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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슈만의 사랑,창작의 젖줄 클라라

鶴山 徐 仁 2006. 1. 9. 23:57

슈만의 사랑,창작의 젖줄 클라라
 
예술의 어느 특정분야에서 뛰어난 사람이 다른 예술분야에서도 만만치 않은 재질을 발휘하는 일은 결코 드문 일이 아니다. 가령 멘델스존이나 쇤베르크등이 미술에서도 상당한 역량이 있었다든가, 레오나르도다빈치는 미술이나 조각에서 뿐만 아니라 건축, 물리학을 비롯해서 르네상스 시대에 가장 앞선 음악 이론가였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가 하면 슈만은 문학적 재질이 비상한 예술가였음을 엿볼수 있다. 아무튼 문학가든 음악가든 모든 예술 창조에는 왕성한 상상력이 창조의 영감으로 작용하게 되지만, 슈만 또한 상상력의 누룩이 풍부한 예술가였다.
창조적 상상력 또는 영감의 원천은 사람마다 다르다. 슈만의 경우, 그것은 어쩌면 그의 분열이었을 것이다.그는 자신의 두 분신 에게 플로레스탄(Florestan)과 오이제비우스(Eusebius)라는 이름을 붙여 주고 그 두 필명을 번갈아 사용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여왕과 시녀들 자기 내부의 활달하고 저돌적인 존재는 플로레스탄, 그리고 꿈꾸고 내성적인 또 하나의존재는 오이제비우스였다. 때로는 오이제비우스로, 때로는 플로레스탄으로 변신하면서, 그는 스스로가 무성하게 꽃피운 환상으로 로맨티시즘의 성곽을 쌓아갔다.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 , 1810 ~1856)은 일찍부터 그를 괴롭혔던 정신분열증세와 함께 문학적인 기질도 그의 아버지로부터 물려 받았던 듯싶다. 독일남부 작센지방의 츠비카우라는고장에서 서적상을 하면서 조그만 출판사도 경영하고 있었던 슈만의 아버지 아우구스트는, 슈만이 태어났던 바로 그 해에 정신착란을 일으킨적이 있었지만 언제나 책과 공상속에 파묻혀 꿈을 꾸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아들이 자신을 닮아 음악과 책을 좋아하고 공상에 탐닉하는 것을 보자 내심 무척 기뻤다. 그가 항상 꿈꾸어 왔으면서도 이룩하지 못했던 꿈이 그의 아들을 통해서 이루어 질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고 있었던 탓이다.
슈만이 16세가 되었을 때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베버에게 보내 음악을 공부시키려고 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바로 그 무렵 베버는 세상을 떠났고, 그 한 달 후, 설마 저승까지 따라가서 아들을 맡아달라고 조를 셈은 아니었을테지만 , 슈만의 아버지도 베버를 뒤따라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하마터면 주책없는 남편 때문에 자식에게 음악을 가르칠뻔 했던 아슬아슬한 고비를 넘기게 되자, 그의 어머니는 깊은 숨을 내쉬면서 자식의 장래에 대해 새로운 설계도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한편 슈만은 그의 어머니가 그의 미래를 어떻게 뒤바꾸려 고 획책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주변에 있는 많은 여인들을 사랑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누구나 어떤 대상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법은 좀처럼 드물다. 대체로는 자신의 환상속에서 미화되어 창조된 대상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 예사지만, 특히 슈만처럼 환상적인 사람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나니(Nanni Patsch)와 리디(Liddy Hempel)에 대한 슈만의 풋사랑도 그의 환상이 빚어낸 하나의 신기루였을 테지만, 슈만은 그 두 소녀를 동시에 사랑하면서 베버에게 음악을 배우지 못한 좌절감을 삭이고 있었다. 슈만이 구축했던 환상의 성을 차지했던 또 하나의 여인은 의사의 아내이자 소프라노 가수 이기도 했던 아그네스(Agnes Carus)였다. 젊고 발랄한데다가 지성적이었던 아그네스는 슈만에게 있어 한동안 꿈의 여왕이었지만,그렇다고해서 그 여왕 때문에 나니와 리디 등 시녀를 잊어 버린 것은 아니었다.
