경에 이르렀다. 축하문과 조공물을 받은 명의 고황제는 만족하여 조선 사신의 접견을 허락하였다. 포은을 보고서는
"아니 너는 전번에 고려국에서 왔던 그 젊은 사신이 아니더냐? 배가 파선해서 우리 조정에서 일년을 머물고 돌아가지 않았더냐!"
"그러하옵니다."
"그래 네가 고려국에서 우리 중국말을 할 줄 아는 유일한 대신이더냐?"
"그렇게 유창하지 못하옵니다."
"아니다 너는 중국말을 잘 하는구나. 너희 나라가 우리에게 지은 죄가 있어서 사은사절을 보내고자 했으나 응하는 대신이 없어서 미루고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래 네가 왔느냐?"
"네 그러하옵니다."
"60일만에 왔다는데, 어떻게 그 짧은 시간에 올 수 있었느냐?"
"말 위에서 자고 걸으면서 잤나이다. 단 한번도 몸을 땅에 누이고 자지 않았나이다."
"으음 가상하다. 기특한지고. 그래 귀국시 원이 있느냐?"
"폐하 전번 사신으로 왔다가 상의 눈 밖에 나서 볼기를 맞고 귀양간 고려국 사신 홍상재를 풀어주옵소서."
"오냐, 괘심한 놈들이지만 네가 가상하니 풀어주겠다."
포은은 홍상재 등 귀양간 고려국 사신 전원을 데리고 귀국하였다.
포은의 효심과 나라와 임금에 대한 충절 그리고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사서삼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 그리고 개경에 5부학당을 짓고 지방에 향교를 지어 대대적으로 성리학을 보급하는 뛰어난 행정력 등 누구도 포은을 넘어 설 수 없었다.
게다가 그는 해박한 병사에 대한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 칼을 쓰고 활을 쏘는 병사는 아니었지만,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병략가였다.
공민양 13년에 이성계를 관북지방으로 호종하여 여진족장 삼선삼개를 화주에서 쳐서 궤멸시켰다. 이어 왜구를 격멸하기 위한 전라도 황산 전투에서 이성계의 조전장수로서 그가 승리를 이끄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이성계가 황산대첩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길에 자신의 관향인 전주에 들려 축하의 자리를 마련했을 때, 특별히 막하 장수 포은을 극찬하였으며 조금은 두려움까지 표하였다.
그는 진정 병장기를 다루지는 않았으나, 부하를 통솔하고 전략을 짜는데 어떤 장수보다도 훨씬 더 능숙하였다. 그 해박한 성리학자가 병사에 대해 이렇게 능하다니 역사에 드물게 보는 예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점이 결국 그의 몰락을 자초하는 결과가될 줄이야.
이방원이 막료 조영규를 시켜 포은을 선죽교에서 격살한 것도 포은이 병을 모을 수 있고 병을 아는 장수였기 때문이었다. 그를 따르는 병졸들이 많았다. 포은이 붓과 책만 아는 문사였다면 그런 살해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포은은 이성계와 이방원을 격살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자니 포은은 애오라지 글장이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신하로서 포은의 충절과 역량, 학자로서의 해박한 예지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폭은 고려조정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런 포은이 쇠망치에 얻어맞고 격살되었으니 그 충격은 어떠했겠는가.
포은과 같이 격살되지는 않았으나, 방원에 의해 철저하게 탄압을 받았던 인물로 배극렴이 있다. 배극렴은 고려조의 문하시중의 벼슬에서 공양왕을 밀어내고 이성계를 추대한 주동적인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는 태조의 신임을 얻어 개국후 좌시중의 벼슬을 받고 성산군에 봉해졌으나 세자 책봉시 방석을 밀어 방원에 눈밖에 나게 되었다. 흥해(포항 위쪽) 배씨의 중시조다. 오늘 여행에는 참석하지 않았으나, 서울대 교수를 지낸 배성동 교수의 선조이다. 배교수는 정년후 정신문화연구원의 후신인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이사장으로 있다.
