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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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피카소의 여인들

鶴山 徐 仁 2005. 12. 30. 22:47



※ 첫번째 연인-페르낭드 올리비에

피카소와 동갑이었던 그녀는
검붉은 머리에 키가 크고 균형잡힌 몸매를 가진 육감적인 여자였는데
항상 쾌활한 성격으로 피카소를 기쁘게 했다.
피카소는 페르낭드를 만나면서 청색시대를 마감하고
장밋빛 시대로 접어든다




※ 두번째 연인- 에바구엘

피부가 무척 하얗던 여인.
피카소는 구년에 걸친 페르낭드와 동거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그녀를 선택한다.
유달리 몸이 약했던 에바. 1차세계대전 이듬해인 1915년 12월 14일 이 젊은 여인은 결핵으로 죽는다.




※ 셋번째 연인- 올가 코클로바

<퍼레이드> 공연 때 만난 러시아 무용수,
피카소가 서른 여섯 살 때 처음으로 결혼을 한 여인이다.
올가는 서민적이고 편안한 것을 즐겼던 피카소와 달리 깔끔하고
상류사회적인 기질을 가졌다.
그녀는 피카소의 첫 아들 파울로를 낳는다.




※ 네번째 연인- 마리 테레즈 발터

피카소가 마흔다섯 살이 되던 해인 1927년 당시 열일곱 살의 건강하고 관능미 넘쳤던 소녀.
페르낭드와 에바, 올가가 갈색 머리카락을 가졌던 것과 달리 그녀는 금발이였다.
피카소의 두 번째 아이 딸 마야를 낳는다.
피카소에게 가장 창조적인 영감을 준 여성이었다고 전해진다,




※ 다섯번째 연인-도라 마알

친구인 폴 엘뤼아르의 소개로 만난 화가이며 사진작가.
피카소의 다섯 번째 연인인 도라는 지적이고 교양을 갖춘 여성으로
현대 미술에 열중했으며 특히, 스페인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 여섯번째 연인-프랑스와즈 질로

2차 세계대전 중에 만난 그녀는 아주 젊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류화가이다.
피카소가 예순세 살 때인 1945년부터 함께 살게 되는데 이 때, 그녀는 스무 살이었다.
완벽주의자이고 독점력이 강했던 프랑스와즈는 아들 클로드와 딸 팔로마를 낳는다.
피카소는 이 때 자신의 아이들을 소재로 해 매혹적이고도 생동감 넘치는 초상화들을 남겼다.
여기서 아이들은 때로는 어머니의 품에 안긴 모습으로,
때로는 자기들끼리 놀이에 빠져 있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 1953년,72세에 만난 자클린 로크

피카소의 마지막 연인이 된 그녀는 커다랗고 짙은 눈망울을 지닌 지중해 풍의 여인이다.
자클린은 1961년 피카소와 비밀 결혼식을 올린다.
후에 서른 살의 젊은 여인이 어떻게 곧 여든이 되는 사람과 결혼을 할 수 있느냐는 말에 그녀는 말한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청년과 결혼했어요. 오히려 늙은 사람은 나였지요"
그녀는 피카소에게 헌신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을 바친다.
피카소가 죽고 난 며칠 뒤 그녀도 그를 따라 죽음을 선택한다.

출처 : 오랜친구의 행복이야기
글쓴이 : 우린친구 원글보기
메모 :

피카소 (Pablo(Ruiz y)Picasso 1881∼1973)인쇄하기

요약

에스파냐 화가. 말라가 출생.