여왕은 여왕대로, 시녀는 시녀대로 그의 '환상의 성'을 사랑의 화원으로 꽃피게 한 아름다운 꽃들이었으므로. 그는 아그네스를 위해 <xxx를 위한 노래>,<그리움>,<나는 네가 우는 것을 보았다> 등의 가곡을 작곡해서 헌정했는데, 아그네스는 슈만이 비록 연하의 소년 이기는 했어도 그의 사랑을 무척 자랑스럽고 흡족하게 여기고 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녀는 기회 있을 때마다 그의 노래를 불렀기 때문이다.
이렇듯 많은 여인들 사이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슈만은 1828년 (18세 때) 어머니의 권고로 라이프치히 대학의 법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그는 애초부터 법학에는 관심이 없어 대학에서도 문학 강의만 들었고, 집에서는 피아노만 두들겨대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 해 8월, 그는 라이프치히에서 가장 유명한 피아노 교사 프리드리히 비크(Friedrich Wiek)를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되었다.
그때 비크 교수의 딸 클라라는 고작 9세여서 사랑의 대상으로 삼기에는 너무 어렸다. 슈만은 깜찍하도록 사랑스럽고도 새침떼기였던 클라라를 귀여워하면서 눈여겨보기는 했어도, 그녀가 자라기를 기다려 언젠가는 아내로 맞겠다는 생각을 그때부터 지니고 있었을 리는 없다.

에르네스티네와의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 그 무렵 슈만은 비크 교수 문하의 동문이었던 에르네스티네(Ernestine von Fricken)에게 끌려 들었다. 17세의 발랄하면서도 이따금 우수의 그늘이 지는 에르네스티네에게 슈만은 넋을 잃고 있었다. 한창 꽃피는 나이인데다 성격도 무척 밝았던 그녀가 이따금 그늘진 모습을 하고 있었던 까닭은 프리켄 남작의 사생아라는 신분 때문이었을 것이다.
에르네스티네는 슈만의 사랑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고, 그녀의 어머니도 슈만을 괜찮은 사윗감으로 여겨 두 연인은 곧 은밀하게 약혼을 했다. 그러나 비록 사생아라 해도 무명의 음악가 지망생에게 딸의 장래를 맡길 수 는 없다고 생각했던 프리켄 남작은 서둘러 라이프치히로 달려가 딸을 아슈 (Asch)의 고향집으로 데리고 가버렸다.
슈만은 <사육제> (op.9) 라는 작품속에 그 사랑의 추억을 되새기면서 이렇게 적었다. ' 이 곡은 특별한 목적으로 씌어진 것으로 2~3곡을 제외하고는 ASCH라는 음계명으로 꾸며져있다. 아슈(Asch)는 내가 잊을수 없는 사람이 살고 있던 보헤미아의 작은 마을인데, 이상하게도 슈만(Schumann)이라는 내 이름 속에도 그 문자가 들어있다.'
<사육제>라는 이름은 나중에 붙여졌다. <사육제>는 1)서곡 2) 피에로 3) 아를르캥 4) 고귀한 왈츠 5) 오이제비우스 6) 플로레스탄 7) 코케토 8) 응답 9) 나비 10) 춤추는 문자(ASCH-SCHA) 11) 키야리나 12 )쇼팽 13) 에스트렐라 14) 재회 15) 판탈롱과 콜롱빈느 16) 알르망드푼의 왈츠와 파가니니 17) 고백 18) 프롬나드 19) 휴식 20) 필리스틴에게 대항하는 다비드 동맹원의 행진 등으로 되어있다.
여기에는 그 자신을 오이제비우스와 플로레스탄으로 표현한 것 이외에 클라라는 키야리나 (11곡)로, 에르네스티네는 에스텔라(13곡)로 표현되어 있지만, 거의 전곡을 에르네스티네의 고향 아슈(ASCH)의 음계명으로 꾸미고 있다는 것을 보더라도 그가 그녀에 대해 얼마나 집착하고 있었는지 짐작할 만하다.
슈만은 피아노를 늦게 시작했기 때문에 단시일에 기교적인 장벽을 극복해 보려고 애썼다. 그러기 위해 한 손가락을 고정시킨 채 나머지 손가락을 움직이게 하는 기구를 고안해서 운지법의 숙달을 꾀했지만, 그것이 화근이 되어 손가락에 고장이 생겨 피아니스트가 되려는 꿈을 버리고 작곡에 전념하게 된다.