사실 포은을 복권시킨 사람도 그를 죽인 이방원이었다. 그를 따르는 조선국의 선비와 일반 백생들을 도저히 저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앞다투어 포은을 서원과 사당에 자신들의 조상들과 함께 모시는 것이었다. 4대 조상 이외의 불천위조상으로 조매시키지않는 신으로 전 조선백성이 포은을 사당에 모신다는 사실을 안 이방원과 이성계는 포은을 자신들이 다시 모셔와야 나라가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를 사하고 영의정에 추증하고 조선 충신 일호에 봉했다.
이 광명한 민주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그 옛날 인간의 성정을 근본적으로 제한하는 성리학의 비조인 포은을 자신들의 정신적인 지주로 모시는 전국의 사당과 서원은 서른 개를 넘을 지경이다.
조선의 성리학의 대학자들에게 포은만큼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는 흉내 낼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영원히 뛰어넘을 수 없는 위대한 거봉이었다.
포은이 이런 거봉이었기 때문이었을까 그의 후손들은 사실 그 그늘에 가리어 오히려 왜소한 감을 준다. 조선 500년 사에 영상에 오른 영일정씨는 영조 조의 정호 한 사람뿐이다. 그리고 정철, 정유성, 정우량, 정휘량 등이 우의정 좌의정에 올랐다.
영일 정씨의 시조는 신라시대로 거슬러올라간다. 신라 초기 6부족의 하나인 진지부의 촌장 지백호에게 유리왕 9년에 정씨 성이 사성된 것이 이 성씨의 시초라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 후에 지백호의 자손에 대한 기록이 유실되어 그 계대를 헤아릴 길이 없다. 다만 그의 원손의 한 분인 종의가 도시조로 추앙되었고, 그의 후손 중에 영일현백에 호봉된 사람이 있어서, 영일을 본관으로 하는 영일정씨가 탄생되었다. 영일의 원마을의 이름을 따서 오천 정씨라고 부르기도 한다.
영일 정씨에는 두 파가 있는데, 고려 의종조에 지주사를 지낸 지주사공파가 있으며, 여기에서 포은이 배출되었다. 그리고 다른 한 파는 역시 고려조에 감무공을 지낸 감무공파가 있으며 여기서는 송강 정철이 배출되었다. 지주사 공파에는 또다시 8개파가 있는데, 필자는 바로 제 1파에 속하며, 거기에서 다시 참의공파에 속하는 22대 손이다. 지주사공파로는 32대에 속한다.
나의 노모 인동장씨는 현 구미시 인동동을 관향으로 하고 있다. 인동 장씨에는 장규 계보와 장금용 계보가 있는데, 인구수가 막상막하이다. 노모의 치매가 심하여 어머님이 어느 계보인지 확인할 수 없다. 외삼촌들이 계시나 지금 당장 연락이 닿지 않는다. 그러나 세보를 자세히 읽어보면, 장규계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 계보 12대 때 일단의 인동장씨들이 봉화로 이주하여 집성촌을 이루어 살았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어머니의 친정이 바로 봉화군 상운면이다. 인동 장씨 중에서 조선조에 상신(영, 좌, 우의정)에 오른 사람은 양 계보를 합해 단 한사람이다. 중중조에 영의정을 지낸 장순손이 그 사람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영일 정씨의 어른들은 자신들의 조상인 포은공을 위해 많은 사업을 벌리고 있었다. 우선 여기 임고서원을 대대적으로 확장하고 성역화사업을 추진하여왔다. 그래서 상당한 규모의 서원을 복구하고 확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안동의 도산서원에 비하면 아직 멀었다.
비교가 불가능한 일이지만, 포은과 퇴계를 억지로 비교해 보는 것도 무익하지는 않으리라.
