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이 시중의 한 話題는
朴槿惠 대표가 범인 지충호로부터 목덜미에 칼질을 당했을 때 어떻게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서, 찡그리지도 않고서, 온화한 표정을 잃지 않고
냉정하게 대처했나 하는 것이다. 손톱에 긁혀도 본능적으로 소리를 치는데 커트 칼로써 치명적일 수도 있었던 상처를 입었는데도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침착할 수가 있을까, 더구나 가녀린 여성으로서..." 하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내가 朴대통령의
마지막 모습을 취재했을 때도 같은 의문이 들었었다. 金載圭가 쏜 권총으로 가슴관통상을 당해 등에서 피가 샘솟듯하는데도 朴대통령은 피하지도 않고
소리도 치지 않고 "난 괜찮아"라고 말하면서 오히려 곁에 있던 두 여자 걱정을 했다. 이런 朴대통령의 초인적 자세는 준비된 몸짓도 아니고
그렇다고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朴대통령은 1974년 8.15 사건 때도 그런 자세를 보였다. 그 전에도 위기에 처했을 때
침착하게 대응했던 일화가 많다. 그런 평소 실력대로 마지막 모습을 보인 것이다. 나는 朴대통령을
小心膽大(소심담대)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평소엔 부끄럼도 타고 소심하면서도 일단 일이 터지면 대담한 모습을 보인다. 이런 아버지의 유전인자를
받은 朴대표가 위기상황에서 자연스럽게 그런 모습을 보인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텔레비전 카메라에 늘 노출되는 公人은 위기 때 어떤 모습을
보이는가에 의해서 정치적 운명이 결정되기도 한다. 미국의 한 유력정치인은 우는 모습을 보였다다 대통령 후보 예비선거에서 탈락했다. 상원의원
에드워드 케네디는 여자와 함께 차를 타고 가다가 車가 호수에 빠졌을 때 혼자서 살아 나왔다고 해서 결국 대통령 후보로 나오지 못했다. 이번에
드러난 朴대표의 침착한 위기대처 능력(또는 본능)은 그를 지도자의 길로 확실하게 내몬 것 같다. 참고로 내가
쓴 박정희의 전기중 그 부분을 소개한다. <超人
총구 앞에서, 그리고 가슴을 관통당하고서, 또 꺼져가는 의식 속에서 다가오는 제2탄을 기다리면서 박정희가 보여준 행동은 세계
암살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초인적인 모습이었다. 김재규의 벽력 같은 고함과 차지철 을 쏜 첫 총성, 그리고 한 4초간의 여유. 이때 박정희는
"뭣들 하는 거 야"란 말 한 마디만 남기고 그냥 눈을 감고 정좌하고 가만히 있다가 김 재규의 총탄을 가슴으로 받았다. 그리고 "난 괜찮아"란
말을 두 번 했다. 우선 이런 행동의 목격자인 두 여인의 합수부 진술을 검토하고 지금 은 미국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는 신재순의 기억을 되살려 이것이 사실인 가를 알아보았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박정희는 술을 너무 많이 마셔 이성을 잃었기 때문에 이런 무모하리만치 태연한 행동이 가능했던가. 그날 밤 시버스리걸 한 병 반을 주로
김계원 박정희 두 사람이 한 시간 40분 사 이에 마셨으니 주기가 올라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주량이 엄청난 박정 희는 총격 직전까지 자세를
흐트러트리지 않았고 그의 언동은 정상이었 다. 거의 같은 양의 술을 마신 김계원은 총성이 나자 마루로
피신했고 그 날 밤 정상적으로 행동했다. 따라서 술 기운으로 해서 그런 '무모한' 행 동이 가능했으리라고 보는 것은 무리이다.
박정희의 불가사의한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서 기자는 총상을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포천의
실탄사격장에 가서 권총사격도 해보 았다. 6·25때 허리에 총상을 당했던 손장래(전 안기부 2차장)장군은 "벌겋게 달군 쇠갈구리로 푹 쑤셨다가
빼내는 것 같았다"고 했다. 머리를 스치는 가벼운 파편상을 입고 기절한 경험을 가진 이병형(전 2군
사령관)장군은 "발뒷꿈치에 총상을 당했을 때는 쇠몽둥이로 뒤통수 를 얻어맞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박대통령의 최후는 체험으로 써
단련된 고귀한 정신력의 소유자였음을 보여준다"고 이병형장군은 말 했다. 가슴을 관통당하는 총상을 입은
박정희가 어떻게 그 고통을 누르고 "난 괜찮아"라고 할 수 있었을까는 여전히 불가사의로 남는다. 박정희는 시저가 암살단에 낀 브루터스에게 말했던
원망 같은 것도 하지 않았다. 2년 전에 암살당한 이스라엘의 라빈수상이 박정희와 비슷한 말을 남기고
운명한 사람이다. 가슴에 총을 맞고 병원으로 실려가면서 "아프긴 한데 별것 아니야"라고 말한 뒤 혼수상태에 빠져 사망했다. 기자는 이 라빈수상이
암살되기 하루 전에 마지막 인터뷰를 했었다. 라빈의 인상은 박정희와 흡사했다. 단아하고 소탈한 모습. 어렵게 태어난 국가의 짐을 고독하게 지고
걸어가다가 동족의 총탄에 맞아 죽어간 모습까지도 비슷 하였다. 라빈수상은 참모총장시절이던 1966년에 한국을 방문하여 박대통령을 만났었다.