다행히도 그에게는 끊임없이 창작의 영감이 샘솟아 그것이 음악이 되어 흘러 나왔고, 그 영감은 문학적인 것과 음악적인 것이 뒤섞인 환상적인 것이었다. ' 음악은 나에게 있어 영혼의 완벽한 표현 수단이다. 이제 나는 나의 노래를 그칠수 없다.
마치 나이팅게일처럼, 나는 죽을 때까지 나의 노래를 계속해서 부를 것이다.' 그가 이런 글을 적어 넣었던 그의 일기장은 그의 온갖 꿈이 기록되는 영감의 저장탱크라는 구실도 하고 있었다. 자신의 이중성을 오이제비우스와 플로레 스탄으로 나눈 것도 바로 그 일기장을 통해서 였다. 그리고 그는 그 일기장 에서 그가 사랑하거나 좋아하는 사람의 이름을 '좀더 아름다운 이름' 으로 바꾸어 놓았는데, 클라라는 릴리아 또는 키야리나 였고, 클라라의 아버지 비크는 라로 선생님, 그와 깊은 관계를 맺었던 소녀 크리스텔은 카리타스 였다.
사육제에 등장하는 그 밖의 인물들도 이미 그의 일기장에서 창조되었던 존재들인가 하면, 다비드 동맹이라는 가공의 단체가 그의 환상 속에서 만들 어져 그 일기장에 등록 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가 좋아했던 파가니니나 쇼팽등은 그들도 모르는 사이에 그 동맹의 동지가 되어 있었던 반면, 그가 싫어했던 사람들은 동맹의 적으로 돌려졌다. 그 일기장에는 클라라가 자주 등장했지만, 그녀가 사랑의 대상으로 언급된 것은 1835년 10월20일이 처음이었다. 그때 슈만의 나이는 25세, 클라라는 16세의 한창 무르익어가는 소녀였다.
그 날 슈만은'오니제비우스 키야리나의 포로가 되다' 라고 적었고, 그 한 달 후에는 첫 키스의 황홀함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재판 끝에 클라라와의 결혼에 성공
그때 클라라는 피아니스트로 이미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장래가 크게 촉망되고 있어 그녀의 아버지 비크 교수의 가슴을 크게 부풀게 했다. 그런 귀엽고 소중한 딸을 그 장래가 전혀 투명치 않은 제자 슈만이 넘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자 노발 대발한 비크 교수는 갖가지 수단을 동원하여 두 연인을 떼어놓으려 애썼다.
클라라를 데리고 멀리 연주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슈만에게 클라라를 단념 하도록 위협 하기도 했으나, 비크의 갖가지 수단과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사이는 점점 더 밀착되어, 아버지와 두 연인 사이의 갈등은 날로 골이 깊어갔다. 슈만은 슈만대로 비크 교수를 설득 하려고 애썼지만, 끝내 그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히자 슈만은 클라라가 성년이 되기를 기다릴수 밖에 없었다.
마침내 법정의 중재로 두 사람이 결혼한 것은 1840년, 클라라가 21세, 슈만이 30세 때의 일이었다. 갖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부부로 맺어 졌을 때, 슈만은 그 성취감과 행복감으로 그 해에만 1백곡이 넘는 가곡을 작곡하여, 1840년은 흔히 슈만에게 있어 '가곡의 해' 로 불리기도 한다.
예술가의 부부관계란 예술창조에 긍정적으로 작용하기보다는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더욱 많다는 것이 일반적인 정설이다.
그리고 예술가는 작품(production)과 자손 (reproduction)중 어느 한 쪽에 치우치면 상대적 으로 반대편의 생산이 약화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죠르쥬 바타이유(George Bataille) 의 주장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자면 예술가에게 있어 지극한 부부애란 종종 창조력의 중화작용과 약화라는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하이든과 셰익스피어가 그 많은 작품을 남길수 있었던 것은 부부관계가 원만치 못했던 탓이며, 베토벤과 슈베르트 또한 그 창조적 영감이 마르지 않았던 것은 독신인채 이성에의 그리움이 끊임없이 창조적 영감으로 작용 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에는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설령 그런 주장을 믿지 않는다 해고 사랑의 불꽃이 창조적 영감으로 작용 하는 반면, 결혼생활에서는 모든 것이 그 밀도를 잃게 된다는 것을 의심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슈만의 경우는 달랐다. 결혼한 후로 클라라는 슈만에게 있어 언제나 영감의 원천 이었기 때문이다. 슈만은 결혼기념으로 새로운 일기장을 마련하고 그 첫 장에 이렇게 적어 넣었다.