설명

에스파냐 화가. 말라가 출생. 회화뿐 아니라 조각·석판화·도자기·소묘·무대장치·벽화·태피스트리 등도 제작하였으며 미술사상 제작량이 가장 방대하다. 20세기 조형에 가장 큰 변혁을 일으켰던 입체파의 창시자이며, 양식은 사실주의에서 초현실주의에 이르기까지 폭넓다. 그의 회화역사는 기법과 주제가 다양하게 변화하며, 그 주제의 중심은 전쟁과 사랑·빈곤과 절망·노여움과 기쁨·사랑과 성(性) 등이다. 미술교사였던 아버지 J.R. 블라스코(피카소는 어머니 쪽 姓)의 가르침을 받아 소년시절부터 뛰어난 사실적 기법과 정서표현의 재능을 보였다. 1895년 바르셀로나로 옮겨 이른바 <카탈루냐 르네상스> 약진기의 카탈루냐시에서 지내고, 1897년 아르누보 시기에 마드리드의 산 페르난도 아카데미에서 잠시 공부하였는데 이 시기에 그는 회화적·인간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 1900년 파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고, 1904년부터 파리에 정착하였다. 1900년 전후까지는 주로 카바레·바 등을 강한 색채로 격렬하게 나타냈으나, 이른바 <청색시대>로 불리는 1901∼1905년에는 가난한 사람들의 절망·슬픔을 청색으로 표현하였다. 그 예로 한쪽 어깨를 올려 표현적 자세로 그린 《생(生, 1903)》 《늙은 그리스도교도(1903)》 등이 있다. 1904년부터 몽마르트르의 집합 아틀리에 <세탁선(洗濯船)>에 거주하며 M. 자코브·G. 아폴리네르·A. 드랭·A. 살몽 등과 교우하였다. 이 무렵부터 장밋빛이 돋보이며 소재는 《공굴리기 곡예(1905)》 같이 곡예사·유랑 예술인이 많아지는 <장미빛시대(1905∼1906)> 를 이루며, 부드러움·사랑을 주제로 하였다. 1906년 여름 안도라의 고솔마을에서 지낸 뒤 P. 세잔·이베리아 조각·아프리카 흑인조각의 영향을 받으면서 프리미티비즘(primitivism;原始 主義)으로 전향, 형태의 단순화·평면화 등의 조형성을 추구하여 이듬해 입체파의 선구가 되는 《아비뇽의 아가씨들》에 이르렀다. 이때부터 비슷한 회화이론을 지니고 있던 G. 브라크와 함께 사진적 형식의 해체, 대상의 분석·종합에 대한 탐구가 제1차세계대전 무렵까지 이루어졌다. 1911년 앵데팡당전 이후 입체파의 새로운 미학과 수법은 현대미술에 있어 결정적인 것으로, 1920년대까지 끊임없이 나타났다. 제1차세계대전, 이탈리아 여행, 발레리나 O. 코흘로바와의 결혼 등을 계기로 1919∼1924년까지 그리스풍의 당당한 인간상을 표현한 <신고전주의시대>로 불리는 밝은 그림을 그렸다. 그 뒤 표현주의·초현실주의 등을 받아들이면서 《거울 앞의 소녀(1932)》와 같은 다채롭고 풍부한 회화세계를 보여주는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1930년대 후반 그리스신화를 소재로 한 《미노타우로스 연작》, 독일 공군에 의한 바스크 지방 게르니카의 폭격을 그린 대작 《게르니카(1937)》로 절정에 이르며, 1930년대 유럽의 불안과 전쟁에 대한 노여움을 표현하였다. 제2차세계대전중 파리에 머물렀고, 1944년 파리 해방 뒤 공산당에 입당하였으며, 전쟁과 평화를 주제로 그렸다. 전쟁 후 남프랑스 앙티브, 이어서 발로리스에 거주하면서 많은 도자기를 제작하였다. 1940년대 중반부터 점차 밝음·유희성 등이 나타나며, 1955년에 칸, 1961년에 무쟁에 거주하였다. 만년에도 제작활동을 계속하여 판화 등을 포함해 하루에 여러 점을 제작하는 다작 경향을 보였다. D.R.S. 벨라스케스·J.L. 다비드·G. 쿠르베 등을 개작한 작품 연작군(群), 6·25를 주제로 한 《학살(1951)》, 발로리스성당의 《전쟁과 평화(1952)》, 유채·판화를 포함하여 <화가와 모델> 연작 등 약 5만 여점의 작품을 남겼다. 그림 외에 희곡 《꼬리 잡힌 욕망(1941)》과 시 등도 썼다. 바르셀로나와 남프랑스 앙티브에 피카소미술관이 있다.

분류
인물 정보 > 미술 >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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