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도(洪範圖) 민족의 백두산 호랑이 1868(고종 5)∼1943. 독립운동가. 일명 범도(範道). 평안북도 양덕 출신. 1907년 전국적인 의병봉기에 자극을 받고 있던 중 이해 9월 일제가 민중의 무장투쟁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총포급화약류단속법 銃砲及火藥類團束法〉을 공포, 포수들의 총을 회수하자, 그해 11월 차도선(車道善)·태양욱(太陽郁)과 산포대(山砲隊)를 조직, 의병을 일으켜 북청의 후치령(厚峙嶺)을 중심으로 갑산(甲山)·삼수(三水)·혜산(惠山)·풍산(豊山) 등지에서 유격전으로 일본 수비대를 격파하였다. 1910년 소수의 부하를 이끌고 간도로 건너가 차도선·조맹선(趙孟善) 등과 함께 포수단(砲手團)을 조직, 교포에게 광복사상을 고취하며 국내와 연락, 애국지사 소집과 독립군 양성에 진력하였다. 1919년 3·1운동 후 동만주에 거주하는 동포들이 간도대한국민회(間島大韓國民會)를 결성하자 그 예하의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총사령관에 취임하였다. 같은해 8월, 200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두만강을 건너 혜산진·갑산 등지의 일본군을 습격, 큰 전과를 거두었다. 이에 자신을 가지고 정예부대를 인솔하여 다시 압록강을 건너 강계(江界) 만포진(滿浦鎭)을 습격한 뒤 자성에서 3일 동안 일본군과 교전하여 70여명을 사살하는 대전과를 거두었다. 이후 최진동(崔振東)이 지휘하는 도독부(都督府)와 통합, 500여명의 대부대로 국내 진입작전을 감행하였다. 1920년 6월 최진동과 협력하여 종성(鍾城) 삼둔자(三屯子)부근에서 국경수비대와 격전을 벌여 120명을 사살하는 대전과를 올렸으며, 두만강 대안의 봉오동(鳳梧洞)에서 일본군 대부대를 전멸시켜 대전적을 올렸으니 이것이 유명한 봉오동전투이다. 또한 같은해 10월 청산리전투에서도 제1연대장으로 참가, 제2연대장 김좌진(金佐鎭), 제3연대장 최진동 등과 함께 일본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치욕적인 패배를 거듭한 일본군이 계속적인 추격을 해옴에 따라 독립군 조직을 총망라하여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 부총재에 선임되었으며 그뒤 간도지방의 김좌진·최진동부대와 함께 노령(露領)으로 이동, 흑룡강 자유시(自由市)를 새로운 근거지로 삼고 러시아군과 교섭하여 협조를 얻었으나, 러시아 공산당의 배반으로 독립군이 무장해제되고, 사살되거나 포로가 되는 등 이른바 자유시참변을 겪게 되었다. 이 사변 이후 1922년 고려공산당과 한족공산당이 통합되어 조직된 고려중앙정청(高麗中央政廳)의 고등군인징모위원에 임명되었으나 독립운동의 지도자로서 후진 양성에만 심혈을 기울이다가 1943년 시베리아에서 죽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梅泉野錄, 韓國獨立運動史(愛國同志援護會, 1956) 韓國獨立運動史(國史編纂委員會, 1967) 大韓民國獨立運動功勳史(金厚卿·申載洪, 韓國民族運動硏究所, 1971) 독립운동사 1·5(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1973) 독립운동사자료집별집 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4) 獨立有功者功勳錄 4(國家報勳處, 1987) 朝鮮民族運動年鑑(在上海日本總領事館, 東文社書店, 1946). 〈李相泰> [역사 인물의 흔적을 찾아서] 홍범도 장군 일본군 벌벌 떨게 한 '백두산 호랑이' 홍범도 장군은 가난한 머슴의 아들로 태어나 포수 생활을 하던 중 일제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자 독립군으로 활동했습니다. 