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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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효교수의 테마가 있는 철학산책] (39) 마음의 혁명

鶴山 徐 仁 2006. 10. 29. 10:38

 

배금주의등 자본주의 찌꺼기 ‘양심의 부름’으로 극복해야

지난주에 보드리야르의 소비사회 비판의 내용을 훑어보면서, 그의 사유의 한계를 금주에 말하겠다고 언급했다. 그의 사유의 한계는 서구의 지성주의가 안고 있는 한계와 그 궤적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지난주에 보았듯이,3대째로 내려오는 서구의 반자본주의의 사상은 다 자본주의의 물신숭배사상(fetishism)에 대한 도덕적 거부감의 표시와 같다.

그런데 경제기술적 자본주의든 사회도덕적 사회주의든 다 서구적 지성철학의 전통이 낳은 쌍생아와 같다. 본디 서구 지성철학의 원조는 아리스토텔레스다. 그의 논리학이 지성적 사유의 원조와 같다. 그의 논리학은 동일성(同一性)과 이타성(異他性)을 확연히 쪼개는 이분법적 사유로서, 간단히 말해서 A와 비(非)A를 완전히 별개로 취급하여 그 둘 사이에 어떤 애매모호한 중간지대도 용납하지 않는 사유를 말한다. 그 논리는 택일적 사유를 기본으로 한다. 택일적 사유는 명사적 사유와 같다. 명사적 사유는 산은 산이고 골짜기는 골짜기로 여기는 사고방식으로서, 산과 골짜기가 불일이불이(不一而不二=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님)로 상호 이중적으로 연계되어 있는 것을 보지 않는다. 명사적 사유는 개념적 사유로 이어지면서, 인간지성이 개념적으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파악하려는 소유의식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서구의 기독교 신학도 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적 사유와 만나서 신학을 합리적 논리학과 어긋나지 않게 정립하게 되었다. 이런 정립의 금자탑이 바로 토머스 아퀴나스에게서 시발된 토미즘(Thomism)이라 하겠다.

무(無)에서부터 신(神)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다 이성(지성)의 능력으로 에누리없이 파악하는 철학이 헤겔의 사유다. 그래서 헤겔의 사유는 웃음을 빼고 역사와 자연과 사회의 모든 것을 다 놓치지 않고 파악한 철학이라고 풍자되기도 한다. 이것은 그의 철학이 너무 진지해서 인간이 웃는다는 것을 깜빡 잊었다는 우스갯 소리겠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성적 논리학과 헤겔의 변증법적 논리학이 다르다고 항의할 이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전자가 반대되는 양자사이의 택일을 주장하는 것이나, 후자가 모순되는 양자의 투쟁사이에서 합일을 주장하는 것이나, 다 종이 한 장 정도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두 논리학은 다 서구의 지적 전통의 뼈대로써 지성이 어떤 경우에도 세상을 혼미한 상태나 모순된 상태로써 방임하지 않는다는 지적 소유의 강인한 소화력을 상징한다. 지성의 철학은 그 출발부터가 소유의식의 자부심이 강렬했다.

지성이 세상을 소유하려는 철학은 서구 지성사에서 둘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경제적 기술적으로 세상을 소유하려는 도구적 실용철학이고, 둘째는 그 실용적 소유철학이 회임하고 있는 이기적 속성을 싫어한 반(反)이기적 사회도덕을 중시하는 인도적 해방철학이다. 소위 인도적 해방철학은 스스로의 이상주의에 심취해서 자신의 지성철학은 소유론이 아니고, 인간을 물질적 소외로부터 해방시키는 인간주의의 정상이라고 착각했다. 그래서 자신의 도덕주의가 곧 형이상학적 존재론이라고 착각했다. 좌우간 서양지성사에서 이런 착각을 처음으로 명쾌하게 세상에 밝힌 이가 독일의 하이데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자본주의적 실용주의만이 소유론이 아니라, 사회주의적 도덕주의도 역시 지성철학이 분비한 소유론이라는 것이다. 이 하이데거의 통찰은 사회주의적 이상주의가 짙게 피워온 신비의 안개를 하루아침에 날려보낸 셈이다. 사회주의적 소유론은 물질적 소유론보다 더 지독한 정신적 소유론이라는 것이다. 정신적 소유론이므로 독재를 필연적으로 몰고 온다.

