毛允淑 [1909~1990]
나는 廣州 山谷을 헤매다가 문득 혼자 죽어 넘어진 國軍을 만났다
산 옆 외따른 골짜기에 혼자 누워있는 국군을 본다. 아무 말, 아무 움직임 없이 하늘을 향해 눈을 감은 국군을 본다. 누른 유니폼 햇빛에 반짝이는 어깨의 표지 그대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소위였고나 가슴에선 아직도 더운 피가 뿜어 나온다. 장미 냄새보다 더 짙은 피의 향기여! 엎드려 그 젊은 주검을 통곡하며 나는 듣노라! 그대가 주고 간 마지막 말을. 나는 죽었노라, 스물 다섯 젊은 나이에 대한민국의 아들로 나는 숨을 마치었노라. 질식하는 구름과 바람이 미쳐 날뛰는 조국의 산맥을 지키다가 드디어 드디어 나는 숨지었노라. 내 손에는 범치 못할 총자루, 머리엔 깨지지 않을 철모가 씌워져 원수와 싸우기에 한 번도 비겁하지 않았노라. 그보다도 내 핏속엔 더 강한 대한의 혼이 소리쳐 나는 달리었노라. 산과 골짜기, 무덤 위와 가시숲을 이순신같이, 나폴레옹같이, 시이저같이 조국의 위험을 막기위해 밤낮으로 앞으로 앞으로 진격 진격! 원수를 밀어가며 싸웠노라. 나는 더 가고 싶었노라. 저 원수의 하늘까지 밀어서 밀어서 폭풍우 같이 모스크바 크레믈린 탑까지 밀어가고 싶었노라. 내게는 어머니, 아버지, 귀여운 동생들도 있노라. 어여삐 사랑하는 소녀도 있었노라. 내 청춘은 봉오리지어 가까운 내 사람들과 함께 이 땅에 피어 살고 싶었었나니 아름다운 저 하늘에 무수히 나르는 내 나라의 새들과 함께 나는 자라고 노래하고 싶었노라. 나는 그래서 더 용감히 싸웠노라. 그러다가 죽었노라. 아무도 나의 주검을 아는 이는 없으리라. 그러나, 나의 조국, 나의 사랑이여! 숨지어 넘어진 내 얼굴의 땀 방울을 지나가는 미풍이 이처럼 다정하게 씻어주고 저 하늘의 푸른 별들이 밤새 내 외롬을 위안해주지 않는가? 나는 조국의 군복을 입은 채 골짜기 풀숲에 유쾌히 쉬노라. 이제 나는 잠에 피곤한 몸을 쉬이고 저 하늘에 나르는 바람을 마시게 되었노라. 나는 자랑스런 내 어머니 조국을 위해 싸웠고 내 조국을 위해 또한 영광스리 숨지었나니 여기 내 몸 누운 곳 이름 모를 골짜기에 밤 이슬 내리는 풀숲에 나는 아무도 모르게 우는 나이팅게일의 영원한 짝이 되었노라. 바람이여! 저 이름 모를 새들이여! 그대들이 지나는 어느 길 위에서나 고생하는 내 나라의 동포를 만나거든부디 일러 다오. 나를 위해 울지 말고 조국을 위해 울어 달라고. 저 가볍게 날으는 봄나라 새여 혹시 네가 날으는 어느 창가에서 내 사랑하는 소녀를 만나거든 나를 그리워 울지 말고 거룩한 조국을 위해 울어 달라 일러다고. 조국이여! 동포여! 내 사랑하는 소녀여! 나는 그대들의 행복을 위해 간다. 내가 못 이룬 소원, 물리치지 못한 원수. 나를 위해 내 청춘을 위해 물리쳐다오. 물러감은 비겁하다. 항복보다 노예보다 비겁하다. 둘어싼 군사가 다아 물러가도 대한민국 국군아! 너만은 이 땅에서 싸워야 이긴다. 이 땅에서 죽어야 산다. 한번 버린 조국은 다시 오지 않으리다. 다시 오지 않으리라. 보라! 폭풍이 온다. 대한민국이여! 이 원수의 운명을 파괴하라. 내 친구여! 그 억센 팔 다리. 그 붉은 단군의 피와 혼, 싸울 곳에 주저말고 죽을 곳에 죽어서 숨지려는 조국의 생명을 불러 일으켜라. 조국을 위해선 이 몸이 숨길 무덤도 내 시체를 담을 작은 관도 사양하노라. 오래지 않아 거친 바람이 내 몸을 쓸어가고 저 땅의 벌레들이 내 몸을 즐겨 뜯어가도 나는 즐거이 아들과 함께 벗이 되어 행복해질 조국을 기다리며 이 골짜기 내 나라 땅에 한 줌 흙이 되기 소원이노라.
