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노래 운동의 선구자 정순철은 누구인가?
정순철(鄭淳哲, 1901∼1950 납북) : 국민 동요 ‘짝자꿍’을 작곡한 정순철(鄭淳哲·1901년 생·사진)은 ‘반달’의 윤극영, ‘오빠생각’의 박태준, ‘봉선화’의 홍난파 등과 1920년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동요작가였다. 동학 2세 교주인 최시형의 외손자이기도 한 정순철은 충북 옥천군 청산면 교평리에서 태어나 방정환, 정병기 등과 함께 색동회를 조직했으며 1929년 동요작곡집 ‘갈닙피리’를 발행했다. 여기 수록됐던 ‘우리 아기 행진곡’(짝자꿍)은 당시에도 어른 아이가 모두 즐겨 부르던 동요다. 해방 후 작곡한 ‘졸업식 노래’ 역시 온국민의 노래가 되었다. 정순철은 1930년대에는 정인섭 이헌구 등과 함께 녹양회라는 동요동극 단체를 만들어 ‘색동저고리’ ‘백설회’ ‘에밀레종’ ‘허수아비’ 등의 동극을 발표하기도 했다.
특히 방정환과 가깝게 지내며 초기 어린이 운동을 이끌었으며 동요운동의 선구자인 셈이다. 그럼에도 국내에서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6.25 때 납북되었기 때문이며 그간의 모든 행적이 매몰된 것이다. 본관은 연일(延日)이고 어릴때 이름은 분답이며 자는 성춘(星春)이다. 청산에서 보통학교를 다니던 정순철은 학교를 중퇴하고 집을 나와 옥천역에서 화물차에 몰래 숨어 타 서울로 올라갔다. 이후 동학 3세 교주인 손병희의 배려로 보성중학교에 입학했으며 김기전, 방정환 등의 주도로 결성한 천도교소년회에 입회해 활동했다. 천도교청년회가 월간지 ‘개벽’을 창간하고 여성운동, 농민운동, 체육운동 등을 전개하면서 대중을 계몽하는데 앞장섰으며 그 산하단체인 소년회는 1923년 3월부터 월간 ‘어린이’를 창간하고 소년계몽운동을 주도했다.
천도교 소년회의 이 운동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시작된 어린이 문화운동과 어린이 인권운동이었다. 정순철이 방정환과 함께 어린이 운동단체인 ‘색동회’를 창립하는 일에 참여 한것은 함께 유학중일 때인 1923년이었다. ‘색동회’는 1923년 3월 16 발족해 5월 1일 방정환을 중심으로 정순철, 윤극영, 마해송 등이 가입해 이날을 어린이날로 제정한 것이다. 윤극영과는 일본유학시절 함께 지냈으며 어려운 형편에서도 동경음악대학을 다니며 음악공부를 계속했다. ‘어린이’잡지에 어린이들이 부를 창작동요를 작곡해 발표, 보급하는데 앞장 섰으며 동경유학을 마치고 국내로 돌아와서도 서울 경운동의 천도교 대교당을 중심으로 각종 어린이 운동을 전개했다.
동요작곡집 1집 ‘갈닢피리’에는 ‘짝자꿍’을 비롯해 ‘까치야’ ‘여름비’ ‘나뭇잎배’ ‘갈잎피리’ 등이 수록돼 있다. 현재까지 확인된 정순철의 노래들은 잡지 ‘어린이’에 발표된 ‘형제별’(1923)을 비롯, 조선일보에 발표된 ‘자장가’(1928), 윤석중이 작사하고 정순철이 곡을 붙인 ‘졸업식 노래’(1948)까지 36곡이다. 이 외에도 ‘조선동요백곡집’(1946) 상권에 수록된 ‘시골밤’ ‘아기별’ ‘어깨동무’ 등을 합하면 40여곡에 이른다. 이중 ‘짝자꿍’은 경성중앙방송국 전파를 타고 방송되어 국민동요로 널리 퍼지게 된 것이다.
