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사랑한다는것" 육영수를 기억하다
<그리운 나라, 박정희>추모일마다 모여드는 한센인, 시각장애인, 꼬부랑 할머니, 할아버지의 사연들
김인만 작가 (2009.08.15 09:06:49)
외롭고 아프고 힘겨운 사람들
-하루 종일 머리를 채우는 것. 그것은 어머니가 안 계시다는 것이다. (1974년 11월 27일)
-지금 나의 가장 큰 의무, 그것은 아버지로 하여금, 그리고 국민으로 하여금 아버지는 외롭지 않으시다는 것을 보여드리는 것이다. 소탈한 생활, 한 인간으로서의 나의 꿈, 이 모든 것을 집어 던지기로 했다. 이왕 공인으로 나서지 않으면 안될 운명이라면 적극적으로 나서기로. (1974년 11월 10일)
박근혜가 어머니를 여의고 쓴 일기의 대목이다. (박근혜 지음 <고난을 벗삼아 진실을 등대삼아>)
당시 그는 어머니가 없는 가족의 분위기를 ‘공황상태’였다고 술회했다.
그러나 그 무렵부터 부쩍 많은 사람들 앞에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한 박근혜의 표정에서는 아픔이나 쓸쓸함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어머니를 대신해 외롭고 아프고 힘겨운 민생의 그늘을 그는 밝은 웃음으로 찾아갔고, 그 자신의 아픔은 가슴속 깊이 갈무리해 두어야 했다.
그해 추석 때 전북 군산의 일맥영아원에 육영수 여사를 대신한 박근혜의 추석선물이 전달됐다. 육 여사가 있던 자리는 박근혜로 갈음되어 10월에는 남산에 있던 어린이회관을 성동구 능동 어린이대공원으로 옮겨 짓기로 한 기공식이 있었고, 소아마비 청소년들을 위한 정립회관 준공식이 열렸으며, 또 낙도 어린이들이 청와대의 초대를 받아 갔다. 이어서 12월, 박근혜의 행보는 영등포 원호병원과 척추장애 의용용사촌, 동대문근로자합숙소와 시립갱생원, 강원도 원주의 음성나환자촌과 맹인 집단촌 등으로 어머니가 가던 길을 따라갔다.
언론은 육영수 여사를 대신해 퍼스트레이디 생활을 시작한 20대 초반의 그를 ‘박근혜양’이라고 호칭했다. 그는 자신을 ‘젊은날의 추억이 없는 애어른’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그 잃어버린 젊음의 시공을 대신 채운 것이 있다면 어머니 육영수의 ‘사람 사랑’ 오직 그것일 것이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
육 여사와 아무 인연이 없는 필자의 블로그에 2006년 7월 쪽지가 날아왔었다.
―고 육영수 여사의 도움으로 미국 유학을 갔었는데 박근혜에게 감사함을 표현하고 싶습니다. 메일 주소를 알아봐줄 수 있습니까? 내 전화는 011-773-××××입니다. 부탁합니다.
2007년 7월에는 한나라당 대선 예비후보 인천합동연설회장 정문 앞에서 육영수 여사 추모시가 적힌 족자를 갖고 나온 사람을 만난 적도 있다.
서울에서 자영업을 한다는 박홍표 씨다. 그는 1975년 육 여사 1주기를 맞아 덕수궁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추모사진전에 그 추모시가 전시되었으며 그 인연으로 청와대 제2별관에 족자로 걸려 있던 것을 처음 공개하는 것이라고 했다.
‘어진 땅에 태어나사’로 시작하는 4.4율조의 20행 추모시는 뒷부분을 이렇게 마무리하고 있다.
살아 생전 감춘 웃음
한번 웃어 꽃 피우고
두번 웃어 행복하사
만만년을 살으시다
필자는 그 시를 받아 적은 수첩을 펴볼 때마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를 곱씹어보게 된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 아마도 그것은 잠 못 드는 밤 머리맡에 환한 웃음으로 다가오는 고즈넉한 달빛 같은 것이리라. ‘만만년을 살으시다’에서 연상되는 한량없는 그리움의 너울처럼, 뭇사람의 인생 행로에 이슬처럼 또는 눈물처럼 초롱초롱 아롱지는 초롱꽃 같고, 무수한 인생과 인생을 넘고 넘어 아득하고 가이없는 시공 속에서 영원히 소멸되지 않고 반짝이는 붙박이별 같은 그것이 참사랑이리라.
