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歷史. 文化參考

“다시 전쟁해도 당장 총 잡고 참전할 것”

鶴山 徐 仁 2009. 6. 26. 09:18

에티오피아군 한국전 적응 훈련장 ‘코리안 빌리지’를 찾아
 

아프리카 최빈국 에티오피아는 인구 7700만 명으로 한반도 면적의 약 5배다.

에티오피아란 ‘태양에 그을린 얼굴의 땅(Land of the Burnt Faces)’이란 뜻으로 이 나라는 대한민국과 인연이 깊다.

한국전 당시 아프리카 지역에서 유일하게 지상군을 유엔군 일원으로 파병, 많은 전과를 올렸다.

에티오피아군은 총 6037명이 참전해 강원도 화천·철원 일대에서 253회의 격전을 벌여 658명의 사상자(전사자 122명·부상자 536명)를 냈으나 단 한 명의 포로도 없었던 부대로 유명하다.

현재 한국전 참전용사 2000여 명이 아디스 아바바 시 일대 코리안 빌리지를 중심으로 생존해 있다.

한국전쟁 발발 59주년을 맞아 본지는 에티오피아 한국전참전용사후원회(회장 손숙)와 공동으로 참전노병 하부탐 미카엘(80·예비역 상사·3진) 옹으로부터 한국전 적응 훈련장이었던 코리안 빌리지를 둘러봤다. 편집자

미카엘 옹은 휴전을 앞두고 38도선 부근에서 유엔군과 북한군이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던 1953년 4월 5일부터 1954년 7월 10일까지 한국전에 참전했다.

에티오피아군이 한국전에 투입되기 전 실전보다 더 강한 훈련을 받았던 코리안 빌리지에서의 추억을 털어놨다.

코리안 빌리지의 행정구역은 아디스 아바바 시 아라다구 13-14지구다. 참고로 에티오피아 사람 대부분은 주소를 모른다. 미카엘 옹은 컴컴한 거실에서 그리스 참전용사가 쓰고 에티오피아 참전용사 후손이 번역한 ‘에티오피아 용사들의 한국전 참전기’라는 책을 넘기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누런 황토 먼지와 우렁찬 군가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잘 광장이 주 훈련장으로 제식훈련을 비롯한 기본교육을 받았고, 참전 현황 지도를 보며 눈살을 찌푸리는 등 한국전 포화 속으로 빠져들었다. 또한 중대장 사진을 보던 미카엘 옹은 당시 격전이 떠올라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

베자빙 중대장은 화천전투에서 중공군과 싸우다 현장에서 장렬히 전사했고 미카엘 옹은 총상을 입고 일본으로 후송 갔다. 왼쪽 다리에는 그때의 총상이 아직도 흉측하게 남아 있다.어두컴컴한 집에서 카키색 군복을 입은 미카엘 옹은 역전의 용사로서 위용이 한껏 묻어났다.

아픈 몸을 이끌고 고샅 길로 나와 코리안 빌리지를 손으로 가리키며 당시 훈련 이야기를 풀어놓았다.미카엘 옹의 집은 메넬릭 아데바바이 도로 옆이다. 문을 열고 나오면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오는 게 누더기처럼 파헤쳐진 도로다. 집과 집의 경계는 없다. 고개를 들면 바로 코리안 빌리지가 시야에 들어온다.

“50년대 코리안 빌리지는 한국전 파병 용사들의 훈련장밖에 없었어요. 정부에서 군인들을 위해 지은 메넬닉 병원 하나뿐이었죠. 저기 빨간 건물 보이죠? 저 건물이 메넬닉 병원이에요.”미카엘 옹은 귀국한 후 코리안 빌리지에서 살다 공산주의가 집권하면서 전 재산을 몰수당해 현재 코리안 빌리지 옆 장모 집으로 옮겼다.

당시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가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에게 싼값에 땅을 분양해 ‘코리안 빌리지’에는 한때 2000가구가 넘는 전우가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 가로 세로 1제곱미터에 0.1비르(달러로 10센트 정도·참전용사 월급 40비르)였다.카그뉴(에티오피아군 한국전 참전용사를 일컫는 말)에게 불행은 1974년부터 16년간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시작됐다.

사유 재산을 인정하지 않는 공산주의는 이들의 재산을 몰수했다. 핍박이 두려웠던 전우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한국전 참전 사실도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모두 숨어서 죽은 듯 지냈다. 공산주의가 종식되고 민주 정부가 들어섰지만 그들은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미카엘 옹은 강한 훈련 덕분에 한국전에서 어려운 점이 없었다.

총상을 입은 다리가 반세기가 지나도록 불편하지만 한국전 참전을 후회하지 않았다. 십여 년 전부터 비가 내릴 징후가 몸으로 감지되지만 한국전 참전 사실이 늘 자랑스럽기만 하다.코리안 빌리지 초입 빛바랜 입간판에는 ‘이 마을은 1950년 한반도에서 북한 공산군의 남침으로 야기된 한국전에 유엔헌장 집단안보조항에 따라 참전했던 카그뉴(KAGNEW) 부대원들이 거주 정착함으로써 한국마을로 불리게 됐다’고 기록돼 있다.