보드리야르가 소비사회의 비판으로써 제기한 환영(simulacrum), 흉내내기(simulation), 초과실재(hyperreality), 내파(implosion)(38회 글 참조) 등과 같은 용어들은 다 실재의 알맹이를 잃고 기호로 변해가는 사회의 환상들을 비판한 것이다. 보드리야르의 사회학은 사회가 도덕적 가치를 잃지 않고 내용이 있는 현실이 구성되기 위하여 교환가치보다 더 튼튼한 사용가치를 기반으로 해서 존재의 알맹이가 있는 사회가 정립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려고 한다. 그런데 그는 소비사회가 그런 존재론적 알맹이를 다 잃어버렸거나 상실해간다는 것을 통탄하고 있다. 그의 사회학은 반자본주의의 사회학이 자본주의적 소비사회를 길들이지 못한 것을 한탄한 소리와 같다 하겠다. 그러나 그의 사회학은 두 가지의 착각을 범한 셈이다. 첫째로 그는 그의 사회학이 형이상학적 존재론의 요구라고 생각한 점이다. 그러나 그의 요구는 정신적 소유론의 요구이지, 결코 존재론의 요구가 아니다.(모든 정신적 가치론은 경제적 가치론의 은유화에 다름 아니라고 지난 9회 글을 통해 지적한 바 있다) 시장에서 매매가격의 은유적 표현으로 정신적인 사용가치나 교환가치를 인간이 상정한다. 따라서 정신적 가치도 인간이 세상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의 은유적 생각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보드리야르의 사회학은 세상을 사용가치로서 정초시키고 싶어하는 지성의 도덕의지가 바라는 소유학이다. 둘째로 그는 아직도 정신적 도덕적 가치론이 경제적 이기적 소유론을 길들일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도덕적 가치론은 당위적인 명령인데, 그 당위의 명령이 자연적 본능의 이기심을 이은 지능(지성)의 이익추구의 충동을 결코 이길 수 없다. 지성의 이기주의는 자연적이고, 지성의 도덕주의는 당위적인데, 당위가 자연을 못 이긴다는 것을 노자가 이미 풍자했다.‘도덕경’에서 노자는 ‘발돋움하고 있는 자는 오래 서 있지 못하고, 성큼성큼 걷는 자가 오래 가지 못한다.’고 암시했다. 인위적인 노력이 자연적인 것을 능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서구의 도덕적 사회주의가 경제적 자본주의를 이기지 못한 까닭은 그것이 힘이 들어간 인위적 당위주의이기 때문이다. 서구의 반자본주의 사상은 자본주의 병리현상의 지적에선 빛났으나, 그 병리를 치유하는 생리적 처방에는 아주 미흡해서 당위적 주장만을 늘 내놓는 추상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경제기술적 자본주의의 장점을 살리면서, 그것이 갖고 있는 찌꺼기와 같은 낭비와 배금주의를 씻어내는 길이 무엇인가를 사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서 나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사유를 다시 그 처방으로 생각한다. 반자본주의적 서구의 지성이 범한 사유상의 과오는 십자군적인 도덕주의의 사고에 너무 젖었었다는 것이다. 십자군적 도덕주의의 사고는 선악을 이분법적으로 생각하여 선악을 각각 분리된 별개의 것인 양 실체론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보드리야르도 그런 십자군적 도덕주의의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대개 서구 지성이 이런 과오에 습관적으로 젖어있는 경향을 갖고 있다. 보드리야르의 비판도 그가 반소비적 물건 가치의 실재를 선으로 집착한 정신적 소유주의를 기본으로 깔고 있기에 생긴 이론이다. 선이 악을 온전히 제거하겠다는 사상으로는 악이 사라지지 않는다. 악과 싸우는 선이 이미 내부에서 악을 또한 분비하고 있다. 사회주의가 실패한 까닭이 바로 도덕주의의 허상 때문이다.