필자에게 쪽지를 보낸 그 사람은 무심한 세월, 팍팍한 세상에 잊어도 그만, 모른 체하고 살아도 그만일 터인데 보은(報恩)의 진심을 고백하고 있다.
그는 아마도 어려운 형편에 미국 유학이라는 행운을 얻었겠지만, 절망의 밑바닥에서, 아득한 벼랑의 끝에서 육 여사를 만난 사람들이 많다. 육 여사를 잊지 못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난날의 눈물과 고통의 인연으로 맺어져 있다.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사람들의 마지막 희망
예나 지금이나 가난과 난치병을 함께 갖고 있는 삶, 불구의 몸으로 세상 풍파에 부대끼는 굽이굽이 구곡간장이 녹는 사연과 절망의 삶들은 무수히 많다.
대전에서의 일이다.
육 여사가 온다는 소식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박정희 후보의 유세가 벌어진 것인데(1971년 4월), 선거 유세보다 육 여사에 주목하는 눈길들이 따로 있었다.
유세가 끝나고 박정희 후보가 승용차를 세워둔 유세장 뒷문으로 먼저 나오고, 그 뒤에 두걸음쯤 떨어져 흰 운갑사의 수수한 한복을 차려입은 육영수 여사의 모습이 나타나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 중에 박정희 후보 승용차 앞에서 기다리던 한 젊은 여성이 육 여사의 눈에 띄었다.
그 여성이 인사를 하자 육 여사는 놀랍고 반가워 얼른 다가가 얼싸안았다.
물론, 아는 사람이었다. 장항에 살고 있는 전명희(당시 22세)라는 여성이었다.
육 여사가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그녀가 17세였던 1967년.
그녀는 어려서 앓은 소아마비로 양쪽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었다. 수술이라도 해보면 원이 없겠건만 엄두도 못낼 형편이라, 암울한 청춘에 한 줄기 희망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육 여사가 군산에 온다는 소식이 들렸다. 어려운 사람들을 돌봐주는 분이기에 그녀는 어머니를 따라 그저 지푸라기라도 잡아 보려는 심정에 군산으로 건너왔다.
육 여사는 먼저 전주에 들러 전라북도 여성회관 기공식에 참석을 한 뒤 군산으로 와서 파월장병의 가족들 중에서 가장 어렵게 사는 사람의 집을 찾아가 위로했다.
이때 육 여사는 몰려든 군중 틈에서 중증 장애의 그녀를 발견했다. 해맑은 얼굴의 예쁜 소녀였다.
“다리만 고칠 수 있다면…….”
육 여사는 그녀의 손을 잡아 용기를 잃지 말도록 격려했고, 고개 숙인 그녀 얼굴에선 하염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육 여사는 상경하자마자 국립의료원에 교섭을 하고 그녀를 올라오도록 했다.
마침내 수술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에 그녀의 부모는 이제 죽어도 한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그보다 더 꿈만 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녀는 두 차례 수술을 받아도 정상적 보행이 어려워 보이는 중증 장애였는데 한번의 수술이 끝나자 거짓말처럼 걸을 수가 있게 된 것이었다.
그후 4년이 흘러 대전에서 만난 그녀는 보랏빛 원피스 차림의 아리따운 여성으로 변해 있었다. 육 여사가 대전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감사의 인사를 하러 아버지와 함께 유세장 뒷문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늘씬한 아가씨인 줄 몰랐네. 정말 아름답구나.”
육 여사는 그녀의 몸을 아래위로 연신 훑어보며 감탄해 마지않았다.