간판 주변에는 당나귀 떼가 우글거리고, 과일 행상이 터줏대감처럼 자리를 잡고 있다. 코리안 빌리지 입구는 유럽의 성을 연상케 하는 높은 담벼락이 장막처럼 도열해 있다.골목 안으로 들어서며 한국국제협력단이 10만 달러를 투자해 도로를 깔끔하게 포장해 놓았다. 큰 길과 골목 사이에는 많은 어린이가 이방인들의 방문을 환영했다.

코리안 빌리지에는 현재 참전용사 260여 가구가 살고 있다. 한때 폐교 위기로 내몰렸던 학교가 지역 명문으로 떠올라 학생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함석 벽엔 울긋불긋 광고물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 이름 모를 산새 지저귐과 한낮의 수탉 울음소리가 고향마을같이 정겹다. 빨간 함석지붕 위에 나팔꽃처럼 활짝 핀 접시 안테나도 친근하다.

너덜너덜한 흙벽을 비닐로 칭칭 감아 놓은 오두막에선 그들의 고단한 삶이 묻어난다. 정오가 훌쩍 지난 시각 몇몇 가정의 굴뚝에선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산등성이 따라 집이 층층 시야로 펼쳐졌다. 한국의 달동네와 비슷한 그곳엔 철물점도 초미니 슈퍼마켓도 있다. 사람 사는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코리안 빌리지는 거대한 빨래 건조장이다. 집집마다 빨래를 담장에 걸어 놓기 때문이다. 어린이들은 주로 검은 고무신을 신거나 맨발로 뛰어다닌다. 예닐곱 살 어린이가 2~3세 어린이를 업고 가는 모습은 한국전쟁 당시를 흑백기록 사진으로 보는 듯해 씁쓸하다.

코리안 빌리지에는 강도 흐른다. 해발 2500m에 형성돼 있는 코리안 빌리지는 한국지형과 유사한 가파른 구릉지와 까발나 강이 한국의 시냇물처럼 흐른다.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까발나 강은 코리안 빌리지 중심부를 관통하면서 서쪽 지류와 만난다. “계곡 가장자리는 훈련병들의 발길에 닳아 반들반들했고, 강도 높은 훈련은 악명이 대단했지요.

이 강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야간 사격장이, 북동쪽에는 각개전투훈련장이, 서쪽 지류에는 주 훈련장이었던 잘 광장이 있죠. 그리고 남쪽에는 정부에서 지은 메넬닉 병원이 있는데 초라한 모습이긴 하지만 지금도 터줏대감처럼 자리를 잡고 있죠.” 미카엘 옹은 잘 광장에서 총 분해 결합, 지뢰 매설, 기관총 사용법, 75밀리 무반동총 등 전투 현장에서 필요한 다양한 훈련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한국전에 참전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전투가 아니라 지부티에서 부산까지 가는 머나먼 항해였다고 고백한다. 한국의 헐벗은 산골에서 전투했기 때문에 한국 사람들을 거의 만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말도 배우지 못했다. 3진 파병 전 교육훈련은 1진 참전용사들이 맡았다. 한국의 지형과 기후, 전통 문화 등 다양한 것을 접했다.

“한국전에 참전해 난생처음으로 눈도 봤지요. 눈을 보고 우박인 줄 알았어요. 파병교육에서 눈에 대한 사전 교육을 받긴 했지만 한국에서 우박이 밀가루처럼 보드랍게 내리는 줄 알았죠.”미카엘 옹은 한국전에 참전해 한국 정부를 비롯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 미국 등에서 혁혁한 전공을 인정받아 수많은 훈장을 받았다. 또 한국기독교연합봉사단이 수여한 에티오피아 한국전 참전 감사 메달을 만지작거리며 자랑스러워한다.

미카엘 옹에게 한국전은 인생을 바꿔 놓았다. 한국전에 병사로 참전했다 귀국해 직업군인의 길로 들어섰기 때문. 1984년 상사로 전역한 미카엘 옹에게 한국전 경험이 군 생활의 자양분이 됐다. 특히 군인이나 경찰, 보안요원을 대상으로 총기 사용법을 교육할 때 한국전 경험보다 더 좋은 사례는 없었다. 한국전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공로를 인정받아 콩고 내전에도 참전했다.

미카엘 옹은 1차 내전에 참전해 71년부터 1년간 콩고에서 유엔평화유지활동에 적극 나섰다. 미카엘 옹은 왼쪽 어깨에 한국전과 콩고 내전에서 얻은 ‘영광스러운 병사’ 표지를 자랑스럽게 달고 있다.한국전에서의 경험담도 털어놨다. 휴전 직전 한 치의 땅이라도 더 빼앗기 위해 치열한 공방전이 펼쳐졌고 발밑에는 시체가 즐비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M1소총에 착검해 피비린내 나는 육박전을 벌였던 기억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미카엘 옹은 “한국전에서 공포를 느끼기보다 한국에 평화를 지켜주고 싶었다”면서 “다시 한국에 전쟁이 발발한다 해도 당장 총을 잡고 참전할 것”이라는 노병의 신뢰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에 대비하라’라는 고대 로마 명장 베제티우스의 명언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취재 도움 주신 분:박수일 목사(크브레멩게스트지역 교회 사역) 에티오피아 공용어 암하라어 통역.