장군은 당시 ‘백두산 호랑이’란 별명을 얻을 만큼 일본군에게는 가장 두려운 인물 가운데 한 분이었습니다. ★ 독립군 활동 활발히 펼쳐 ◀ 홍범도는 평양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결혼 후에는 아내의 고향인 북청으로 이사해 삼수와 갑산을 오가며 사냥을 했습니다. 삼수와 갑산은 백두산 자락의 깊은 산골이라 큰 짐승이 유달리 많았습니다. “피웅!” 홍범도의 화승총이 불을 뿜으면 어김없이 호랑이나 곰이 쓰러졌습니다. 홍범도는 이처럼 짐승들을 사냥하며 가족을 먹여 살렸습니다. 그러던 중 일본이 나라를 삼키기 위해 1907년에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키고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을 만들자, 독립군이 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무기를 뺏어 일본에 대한 저항을 막으려는 속셈이야.” “맞습니다. 농사꾼이 호미와 낫 없이 농사를 지을 수 없듯, 사냥꾼이 총 없이 어찌 살 수 있나요?” “그래, 차라리 일본군과 맞서 싸우세. 총으로 우리 터전을 지켜야 하네.” 홍범도는 짐승을 사냥하듯 일본군과 당당하게 맞서 싸웠습니다. “홍범도는 날아다니는 장군이야.” “그가 나타나면 일단 도망부터 가야 하므니이다.” 홍범도가 이끄는 독립군은 삼수 일대를 점령하고 일본군의 무기고를 불태웠습니다. 그리고 1908년 1월 갑산읍을 빼앗자‘날아다니는 장군’이란 별명을 얻었습니다. 그해 2월 12일에는 혜산 관공서를 습격하기도 했습니다. “지리도 잘 알고 총질도 잘해 참으로 그들을 상대하기가 어렵스므니다.” 홍범도가 이끄는 의병 부대는 함경도와 평안도 일대를 무대로 하루에도 몇 차례씩 일본군을 공격한 다음 곧바로 도망치는 게릴라 수법을 썼습니다. ▲ 홍범도 가족 사진. 큰아들 양순을 1908년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잃었다.(왼쪽) 크즐오르다의 홍범도 묘. 카자흐스탄 한인들은 홍범도 장군을 기리며 지금까지 장군의 제사를 지내고 있다.(오른쪽) ★ 봉오동 전투·청산리 대첩 1910년 일본에 나라를 완전히 빼앗기게 되자 홍범도 부대는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 연해주로 갔습니다. 연해주는 조선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홍범도는 이곳 연해주에 본거지를 두고 얕은 두만강을 건너 만주(간도)에 들어가 일본군과 싸운 다음 다시 연해주로 돌아오는 전술을 썼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홍범도는 넓은 만주 지역에 흩어져 있던 독립군 부대를 만주 화룡현 봉오동 계곡으로 모이도록 했습니다. “일본의 공세가 더 거세졌으니, 우리도 힘을 합쳐 적을 물리쳐야 하겠소.” 봉오동 일대에 700여 명의 독립군이 모였다는 소식을 들은 일본군은 이곳으로 군사를 보냈습니다. 전투는 3 시간 넘게 계속됐고 일본군은 거의 죽었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봉오동 전투’입니다. 이때 장군의 나이 53 세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패한 일본군은 만주 지역에서 독립군을 소탕하겠다며 대대적인 공세를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일단 일본군의 공세를 피하기 위해 백두산으로 들어갑시다.”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들은 백두산으로 가는 길목인 청산리에 속속 모여들었습니다. 이때 홍범도가 이끄는 독립군 부대도 청산리로 향하던 중 일본군과 전투를 치렀습니다. 이때 김좌진 장군의 북로 군정서군이 청산리에서 일본군과 맞서고 있다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당장 청산리로 달려가자!” 