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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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헬로! 모차르트

鶴山 徐 仁 2006. 1. 12. 01:00
18세기 유럽은 ‘불멸의 천재’를 감당 못했다
35년 삶의 흔적 안타까워... 생활고에 시달린 빈 생활 10년 동안 12번이나 이사
`피가로의 결혼` 만든 `돔 골목길 5번지 시대`가 절정기... 베토벤·하이든도 방문

▲ 18세기 슈테판성당과 시민들의 모습. 모차르트의 시신은 1791년 12월 6일 화살표(←)의 시신보관소에 여러시간 방치되어 있었다.
빈의 겨울은 뼛속 깊이 춥고 변덕스럽다. 잔뜩 찌푸린 날씨는 비, 진눈깨비, 눈을 번갈아 뿌리며 하루에도 수십 번씩 오락가락한다. 그날 늦은 오후 빈에는 짙은 안개가 끼어있었다. 생 마르크스 공동묘지 인부들은 대여섯 구의 시체를 마차에 싣고와 구덩이에 내던졌다. 자루에 담긴 시신들은 아무런 표식도 없었고 그 위에 흙이 덮여졌다. 1791년 12월 6일 오후 빈 교외의 공동묘지 생 마르크스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날 그렇게 행려병자의 시신처럼 파묻은 시체 중에는 불멸(不滅)의 천재음악가 모차르트가 있었다.

그후 214년이 흘렀다. 모차르트가 묻힌 생 마르크스 공동묘지는 더 이상 교외가 아니다. 당시 모차르트 부인 콘스탄체와 몇 명의 친구들은 마차를 타고 1시간 걸려 이 공동묘지 입구에 도착했지만 지금은 버스로 15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다.

지난 11월 22일 오전,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는 가운데 기자는 공동묘지에 들어섰다. 공동묘지는 1784년부터 1874년까지 90년간 사용되었다. 공동묘지 정문에는 ‘모차르트 2006’과 관련된 장소라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완만한 경사의 길을 100여m쯤 오르니 왼편에 ‘모차르트 묘지’가 보인다. ‘W. A. Mozart 1756~1791’. 이게 전부다. 흔한 묘비명도 없고 그 옆에 어린 천사가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으로 요절한 천재의 곁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 돔골목길 5번지의 `피가로의 집`
빈시(市)는 60년 뒤 모차르트의 시신을 찾기 위해 묻힌 곳으로 추정되는 묘지를 파헤쳤으나 소용이 없었다. 모차르트 팬들은 모차르트의 어이없는 비참한 죽음 앞에 애통해 하고 묘비명조차 세우지 않은 18세기 빈 사람들의 처사에 분노한다. 21세기의 그들은 18세기의 빈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다.

청천벽력 같은 존재 모차르트는 빈에서 35년 인생의 마지막 10년을 보낸다. 1781년 봄부터 1791년 겨울까지 10년 동안 모차르트는 13곳에서 살았다. 모차르트는 빈의 20여곳에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 모차르트의 흔적은 대부분 빈의 한복판 슈테판성당을 중심으로 도보로 10~25분 거리에 펼쳐져 있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손바닥만한 공간에서 천재음악가는 절정의 10년을 보냈다.

모차르트가 태어나기 2년 전인 1754년, 합스부르크 제국은 최초로 제국의 심장부인 빈의 인구조사를 실시했다. 당시 빈의 인구는 17만5000명. 빈 인구는 1800년에 23만2000명이 되었다. 모차르트가 살던 당시 빈은 인구 20만의 도시였다. 2005년 빈의 인구는 200만명. 도시가 개발되고 확장되면서 모차르트가 살았던 흔적들은 몇 곳을 제외하고는 원래의 모습을 잃었다.

모차르트가 숨을 거둔 곳은 라우헨슈타인가(街) 8번지. 병약한 몸으로 의뢰받은 ‘레퀴엠’을 작곡하다 미처 끝내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한 그 집. 라우헨슈타인가 8번지는 빈 최고의 번화가 카른트너가와 인접해 있다. 모차르트 팬들은 가슴 아파한다. 말년의 모차르트가 얼마나 돈에 쪼들려 힘들어했는지를. 천재음악가의 비참한 마지막 나날을 지켜본 그 집이 있던 자리에는 빈에서 가장 화려한 스테플 백화점이 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닌가. 백화점 후문에는 ‘1791년 12월 5일 모차르트가 사망한 곳’이라는 안내판이 붙어 있다. 사망진단서에 기록된 그의 사인은 급성 속립성 발진. 입관은 프리메이슨단의 의식에 따라 두건이 달린 검은 외투가 입혀졌다.