“용감한 ‘아버지 역사’ 국민에게 알리고 싶어요”- 참전용사 후손 디레시 씨 ‘에티오피아 용사들의 한국전 참전기’ 번역

“‘우리의 아버지들’이 한국전 당시 용감하게 싸운 역사를 에티오피아 한국전 참전용사 가족과 미래 주역인 어린이들에게 알려주고 싶어요.”베가샤우 디레시(47·사진) 씨는 지난해 5월 그리스 한국전 참전용사 겸 종군기자 키몬 스코르딜러스가 54년 최초 영문으로 쓴 ‘에티오피아 용사들의 한국전 참전기’를 번역, ‘역사 바로 알리기 운동’ 전도사로 나선 것.

한국전 참전용사 후손인 디레시 씨가 ‘역사 바로 알리기 운동’에 관심을 가진 것은 참전용사 가족이나 국민들이 반세기 전의 찬란한 역사를 잊고 사는 게 안타까워 에티오피아 공동어인 암하라어로 번역했다.이 책은 참전용사 가족들에게는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종군일기이며, 국민들에게는 성공한 해외파병사라는 점에서 그 가치를 높게 평가받는다.

디레시 씨는 “에티오피아 참전부대 명칭은 카그뉴(Kagnew)”라면서 “카그뉴란 공산주의 침략으로 생긴 혼란을 극복하자는 뜻과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을 타도하자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고 설명했다.당시 파병부대는 최정예 황제근위대 10개 대대에서 지원자를 받았다. 단 하루 만에 대대 편성이 완료됐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9000마일이나 떨어진 한국전에 참전한 에티오피아군은 집단안보(Collective Security) 개념이 약소국이 나라를 지키는 데 꼭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집단안보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나선 것.하일레 세라시에 황제도 “우리의 자랑스러운 조국은 애국자들의 피뿐만 아니라 충실한 동맹들에도 빚을 지고 있다”면서 국제 연대 차원의 파병임을 분명히 했다.

아버지가 한국전에 참전한 디레시 씨는 “에티오피아군의 한국전 파병은 경제적 이익을 챙기기보다 집단안보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다”면서 “이러한 훌륭한 뜻을 우리 국민들은 모르고 있다. 일부는 부모가 참전했다는 사실도 모른다”며 안타까워했다.1951년 4월 지부티에서 출항한 에티오피아군은 21일간의 항해 끝에 5월 7일 부산항으로 입항, 한국땅을 밟았다.

부산에서 6주간의 훈련을 받고 미9군단 7사단 32연대에 배속돼 전선에 투입됐으며, 8월 1073고지 격전이 첫 전투다. 전선에서 단 1인치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가 어느 나라 군대보다 결연했다. 에티오피아군은 “진지에서 싸우거나 아니면 전사하겠다”는 각오로 임했다.특히 51년 9월 16일부터 22일까지 602고지 전투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중공군 587명을 사살하고 656명에게 부상을 입혔으며 10명을 포로로 잡았다. 기관총 6정을 비롯해 수많은 소총과 100발이 넘는 수류탄을 노획하는 전과를 거뒀다.디레시 씨는 휴전을 앞둔 53년 5월 요크 전초진지 전투에서 37명의 에티오피아군이 500여 명의 중공군과 맞서 진지를 지킨 사례는 감동적이었다고 설명을 덧붙였다. 중부전선 전략적 요충지인 요크 전초진지는 미7사단의 전초진지일 뿐만 아니라 자유 세계의 상징적인 전초진지였다는 것이다.

특히 디레시 씨는 “이 책의 원서는 74년부터 16년간 에티오피아에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한국전 관련 서적을 불태울 때 모두 없어졌죠”라면서 “영문판은 국내에 이 책이 유일하다”며 소중하게 다뤄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인터뷰가 끝날 무렵 디레시 씨는 “이 책이 한국어로 번역돼 한국인들이 에티오피아나 아프리카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혈맹인 한국과 에티오피아의 선린 우호관계 증진에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밝혔다.

취재 도움 주신 분:송인엽 에티오피아 해외사무소장(한국국제협력단) 영어 통역.

사진설명
위: 깔끔하게 군복을 차려 입은 미카엘 옹이 코리안 빌리지를 가리키며 당시 훈련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다.
가운데:코리안 빌리지 입구에 에티오피아 국기와 태극기가 그려진 입간판을 세워 놓았다.
아래:디레시 씨

2009.06.25 아디스 아바바(에티오피아) 글·사진=김용호기자 yhkim@dema.mil.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