'나의 사랑하는 아내, 당신이 스물 한 살을 맞게 되는 오늘(그들은 클라라의 생일 바로 전날인 9월12일에 결혼했다) 이 특별한 날을 맞아 나는 당신께 참으로 뜨거운 키스를 보내오.' 이렇게 시작된 결혼 일기에 슈만은 그의 모든 것을 적어나갔다.
클라라를 사랑하기 전에 그가 수많은 여인들을 사랑했던 것과는 달리, 이제는 그 일기장에 오직 한 사람의 여인 클라라가 등장할 뿐이라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었다. 교향곡 1번을 작곡 하고난 결혼 이듬해에 그의 일기장에는 그의 창작계획이 이렇게 적혀 있었다.
' 나의 다음 교향곡엔 사랑하는 아내 클라라의 이름을 붙일 것이다. 플륫과 오보에 그리고 하프로 클라라의 모습을 그려갈 작정이다.'
미완성으로 끝난 <클라라 교향곡>
그러나 이 <클라라 교향곡>은 끝내 완성되지 못했고, 단악장으로 된 교향적 환상곡이 스케치로 남아 있을 뿐이다. 클라라를 가장 훌륭하게 표현할 수 있는 악기란 말할것도 없이 피아노인데도 악기편성에서 피아노가 빠진 채 플륫과 오보에로 클라라를 그리자니 작품의 구상이 순조로울 리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슈만은 그 교향곡의 구상을 피아노 협주곡으로 바꾸고 나서 연주 여행중인 클라라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써보냈다.
' 이 협주곡(a단조)은 교향곡과 협주곡 그리고 대규모의 소나타를 융화시켜 작곡한 것이오.
물론 당신의 모습을 구석구석에 새겨넣었소. 나는 피아노의 명인들을 위한 작곡에는 능하지 못하니까 기교적인 요소와는 다른 것을 추구 하느라 애썼다오.'
슈만은 자신의 작품이 고도의 기교를 요구하는 것이 아닌 듯이 이야기 했지만, 사실은 뛰어난 연주기교를 구사하지 않고서는 이 작품을 연주하기란 불가능 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다만 그 기교가 기교를 위한 허식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그와 클라라와의 영적인 교감을 추구했다는 것을 슈만은 밝히고 싶었을 것이다.
이 작품은 환상적이면서도 내면적으로 깊이 성찰하는 정신적인 심도를 지니고 있을 뿐만아니라, 로맨티시즘의 향취를 드높게 풍겨낸다. <클라라 교향곡> 대신 <클라라 협주곡>은 이렇게 해서 탄생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작품 속에 어딘지 모를 불안한 요소, 슈만의 정신적 분열과 갈등을 느끼게 하는 낌새가 여기저기서 느껴진다는 것도 부인할 수 는 없는 일이다.
슈만의 정신질환은 점차 심해져서 마침내 정신 요양소에 입원할 만큼 악화 되었다. 클라라가 거의 매번 브람스와 함께 그를 찾아오는 것을 지켜보면서, 병상에 있었던 슈만도 아내와 브람스가 나날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낌새를 눈치채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오히려 그의 마음속에 커다란 위안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1856년 요양소에서 46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그때 그의 미망인 클라라는 37세였다.
 
마릴라님에 글 중에 "슈만과클라라" 글을 보고 자료 수집했습니다, 비숫한 자료중 유독 눈에 끄는 자료를 발견 하고 나름대로 정리해서 올렸습니다, 슈만과 클라라 그리고 브람스 미묘한 관계이지만 아름답다, 고결하다. 고 판단하며 슈만이 클라에게 보내는 편지,애틋한 사랑 이였고. 죽는날 까지 순정과 열정을 슈만에게 바쳤다는 클라라, 요즘 우리에게 많은 것을 깨우쳐 주는 듯 합니다. 감상 잘 했습니다, 
<배경음악은, 슈만의 시인의 사랑 중 기적같이 아름다운 5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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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주물로베]


 
출처 : 블로그 > ♥생을 그리는 작업실♥ | 글쓴이 : 글짱 [원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