홍범도 부대는 김좌진 장군을 도와 일본군 후방을 공격해 승리했습니다. 이때 일어난 전투를 통틀어 우리는‘청산리 대첩’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홍범도가 독립군을 이끌고 대승을 거둔 봉오동 저수지 입구에 세워진 표지석. 중국 정부가 세운 것이다. 청산리 전투에서 패한 일본군은 만주에 사는 우리 민족에게 분풀이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바람에 1만 명이 넘는 동포들이 아까운 목숨을 잃었습니다. “우리가 만주에 있는 한 동포들의 피해가 큽니다. 연해주로 이동합시다.” 독립군 부대는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 연해주로 갔습니다. 그런데 러시아는 독립군을 해체하고 러시아군 밑으로 들어오라며 강요했습니다. 결국 김좌진 부대는 다시 만주로 건너갔고 홍범도 부대는 연해주에 남아 기회를 엿보게 됐습니다. 그러나 기회는 오지 않았고 러시아 정부는 연해주의 우리 동포들에게 중앙 아시아로 옮겨 가라는 통지를 보냈습니다. 일흔이 넘은 홍범도는 눈물을 삼키며 동포들과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그리고 그곳 카자흐스탄에서 극장 수위로 일하다가 1943년 76 세의 일기로 한 많은 생애를 마감했습니다. |
☆ 홍범도 장군 연보 ☆ 1868년 평양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남. |
/김남석(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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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 전투의 영웅 홍범도 독립전쟁 첫 승첩, 봉오동 전투 ▲ 봉오동 계곡, 치열했던 전적지가 지금은 저수지로 변하였다 ⓒ2005 박도 봉오동 전적지는 연변조선족 자치주 두만강변 도문에서 불과 30리 정도 떨어진, 우리나라와 중국 국경에서 무척 가까운 곳에 있다. 이곳은 1920년 6월 7일 항일 명장 홍범도를 사령으로 한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안무의 대한국민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가 연합부대를 결성한 군단) 부대가,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하여 두만강을 넘어온 일본군 제19사단 야스가와 소좌가 거느린 부대를 참패시킨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길이 빛나는 최초 승첩지이다. ▶ 함경북도 종성 강양동 일제 헌병 순찰소대 옛 터가 지금도 두만강 건너로 보인다 ⓒ2005 박도 봉오동전투는 사흘 전인 1920년 6월 4일에 있었던, 두만강변 삼둔자전투에서 비롯되었다. 그 날 새벽 30여 명의 독립군 소부대는 국내 진공작전으로 삼둔자를 출발하여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종성 강양동으로 가서 일제 헌병 순찰소대를 습격하고 돌아왔다. 그러자 일본군 2개 중대는 이를 보복하려고 독립군 추격에 나섰다. 이들은 두만강을 건너 삼둔자에 이르렀으나, 독립군을 발견하지 못하자 그 분풀이로 애꿎은 양민을 무차별 살육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독립군은 삼둔자 서남쪽 범진령 산기슭에 잠복하고 있다가 돌아가는 일본군을 섬멸해 버렸다. 이에 함경북도 종성군 나남에 주둔했던 일본군 제19사단은 독이 바짝 올랐다. 그들은 삼둔자전투 참패를 설욕하고,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월강 추격대대’(越江追擊大隊)를 편성하였다. 