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나 오늘이나 대개 비슷비슷한 일을 되풀이하면서 살고 있다. 시들한 잡담과 약간의 호기심과 애매한 태도로써 행동하고 거지(擧止)한다. 여기에는 자기 성찰 같은 것은 거의 없고 다만 주어진 여건 속에 부침하면서 살아가는 범속한 일상인(日常人)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자신의 의지에서가 아니라 타성의 흐름에 내맡긴 채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모방과 상식과 인습의 테두리 안에서 편리하고 무난하게 처신하면 된다. 그래서 자기가 지닌 생생한 빛깔은 점차 퇴색하기 마련이다.
생각하면, 지겹고 답답해 숨막힐 일이지만 그래도 그렁저렁 헛눈을 팔면서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일상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람들은 때로 나그네길을 떠난다. 혹은 한강 인도교의 난간 꼭대기에 올라가 뉴스거리가 되어 보기도 한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자신의 그림자를 이끌고 되돌아오고 만다.
자기의 인생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보았으면 좋겠다는 별난 사람이 있었다. 필자는 그를 데리고 불쑥 망우리를 찾아간 일이 있다. 짖궂은 성미에서가 아니라 성에 차지 않게 생각하는 그의 생을 죽음쪽에서 조명해주고 싶어서였다. 여지가 없는 무덤들이 거기 그렇게 있었다.
망우리(忘憂里)! 과연 이 동네에서는 모든 근심 걱정을 잊어버리고 솔바람소리나 들으며 누워 있는 것일까. 우뚝우뚝 차갑게 지켜 서있는 그 비석들만 아니라면 정말 지극히 평온할 것 같았다. 죽어 본 그들이 살아있는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만약 그들을 깊은 잠에서 불러 깨운다면 그들은 되찾은 생을 어떻게 살아갈까?
사형수에게는 일분 일초가 생명 그 자체로 실감된다고 한다. 그에게는 내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오늘을 살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에 살고 있으면서도 곧잘 다음날로 미루며 내일에 살려고 한다. 생명의 한 도막인 하루하루를 소홀히 낭비하면서도 니우칠 줄 모른다.
바흐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의 음악에서 장엄한 낙조(落照) 같은 걸 느낄 것이다. 단조로운 듯한 반복 속에 심화(沈化)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일상이 심화 없는 범속한 되풀이만이라면 두 자리 반으로 족한 '듣기좋은 노래'가 되고 말 것이다.
일상이 지겨운 사람들은 때로는 종점에서 자신의 생을 조명해보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반복의 심화를 위해서인 것이다.
1970년 5월 30일 |
까딱 잘못하면 남의 입살에 오르내려야 하고, 때로는 이쪽 생각과는 엉뚱하게 다른 오해도 받아야 한다. 그러면서도 이웃에게 자신을 이해시키고자 일상의 우리는 한가롭지 못하다.
이해(理解)란 정말 가능한 걸까.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가 상대방을 이해하노라고 입술에 침을 바른다. 그리고 그러한 순간에서 영원을 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 이해가 진실한 것이라면 항상 변하지 않아야 할텐데 번번이 오해의 구렁으로 떨어져버린다.
"나는 당신을 이해합니다"라는 말은 어디까지나 언론자유에 속한다. 남이 나를, 또한 내가 남을 어떻게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그저 이해하고 싶을 뿐이지. 그래서 우리는 모두가 타인(他人).
사람은 저마다 자기 중심적인 고정관념을 지니고 살게 마련이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사물에 대한 이해도 따지고 보면 그 관염의 신축작용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의 현상을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은 걸 보아도 저마다 자기 나름의 이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나름의 이해'란 곧 오해의 발판이다. 하니까 우리는 하나의 색맹에 불과한 존재. 그런데 세상에는 그 색맹이 또다른 색맹을 향해 이해해주지 않는다고 안달이다. 연인들은 자기만이 상대방을 속속들이 이해하려는 맹목적인 열기로 하여 오해의 안개 속을 헤매게 된다.
그러고 보면 사랑한다는 것은 이해가 아니라 상상의 날개에 편승한 찬란한 오해다. '나는 당신을 죽도록 사랑합니다'라는 말의 정체는 '나는 당신을 죽도록 오해합니다'일 것이다.
언젠가 이런 일이 있었다. 종단 기관지에 무슨 글을 썼더니 한 사무승이 내 안면신경이 간지럽도록 할렐루야를 연발하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속으로 이렇게 되뇌이고 있었다. "자네는 날 오해하고 있군. 자네가 날 어떻게 안단 말인가. 만약 자네 비위에 거슬리는 일이라도 있게 되면, 지금 칭찬하던 바로 그 입으로 나를 또 헐뜯을텐데. 그만두게 그만둬."
아니나다를까, 바로 그 다음 호에 실린 글을 보고서는 입에 게거품을 물어가며 죽일놈 살릴놈 이빨을 드러냈다. 속으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 "거 보라고, 내가 뭐랬어. 그게 오해라고 하지 않았어. 그건 말짱 오해였다니까."
누가 나를 추켜 세운다고 해서 우쭐댈 것도 없고 헐뜯는다고 해서 화낼 일도 못된다. 그건 모두가 한쪽만을 보고 성급하게 판단한 오해이기 때문에.
오해란 이해 이전의 상태가 아닌가. 문제는 내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느냐에 달린 것이다. 실상(實相)은 언외(言外)에 있는 것이고 진리는 누가 뭐라 하건 흔들리지 않는 법. 온전한 이해는 그 어떤 관념에서가 아니라 지혜의 눈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그 이전에는 모두가 오해일 뿐.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제기랄, 그건 말짱 오해라니까."
1972년 1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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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 골짜기와 시정의 쌀가게에는 아직도 '겨울'이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고 잇다. 캘린더는 산뜻한 3월로 싱그러운 얼굴을 하고 있지만, 인간의 대지는 마냥 한랭한 고기압권이다.
그러나 지금 어디선가 봄은 움트고 있으리라. 긴 겨울잠에서 깨어나 하픔을 하면서 기지개라도 펼 것이다. 그래서 머지 않아 부우연 토우(土雨)가 3월의 하늘 아래 내릴 것이다. 지난 겨울의 비애를 딛고 새봄을 마련하는 나뭇가지를 매만져 줄 것이다. 자연의 계절은 이렇듯 어깁없이 우리를 찾아온다.
어제 오후 나는 물건을 사려고 시장에 들렸다가 가게주인에게 축출을 당했다. 가끔 당하는 일이라 새삼스레 서운할 것도 화낼 것도 없는 일. 세상과 마주친 것뿐이다.
남루한 겉모양으로 해서 얻으려 온 거지로 안 모양이다. 겈모양이 알맹이보다 화려해야 팔리는 시장이기 때문에 있을 법한 일이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조금은 서글픈 일이다. 같은 인간가족끼리 대화 이전에 겉모양만 보고 내쫓는다는 것은 아무래도 서글픈 일이다.
'스프링 소나타'가 3월의 창변을 울리고 있다. 난초분에서는 초생달처럼 가녀린 꽃이 조심스레 올라오고 있다.
인간의 계절은 어디서 오는 걸까? 그것은 어디서 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마련하는 것. 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 비극은 있어도 절망은 없다. 어제를 딛고 오늘 일어서야 하는 것이다.
이 봄에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묻지 말자. 어떤 봄을 마련할 것인가를, 이른 새벽에라도 생각해보자. 그래서 겨울의 그늘진 잔해를 우리들의 영토(嶺土)로부터 말끔히 씻어내야겠다.
1969년 3월 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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