그의 장례식은 걸어서 10분도 걸리지 않는 슈테판성당에서 치러졌다. 9년 전 콘스탄체와 결혼식을 올렸던 성당에서 생의 마지막 의식이 초라하게 치러졌다. 성당으로 들어가서 왼편에 있는 십자가소성당. 모차르트의 시신은 이곳에서 약식 장례식이 끝난 뒤 성당 뒤편 시신보관소로 옮겨졌다.

그는 여기서 여러 시간을 이름 없는 이들과 함께 누워있었다. 모차르트가 누워있는 곳에서 돔(Dome) 골목길 5번지까지는 100여 걸음, 엎어지면 코 닿을 데다. 모차르트는 누워있으면서도 돔 골목길 5번지에서 보낸 아름다운 나날을 떠올렸을 것이다. 골목길도, 집도 옛날 그대로다. 모차르트는 이 집에서 1784~1787년까지 3년여 살았다. 모차르트가 이 집 2층에 살면서 유명한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을 작곡했다고 해서 ‘피가로의 집’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모차르트 전문가이드 라이너 레훼브는 “모차르트는 ‘피가로의 결혼’의 대성공으로 이곳에서 경제적으로나 명성으로나 가장 성공적인 시간을 보냈다”고 설명한다. 1995년 타임지가 지난 1000년의 가장 위대한 음악으로 선정한 곡이 바로 ‘피가로의 결혼’이 아니었던가.

▲ 베링게르가 26번지

‘피가로의 결혼’을 쓴 1785년에 그는 피아노 5중주곡을 썼다. 평론가들은 1785년을 창작과 성찰에 있어 위대한 해라고 평가한다. 2층은 큰방 네 개와 작은방이 두 개나 되었다. 모차르트는 악상이 떠오르지 않으면 상상력에 불이 붙을 때까지 방안을 중얼거리면서 왔다갔다 했다.

돔 골목길 5번지의 모차르트하우스

▲ `돈조반니`를 쓴 장소에 있는 부조
돔 골목길 5번지의 모차르트하우스는 음악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7살의 베토벤은 모차르트의 명성을 듣고 독일 본에서 14일간의 마차 여행 끝에 빈을 찾아온다. 베토벤은 이 집에서 모차르트를 만났고 그 앞에서 피아노 연주를 한다. 모차르트는 베토벤에게 최고의 찬사를 했다. 동시대의 위대한 음악가 하이든 역시 이 집을 방문한다. 18~19세기 위대한 음악가 3인이 흔적을 남긴 집이다.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저 유명한 피아노협주곡 21번을 이야기하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피아노협주곡 21번 2악장은 1967년 영화 ‘엘비라 마디간’의 배경 음악으로 사용되면서 영화명이 별칭이 되었다.

기자가 사진을 찍고 있는데 지도를 든 사람들이 연달아 모차르트하우스 앞을 서성거린다. 2006년 1월 27일부터는 박물관 모차르트하우스로 문을 연다. 입장료는 9유로. 비록 비참한 말년을 보냈지만 모차르트가 이 집에 살면서 한때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고 하니 그래도 덜 미안하다.

모차르트는 돔 골목길에서 교외로 이사를 했다. 란트-하우프트가(街) 75~77번지. 모차르트가 1787년 4월부터 1787년 12월까지 9개월을 살았던 집이다. 그는 이 집에서 오페라 ‘돈 조반니’를 썼다. 지금은 아파트로 변한 이 공동주택의 현관으로 들어서자 모차르트 얼굴이 벽에 부조(浮彫)되어 있다.

1788년 모차르트는 빈 교외의 집, 베링게르가 26번지에서 교향곡 39·40·41번을 비롯한 수많은 기악곡을 작곡했다. 모차르트는 월세로 이 집에 들어왔다. ‘시내 나가기가 어렵지만 봄 여름 가을 동안 정원이 있는 거나 마찬가지로 풍광이 좋다’고 편지에 썼다. 지금은 지하철 2호선 쇼텐트역에서 내려 전차를 갈아타면 금방이다. 전차에서 내려 베링게르가를 걷고 있는데 눈발이 더 거세진다. 1788년, 모차르트는 경제적 궁핍이 극에 달했던 시점이 아닌가. 가장으로서 그의 인생은 눈보라 휘몰아치는 겨울이었다. 모차르트는 이 집으로 이사온 첫날밤 프리메이슨 동지에게 돈을 빌려달라는 편지를 쓴다.