그녀의 사연을 알게 된 사람들이 더욱 육 여사 앞으로 몰려들어 유세장 뒷문 앞이 매우 혼잡했다. 육 여사와 동행했던 한 여류시인은 인파에 부대껴 손을 다치고 안경알이 깨지는 수난을 겪으면서도 대통령 부인과 그녀의 재회를 보며 눈시울이 뜨겁고 가슴 벅찬 순간이었다고 술회했다. (1971년 4월12일 주간여성)
육 여사의 소아마비 친조카들
지난날에는 한센씨병 환자(나환자)들이 사람 취급을 못받고, 집안에 장애인이 있으면 숨기는 것이 예사였다. 난치병이나 장애도 서러운데 그보다는 사람들의 손가락질이 두려워서였다. 세태가 그러했다.
필자는 육영수 여사의 집안에 장애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불과 몇년 전에 언론보도를 통해 알고 놀랐었다. (한겨레21 2005년 2월)
1965년 청와대에서 소아마비 어린이들을 초청해서 지체장애인단체 사람들이 갔더니, 육 여사가 “우리 집안에도 소아마비를 앓은 친조카가 3명이 있다”고 말하더라는 것이었다.
그때 육 여사가 건네준 자금으로 국내 최초의 장애인 재활ㆍ복지시설인 정립회관 터가 마련되고, 육 여사는 그후로도 건립기금을 모아주었다. 그런데 육 여사가 서거하는 바람에 정립회관이 공사 중단 위기에 처하자, 이를 알게 된 박 대통령이 당시 공식적인 ‘하사금’으로 최대 규모인 2억원을 지원했다.
1975년 10월 정립회관 개관식에는 육 여사 대신 박근혜가 참석했고, 박 대통령은 정립회관의 현판 글씨를 직접 썼다.
당시의 관계자들은 청와대의 전폭적인 지원이 없었더라면 정립회관 건립은 불가능했고, 그것은 육 여사의 장애인에 대한 각별한 관심과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집권 초기인 1962년 11월, 당시 최고회의 의장이자 대통령 권한대행의 자격으로 전 미국 대통령 부인 엘리너 루즈벨트 여사의 서거에 국민과 정부를 대표하여 조의를 표하는 전문을 보낸 적이 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미국 역사상 유일한 4선 대통령이다. 세계제2차대전 중 일본의 항복과 한국의 독립을 표명한 카이로회담에서 루즈벨트가 영국 처칠, 중국 장졔스와 함께 앉아 있는 모습은 우리에게도 낯익은 역사 장면이다.
루즈벨트가 서 있는 모습의 사진은 없다. 루즈벨트는 지체장애인이었다. 처칠과 장졔스는 일어설 수가 없는 루즈벨트를 위해 앉아서 포즈를 취했던 것으로 보인다.
최장기 집권을 한 루즈벨트는 개인적인 지체장애와 대공황의 위기, 세계대전이라는 시대적 악재를 극복하고 뉴딜 정책을 성공시켜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다.
이러한 루즈벨트의 성공은 부인 엘리너 루스벨트의 내조가 크게 작용한 결과임을 미국인들은 잘 알고 있다. 그녀는 남편이 한창 때인 39세의 나이에 다리를 못쓰게 되자, 용기를 잃지 않도록 정신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항상 낙관적인 사고방식과 밝은 표정으로 주변을 즐겁게 했다.
오늘날 미국인들은 엘리너 루즈벨트를 가장 훌륭한 퍼스트레이디로 꼽고 있다.
엘리너 루즈벨트나 육영수 여사에 대한 뭇사람의 존경은 ‘역경’에서 우러나오고 있다.
사랑의 손길이 구석구석의 그늘을 다 지울 수는 없어도
육 여사가 생전에 얼마나 많은 불우 이웃들을 만났는지는 자세히 알 길이 없다.
박정희 대통령도 부인 묘소에 찾아오는 시각장애인, 지체장애 소년, 음성 나환자, 그리고 꼬부랑 시골 할머니와, 갓 쓰고 수염 기른 할아버지들을 보면서 “저 많은 사람들을 언제 만나고 다녔는지 모르겠다”며 부인의 생전 행적을 더듬을 뿐이었다.