정순철은 1931년부터 34년까지 경성보육학교에 재직했으며 1939년부터 41년까지 두 번째로 음악공부를 하러 동경에 들렀다. 1948년에는 서울 성신여고에서 교편생활을 시작 했으며 재직 당시 별명은 ‘한국의 베토벤’이라고 했다. 성신여고 재직시 6.25가 발생했고 학교 교장이 피난 가며 정순철에게 부탁하자 학교에 혼자 남아 있던 정순철은 인민군이 후퇴하던 9월 28일 납북된 것으로 전해진다. 가족들은 9월 29일을 기일로 정하고 매년 제사를 지내고 있다. 북한 음악사에서도 정순철은 중요한 동요작가로 다뤄진다. △지난 4일 아동청소년 문학회 세미나서 발표한 도종환시인의 ‘어린이 노래 운동의 선구자, 정순철’의 주제 발표문에서 요약.
참고 :
정순철은 윤극영과 함께 '색동회' 동인으로서 1929년에 정순철 동요작곡집 제1집「갈닙피리」를 발행했는데, 여기에는〈우리 애기 행진곡(짝짝궁)〉을 비롯해서 9곡이 들어 있으며, 모두 멜로디뿐이고 반주는 없다. 그의 대표작은 물론〈우리 애기 행진곡〉이지만, 이밖에도〈갈닙피리〉는 명작에 속한다고 나는 생각하며,〈여름비〉,〈늙은 잠자리〉,〈나무닙배〉등도 아름다운 곡이다. 「조선동요 백곡집 상권」(1946년, 조선아동문화협회발행)에 의하면〈봄〉,〈새나라의 어린이〉,〈시골밤〉,〈아기별〉,〈어깨동무〉,〈옛이야기〉,〈진달래〉가 들어있는데, 거의 불려지지 않으며 〈졸업가〉만이 지금도 애창되고 있다. 정순철은 작품이 너무도 적은데다가 짧은 곡이 비교적 많으므로 유치원 동요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갈닙피리〉는 8마디의 짧은 곡이긴 하나 서정적이고도 말할 수 있다. 〈갈닙피리〉는 8마디의 짧은 곡이긴 하나 서정적이고도 한국적이다. 정순철과 윤극영의 공통점은 멜로디뿐이고 반주곡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한국전쟁중 납북 1901년 충북 옥천에서 태어난 정순철은1950년 한국전쟁중 납북돼 행방이 묘연하다. 이런 가운데 올해 도종환 시인은 '옥천에서 자란 정순철은 동학 2세 교주 해월 최시형의 외손자'임을 증명하는 자료들을 발표했다.
시인은 정순철 선생의 고향인 충북 옥천에서 그가 동학 2세 교주 해월 최시형 선생의 외손자임을 확인케 하는 제적부를 발견했으며 그의 동요집 발굴작업와 연구를 통해 선생에 대한 문단의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정순철은 1931년부터 경성보육학교에서, 1939년에는 다시 동경에서 3년간 음악공부에 전념했으며 귀국후에는 1942년 중앙보육학교(중앙대 전신) 음악교사로 재직했고 해방후 서울무학여고와 성신여고에서 음악교사로 활동하며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성신여고에 재직하고 있던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서울이 점령당하자 당시 여성 교장은 정순철에게 학교를 맡겨놓고 피신했으며 9.25 수복 당시 정순철은 유엔군 반격으로 퇴각하던 인민군에 의해 납북된다. 후손들은 수복 다음날인 9월 29일을 정순철 선생의 기일로 정해 현재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했다.
정순철은 윤극영과 함께 '색동회'동인으로서 1929년에 정순철 동요작곡집 제1집 갈닙피리를 발행한 것으로 유명한데 여기에는 '우리 애기 행진곡(짝짝꿍)'을 비롯해 아홉곡이 수록돼 있다. 그의 대표작은 '우리 애기 행진곡'이지만 이밖에도 갈닙피리가 명작에 속하며 여름비와 늙은 잠자리, 나무닙배 등의 아름다운 곡들이 있다.
색동회는 1923년 5월 1일 일제 암흑기에 소파 방정환을 중심으로 강영호, 정순철, 진장섭, 손진태, 고한흥, 정병기, 조준기 선생 등 8명이 일본에서 조직했으며 1921년 소파 방정환 선생이 창안한 '어린이'라는 말을 쓰기로 하고 어린이날을 제정해 어린이 문화운동과 어린이 인권운동, 구국운동을 전개한 한국 최초의 어린이 문화운동 단체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