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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석, 반역자 편들고, 조국깍아내리기人生

鶴山 徐 仁 2006. 1. 3. 21:35
이종석, 반역자 편들고, 조국깍아내리기人生
“북한의 경제는 자립경제이며 북한에서도 최소한 의료*교육 등 기초적인 사회복지문제와 의식주문제는 해결되었다"
김성욱(미래한국)   
 李鍾奭 "통일은 韓國강점 제국주의 축출해야 가능"
 
 
  北정권은 두둔·대한민국은 폄훼(貶毁)
 "金日成은 개혁을 성공적 주도`北주민에 자주적 삶 안겨 준 은인"
 "대한민국 역대정권은 對美예속`反민족`反민주
 
 
 이종석(李鍾奭)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차장이 2일 통일외교사령탑에 해당하는 통일부 장관에 내정된 것으로 발표되면서, 노무현(盧武鉉) 정권의 친북반미노선 노골화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이종석氏는 송두율(宋斗律)의 ‘內在的 접근법’을 차용(借用), ‘북한의 논리로 북한을 이해하자’고 주장해 온 학자로서, 盧정권 출범 이후 외교*통일*안보정책의 입안 및 집행 전 과정에 참여해왔다.
 
 그는 석*박사 시절 이래 북한체제를 ‘한 민족으로서’ 이해하고 관용할 것을 주장하면서도, 대한민국 역대정권에 대해서는 ‘대미예속*反민족*反민주적’이라 평가하는 등 편향된 시각을 보여 온 인물이다.
 
 석사논문에서 “金日成은 민족의 영웅”으로 부각
 
 성균관大 행정학과 78학번인 이종석氏는 金日成과 주체사상(主體思想)에 대한 연구로 학문활동을 시작했다. 1989년에는 ‘金日成의 抗日빨치산운동에 대한 연구’로, 1993년에는 ‘金日成 주체사상과 조선로동당 연구’로 성균관大에서 각각 석사*박사학위를 받았다.
 
 李씨는 석사논문에서 金日成을 가리켜 “군사지도자로서의 탁월성을 보여 준다”고 평가하며, 金日成의 ‘보천보전투’‘조국광복회’에 대해 각각 “역사적 의의는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다”“진정한 의미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反日민족통일전선체였다”고 격찬했다. 그의 석사논문 중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당시 金日成은 일반 민중에게 ‘공산당의 영웅’이 아니라 ‘민족의 영웅’으로 부각되어 있었다…요컨대 조국광복회에서 민족통일전선운동의 실천적 경험자였던 金日成과 그의 동료들은 그들의 抗日무장투쟁의 聲價(성가)로 담보된 정통성을 기반으로 해방 후 혼란했던 북한정국을 정면으로 돌파하고…”
 
 “金日成, 거대한 제국주의에 맞서 對日항전”
 
 李씨의 金日成과 북한체제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그가 저술한 논문과 저서에서 일관되게 나타난다.
 
 그는 1988년 9월 「역사비평」에 기고한 ‘북한사회주의 정권의 성립과정’라는 논문에서 “金日成이 소련의 지원과 조종을 받아 집권했다”는 정통 사학계의 주장을 반박했다.
 
 “소련이 左派의 다른 政派들을 제치고 계획적으로 金日成을 지원하고 조종했다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金日成은 抗日무장투쟁에서 얻은 그의 정통성을 기반으로 해방 직후 북한사회에서 통일전선의 모색과 군중노선의 추구, 그리고 현지지도 등을 실천했다”
 
 그는 또 “金日成과 그의 동료들이 소련의 조종을 받은 꼭두각시가 아니었음은 명확히 드러난다(1989년 8월「역사비평」‘金日成의 反宗派투쟁과 북한권력구조의 형성’)” 며 “金日成과 그 동료들의 ‘對日항전’은 거대한 제국주의 세력에 대항해서 소수의 인원과 열등한 무기를 가지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싸운 투쟁이었다”고 격찬하고 있다(1994년 여름「통일문제연구」 ‘주체사상과 민족주의’)
 
 李씨의 북한체제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정권설립 초기의 공산화숙청을 ‘성공적 개혁’으로 묘사하는 수준까지 이른다.
 