이들 추격대대는 야스가와 소좌 인솔로 6월 6일 밤 9시부터 두만강을 건너 이튿날 새벽 3시 30분에 독립군의 근거지인 봉오동으로 진격해 왔다. 이런 낌새를 미리 알아차렸던 홍범도 장군은 그들과 교전에 앞서 봉오동 주민들을 산중으로 미리 대피시켜 마을을 비우게 했다. 그러고는 봉오동 상동 험준한 사방 고지에 독립군 각 중대를 매복시켜 놓은 다음, 일본군 추격대대를 이곳으로 유인하여 포위망 속에 가둬두고 일망타진한다는 작전을 세웠다. 홍범도 장군은 독립군 1개 분대를 월강 추격대대가 쳐들어오는 길목에 내보내 교전하는 척하면서 봉오동 골짜기로 후퇴케 하여 그들을 유인했다. 그날 아침 8시 30분 무렵에 월강 추격대 첨병이 독립군 분대의 뒤를 쫓아 봉오동 들머리에 이르렀다. 여기까지 온 일본군 추격대 첨병은 독립군 분대를 놓치고는 봉오동 하동을 정찰한 결과, 독립군이 이미 겁을 먹고 죄다 북으로 도주한 것으로 여겼다. 그들은 추격대 본대를 불러서 하동 마을을 뒤지면서 미처 대피하지 못한 노약자를 살육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들 일본군 월강 추격대는 봉오동 하동을 실컷 유린한 다음 오전 11시 30분에 다시 대오를 정돈하여 중동과 상동을 향하여 진군했다. 그 날 오후 1시 무렵에는 일본군 전위부대가 사방 고지로 둘러싸인 상동 남쪽 300미터 지점까지 진출하여 완전히 독립군 포위망 속에 걸려들었다. 하지만 홍범도 장군은 곧장 사격 명령을 내리지 않고 주력부대를 묵묵히 기다렸다. 잠시 후 전위부대에 이어 주력부대도 독립군 포위망 속으로 깊숙이 들어왔다. ◀ 봉오골 반일 전적비 ⓒ2005 박도 그제야 홍범도 장군은 일제 공격을 알리는 신호탄을 발사했다. 이에 삼면 고지에 매복하고 있었던 독립군의 총에서는 일제히 불을 뿜었다. 뜻밖에 기습 공격을 받은 일본군은 필사적으로 돌격해 왔다. 하지만 유리한 지형을 미리 차지한 독립군의 맹렬한 집중 사격과 수류탄 투척으로 일본군 추격대는 사상자만 속출할 뿐이었다. 그들은 독립군 포위망 속에서 3시간 이상 끈질기게 버텼으나 이미 작전상 허를 찔려 시간이 흐를수록 사상자만 늘어날 뿐이었다. 그들은 더 이상 전투는 무모했음을 알아차리고는 후퇴했다. 통쾌한 승전이었다. 봉오동전투에 대한 전상자 피해는 독립군 일본군 양측의 주장이 엇갈린다. 비교적 객관적 자료인 당시 중국〈상해시보〉에 따르면 독립군이 일본군 월강 추격대를 150여 명이나 사살하여 크게 이겼다고 보도했다. 봉오동 전투의 영웅, 홍범도 장군 ▶ 여천 홍범도 장군 ⓒ2005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홍범도는 1868년 8월 27일(음력), 평양 서문 안 문렬사 부근에서 가난한 농사꾼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홍범도 아버지 홍윤식은 남의 집 머슴살이를 했다. 홍범도 어머니는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외가에서 자랐다. 그녀는 인물이 남달리 뛰어나 관기(官妓)로 뽑혀갈 처지에 이르자, 외가어른들이 서둘러 홍윤식과 혼인시켰다. 이들 가난한 부부는 생계에 어려움이 많았지만, 결혼 이태 후에는 아들을 얻는 기쁨을 누렸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뿐, 산모가 해산한 뒤 하혈이 심하여 이레 만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홍윤식은 동네 아낙네들에게 동냥젖을 얻어 먹이며 어린 아들을 길렀다. 그러나 그도 아들이 아홉 살 되던 해 열병으로 세상을 떴다. 일찍 부모를 여읜 홍범도는 머슴살이, 막일꾼 등 닥치는 대로했다. 