포은은 우선 충절의 신하이고, 퇴계는 사직에의 봉사를 제한하고 자신의 서재로 들어간 학자이다. 두 분 사이에는 이런 절대적인 차이가 있다. 포은은 후세인의 감정과 가슴에 호소하지만 퇴계는 머리에 호소한다. 어느 편이 더 감동적일까 하는 것은 내가 할 말이 아니다. 퇴계를 흠모하여 그의 학문을 연구하는 후세인은 많아도, 그를 사당이나 서원에 배향하는 후손은 포은에 비하여 아주 적다.
퇴계는 절경인 안동 도산에 서원를 건립하였고, 안동이라는 도시가 가지는 유교적 회고적 분위기와 주변에 위치한 신비스런 강변마을인 하회 등과 메치되어 많은 국민들의 방문지로 떠올랐다. 이런 지리적인 이점을 퇴계와 도산서원은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나의 강변일까.
그러나 임고서원의 위치인 영천은, 영남의 웅도인 대구에 가려있고 천년 고도 경주에도 가려 있으며 국내 최대 공업도시인 울산에 또 가려 이중 삼종의 빗장을 지르고 있는 형편이다. 이런 지리적 특성을 가진 도시인 영천은 사실 어떤 특징을 뚜렷이 가진 도시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임고 서원을 통한 포은의 정신이 더욱 알려져 서구문화의 무분별한 유입으로 지금껏 흔들리는 국민의 정서를 바로잡는데 기여케 했으면 한다.
그리고 종중땅 백만평을 팔아 서울 동대문구에 포은 회관을 7층으로 건립하였다. 대대적인 임대사업을 벌리고, 그 수입으로 각종 제사와 사우를 보수 관리하고, 기념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그리고 용인 묘소를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용인시 모현면에 모셔진 포은의 유택은 지금은 성역화되었다. 모현면의 <현(賢)>은 포은을 말함은 물론이다.
훌륭한 조상의 사당을 처음 찾은 까마득한 후손의 죄스러움이 가슴을 쓸어왔다. 일행에 묻혀 서원을 떠나면서 나는 한 개인은 자신이 존재했던 시대에 동시대인들과의 관계를 가지면서 수평적으로 존재하기도 하지만, 아울러 사후 한 성씨의 계파 속으로 들어가 작은 매듭이 됨으로서 사후를 사는 수직적인 삶을 살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국 나는 영일정씨 피의 흐름의 한 매듭에 불과한 것이다. 몇 백년 몇 천년이 흐른 후에 영일 정씨 나의 후손들은 나를 어떤 매듭으로 볼 것인가.
포은의 임고서원을 나와서 우리 일행은 매곡마을로 들어갔다. 가까운 곳이라 도보로 갔다. 매곡 마을의 정씨들은 영일정씨이기는 하지만 포은 공파가 아니고, 포은공의 4대조인 정림(林)공에서 갈려져 나간 영일정씨 제2파이다. 그들은 영일정씨라는 사실 이외에는 포은과는 별무관계이다. 이분들을 영일정씨 선무랑공파라고 한다.
선무랑공은 임진왜란 때 여기 영천지방에서, 승승장구 쳐올라오는 왜군에게 최초로 패배의 쓰라림을 안긴 영천 의병장 정세아 장군의 조부되는 분이다.
정세아 장군의 5대손인 영조조의 명신 정중기 공이 형조참의를 끝으로 벼슬을 버리고 여기 고향인 영천 매곡마을로 낙향하여 성동하였다. 영일정씨 집성촌인 매곡마을에는 문화재중요민속자료 24호로 지정되어 있는 매산 종책이 있어 가볼만 하다. 그 특징은 입구자 형식으로 집이 지어져 있다는 사실인데, 이것은 안동지방의 전통가옥 형식이다.
과연 동행한 김원교수가 자신의 윗대 할머니 한 분이 이 집안으로 시집을 와서 바로 저기 저 안방의 주인노릇을 하였다고 말해 웃음 바다를 만들었다.