하이데거가 그의 ‘존재와 시간’에서 ‘존재론적 욕망의 부름으로써의 양심’을 천명하였다. 나는 이 뜻을 우리가 다시 깊이 새겨야 한다고 여긴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사유를 철학자들이 하는 어려운 관념의 유희라고 오해하거나 일축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가장 절실하게 세상의 병을 치유할 수 있는 생리의 길이라고 생각된다. 하이데거가 말한 ‘존재론적 욕망의 부름으로써의 양심의 소리’는 흔히 도덕론자들이 즐겨 쓰는 선의 진군나팔 소리를 울리자는 뜻이 아니다. 그의 생각은 이렇다. 세상사람들이 손익의 계산적 지성이나 또는 선악의 도덕적 지성의 둘 중 하나에 젖어서, 전자는 현실주의자들의 방패로, 후자는 이상주의자들의 창으로 각각 써 온 지 오래되었다는 것이다. 둘 다 소유주의의 철학이다. 소유주의적 문명을 존재론적 문명으로 되돌리려 하는 것이 그의 사유의 본질이다. 모든 것은 다 동시에 양가적이므로 선악을 분별적으로 생각하는 인간의 이분법을 버려야 한다. 모든 것이 양가적이고 이중적인 한에서, 세상을 구하는 길은 세상을 분별적으로 여기는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하이데거가 말하고자 하는 양심의 소리는 분별적인 세상사람들의 마음을 본래의 본성적 마음으로 되돌아가는 마음의 자기 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을 가리킨다. 본성의 소리는 당위적인 도덕의 명령이 아니라, 본능처럼 마음이 스스로 하고자 하는 기호적(嗜好的) 욕망을 말한다. 기호적 욕망에는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본능적 소유욕을 말하고, 또 다른 하나는 본성의 존재론적 욕망이다.(1·2회 글 참조)

하이데거가 언급한 양심은 마음이 자기의 본성을 되찾은 자성(自性)의 목소리와 다르지 않다. 그 자성을 그리스도성이라 불러도 좋고, 불성이라 말해도 괜찮다. 그러므로 그 양심의 부름은 도덕적 당위를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성이나 불성이 하고싶어 하는 욕망을 부르는 것이다. 이런 부름을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현존재(마음)가 자신의 가장 고유한 존재가능성에로의 말건넴’과 같다고 언명했다. 소유론적 욕망은 이기배타적인 욕망이지만, 존재론적 욕망은 그리스도성이나 불성이 욕망하는 것이므로 자리이타적 욕망이다. 인간에게 이런 욕망의 자발성도 있다. 이 자발성을 부르는 것이 양심의 부름이다. 이 욕망은 경제와 과학기술을 위한 지혜도 부정하지 않고, 사회도덕도 파괴하지 않는다. 자리이타의 욕망은 자기본성에 의한 재능의 계발이 곧 사회적 이타행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알기 때문이다. 소유론적 지성(知性)을 넘어선 존재론적 지성(智性)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마명스님은 ‘대승기신론’에서 이 지성(智性)을 중생의 마음속에 깃들어 있는 수염본각(隨染本覺)의 능력인 지정상(智淨相)과 그 것의 불가사의한 활동력인 부사의업상(不思議業相)이라고 명명했다. 본성의 욕망인 양심이 숨을 쉬면, 이 본성의 능력들이 우리를 경제적으로 도덕적으로 이끌어준다는 것이다.

양심의 부름을 하이데거는 간결하게 말했다.“양심의 부름은 나로부터 나오지만, 나를 넘어서 나온다. 그 부름이 어디로 가는가? 그것은 나에게 온다.” 이것이 마음의 혁명이다. 세상을 혁명하려하지 말고 마음을 혁명해야 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철학

기사일자 : 2006-09-28    25 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