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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최용신] 상록수의 꿈과 희망

鶴山 徐 仁 2006. 2. 5. 12:43

상록수의 꿈과 희망 최용신


샘골 여러 형제를 두고 어찌 가나. 애처로운 우리 학생들의 전로를 어찌하나. 애처로운 우리 학생들의 전로를 어찌하나. 어머님을 두고 가매 몹시 죄송하다. 내가 위독하다고 각처에 전보하지마라. 유골을 천곡강습소 부근에 묻어주오.

- 선생의 마지막 유언 중에서(1935. 1)

 

선생은 1909년 8월 함남 덕원의 두남리에서 최창희(崔昌熙)의 2남 3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로 12대조가 원산으로 옮겨온 이래 동해 영흥만에 자리 잡은 원산 인근의 덕원에 정착했다.

 

일찍이 기독교가 전래되고 근대문물이 들어온 이곳에서 조부와 부친이 설립한 사립학교에 입학하고 마을교회에도 다녔다.

 

어릴 때 앓은 천연두로 생긴 마마자국 때문에 놀림을 많이 받았으나 굳건한 신앙 생활과 봉사 활동으로 이를 극복하였다.

선생이 본격적으로 농촌계몽 활동에 헌신하기로 한 것은 1928년 원산의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협성여자신학교에 재학하면서부터 였다. 그것은 한국의 부흥은 농촌에 있고, 민족의 발전은 농민에 있다는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선생은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 총회 때 협성학생기독교청년회 대표로 참가하여 본격적으로 YWCA의 농촌계몽 사업에 참가했다.

 

1929년부터는 황해도 수안과 경북 포항 등지에서 봉사 활동을 하였다. 이런 현지 활동을 통해 많은 갈등과 자책감을 느꼈기 때문에 계몽 운동을 위해 학업마저 중단했다.

1931년 10월 YWCA 농촌지도원으로 경기도 화성군 반월면 천곡(샘골)에 파견된 선생은 예배당을 빌려 강습소를 개설하고 아동과 청년, 부녀자들을 대상으로 야학을 통한 문맹퇴치에 힘을 기울였다. 다른 한편으로 생활개선과 농가부업 장려를 위한 부녀회와 청년회를 조직하여 주민들 상호간에 신뢰감을 조성하는 데도 앞장섰다.

 

그러나 처음에 주민들의 이해 부족으로 냉대와 질시를 받았고, 일본경찰의 감시와 탄압을 받는 등 그 과정에서 겪은 어려움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굳은 노력으로 1932년 5월 강습소는 정식인가를 받았으며, 천곡학원(샘골학원) 건축발기회를 조직하고 유지들 및 YWCA의 보조로 1933년 1월 낙성식을 거행했다.

이즈음 선생은 보다 장기적이고 실천적인 농촌계몽 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리하여 1934년 새로운 지식과 학문을 충족시키고자 일본에 건너가 3월 고베여자신학교 사회사업학과에 입학하여 뒤늦게 향학열을 불태웠으나 별안간 각기병에 걸려 학업을 중단했다.

 

같은 해 9월 귀국과 동시에 다시 샘골로 돌아와 1934년부터 YMCA 보조금 중단으로 운영난에 빠진 천곡학원을 살리기 위해 다방면의 노력을 기울이던 중, 1935년 1월 23일 과로로 쓰러져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불과 26세의 나이였다. 한국의 농촌을 살리기 위해 헌신한 선생의 눈물겨운 행적은 심훈(沈熏)의 소설 『상록수』에서 실재화되어 일제하 농촌계몽 운동의 귀감이 되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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