申 東 曄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는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 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네가 본 건, 지붕 덮은
쇠 항아리,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닦아라, 사람들아
네 마음속 구름
찢어라, 사람들아,
네 머리 덮은 쇠 항아리.
아침 저녁
네 마음속 구름을 닦고
티 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
볼 수 있는 사람은
畏敬을
알리라
아침 저녁
네 머리 우 쇠항아릴 찢고
티 없이 맑은 구원의 하늘
마실 수 있는 사람은
憐憫을
알리라
차마 삼가서
발걸음도 조심
마음 모아리며.
서럽게
아 엄숙한 세상을
서럽게
눈물 흘려
살아 가리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자락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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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태어날 당시
신동엽은 1930년 8월 18일 충남 부여읍 동남리의 가난한 초가에서 생계가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 2대 독자로 태어났다(전처 소생의 아들은 죽고, 후처인 그의 어머니가 그를
낳았기 때문에).
때문에 네 이복 누이들은 가난 속에서 신동엽의 희생양으로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2. 유년 시절
신동엽의 유년 시기는 일제의 군국주의가 수탈정책을 극도로 강화하여 헐벗고 굶주림이
지배하는 절대적 빈곤의 시대였다.
부여초등학교 시절에 신동엽은 과묵하고 내향적 성격이었다.
곧잘 깊은 사색에 잠겨 있었고, 6년간 내리 우등상을 탈 정도로 두뇌가 명석했다.
6학년 때 '내지성지참배단'의 그 학교 대표로 뽑혀 보름간 일본을 다녀 오기도 했다(이로
인해 그의 부친은 아들을 통한 신분 상승의 의지를 갖게 된다).
3. 전주사범 시절
1943년 입학.
그 절대적 빈곤의 시대에 가난한 수재들이 열망하는, 또는 선택할 수밖에 없는 곳이 바로
사범학교다(학비가 훨씬 적게 들고 의무적이지만 초등학교에 발령이 나기 때문에).
신동엽은 학우들과 잘 어울리지 않고 문학,종교,사상서에 파묻혀 살았다.
일제의 무리한 근로봉사와 굶주림으로 건강을 잃어가던 이 시기가 비로소 민족의식에
눈뜬 시기라고 추정해 봄직하다.
→ 재학 중의 8·15해방 : 그 당시 그의 반응은 알 수 없으나 그 후, 1948년 남한 총선을 반대한
동맹휴학 가담으로 학교로부터 퇴학처분을 받았다.
또, 그는 우익뿐만 아니라 좌익 학생들에게도 끌려가 심한 린치를 당하기도 했다.
그 이유는 좌·우익에게는 '중립'으로 여겨지는 그의 소박한 '민족주의' 때문이었다.
그에게는 이데올로기보다 민중 자체가 더 중요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모범적인 식민지 학생이나 혼자만의 문학세계에 빠져있던 모습과는 다른 내면의
변화을 나타낸다.
4. 단국대학 시절과
6·25
1949년 사학과 입학.
그는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고 진정한 민족주의가 좌절된 정치적 현실에 대한
좌절감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恨의 서정으로 표현한 <나의 나>를 쓴 것이 이 때이다(발표는 1962년 6월).
6.25 전쟁은 신동엽의 정신과 육체에 치명적 손상을 입힌 시기이다.
7월부터 9월까지 부여에서 인민군의 강제부역을 함으로써 수복 후 부산으로 도피, 12월
방위군으로 징집됨.
군간부들의 부정부패로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리다 이듬해 2월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귀향한다.
오랜 요양을 필요로 한 이 귀향길에서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여 민물의 날게를 생으로
잡아 먹는 바람에 뒷날 간디스토마로 고생하다 간암으로 요절하게 된다.
→백제 사적과 갑오농민전쟁 전적지 답사 : 대전 전시연합대학 재적 중.
이는 그가 1960년대 대표적 참여시인이 되게 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반봉건·반외세의 갑오농민전쟁에서 그는 '적'을 인식하게 되는 확실한 역사의식을 가진다.
