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7 년 부터 1811 년 까지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가 건너가 일본의 문맹자들을 깨우쳐 주었다. 朝鮮通信使에는 온갖 방면의 학자와 예술가들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천문관까지 끼어 있었다는 것이 일식기록에서 드러난 것이다. 일본에 曆法을 가르쳐준 박안기[朴安期 : 천문학자로서 1643 년 일본에 가서 일본의 가장 유명한 천문학자 오카노이 겐테이(野井玄貞)에게 천문계산법을 전수했다]는 단순히 李氏朝鮮의 선비가 아니라, 天文官이었다. 일본은 관륵(觀勒 : 百濟 武帝때 倭에 天文技術을 전했다고 함)을 일본 천문학의 비조(鼻祖)라 내세우지만, 西洋 天文學을 배울 때까지 천문관측할 줄 몰랐으니까, 정확히 말해서 西洋人이 일본 천문학의 비조(鼻祖)이다.
高麗가 黑水와 접해 있다고 高麗史는 물론 고려도겅高麗圖經 등에도 나와 있다. 일식관측지로 보건데, 흑룡강黑龍江 이남의 강들은 黑水가 될 수 없다. 국경에서 천문관측하는 나라는 없다. 일식기록상 흑룡강 중, 하류 너머도 高麗 영토니까, 黑水는 黑龍江 상류이다. 黑龍江이 우리나라 영토니까, 1343 년 에서 1599 년 까지 日本이 베낀 일식관측지 만주滿州[일본에서도 몇 개 관측한 것인지 일식관측지가 동쪽으로 늘어져 있다. 장소가 北海島와 혼슈(本州) 사이이다. 이 당시 홋가이도(北海島)는 일본 땅이 아니라, 아이누族의 땅이었다. 본격적인 일식관측은 아니고, 어떤 사건과 연결지어 기록을 남긴 것으로 보인다. 자연의 비일상적인 변화가 사회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알아보기 위해] 역시 당연히 우리나라 영토이다. ▲ 현 역사책에 나타난 삼국과 고려의 일식기록 및 일본이 베낀 우리나라 일식기록의 최적 관측지
中國은 잃어버린 역사가 없으니까, 天文志(?)에 실리지 않은 中國의 일식기록은 없다. 반면 우리나라 역사책은 대대로 분서焚書 됐다고 했으니까, 현 역사책에 실린 일식기록은 우리나라가 관측한 최소한의 일식이다. 日本이 중국의 일식기록(?)을 베꼈다면, 일본의 일식기록이 중국의 일식기록에 다 나와야 한다. 하지만 일본은 중국의 일식기록(?)과 일치하는 기록은 베끼지 않고, 三國이 중국 일식기록을 베꼈다고 우겼다. 무엇보다 천문관측 장소도 표시하지 않고, 한 곳에 集中 되지도 못하는 중국의 일식기록에서 시대에 따라 한 곳에 강하게 집중 되면서 東아시아 전역에 일식 관측지가 흩어져 있는 日本의 일식기록을 컴퓨터의 도움 없이 베껴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일식기록은 한 곳에 강하게 집중 되므로 간단히 베낄 수 있다. 일식기록은 모조리 우리나라 것을 베끼고, 나머지 역사기록은 중국 역사책 에서도 베꼈다? 중국 역사책도 베꼈다면, 중국(?)의 일식기록도 베껴야 했다. 결국 “니혼쇼키(日本書紀)가 한국이나 중국의 역사서를 기초로 만들어 졌다”는 이노우에 미쓰시다(井上三下)의 말은 사실이 아니었던 것이다. 일본의 역사책은 오로지 우리나라 역사책만을 보고 썼다. 이성계李成桂와 주원장朱元璋이 우리나라 역사책을 대부분 중국의 역사책으로 할당한 결과, “일본서기日本書紀가 한국이나 중국의 역사서를 기초로 만들어진” 셈이 되었던 것이다. 日本은 18 세기 이후 역사날조 하면서 날조 역사책을 참고서로 삼았다. 중국사로 할당된 것에 맞추어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고 고친 것이다. 日本의 일식기록日蝕記錄은 東洋史가 완전히 날조 되었다는 증거이다. 일본의 천문기록은 모두 우리나라 역사책에서 직접 베꼈다. 날조 역사책과 우리나라 실사책을 대조해 가면서 빠진 일식을 챙겼던 것이다. 베꼈다는 사실을 은폐 하려고 가짜일식을 40~50 %씩 섞었다. 대대로 베낀 것이 아니라, 일시에 베꼈다는 의미이다. 日本이 베낀 1343 년 에서 1599 년 까지의 일식관측지가 만주滿州라는 사실은 李氏朝鮮이 滿州를 상실한 1824 년 이후에 일본이 천문기록을 갖기로 날조 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어째서 일본은 628 년 부터 709 년 까지 중국 남해안의 일식기록을 베끼는 모험을 감행 했을까. 이 시기, 中國倭는 중국 대륙에 있었다. 그러나 중국 남해안은 아니다. 中國倭는 천문관측할 줄 몰랐다. 이 당시, 중국 남부는 新羅 땅이었고, 中國倭(정확한 표현은 大陸倭)는 대만(臺灣 : 원래의 지명은 對馬島)으로 밀려나 있었다. 中國倭의 위치에 가장 근접 하면서도 역사 중심지에서 비켜난 지역의 일식기록을 베꼈던 것이다. 제 딴에는 역사에 충실하게 왜곡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뿐이다. 이후에는 오로지 변두리만을 찾아 일식기록을 베꼈다. 中國倭가 일본으로 이주한 후로 일본은 대륙과의 연결고리가 끊어지기 때문이다. [혹성(惑星)이 日本語라는 주장이 사실로 받아 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일식관측도 못하던 나라가 행성(行星 : planet)관측을 할 수 있는가. 행성관측行星觀測도 불가능 했던 일본이 행성이 존재 한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 수 있단 말인가. 알았다면 하사받은 우리나라 史書를 통해서다. 三國時代 우리나라는 水星, 金星, 木星, 土星 등을 진성(辰星), 태백성(太白星), 세성(歲星), 진성(鎭星)으로 부르는 것과는 달리, 火星을 특별히 형혹성(熒惑星)이라고 불렀다. 사람의 마음을 현혹시키는 行星. 서양에서도 火星의 붉은 색에 착안해 전쟁의 신 이름을 따 마르스Mars라 불렀다. 日本의 혹성惑星은 형혹성熒惑星에서 유래한 것으로 별인지 의심스럽다는 뜻으로 와전(訛傳)된 말이다] 옛날에는 육안(肉眼)으로 천문관측 했다. 그런데도 단군세기檀君世紀와 태백일사太白逸史에는 감성監星을 두었다는 기사가 나온다. “을축乙丑 35년(B.C. 1916) 처음으로 監星을 두었다(乙丑三十五年始置監星 檀君世紀)." “을해乙亥년에 監星을 두다(乙亥置監星 太白逸史 番韓世家)." 이들 기사는 고정적인 위치에서 천문관측 했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기원전 1916 년 부터 우리나라는 고정적인 위치에서 천문관측 하기 시작했다. 상선약수 지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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