육 여사 서거후, 박근혜는 어머니의 조문 편지가 너무 많이 와 제대로 답장을 못했다고 말했다. 대부분 서민층에서 보내온 편지였고 그중에서도 7할이 부녀자들이었다고 한다. 조문 편지를 보내온 사람들 중에는 고인을 생전에 한번도 본 일이 없는 사람들도 많이 있고, 또 편지를 읽노라면 “그 사람이 이런 일도 했나?”하고 몰랐던 일을 새삼 깨닫곤 한다고 박 대통령은 말했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세태는 무심히 메말라가는데, 왜 사람들은 육 여사의 영상을 자꾸만 찾아내려 하는 것일까. 대체 인간 육영수는 사람들 가슴에 어떤 영상으로 그려져 있는 것일까.
육 여사는 최후의 구원이었다. 세상이 너무 어둡고 사방이 꽉 막혀 도저히 헤어날 길이 없을 때 마지막으로 구원을 청할 수 있는 사람이 육 여사였다. 사람들은 그렇게 믿었다. 유일한 사람이라는 믿음이 강했다.
육 여사의 손길이 세상 구석구석의 그늘을 다 지울 수는 없는 일이었지만, 사람들은 눈물과 불행을 어깨동무하고 험한 세상 굽이길을 함께 넘어가는 육 여사를 보면서 힘과 용기를 얻었다.
“좌절하지 말고 굳세게 살아야지.”
입술을 깨무는 모진 결심에는 뜨거운 사랑이 있고, 가슴이 녹아 흐르는 눈물이 있고, 바위처럼 굳은 믿음이 있었다.
오늘 2009년 8월 15일은 육영수 여사의 35주기가 되는 날이다.
달빛 밟고 머나먼 길 오시리
두 손 합쳐 세 번 절하면 돌아오시리
어머닌 우시어
밤내 우시어
하이얀 박꽃 속에 이슬이 두어 방울. (이용악 ‘달 있는 제사’)
황량한 세상에 이런 시를 만날 수 있음은 큰 위안이고 행복이다.
-하루 종일 머리를 채우는 것. 그것은 어머니가 안 계시다는 것이다. (1974년 11월 27일)
-지금 나의 가장 큰 의무, 그것은 아버지로 하여금, 그리고 국민으로 하여금 아버지는 외롭지 않으시다는 것을 보여드리는 것이다. 소탈한 생활, 한 인간으로서의 나의 꿈, 이 모든 것을 집어 던지기로 했다. 이왕 공인으로 나서지 않으면 안될 운명이라면 적극적으로 나서기로. (1974년 11월 10일)
박근혜가 어머니를 여의고 쓴 일기의 대목이다. (박근혜 지음 <고난을 벗삼아 진실을 등대삼아>)
당시 그는 어머니가 없는 가족의 분위기를 ‘공황상태’였다고 술회했다.
그러나 그 무렵부터 부쩍 많은 사람들 앞에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한 박근혜의 표정에서는 아픔이나 쓸쓸함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어머니를 대신해 외롭고 아프고 힘겨운 민생의 그늘을 그는 밝은 웃음으로 찾아갔고, 그 자신의 아픔은 가슴속 깊이 갈무리해 두어야 했다.
그해 추석 때 전북 군산의 일맥영아원에 육영수 여사를 대신한 박근혜의 추석선물이 전달됐다. 육 여사가 있던 자리는 박근혜로 갈음되어 10월에는 남산에 있던 어린이회관을 성동구 능동 어린이대공원으로 옮겨 짓기로 한 기공식이 있었고, 소아마비 청소년들을 위한 정립회관 준공식이 열렸으며, 또 낙도 어린이들이 청와대의 초대를 받아 갔다. 이어서 12월, 박근혜의 행보는 영등포 원호병원과 척추장애 의용용사촌, 동대문근로자합숙소와 시립갱생원, 강원도 원주의 음성나환자촌과 맹인 집단촌 등으로 어머니가 가던 길을 따라갔다.
언론은 육영수 여사를 대신해 퍼스트레이디 생활을 시작한 20대 초반의 그를 ‘박근혜양’이라고 호칭했다. 그는 자신을 ‘젊은날의 추억이 없는 애어른’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그 잃어버린 젊음의 시공을 대신 채운 것이 있다면 어머니 육영수의 ‘사람 사랑’ 오직 그것일 것이다.