 그는 ‘북조선공산당과 조선신민당의 북조선로동당으로의 合同에 관한 연구(94년 「국사관논총」)’라는 논문에서, 해방공간에서 金日成이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던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당시 金日成은 북한개혁의 주체였던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개혁을 ‘성공적으로’ 주도하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외형상의 정치연합에도 불구하고 북로당 창립시점에 이미 金日成은 당 내에서 상당한 정도로 배타적 지위를 확보해가고 있었다.”
 
 “주체사상은 국가의 자주성 실현”
 
 李씨는 93년 박사논문에서 “주체사상이 북한에 적용된 것을 비판적으로 연구한 결과 완전히 실패한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러나 주체사상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이후에도 계속됐다.
 
 “주체사상은 무엇보다 우리민족의 전통적 인습으로 이어져 내려왔던 사대주의적 인습에 대한 분명한 안티테제로 제시되었다...이렇듯 초기 주체사상의 대두발전은 북한체제라는 공동체의 대외적 자주성의 고양과 북한식 발전전략의 모색이라는 차원에서 이뤄졌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기 주체사상은 ‘맑스*레닌주의의 조선혁명에의 창조적 적용’을 위한 기치로서 그리고 국가의 자주성 실현과 자력갱생의 담론으로서 기능하였다.(1994년 여름 「통일문제연구」‘주체사상과 민족주의’ )”
 
 “주체사상은 명백히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소련과 중국의 영향으로부터 자주성을 획득하기 위한 金日成 지도부의 노력과 자력갱생적 삶의 추구, 그리고 민족적 자부심을 고취하려는 시도들의 연장선상에서 제기된 것이었다. 바로 이러한 주체사상의 기치를 내걸면서 金日成은 북한 주민들에게 자주시대의 개척자로서 그리고 자신들에게 자주적 삶을 안겨 준 은인으로 각인되었다.(1995년 「현대북한의 이해 사상*체제*지도자」)”
 
 “내 조국 반쪽 북한 바로 알자”
 
 李씨는 북한정권을 긍정(肯定)하면서도, 대한민국 역대 정권에 대해서는 폄훼(貶毁)해왔다.
 
 그는 송두율, 조희연 등 左派지식인들이 참여했던 월간지 「사회와 사상」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한국사회를 강점하는 제국주의세력 축출을 위한 민족해방론을 주장했다. 88년 9월호에 실린 李씨의 ‘남한의 통일정책과 통일운동’이라는 글을 살펴보자.
 
 “왜 지금까지 역대 정권은 통일논의를 일방적으로 독점하였는가? 이는 역대정권이 한결같이 갖고 있던 ‘대미예속성’과 ‘反민족주의*反민주주의적 속성’이 바로 그 주범인 것이다... 오늘날 통일운동을 주도해가는 민족민주운동진영에 있어 진정한 통일은 한국사회를 강점해 분단함으로써 한국민중을 고통의 늪에 빠뜨리면서 그들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고 있는 제국주의(帝國主義)세력을 이 땅에서 축출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즉 민족해방의 관점에서 통일운동을 전개해가는 것이다 ...내 조국의 반쪽인 북한사회에 대해서 바로알기운동을 수행해나가야 한다.”
 
 北은 상당수준의 사회복지제도 확립?
 
 李씨는 「사회와 사상」이 90년에 펴 낸 「한국사회의 쟁점」이라는 책에 실린 ‘전체주의적 관점과 내재적 접근방법’이라는 논문에서 “북한사회를 통제사회로 만들어간 주체는 북한체제 자신이라기보다 군사적으로 긴장상태가 계속되고 있는 남북관계라고 본다”며 북한의 문제들은 북한 체제 내부(內部)가 아닌 외부(外部)에 있다는 논리를 전개했다.
 
 그는 같은 책에서 북한에 단기(短期)체류한 이들이 써 낸 북한방문기들을 인용, “북한의 경제는 자립경제이며 북한에서도 최소한 의료*교육 등 기초적인 사회복지문제와 의식주문제는 해결되었다...북한체제의 폐쇄성*통제성은 많은 부분이 긴장된 남북관계로부터 초래되고 있다”며 북한체제를 옹호했다.
 