5. 졸업 후
1953년 졸업 후 서울에서 친구의 헌책방 일을 하며 자취를 했다.
여기서 소설가 현재훈과 아내 인병선을 만난다.
열렬한 연애 끝에 1956년 결혼,부여에서 신혼집을 차렸으나 가난은 여전했다.
아내의 양장점 개업으로 안정된 생활을 누리게 되자 구상회 등 문학지망생들과 어울려
시인이 될 꿈을 키운다.
그 후 보령농고에 취직하였으나 디스토마가 발병해 각혈과 고열에 시달리게 되면서 가족과
헤어져 본가에서 요양한다(폐결핵으로 오인하여).
이때 詩쓰기에 몰두해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大地>를 썼고(1959년 조선일보에 20여행이
삭제되어 실림), 이 시로 인해 시인 박봉우와 만나 참여시인으로서 둘도 없는 지기가 되었다.
6. 서울 생활
교육평론사 재직, 본격적인 시인으로서의 삶의 시작.
1960년 [교육평론]에 <싱싱한 瞳子를 위하여>를 발표, 미래 지향적 태도를 보인다.
7. 4.19 혁명
시기
4.19의 체험은 그로 하여금 1960년대 대표적 참여시인이 되게 했다.
<학생혁명시집>을 엮어 4.19의 정신을 자유와 정의로 읽고, 승리와 그 감격을 노래했다.
그러나 미완의 혁명은 쓰라린 좌절도 함께 가져다 주었다.
→명성여고 교사로 재직 : 1961년.
이로써 사망할 때까지 8년동안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했다.
혁명의 좌절로 인한 정신주의에 몰두한 시기로 정신사적 시론 <詩人精神論>을 발표(1961.2),
무정부주의·동양적 정신주의·민족주의를 나타낸 시관을 보여준다.
8. 5.16 이후
4.19의 좌절로 더욱 정신주의에 침잠한다.
정지척 현실에 환멸을 느끼고 1962년 건국대학원에 입학, 정신주의로 도피해 버티고자
한다.
이 때 쓴 시는 참여시 성격이 강한 작품에도동양적 형이상학으로서의 정신주의가 지배하고
있다(시집<阿欺女>).
그 후 <주린 땅의 指導原理>(1963.11)에서야 부조리한 현실을 비판함으로써 정신주의 우세
로부터 돌아와, 현실참여적 성격을 더 강하게 띠게 된다.
9. 6.3 사태
1964년 굴욕적 외교인 한일회담 일정합의와 정보기관의 학원사찰로 인한 학생 시위.
그러나 계엄 선포와 많은 학생들,정치인,언론인이 구속되는 결과를 낳고 좌절한다.
→이로써 신동엽은 정신주의의 안주에서 현실로 뛰쳐나오게 된다(한일 협정 비준반대
서명참여).
적극적 현실참여로 나온 <발>, <4월은 갈아엎는 달>등이 발표된다.
10. 절정기
1967-1968. 개인 시사에서의 절정기.
→1967년 : 참여시의 극점인 <껍데기는 가라>(1월), 대작 <錦江>(12월)을 발표, 1960년대
참여시인으로서 확고하게 자리매김하게 된다.
→1968년 : 시인으로서의 삶이 절정에 이른 시기.
세상을 하직하기 직전의 한 해 동안 가장 왕성하게 창작을 했다.
<봄은>(2월), 오페레타<석가탑>, <술을 많이 마시고 난 어제밤은>(6월), <여름고개>(8월),
<散文詩1>(11월),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등 많은 유작이 창작되었다.
이 해 그를 확고한 참여시인으로 평가했던 김수영의 죽음을 체험한다.
11. 1969년
4월 7일 간암으로 사망.
3월 간암 진단을 받은 후, 퇴원하여 한약으로 버티면서 신체가 망가지고 혼수상태의 사경을
헤메며 투병하다 문병 온 남정현의 품에서 숨을 거두었다.
[신동엽님의 홈 : http://my.dreamwiz.com/garaya/dongyu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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