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에는 잘 살자"가 구호 | |||
[2005-12-29] | |||
대낮처럼 밝은 거리, 명멸하는 네온사인 간판, 풍성하게 차린 송년회 식탁을 마주하면 북한에서 쇠었던 망년회(송년회) 생각이 난다. 2000년까지 나는 평성시 배전부에서 근무했다. 12월 말이 되면 북한에서도 직장별로 망년회를 준비한다. 집체적으로 먹고 마실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는 주민들은 돈이 없어도 망년회만은 꼭 챙긴다. 힘들게 버티어낸 한 해의 근심을 홀가분히 털어버리려는 마음에서다. 준비는 알아서 능력껏 우리 작업반은 25명이었다. 반장은 한달 전부터 고기와 술을 구입할 계획을 세웠다. 반원 25명과 가족까지 모여 한끼 푸짐하게 먹자면 돼지 한 마리, 술 30리터는 있어야 했다. 이전에는 공장에서 음식재료들을 나누어주었지만, 식량난 이후에는 자체로 준비해야 했다. 당, 법 기관, 검열부서들은 전화 한 통으로 망년회 준비를 다 끝낸다. 그러나 일반 주민들과 비생산 단위의 망년회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반장은 “내가 술을 구할테니, 너는 농장에 나가 돼지와 쌀을 얻어오라”는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전기를 단속해 다행이었다. 당시 ‘교차생산조직’에 대한 당의 방침이 나와 유리했다. 당시 농촌에는 전기가 무척 모자랐다. 당의 방침으로 낟알탈곡을 우선적으로 해야 하지만, 하루에 전기를 5시간밖에 못쓰게 했다. 이후에는 다른 농장에서 전기를 쓰도록 넘겨야 한다. 이것이 북한전력계통에서 말하는 ‘교차생산 조직체계’다. 탈곡도 당의 방침이고, ‘교차생산’도 당의 방침이었다. 탈곡계획을 못하는 농장일꾼은 자리를 내놓아야 한다. 농장에서 5시간 전기를 쓰고 탈곡한다는 것은 어림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농장은 전력 리미트(한계)를 어기고 몰래 전기를 쓴다. 이런 농장을 단속하면 얼마든지 고기를 구할 수 있었다. 먼저 ‘도둑전기’를 쓰는 농장을 단속해야 했다. 나와 직장동료는 자전거를 타고 탈곡기 소리가 나는 농장을 찾아 순회하기 시작했다. 이틀째 되던 날, 탈곡장 쪽에서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불의에 탈곡장에 들어간 우리는 작업반장을 불렀다. ‘도둑전기’를 썼다는 조서를 쓰고 도장까지 받아낸 우리는 벌금을 물라고 들이댔다. 작업반장도 우리가 왜 그러는지를 거의 짐작하는 것 같았다. 연말이 되면 배전부를 비롯한 모든 감독기관들이 망년회 준비를 위해 총출동하기 때문이다. 작업반장은 “연말도 가까워 오는데 뭘 좀 지원하겠다”고 밝혀왔다. 우리는 그 자리에서 돼지 50kg짜리 한 마리와 쌀 한말, 콩 한말을 받고 조서를 기각해버렸다. 한편 식료공장에 갔던 사람들도 지배인에게 들이대어 술 30리터를 가지고 돌아왔다. "새해에는 잘 살자" 덕담 이렇게 우리는 마지막 날인 12월 31일 오랜만에 반장의 집에 모여 앉았다. 준비가 다 되자 반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고난의 행군을 살아가느라 모두 수고했다”고 말하고, “새해에는 잘 살아야 한다”고 격려했다. 지난날에는 ‘장군님의 배려에 보답하자’고 말을 많이 했지만, 요즘은 잘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을 ‘머저리’라고 한다. 굳이 말을 한다면 직장계획이나, 단결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발언한다. 반장은 여자들까지 잔을 가득 부어주며 “내년엔 어떻게 하든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고 힘을 주었다. 오랜만에 푸짐한 음식상을 마주한 사람들은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었다. 녹음기 테이프를 바꾸어 가며 ‘언제라도 갈 테야’ ‘사랑의 미로’ ‘까투리 사냥을 나간다’ 등을 불렀다. 북한에 있을 때 ‘사랑의 미로’가 중국연변 노래인 줄 알았는데, 여기 와서 보니 남한노래였다. 아직도 직장동료 성수가 녹음기 반주에 맞춰 엉덩이를 흔들며 디스코를 추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김광민/ 평남출신, 2003년 입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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