◇아름다운글 1967년 6월22일 소아마비 중증 장애를 딛고 똑바로 서게된 전명희양을 만난 육여사 <국가기록원> |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
육 여사와 아무 인연이 없는 필자의 블로그에 2006년 7월 쪽지가 날아왔었다.
―고 육영수 여사의 도움으로 미국 유학을 갔었는데 박근혜에게 감사함을 표현하고 싶습니다. 메일 주소를 알아봐줄 수 있습니까? 내 전화는 011-773-××××입니다. 부탁합니다.
2007년 7월에는 한나라당 대선 예비후보 인천합동연설회장 정문 앞에서 육영수 여사 추모시가 적힌 족자를 갖고 나온 사람을 만난 적도 있다.
서울에서 자영업을 한다는 박홍표 씨다. 그는 1975년 육 여사 1주기를 맞아 덕수궁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추모사진전에 그 추모시가 전시되었으며 그 인연으로 청와대 제2별관에 족자로 걸려 있던 것을 처음 공개하는 것이라고 했다.
‘어진 땅에 태어나사’로 시작하는 4.4율조의 20행 추모시는 뒷부분을 이렇게 마무리하고 있다.
살아 생전 감춘 웃음
한번 웃어 꽃 피우고
두번 웃어 행복하사
만만년을 살으시다
필자는 그 시를 받아 적은 수첩을 펴볼 때마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를 곱씹어보게 된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 아마도 그것은 잠 못 드는 밤 머리맡에 환한 웃음으로 다가오는 고즈넉한 달빛 같은 것이리라. ‘만만년을 살으시다’에서 연상되는 한량없는 그리움의 너울처럼, 뭇사람의 인생 행로에 이슬처럼 또는 눈물처럼 초롱초롱 아롱지는 초롱꽃 같고, 무수한 인생과 인생을 넘고 넘어 아득하고 가이없는 시공 속에서 영원히 소멸되지 않고 반짝이는 붙박이별 같은 그것이 참사랑이리라.
필자에게 쪽지를 보낸 그 사람은 무심한 세월, 팍팍한 세상에 잊어도 그만, 모른 체하고 살아도 그만일 터인데 보은(報恩)의 진심을 고백하고 있다.
그는 아마도 어려운 형편에 미국 유학이라는 행운을 얻었겠지만, 절망의 밑바닥에서, 아득한 벼랑의 끝에서 육 여사를 만난 사람들이 많다. 육 여사를 잊지 못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난날의 눈물과 고통의 인연으로 맺어져 있다.
◇ 국내 최초의 장애인 재활. 복지시설인 정립회관은 육 여사 사후 1975년 10월 30일 박근혜씨가 참석한 가운데 준공식을 거행했다 <국가기록원> |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사람들의 마지막 희망
예나 지금이나 가난과 난치병을 함께 갖고 있는 삶, 불구의 몸으로 세상 풍파에 부대끼는 굽이굽이 구곡간장이 녹는 사연과 절망의 삶들은 무수히 많다.
대전에서의 일이다.
육 여사가 온다는 소식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박정희 후보의 유세가 벌어진 것인데(1971년 4월), 선거 유세보다 육 여사에 주목하는 눈길들이 따로 있었다.
유세가 끝나고 박정희 후보가 승용차를 세워둔 유세장 뒷문으로 먼저 나오고, 그 뒤에 두걸음쯤 떨어져 흰 운갑사의 수수한 한복을 차려입은 육영수 여사의 모습이 나타나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 중에 박정희 후보 승용차 앞에서 기다리던 한 젊은 여성이 육 여사의 눈에 띄었다.
그 여성이 인사를 하자 육 여사는 놀랍고 반가워 얼른 다가가 얼싸안았다.
물론, 아는 사람이었다. 장항에 살고 있는 전명희(당시 22세)라는 여성이었다.
육 여사가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그녀가 17세였던 1967년.
그녀는 어려서 앓은 소아마비로 양쪽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었다. 수술이라도 해보면 원이 없겠건만 엄두도 못낼 형편이라, 암울한 청춘에 한 줄기 희망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육 여사가 군산에 온다는 소식이 들렸다. 어려운 사람들을 돌봐주는 분이기에 그녀는 어머니를 따라 그저 지푸라기라도 잡아 보려는 심정에 군산으로 건너왔다.