“아시겠지만 분할대금을 받아서 살다보면 다음번 돈이 나올 때까지는 참 어렵거든요. 아니 생활해나가기가 불가능하다고 해야겠지요. 얼마간이라도 모아둔 돈이 없으면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으니 말입니다. 역시 무일푼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군요. 그러나 이번에 호의를 베풀어주시면 저로서는 우선 급한 지출을 적당한 때에 해결할 수가 있겠습니다. 지금은 지불을 미룰 수 있는 한 미뤄온 상태라 수입이 들어와도 바로 빼앗겨버리기 때문에 상황이 아주 안좋거든요.”

▲ 모차르트 숨진 장소.
모차르트가 걸었던 그 길을 걷고 있는 순간 눈발에 실려 들려오는 교향곡 선율을 들었다. 그것은 교향곡 40번 G단조였다. 기자가 40번 교향곡을 허밍하자 모차르트 전문 가이드 역시 따라했다. 우리는 교향곡 40번을 읊조리면서 걸었다. 추위는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다.

옛날 집은 사라지고 없었지만 그 자리에 ‘모차르트가 이곳에서 오페라 코시 판 투테와 교향곡 39~41번을 작곡했다’라는 안내판만이 반긴다. 돈을 구걸하는 비굴한 편지를 써야만 했던 그 손으로 모차르트는 어떻게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곡을, 그것도 단 10주 만에 쓸 수 있었을까. 그 앞에 서니 40번 G단조는 더 큰 볼륨으로 울려왔다.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신비한 전율이었다. 육신은 사라졌지만 그가 남긴 음악은 살아 있었다.

고향을 떠나 위대해진 모차르트

빈 서부역에서 잘츠부르크행 기차를 탔다. 열차표를 사니 317㎞의 거리라고 찍혀나온다. 18세기 잘츠부르크~빈은 마차로 6일이나 걸렸지만 21세기의 우리들은 3시간10분 만에 가는 거리다. 모차르트가 음악가로서 위대해질 수 있었던 것은 잘츠부르크와 과감히 결별을 선언했기에 가능했다.

그가 종교권력이 주는 안정된 삶을 거부한 채 빈에 온 것은 1781년. 빈에서 그는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프리랜서 음악가로 활동하며 황금기를 열었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프리랜서 음악가-. 자유롭게 하고 싶은 음악을 하며 생활하는 이런 상황은 그를 후대(後代)에는 영원불멸의 존재가 되게 했지만 당대(當代)에는 비참하게 만들었다.

▲ 모차르트가 묻힌 곳으로 추정되는 묘소.
잘츠부르크로 가는 기차 안에서 마차를 타고 잘츠부르크를 떠나 빈으로 가는 천재 음악가의 여정을 생각해본다. 잘츠부르크 시절 모차르트는 종교권력의 권위주의에 숨막혀 했다. 잘츠부르크 궁정악장 시절을 모차르트는 ‘군주 밑에서의 종살이’라고 표현했다. 모차르트는 요리사나 시종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푸대접을 받았고 대주교는 음악가 하인이 앞문으로 다니는 것이 못마땅해 뒷문 출입을 명했다. 그러나 모차르트는 당당히 앞문으로 출입했고 이것이 대주교의 미움을 사 궁정악장직에서 해고된다. 모차르트는 빈으로 온 직후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하느님만이 아실 거예요. 제가 아버지에게서 멀어지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를. 하지만 밥을 빌어먹더라도 절대로 또다시 그런 군주 밑에서 종살이를 하지는 않겠습니다. 그 일은 제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잊혀지지 않을 모욕이었으니까요.”

35년 인생의 25년을 보낸 곳, 잘츠부르크. 이곳은 모차르트가 살았던 18세기와 거의 변함이 없다. 모차르트가 살던 당시 잘츠부르크 인구는 1만5000명. 특히 생가가 있는 구시가는 250년 전 그대로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구시가는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해 개발이 엄격히 제한되고 있어 모차르트와 그의 가족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현재의 인구는 15만명으로 늘어났지만 주로 잘자흐강 건너편 신시가지를 중심으로 도시가 확장되었다.

모차르트의 음악세계는 유년의 학습기(1756~1774)와 작품 성숙기(1774~1781)로 구분되곤 한다. 유년의 학습기는 생가에서 살던 시절을, 작품 성숙기는 보통 ‘모차르트 저택’으로 불리는 마카광장 8번지에서 살던 때를 각각 말한다. 게트라이더 생가가 너무 비좁자 아버지 레오폴트는 잘자흐강 건너편, 마카르트 광장의 집으로 이사왔다. 1774년 이후 이 집에서 모차르트 누나 난네를이 1784년 결혼할 때까지 살았고 아버지 레오폴트가 1787년 눈을 감았다.