 또 “이렇듯 북한방문기 등에서 북한의 실상이 알려지고 이를 통해 기존의 북한인식이 상당부분 허구적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북한경제의 자급자족이 전문가의 눈에 의해 직접 확인되고 상당수준의 사회복지제도의 확립에 대한 목격담은 지금까지 남한에서 출판된 수천편의 논문들의 학문적 타당성을 일거에 의심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임동원이 끌어 준 이종석
 
 李씨는 박사학위를 받은 후 성균관대, 경희대, 부산대 등지에서 시간강사를 전전하다 94년 세종연구소 연구위원으로 채용됐다.
 
 당시 세종연구소 측은 그의 좌파적 이념성향을 이유로 미온적 태도를 보였으나, 세종연구소 객원연구위원으로 있던 임동원(林東源) 씨가 사실상 보증을 하면서 채용이 가능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DJ정권 들어 임동원氏가 대통령비서실 외교안보수석*통일부 장관*국정원장을 거치면서, 李씨도 2000년 6월15일 정상회담 남북정상회담 특별수행원, 2001년 5월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으로 현실정치에 참여하게 된다. 盧武鉉 정권 들어서는 2002년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외교*통일*안보분과 위원으로 초기부터 관여했다.
 
 李씨는 2000년대 이후 소위 ‘햇볕정책’의 전도사역할을 자임하면서 金正日 정권을 지지*강화하는 논리를 전개했다.
 
 그는 “북한의 미사일개발문제의 해결은 미사일 주권을 포기해야 하는 북한에게 경제적 보상을 하는 것밖에 달리 대안이 없다”거나 “포용정책은 북한체제 내부의 변화를 유도하는 정책이 아니라 북한이 우리와 적대관계를 해소하고 평화관계, 즉 평화공존을 이룩하도록 하자는 것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2000년 2월 「통일경제」‘대북포용정책 2년의 평가와 과제’)”고도 주장했다.
 
 그는 또 “제2차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평화협정을 추진해야 하며 원활한 회담추진을 위한 사전 정비작업으로 金正日 답방 시 사과(謝過)요구론의 제어가 필요하다...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역사청산 방식 모색이 바람직하다.(2001년 7월 「제2차 남북정상회담 추진방안」 세종연구소刊)”며 한국사회가 金日成*金正日의 反역사적*反민족적 행위에 대해 문제 삼아서는 안 된다는 식으로 주장했다.
 
 “仁德정치, 김일성 카리스마 표상”
 
 李씨가 최근 발간한(2000년) 「새로 쓴 현대북한의 이해」라는 저서에서도 기존의 대북인식은 달라지지 않고 있다. 일부를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수령은 북한에서 어버이 수령으로도 호칭된다. 부모 이외에 어버이가 있을 수 없는 우리에게는 낯설고 우스꽝스러운 호칭이지만 북한의 논리에서는 자연스러운 호칭이다…관찰자들이 전하는 천부적 사교(社交)력과 판단력은 金日成이 상당한 수준의 외교가였다는 사실을 짐작케 한다…국가에서 수령과 인민대중이 하나가 되는 일심단결이 강조되고, 최고의 윤리로 최고지도자에 대한 충성과 효성이 강조된다...수령이 대중으로부터 충성과 효성을 맹세 받는 대신에 이민위천(以民爲天)의 정신으로 인민을 대하고 ‘인민에 대한 믿음과 사랑의 정치’, 즉 인덕(仁德)정치를 공언한다. 이 인덕정치야말로 현대와 봉건의 착종으로 특징지어지는 金日成 카리스마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는 3일 “2일 개각은 한마디로 국민을 완전히 무시한 개각이었다. 국민이 어떻게 생각하고 국가가 어떻게 되든 盧武鉉 대통령 자신의 뜻대로 하겠다는 개각이었다”며 “이번 개각을 볼 때 앞으로 남은 2년을 어떻게 해 나갈지 충분히 예측된다”고 비판했다.
 
 한나라당은 2일 대변인논평을 통해서도 “한미관계를 최악의 상태로 만들고 안보 불안의 중심에 서 왔던 이종석씨를 통일부 장관에 임명한 것은 북한에 대한 아부 이외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며 “이제 국민이 이런 정부에 대해 불같이 일어나 저항하지 않는다면 나라도 국민도 盧武鉉 정부와 똑같이 엄청난 불행을 맞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고 밝혔다.
 
 김성욱기자 2006-01-03 오후 5:26:00
 
 
[ 2006-01-03, 20: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