육 여사는 먼저 전주에 들러 전라북도 여성회관 기공식에 참석을 한 뒤 군산으로 와서 파월장병의 가족들 중에서 가장 어렵게 사는 사람의 집을 찾아가 위로했다.
이때 육 여사는 몰려든 군중 틈에서 중증 장애의 그녀를 발견했다. 해맑은 얼굴의 예쁜 소녀였다.
“다리만 고칠 수 있다면…….”
육 여사는 그녀의 손을 잡아 용기를 잃지 말도록 격려했고, 고개 숙인 그녀 얼굴에선 하염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육 여사는 상경하자마자 국립의료원에 교섭을 하고 그녀를 올라오도록 했다.
마침내 수술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에 그녀의 부모는 이제 죽어도 한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그보다 더 꿈만 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녀는 두 차례 수술을 받아도 정상적 보행이 어려워 보이는 중증 장애였는데 한번의 수술이 끝나자 거짓말처럼 걸을 수가 있게 된 것이었다.
그후 4년이 흘러 대전에서 만난 그녀는 보랏빛 원피스 차림의 아리따운 여성으로 변해 있었다. 육 여사가 대전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감사의 인사를 하러 아버지와 함께 유세장 뒷문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늘씬한 아가씨인 줄 몰랐네. 정말 아름답구나.”
육 여사는 그녀의 몸을 아래위로 연신 훑어보며 감탄해 마지않았다.
그녀의 사연을 알게 된 사람들이 더욱 육 여사 앞으로 몰려들어 유세장 뒷문 앞이 매우 혼잡했다. 육 여사와 동행했던 한 여류시인은 인파에 부대껴 손을 다치고 안경알이 깨지는 수난을 겪으면서도 대통령 부인과 그녀의 재회를 보며 눈시울이 뜨겁고 가슴 벅찬 순간이었다고 술회했다. (1971년 4월12일 주간여성)
◇ 1967년 청와대 신년 하례 <정부기록 사진집> |
육 여사의 소아마비 친조카들
지난날에는 한센씨병 환자(나환자)들이 사람 취급을 못받고, 집안에 장애인이 있으면 숨기는 것이 예사였다. 난치병이나 장애도 서러운데 그보다는 사람들의 손가락질이 두려워서였다. 세태가 그러했다.
필자는 육영수 여사의 집안에 장애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불과 몇년 전에 언론보도를 통해 알고 놀랐었다. (한겨레21 2005년 2월)
1965년 청와대에서 소아마비 어린이들을 초청해서 지체장애인단체 사람들이 갔더니, 육 여사가 “우리 집안에도 소아마비를 앓은 친조카가 3명이 있다”고 말하더라는 것이었다.
그때 육 여사가 건네준 자금으로 국내 최초의 장애인 재활ㆍ복지시설인 정립회관 터가 마련되고, 육 여사는 그후로도 건립기금을 모아주었다. 그런데 육 여사가 서거하는 바람에 정립회관이 공사 중단 위기에 처하자, 이를 알게 된 박 대통령이 당시 공식적인 ‘하사금’으로 최대 규모인 2억원을 지원했다.
1975년 10월 정립회관 개관식에는 육 여사 대신 박근혜가 참석했고, 박 대통령은 정립회관의 현판 글씨를 직접 썼다.
당시의 관계자들은 청와대의 전폭적인 지원이 없었더라면 정립회관 건립은 불가능했고, 그것은 육 여사의 장애인에 대한 각별한 관심과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집권 초기인 1962년 11월, 당시 최고회의 의장이자 대통령 권한대행의 자격으로 전 미국 대통령 부인 엘리너 루즈벨트 여사의 서거에 국민과 정부를 대표하여 조의를 표하는 전문을 보낸 적이 있다.
◇ 1974년 육 여사 영결식 후 현충원 묘소에 분향하는 시민들 <국가기록원> |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미국 역사상 유일한 4선 대통령이다. 세계제2차대전 중 일본의 항복과 한국의 독립을 표명한 카이로회담에서 루즈벨트가 영국 처칠, 중국 장졔스와 함께 앉아 있는 모습은 우리에게도 낯익은 역사 장면이다.