[ 미군이 촬영한 6.25전쟁 당시의 사진들 ]
▲ 1950. 10. 22. 평양, 북한 주민의 학살 현장. 누가 그들을 죽였을까?
▲ 1950. 11. 2. 거리에 버려진 아이들이 트럭에 실려 고아원으로
가고 있다. 눈망울이 초롱한 아이는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 1950. 11. 11. 바지 저고리들의 포로들. 총이나 한 번 제대로 잡아보고 포로가 되었는지?
▲ 1950. 11. 13. 함흥 덕산광산, 482명을 생매장한 갱도에서
시신을 꺼내 늘어놓은 것을 한 아버지가 아들을 찾고 있다.
"제발 내 아들이 아니기를..."
▲ 1950. 11. 13. 지아비가 생매장된 갱도 어귀에서 오열하는 지어미.
"날라는 어찌 살라하고 가시리잇고"
▲ 1950. 8. 12. 북한군 포로.
▲ 1950. 8. 10. 폭격으로 불타는 마을
▲ 1950. 8. 10. 핫바지들을 인솔하는 미 해병대.
▲ 1950. 7. 29. 경북 영덕, 포화에 쫓기는 피난민.
▲ 1950. 7. 29. 경북 영덕, 남자는 등에 지고 여자는 머리에 이고
지향없이 떠나는 피난민 행렬.
▲ 1950. 7. 29. 경북 영덕, 논두렁에 머리를 처박고 죽은 북한군 병사
▲ 1950. 7. 29. "뜨거운 전우애" 한 병사가 부상당한 전우를 업어가고 있다
▲ 1950. 7. 29. 마을 소년들이 주먹밥을 만들어 군인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 1950. 7. 29. 야간전투후 주간 취침.
▲ 1950. 7. 29. 취침 후 병기 손질
▲ 1950. 8. 4. 피난민들의 보금자리 산동네 판자촌
▲ 1950. 8. 8. 누가 이 아이를 버리게 했을까?
▲ 1950. 8. 8. 다리 아래 피난민 움막
▲ 1950. 8. 9. 임시 포로수용소
▲ 1950. 8. 2. 금강철교
▲1950. 8. 3. 뙤약볕 속에 전선으로 가는 국군 행렬
▲ 1950. 8. 3. 한국전쟁 무렵의 부산항, 멀리 영도가 환히 보인다
▲ 1950. 7. 29. 경남 진주 부근에서 생포한 빨치산(?). 원문은 포로로 되어 있다.
▲ 1950. 12. 16. 흥남부두. 후퇴하려고 수송선을 기다리는 병사들
▲ 1950. 12. 18. 흥남에서 묵호(동해)로 후퇴한 후 수송선에서 내리는 병사들
▲ 1950. 12. 24. 유엔군 후퇴 후 텅 빈 흥남부두
▲ 1950. 12. 24. 유엔군 후퇴 후 불타는 흥남항
?1950. 12. 26. 전차도 후퇴대열에. 흥남항에서 출발해 부산항에 도착하고 있다
▲ 1950. 12. 27. 인천항에서 출발해 부산항에 도착한 피난민들
▲ 1950. 1. 3. 1·4 후퇴를 앞두고 불타고 있는 서울 시가지
▲ 1951. 1. 5. 1.4 후퇴 피난민 행렬
▲ 1951. 1. 5. 언 한강을 피난민들이 걸어서 건너고 있다
▲ 1951. 1.4. 한강나루터에서 건너야 할 강을 바라보는 피난민 아이들
▲ 1951. 1. 4. 한강 임시 부교
▲ 1950. 12. 29. 양평 , 생포된 포로들
▲ 1950. 11. 29. 최전방의 간호사들
▲ 1951. 1. 6. 수원역에서 남행열차를 기다리는 피난민들
▲ 1951. 1. 5. 한미 합작의 한국군 병사 장비. 신발, 겉옷 , 모자 :
한국제. 코트, 소총, 탄환 : 미제
▲ 1951. 1. 5.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고 미군 부대에 몰려온 한국의 노무자들
▲ 1951. 1. 4. 무개화차에 몰린 피난민들
▲ 1950. 12. 1. 부산 임시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를 등록하려고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 1951. 1. 16. 대구 근교 신병훈련소에서 신병들이 M1 소총
사격 교육을 받고 있다
▲ 1951. 1. 4. 대구 근교 신병훈련소에서 신병들이 PRI(사격술 예비훈련)을 받고 있다.
▲ 1950. 11. 5. 국군과 유엔군이 수복한 북한의 어느 지역(평산)에서
주민들이 지역 대표와 치안대장을 뽑고 있다. 그들 대표는 무슨
색깔의 완장을 찼을까?
▲ 1951. 1. 5. 서울. 꽁꽁 언 한강을 피난민들이 조심조심 건너 남하하고 있다.
▲ 1950. 9. 22. 전쟁에는 2등이 없다. 포로가 되는 순간부터 치욕이다.
