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생활의 단면이 담긴 사진들을 제1부에 담았다. 도회의 모습을 담은 것도 있고 농촌의 풍경을 담은 것도 있지만,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어느 쪽이든 일상에는 큰 차이가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대부분의 사진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보여준다. 관청으로 출근하는 관리나 돈푼깨나 있어 보이는 양반도 등장하지만 대개는 가난한 민초들의 일상이다. 몇몇 사진의 주인공이 여자와 아이들이라는 점도 재미있다. 전통사회에서 남녀와 장유(長幼)의 구별이 엄격했던 사실에 비추어보면, 특히 집안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일상생활의 편린을 엿볼 수 있는 진귀한 사진이 적지 않다.
아침 일찍 일어나 밥을 짓거나 청소와 빨래, 절구질이나 다듬이질, 물 긷기 등의 집안일은 모두 여자들 몫이었다. 어른을 모시고 아이를 기르며 손님도 대접하고, 철 따라 명절이나 제사준비도 해야 했다. 그렇다고 베를 짜거나 농사 짓는 일을 게을리할 수도 없었다. 양반댁이야 조금 덜했겠지만 여자들의 하루하루는 몸이 견뎌내기 어려울 정도로 노동의 연속이었다. 다듬이질을 하는 어린 여자아이에서부터 물동이를 이거나 절구질을 하거나 요강을 닦는 아낙에 이르기까지 여인들을 담아낸 사진에서 그러한 일상을 엿볼 수 있다. 여자들은 외출할 때 장옷을 입거나 삿갓을 써야 했다. 장에 다녀오는 정도의 멀지 않은 나들잇길에도 장옷을 걸쳤다.
아이들이 연날리기와 비석치기(혹은 돈치기를 하는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를 하는 사진도 있는데, 일부는 이미 공개된 것이다. 사진 자체는 실내에서 연출된 것으로 보인다. 사내아이들은 서당에 나가 공부하기도 했으나 대부분은 집안일을 도와야 했고, 가난한 집 아이들은 장에 나가 장사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어디나 남자들의 삶이 비슷하기 때문일까. 성인남성의 일상을 보여주는 사진은 그리 많지 않다. 관리는 아침에 조복을 입고 남여(籃輿)를 타고 등청한다. 한량들이 활터에 나가 활 솜씨를 뽐내거나 기생집에 앉아 술이며 음식을 먹고 마시는 모습도 카메라에 담겼다. 반면 민초들은 먹고살기에 바빴다. 농사짓는 일에 매달려 한 해를 보냈다. 소를 돌보아야 했고, 땔감을 구해 장작도 패야 했다. 장에 나갔다가 아는 사람을 만나 막걸리 한 사발 마시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으리라.
삶을 살아가며 반드시 맞이하는 관혼상제는 중요한 행사였다. 어쩌다가 세금을 내지 못하거나 이웃과 다툼이 커지면 관아에 끌려가는 일도 있고, 일이 잘못 풀려 볼기를 맞는 일도 있었다. 대부분의 민초는 평생 그럴 일이 없었겠지만, 무거운 죄를 지어 칼을 쓰고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지방관이 맡고 있던 재판권은 갑오경장 이후 제도적으론 재판소로 이관되었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지방 관리들이 행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동네에 일본인이 하나 둘씩 나타나고, 생전 처음 보는 큰 코와 흰 피부의 서양 선교사들이 지나가 주민들을 놀래키기도 했다. 1900년대 후반에는, 왜적을 쫓아내려고 봉기한 의병들이 마을에 머무른 뒤 일본군이 들어와 죄없는 민초들을 죽이고 불을 질러 마을을 피폐하게 만들곤 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100년 전 민초들의 일상은 사실상 그 이전 수백 년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근대문물이 평민들의 일상생활에 파고들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들은 선대가 살아온 대로 살다 갔지만, 사진 속 아이들은 그렇듯 나른하게 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 뒤 불과 몇십 년 동안 한반도에 찾아든 변화는 몇백 년 계속되어온 생활의 근간을 격렬하게 흔들었기 때문이다. 비록 사진 속 아이들은 그러한 미래를 짐작할 수 없었을 테지만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