그것은 매산 정중기가 퇴계의 학풍을 존경해 자신의 학문의 원향을 도산으로 삼은 데서 비롯되었다. 우리는 유서깊은 매산의 종택 본채 대청 마루에 올라, 매산의 후손인 정동윤씨(11,12대 국회의원 역임) 부인이 내는 맛있는 과일과 감주를 마셨다. 매산 종택에서 계곡 쪽으로 한 3백미터쯤 올라가면 매곡정사가 있는데, 달리 산수정이라고도 한다. 높은 절벽에 지어 그 아래 풍경이 절경이다. 매산 선생이 글을 읽고 시상을 가다듬던 곳이다.
매산선생의 원래 고향은 옆 동네인 선원리인데, 선원리에 천연두가 번져 여기 매곡마을로 옮겨 왔다고 한다. 선원리에는 매산의 아버님인 함계 정석달 선생이 사용하던 함계정사가 남아 있다.
모든 영일정씨들은 포은을 모신다. 그러나 정작 포은 공파는 숫자가 많지 않다. 포은공의 5대 선조에서 파가 갈라졌기 때문이다. 더 올라가면 포은 공의 10대 조에서 벌써 갈라져 그들은 지주사공파와 감무공파로 흩어진다. 포은공의 피를 받은 순수 피흐름으로 보면 제1파 포은공파 이외에는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그러나 모든 영일정씨들이 포은공을 모시니, 그것은 그만큼 포은공의 공덕이 큼을 말함이니, 어찌 말릴 수 있겠는가. 어차피 영일정씨의 중시조, 즉 포은공의 10대 할아버지 지주사 습명의 자손들이 아닌가.
영일정씨의 제2파인 선무랑공파의 7대조가 매산 정중기 공이라는 말은 벌써 하였다. 매산이 살았던 영천 매곡마을의 매산 종택에는 물론 사당이 있다. 매산 종택은 매산 고택이 바뀐 것이다. 이 종택의 사당은 정침 우측에 있다. 이 집의 사당은 불천위 사당이다.
불천위사당이라 함은, 일반적으로 조선 양반가에서는 종손에서 볼 때 부, 증조, 고조, 선고조를 말하는 즉 4대까지만의 조상의 신위를 감실에 모시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조상 중에서 대 수에 관계없이 영원히 모시는 신위가 있을 경우, 그 신위를 불천위감실이라 한다. 그런 불천위신위가 없을 경우, 대부분 4대 조상을 넘어서면 신주를 땅에 묻어버린다. 이런 행사를 <조매>라고 한다.
그러므로 조선 선비들은 죽고 나서도 사당에서 대략 100년 세월 동안 조석으로 예를 받으면서 죽은 후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다.
매산은 선무랑공파에서는 불천위 신위이다. 어떤 성씨 중에서 하나의 피의 흐름으로 이룩되는 계파에서 불천위 신위가 있다는 것은 그 계파와 본인에게 무한한 영광이다.
그래서 불천위신위가 있으면, 예와 효를 목숨처럼 중시하는 조선사회에서는 새로운 계파를 형성해 나가는 것이 원칙이다. 그것은 너무나 영광스런 일이기 때문이다.
조선 양반들은 집안의 길흉대소사를 일일이 사당에 고유하며, 집을 방문하는 손으로 하여금 사당에 예를 올리도록 인도하며, 심의를 입고 조석으로 그리고 초하루와 보름에 알묘한다. 이 예는 살아있는 부모에게 하는 것과 똑같다.
그러므로 조선의 양반들은 4중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자신의 존재문제같은 것으로 괴로워할 겨를이 도무지 없었다. 그들의 정신 내면의 공간은 그만큼 넓었으며, 언제나 복수적이었고 포괄적이었다.