루즈벨트가 서 있는 모습의 사진은 없다. 루즈벨트는 지체장애인이었다. 처칠과 장졔스는 일어설 수가 없는 루즈벨트를 위해 앉아서 포즈를 취했던 것으로 보인다.
최장기 집권을 한 루즈벨트는 개인적인 지체장애와 대공황의 위기, 세계대전이라는 시대적 악재를 극복하고 뉴딜 정책을 성공시켜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다.
이러한 루즈벨트의 성공은 부인 엘리너 루스벨트의 내조가 크게 작용한 결과임을 미국인들은 잘 알고 있다. 그녀는 남편이 한창 때인 39세의 나이에 다리를 못쓰게 되자, 용기를 잃지 않도록 정신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항상 낙관적인 사고방식과 밝은 표정으로 주변을 즐겁게 했다.
오늘날 미국인들은 엘리너 루즈벨트를 가장 훌륭한 퍼스트레이디로 꼽고 있다.
엘리너 루즈벨트나 육영수 여사에 대한 뭇사람의 존경은 ‘역경’에서 우러나오고 있다.
사랑의 손길이 구석구석의 그늘을 다 지울 수는 없어도
육 여사가 생전에 얼마나 많은 불우 이웃들을 만났는지는 자세히 알 길이 없다.
박정희 대통령도 부인 묘소에 찾아오는 시각장애인, 지체장애 소년, 음성 나환자, 그리고 꼬부랑 시골 할머니와, 갓 쓰고 수염 기른 할아버지들을 보면서 “저 많은 사람들을 언제 만나고 다녔는지 모르겠다”며 부인의 생전 행적을 더듬을 뿐이었다.
육 여사 서거후, 박근혜는 어머니의 조문 편지가 너무 많이 와 제대로 답장을 못했다고 말했다. 대부분 서민층에서 보내온 편지였고 그중에서도 7할이 부녀자들이었다고 한다. 조문 편지를 보내온 사람들 중에는 고인을 생전에 한번도 본 일이 없는 사람들도 많이 있고, 또 편지를 읽노라면 “그 사람이 이런 일도 했나?”하고 몰랐던 일을 새삼 깨닫곤 한다고 박 대통령은 말했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세태는 무심히 메말라가는데, 왜 사람들은 육 여사의 영상을 자꾸만 찾아내려 하는 것일까. 대체 인간 육영수는 사람들 가슴에 어떤 영상으로 그려져 있는 것일까.
육 여사는 최후의 구원이었다. 세상이 너무 어둡고 사방이 꽉 막혀 도저히 헤어날 길이 없을 때 마지막으로 구원을 청할 수 있는 사람이 육 여사였다. 사람들은 그렇게 믿었다. 유일한 사람이라는 믿음이 강했다.
육 여사의 손길이 세상 구석구석의 그늘을 다 지울 수는 없는 일이었지만, 사람들은 눈물과 불행을 어깨동무하고 험한 세상 굽이길을 함께 넘어가는 육 여사를 보면서 힘과 용기를 얻었다.
“좌절하지 말고 굳세게 살아야지.”
입술을 깨무는 모진 결심에는 뜨거운 사랑이 있고, 가슴이 녹아 흐르는 눈물이 있고, 바위처럼 굳은 믿음이 있었다.
오늘 2009년 8월 15일은 육영수 여사의 35주기가 되는 날이다.
달빛 밟고 머나먼 길 오시리
두 손 합쳐 세 번 절하면 돌아오시리
어머닌 우시어
밤내 우시어
하이얀 박꽃 속에 이슬이 두어 방울. (이용악 ‘달 있는 제사’)
황량한 세상에 이런 시를 만날 수 있음은 큰 위안이고 행복이다.
◇ 1974년 8월 이후 청와대에는 육 여사를 애도하는 편지가 쇄도했다 <국가 기록원> |
◇ 1974년 9월 27일 일맥 영아원(전북 군산시 문화동)의 원아와 보모 원장이 박근혜씨가 보낸 추석 선물을 전달받고 기념 촬영을 했다 < 전북 도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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