잘츠부르크 생가에서 만난 생과 사

모차르트는 이 집에서 150곡 이상을 작곡했다. 널리 알려진 곡이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 하프너 세레나데, 바이올린 협주곡 K216 등이 있다. 이 집에서는 음악가 가족의 단란한 가족애가 느껴진다. 모차르트가 뮌헨에서 잘츠부르크의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1780년 11월 15일)와 역시 뮌헨에서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1775년 1월 14일), 아버지 레오폴트가 딸에게 보낸 편지(1787년 3월) 등이 있다. 모차르트 가족은 수많은 편지를 주고 받았고 이것이 결국 귀중한 역사적 자료가 되었다. 이 집에는 난네를이 쓴 일기장(1780년 9월)도 전시돼 있다. 난네를의 일기를 통해 18세기 생활상이 그대로 복원된다.

모차르트가 1780년 무렵 사용한 포르테(forte)피아노도 눈길을 멈추게 한다. 안내원은 “모차르트는 이 포르테피아노로 수많은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했다”고 설명한다. 이 집에서는 모차르트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는 게 있다.

밀로스 포먼 감독이 연출한 영화 ‘아마데우스’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알 것이다. 모차르트는 장난기가 많았고 실제로 언행이 천진난만했다. 종교권력이 개인의 사생활조차 간섭할 만큼 엄격했던 18세기의 사회 분위기에 비춰보면 모차르트는 별종으로 보였을 법하다. 이 집에는 일종의 표적 맞히기 게임 그림이 세 개가 붙어있다. 모차르트가 즐겨했던 놀이다. 그가 1777년 11월에 보낸 편지에서 묘사된 대로 그림을 그려 만들었다고 한다.

구시가의 300년 이상된 건물에는 전부 모차르트의 흔적이 남아 있다. 대주교가 살았던 호엔잘츠부르크 성채 내부의 구석구석을 둘러보면 16~18세기 종교권력의 가공할 파워를 몸서리치게 체험하고도 남는다. 어린 모차르트는 이 성채에 갇혀 깊은 밤 무서움에 떨며 작곡하곤 했다.

생 피터스 교회는 모차르트가 1783년 C단조 미사곡을 처음으로 연주한 곳이다. 모차르트는 2층에서 직접 오르간을 연주했다. 아버지와 소원한 관계였던 모차르트는 미사곡 연주를 위해 잘츠부르크를 방문하면서 아버지와 화해하게 된다.

▲ 모차르트 생가(왼쪽)과 살던 집.

모차르트 흔적 찾기의 하이라이트는 생가(生家)에 있다. 모차르트가 어린 시절 아버지 레오폴트가 쓴 바이올린 교본을 보며 켰던 바이올린, ‘마술피리’를 작곡할 때 사용한 피아노 전신인 클라비코드(clavichord)도 모차르트 팬들의 발길을 오래 붙든다. 클라비코드에는 콘스탄체의 친필 확인서가 붙어 있었다.

기자는 생가의 전시물 중 ‘탄생과 죽음’이라는 코너에서 발을 뗄 수가 없었다. 성당교구의 통계에 따르면 잘츠부르크에서 1751~1760년에 1795명이 태어났고 이 중 1071명이 열 살 이전에 사망했다.

모차르트 부모는 일곱 명의 아이를 낳았으나 다섯을 잃고 모차르트와 난네를만이 살아남았다. 영아 사망률이 60%에 달하던 시절에 모차르트는 가까스로 생존했다. 모차르트는 아홉 살 때 다시 천연두에 걸려 사경을 헤맸지만 극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모차르트와 콘스탄체는 역시 여섯 명의 아이를 낳았지만 이 중 두 아들만이 살았다. 이것을 보면 모차르트가 35년을 산 것만으로도 기적이고 신의 섭리가 작용했던 것이 아닐까. ‘모차르트 평전’을 쓴 필립 솔레르스가 그의 비참한 죽음에 대해 해석을 내렸던 게 생각났다.

“신은 우리에게 그를 보내주었다가 다시 데려갔다. 우리는 그를 감당할 자격이 없었지만, 그는 우리를 다른 세계로 데려간다.”

빈ㆍ잘츠부르크 = 글ㆍ사진 조성관 주간조선 차장대우(mapl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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