그는 공장에서 막일꾼 생활 중에 공장주가 품삯을 일곱 달이나 주지 않고, 도리어 먹고 입고 잠잔 값을 받아야겠다는 데 너무나 어이가 없어서 공장주를 둘러치고는 그 길로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그는 외금강 신계사 주지 스님 앞에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그때 홍범도는 수도 생활 중에 여승 옥녀와 정이 들어 뱃속에 아이까지 가지게 되었다. 그들은 옥녀의 고향인 북천으로 가고자 금강산을 떠났다. 하지만, 원산 교외에서 불한당으로부터 변을 당한 홍범도는 옥녀와 생이별을 하고 방랑객이 되었다. 그는 그때 남에게 천대와 멸시를 받지 않고 살아가자면, 남보다 뛰어난 재주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그는 글을 배우지 못 했기에 무예를 닦는 길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홍범도는 강원도 회양에서 만난 포수로부터 사냥총 한 자루를 구입했다. 그 길로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서 사냥꾼생활로 생업을 삼으면서 사격술과 검술을 닦았다. 뒷날 일본군들이 홍범도란 이름을 듣기만 해도 간담이 오싹했던 백발백중 사격술과 신묘한 검술은 그때 익힌 솜씨였다. 홍범도의 사상과 인생길에 큰 파문을 일으킨 것은 1894년의 갑오 동학혁명과 이듬해 명성황후 시해사건이었다. 특히 일제의 낭인무리들이 남의 왕궁을 마음대로 포위해서 명성 황후를 난도질해 죽이고, 그 시신마저 장작더미에 던져 태워버렸다는 얘기를 듣고 난 홍범도는 울분이 하늘을 찔렀다. ◀ 봉오동 들머리에 있는 봉오골 반일 전적지 표지석 ⓒ2005 박도 1895년 10월, 홍범도는 강원도 단발령에서 만난 포수 김수협과 뜻이 맞아 항일 의병을 일으킬 것을 맹세한 후, 곧 무장한 일본군 12명을 통쾌하게 처치했다. 이를 시작으로 홍범도의 맹렬한 항일 무장투쟁이 펼쳐졌다. 일제 강압에 따라 정미 7조약이 체결된 후인 1907년 11월, 홍범도와 차도선은 의병대를 만들어 함경남도 후치령에서 일제 북청수비대를 섬멸하여 첫 개가를 올렸다. 그 뒤를 이어 홍범도 의병대는 함경남도 삼수·갑산에서 일제 군경과 수십 차례나 처절한 격전을 벌여서 모두 승리로 이끌었다. 경술국치 이듬해 1911년 봄, 홍범도는 정예부대를 인솔하여 첫 국내 진 격전을 감행하여 함경북도 경원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하여 개가를 올렸다. 또 1919년 10월에는 평안북도 강계 만포진을 공략하여 일본군과 3일간 격전을 치르면서 70여 명을 살상했다. 홍범도 의병부대는 신출귀몰하는 전술로, 지금도 홍범도 장군은 우리나라 게릴라전의 비조(鼻祖)로 불리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 독립 전쟁 효시(嚆矢)로 일컫는 1920년 6월의 봉오동전투는 홍범도 장군 지휘 아래에 이루어졌다. 아울러 우리나라 독립전쟁사에 가장 빛나는 1920년 10월의 청산리대첩 역시 홍범도 장군과 김좌진 장군의 연합작전으로 거둔 성과다. 홍범도 장군은 일제에게는 ‘나는 장군’으로 저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고, 우리 겨레에게는 독립전쟁의 영웅, ‘백두산 호랑이’로 추앙 받고 있다. 장군의 거룩한 발자취는 조국의 산과 계곡에, 압록강 두만강 굽이굽이에, 백두산 밀림과 드넓은 만주 벌판에, 러시아 연해주와 시베리아 황야에까지 남겼다. 홍범도 장군은 1943년 10월 25일, 러시아 카자흐스탄의 크질 오르다에서 75세를 일기로 구국의 생애를 마감하였다. ⓒ2005 박도 박도/오마이뉴스 |
선친 김성배 목사, 철학박사, 의학박사, 신학박사가 홍범도 부대에서 3년동안
독립군부대서기로 복무하다 훈춘지역 타마구 전투에서
총상을 입고 제대한 홍범도 부대임.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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