2003년 4월 11일 안동 출향 재경 교수 모임인 동연회의 경주 영천 지역 탐방은 대략 이렇게 끝이 났다. 일행을 태운 버스는 나의 어린 시절의 또 다른 성장지인 신녕을 거쳐, 군위로 해서 북상했다. 그러니까 나는 그야말로 열 살 남짓한 나이 때 보낸 여기 신녕을 근 50년 만에 비록 대형 버스의 차장으로나마 처음 보게 된 것이다. 영혼의 바닥을 휩쓸어가는 감회가 일었으나, 누구보고 무슨 말인들 단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동연회는 여행을 떠났다하면 안동지방이다. 그러나 이번 여행은 기이하게도 경주, 영천지방에 흩어져 있는 유림들의 유적을 훑어보는 것으로 짜여졌다. 그래서 회재(옥산서원)와노계(노계서원), 그리고 포은(임고서원)을 만나게 되었다. 조선유학에 대한 인식의 폭이 그만큼 넓어진 것이다. 나의 입장으로서는 원조상이신 포은할배에게 처음으로 예를 올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이 여행을 기획한 분들에게 감사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서울로 돌아온 후 며칠간 참으로 알 수 없는 흥분과 감격과 내면의 평화를 느꼈다. 나의 뿌리같은 것을 확인하였기 때문이었다. 그까짓 임고서원 하나를 보고서 그런 것은 아니다. 파가 아주 다른 정세아, 정중기의 고택을 보아서도 아니다.
나는 서울 집으로 돌아온 후 영일정씨포은공파종약원이라는 데를 찾아서 족보를 보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찾아온 김에 인터뷰를 하자고 하여 그 다음달 종보에 사진과 함께 게재되는 일이 벌어졌다. 결국 나는 내가 영일정씨 지주사공파의 32세 손이고, 그 제 일 파인 포은공의 22세 손이라는 것을 밝혀 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포은공파의 또 한 파인 참의공의 19세손이라는 것도 알아냈다.
포은공은 종성 종본 두 아드님 두셨고, 종성은 <보>라는 아들을 두셨다. 보는 윤정, 윤화, 윤관의 세 아드님을 두셨는데, 바로 셋째 아드님이신 윤관 선조가 나의 파조가 되시는 분이다. 바로 영일정씨 참의공파의 시조이시다.
포은공이 이방원이 보낸 자객 조영규와 고여배의 철퇴를 맞고 비명에 가셨을 때, 맏아드님종성은 춘추 19세였다. 어떤 관직도 거절하고 와신상담 비통한 세월을 보냈다. 태종원년에 포은공이 복권되고 영의정에 추증되어 다소 울분이 풀렸으나 맏아드님은 결코 이씨 사직에는 나가지 않았다. 2품직인 지사에 제수되었으나 거절하여 결국 하옥되는 수난을 겪였다. 그러나 세종 때 포은공이 충신 서열 제 일위에 오르자, 그제서야 벼슬에 나가, 64세의 노경에 철원 부사를 받아 떠났고 이어 이조 참의로 승차하였고, 69세의 나이가 되어 노령을 핑계하고 사직을 주장하였으나 세종은 윤허하지 않고 첨지중추원사로 삼았다. 오직 선고 포은공의 문집 꾸미기에 여생을 바쳤다. 진산부원군 하륜과 예문관제학 변계량의 서문을 받았으며, 더욱 산고를 수집보강하여 포은공의 문인인 박신의 서문을 받았으며, 모인 유고를 세종에게 진납하였던 바, 그 내용의 뛰어남에 놀란 세종은 보문관 직제학 권채에게 편찬을 명하였다. 세종 21년(1439)에 포은문집이 드디어 처음으로 인출되었다.
동생 종본은 조선 사직에서 성균관사예에까지 오르긴 했으나, 선고의 참사가 있고 난 후 절대적으로 출사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형 종성과 함께, 선고 포은공이 조선 사직에 의해 충신서열 일등의 대우를 받게 되자 울분이 조금은 풀렸다. 64세의 노경으로 세종의 명소를 거절하지 못하고 곡산군수를 수락하셨다. 영일정씨 사예공파의 시조로서 수많은 명현을 배출하였다.