미군들이 생포된 포로의 온 몸을 수색하고 있다.
▲ 1950. 9. 20. 미군이 인민군 포로들을 발가벗긴 채 수색하고 있다.
▲ 1950. 9. 17. 인천. 유엔군 인천상륙작전 후 함포사격 포화에 무너지고
그을린 인천시가지
▲ 1950. 9. 18. 인천에 상륙하기 위해 전함에서 병사들이 하선하고 있다.
▲ 1951. 5. 28. 38선 부근 6마일 남쪽 마을에서 탱크의 포화소리에
귀를 막는 소년들. 이들의 누더기 바지 차림이 그 무렵 소년들의
대표적 옷차림이다.
▲ 1950. 8. 18. 애송이 북한군 소년 포로를 미군 포로심문관이
취조하고 있다. 곁에는 통역 겸 여비서라고 표기돼 있다. 엄마
젖 떨어진 지 얼마나 되었을까?
▲ 1950. 8. 18. 임시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들의 신상명세서를 만들고 있다
▲ 1950. 8. 18. 포로수용소 전경
▲ 1950. 8. 18. 포로수용소 천막 안에서 밥을 먹고 있다
▲ 1950. 8. 18. 포로들이 줄을 서서 밥을 타고 있다
▲ 1950. 8. 11. 그해 여름 피난민들의 움막. 필자도 이런 곳에서 지냈던 기억이 난다.
▲ 1950. 8. 13. 잠깐의 휴식시간에 LMG(기관총) 병기 손질을 하고 있다
▲ 1950. 8. 13. 박격포 사격 훈련
▲ 1950. 8. 15. 피난민 행렬
▲ 1950. 8. 15. 창녕 남지철교. 국군의 최후 방어선으로 핏빛으로
강물이 물들 만큼 피아 엄청난 희생을 치렀던 격전의 현장이었다.
▲ 1950. 8. 24. 모정 무한, 젖을 먹이는 어머니
▲ 1950. 8. 23. 머리에 이고 등에 업고 앞에 붙들고... 고단한 피난 행렬.
▲ 1950. 8. 18. 낙동강 전선에서 쌕쌕들이 폭격을 가하고 있다.
▲ 1950. 8. 25. 폭격에 불타고 기총소사에 죽어가다ⓒ2004 NARA
▲ 1950. 8. 15. 마산 부근, 피난민들이 배를 기다리고 있다
▲ 1950. 8. 15. 전란으로 폐허가 된 마을
▲ 1950. 8. 22. 불을 뿜는 전함
▲ 쌕쌕이의 융단 폭격으로 초토가 된 경북 왜관
▲ 1951. 1. 2. 누가 이 여인을 모르시나요? 부산 임시 포로수용소에서
▲ 1950. 8. 포항 부근의 한 마을이 포화에 불타고 있다
▲ 1950.9. 15. 인천상륙작전을 함상에서 진두 지휘하는 맥아더 장군
▲ 1950. 9. 15. 인천 월미도로 상륙하는 함정들
▲ 1950. 9. 16. 인천에 상륙한 후 시가지를 활보하는 유엔군들
▲ 1950. 9. 16. 인천부두로 상륙하는 맥아더 장군
▲ 1950. 9. 16. 인천시가지에서 생포한 북한군들
▲ 1950. 9. 16. 월미도에 나뒹구는 북한군 시신들
▲ 1950. 9. 15. 인천에서 생포한 포로들
▲ 1950. 9. 17. 서울 진격 작전
▲ 1950. 9. 23. 서울 탈환을 눈앞에 둔 노량진에서 바라본 끊어진 한강 철교
▲ 1950. 9. 25. 한강 도하 작전
▲ 1950. 9. 29. 미군 전차가 서울 시내 중심가로 들어오고 있다.
▲ 1950. 9. 27. 경인가도에서 국군 수복을 환영하는 흰옷 입은 사람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북한군이 내려왔을 때는 또 다른 깃발을 흔들어야
했던 불쌍한 백성들
▲ 1950. 10. 1. 서울 시청 일대
▲ 1950. 10. 1. 소공동 일대
▲ 1950. 10. 1. 남대문에서 바라본 서울역
▲ 1950. 10. 1. 반도호텔(지금의 롯데호텔)에서 바라본 서울 시가지, 멀리 중앙청이 보인다.
▲ 1950. 10. 1. 반도호텔에서 바라본 을지로
▲ 1950. 9. 30. 서울의 아침, 폐허가 된 시가지에 사람들이 부산하게 오가고 있다
▲ 1950. 9. 29. 서울 탈환 환영대회 직전의 중앙청 홀, 이승만 대통령 내외와 맥아더 장군
▲ 1950. 9. 29. 유엔 깃발로 펄럭이는 중앙청 광장, 서울 탈환 환영대회가
끝난 직후 바로 옆 건물이 불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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