그때의 추억을 이야기하면서 그는 박정희의 지도력을 높게 평가하였다. 박정희는 설마 나를 쏘겠는가 하는
자신감 때문에 피신동작을 하지 않았으리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바로 눈앞에서 총격이 이루어지고 피를 쏟으며 경호실장이 달아나고 하는 아수라장이
벌어질 때는 계산보다 본능적인, 조건반사적인 행동에 지배당한다. 박정희의 태연자약한 행동은 그의 본능으로 내면화된 사생관과 지도자도의 자연스런
발로였다고보아야 할 것이다. 그는 남 앞에서는 부끄럼 타고 누가 면전에서 칭찬을 하면 쑥스러워 하고
육영수와 선을 보러 갈 때는 가슴이 떨려서 소주를 마시고 간 사람 이었지만 죽음과 대면할 때는 항상 의연했다. 그는 여순반란사건 이후에 군내
남로당 조직 수사에 연루되어 체포되고 전기고문을 당한 뒤에 수사 책임자 백선엽 정보국장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박정희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었던 백선엽과 수사실무자 김안일은 지옥의 문턱에 서서 구원을 요청하던 박정희의 모습은 전혀
비굴하지가 않았고 의연했다고 전한다. 백 선엽장군은 "도와드리지요"하는 말이 무심코 나오더라고 회고했다. 인격이 그를 살린 것이었다.
1961년5월16일 새벽 한강 다리위에서 혁명군 선발대를 저지하는 헌병들의 사격이 쏟아질 때도 박정희는 태연했다. 1974 년8월15일
국립극장에서 문세광의 총탄이 날아올 때, 육영수가 피격되어 실려가고나서 연설을 계속할 때 그는 비정하리만큼 냉정했다.
10월26일 밤 나타난 박정희의 행동은 이런 과거행태의 연장선에서 자연스럽게 표출된 것이지 그에게 있어서는 특별한 것이
아닐수도 있다. 사선을 넘나들면서 죽음과 친해지고 그 죽음을 끊임없이 사색하여 드디어 죽음과 친구가 되어버린 박정희. 그가 제1탄을 가슴에
맞고서 제2탄을 기다릴 때까지의 시간은 1분 내외였을 것이다. 이 시간에 그는 의식을 지니고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허파 관통상을 당하면 허파의 혈관이 터져 다량의 출혈이 생기고 호흡이 곤란하게 된다.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면서 숨이 찬다.
이 상태에서 도 한 10분간은 의식을 유지할 수가 있다. 박정희의 사망진단서를 끊었던 국군서울지구병원 김병수 원장은 "김재규가 제2탄을
발사하려고 권총 을 갖다 대었을 때 박정희는 의식은 하고 있었지만 거부할 힘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정희는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의식하면서 그 1분을 기다렸다는 얘기다. 죽었다가 깨어난 사람들의 거의
일치된 증언은 숨이 넘어가기 직전 에는 자신의 생애, 그 중요한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지나간다는 것이다. 이 1분 사이 박정희의 뇌리를
스쳐지나갔던 장면들은 무엇이 었을까. 어머니의 얼굴. 며느리를 둘이나 본 44세의 나이에 박정희를 임신한
것이 부끄러워 이 생명을 지우려고 간장을 두 사발이나 마시고 기절했던 어머니는 효과가 없자 언덕에서 뛰어내리고 디딜방아를 배에 올려놓고 뒤로
넘어지기도 했으나 뱃속의 생명은 죽어주지가 않았다. 그리하여 '태어나지 못할 뻔했던 생명'이 태어났고 그에 의하여 우리나라의 운명 이 바뀌었다.
이00 여인의 얼굴. 첫 부인과 별거한 뒤에 장교시절에 만나 동거했던 이여인은 박정희가 숙군수사에 걸려
사형선고까지 받았다가 생환하여 군복을 벗었을 때 문관신분으로 겨우 군에서 밥벌이를 하고 있던 이 죄끄만 장교를 버렸다. 집을 나간 이여인을
찾아헤매던 때 박정희의 어머니는 아들 때문에 병을 얻어 죽었다. 직장, 연인, 어머니를 동시에 잃었던 이
시기의 박정희를 구해준 것은 김일성이었다. 그의 남침이 박정희를 살렸고 그 박정희에 의해서 김일성의 북한은 몰락의 길로 들어 서게 된다. 역사의
오묘한 복수인가. 육영수의 얼굴. 맞선을 보는 날 육영수는 박정희의 뒷모습을 먼저 보았다고 한다.
"군화를 벗고 계시는 뒷모습이 말할 수 없이 든든해 보였어요. 사람은 얼굴로는 속일 수 있지만
뒷모습으로는 속이지 못하는 법이에요.". 궁정동에서 박정희가 보여준 최후의 모습이 바로 그의 뒷모습일
것이다. 박정희의 뇌리에 마지막으로 남은 영상은 아마도 소복 입고 손짓하는 육영수였을 것이다. 가난과
망국과 전란의 시대를 살면서 마음속에 큰 응어리로 뭉쳐두었던 한의 덩어리를 뇌관으로 삼아 잠자던 민족의 에너 지를 폭발시켰던 사람. 쏟아지는
비난에 대해서는 "내가 죽거든 내 무덤 에 침을 뱉어라"면서 일체의 변명을 생략한 채 가슴을 뚫리고도 '체념한 듯 담담하게'(신재순 증언)
최후를 맞은 이가 혁명가 박정희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