포은공의 장손인 보(설곡공)는 사마시에 올라 예안현감을 거쳐 사헌부감찰에 이르렀다. 설곡공의 예안 현감 제수는 영일정씨가 안동과 무관하지 않다는 일례가 될 것이다. 성격이 강직하고 사직에 충성심이 강해 감히 소인들이 범접하지 못했다. 세조가 사육신을 죽이려 하는 때, 설곡공은 권신 한명회와는 가까운 친구였고, 또 서매가 명회의 애첩이었다. 그래서 그는 성삼문과 박팽년을 죽이면 상이 하늘의 죄를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명회가 이 말을 상에게 고하였고, 세조는 설곡공을 환형(찢어죽이는 형벌)을 가할 것을 명했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이 이 자가 바로 포은공의 장손이라고 고하자, 세조는 놀라 공을 영일에 유배케 했다.
얼마나 조선의 제왕들이 태조 이성계가 충신 서열 일위로 모신 포은공의 위세에 눌려있었나 하는 점을 깨달을 수 있다. 설곡공은 적소에서 죽으니, 가족은 적몰되고 전답은 저폐되어 거대학자가 일조에 무로 돌아갔다. 조부의 피를 받아 강직하고 인정에 강한 그의 기질은 결국 자신의 삶을 황폐케 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설곡공은 3남 6녀를 두었는데, 삼남은 위에서 말하였다. 4녀가 판서를 지낸 여주 사람 이계손에게 시집갔다.
설곡공의 3자 윤관 공은 계유 사마 양시에 급제하였으며, 향년 76세로 졸하였다. 사후 통정대부. 이조참의가 귀증되었다. 경남 산청군 신안면 청현리 문태촌 비느리에 위치한 남간제가 묘재이다.
참고삼아 포은공부터 필자에 이르는 선조들을 세대해보고자 한다. 간단한 벼슬과 형제관계를 부기하겠다.
포은(1대, 증 영의정) - 종성(2대, 첨지중주원사, 장남) - 보(3대,사헌부감찰,장남) - 윤관(4대, 귀증 형조참의 통정대부, 3남) - 견(5대, 귀증 호조참의 가선대부, 장남) - 세좌(6대, 사용, 2남)- 함(7대, 능참봉,장남)- 응린(8대, 장사랑, 증 가선대부, 장남) - 준(9대, 5남) - 연수(10대, 장남) - 승리(11대, 장남) - 홍엽(12대, 가선대부, 용양위 부호군, 배 정부인, 장남) - 도원(13대, 장남) - 윤제(14대, 가선대부, 배 정부인, 장남) - 대채(15대, 증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 배 증 숙부인, 장남) - 환의(16대, 통정대부, 배 숙부인 부 가선대부 증조 가선대부, 2남 ) - 복기(17대, 통정대부, 배 숙부인 부 선대 조 통정대부, 2남) - 철용(18, 장남) - 탁영(19대, 배 청송심씨 부 가선대부 조 통정대부 증조 선대, 2남) - 치화(20대, 장남) - 연철(21, 2남) - 소성(22대, 교수, 배 풍산김씨, 장남) - 태린(23대, 장남) - 재린(23대, 차남)
이번 여행은 나에게 내 존재의 중첩성이랄까, 뿌리박힘이랄까 하는 감각을 나에게 심어주었다. 외국문학도로서 소설을 쓰는 사람으로서 언제나 내 존재가 우연성이나 그 가벼움의 감각에 빠져 늘상 허덕거리면서 살아왔다. 서양의 실존주의니 하는 것에 내가 매달린 이유도 이런 이유에서 였다. 그러나 나는 이 나이가 되어서 이런 족보 속에서 누적되어진 내 앞선 피의 흐름의 매듭을 분명히 느끼게 되었다. 내 존재 역시 이 작은 매듭의 하나에 불과할 뿐이다. 나는 숙연해지는 마음을 느끼면서 다시 한번 컴퓨터 앞에 앉는다. 나는 과연 이 나이에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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