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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중공 당수들에 대한 모택동의 정확한 평가

鶴山 徐 仁 2005. 12. 21. 00:29

 

당수들에 대한 모택동의 정확한 평가

 

 

모택동이 자기 수하나

주변 사람들에 대한 견해는

에누리 없이 정확했다.

만년에 모택동은 자기의 측근들에 대해서

평가를 더러 했는데,

그런 평가와 결과들은

다시 돌이켜 보았을 때

신의 판단처럼 날카롭고 정확했다.

 

1] 등소평[덩샤오핑, 鄧小平]에 대한 평가

 

등소평은 그들[문화대혁명에 적극적이 었던 모택동의 측근들]을 옳게 보지도 않거니와 눈에 차하지도 않는다. 지금은 내가 있으니 그렇지만 내가 죽고나면 그[등소평]을 누를 수 없을 것이다. 등소평은 '3자1포[자본주의식 경영방법]에 정이 있어 자본주의 길로 나가는 자들을 미워하지 않는다.

베트남공산당 서기장이 등소평은 소장파이니 그에게 자리를 물려주려느냐 묻자 모택동은

"등소평이 문화대혁명을 기본 인정한다면 다칠 수 없소. 다른 사람들은 다 합쳐도 그 하나를 못당하오, 등소평은 총리[주은래]도 아니구 총사령[주덕]도 아니오. 겉은 거북이 등처럼 딴딴하고 안에는 강철회사가 있소. 당신들은 모르나 나는 다 알고 있소."라고 했다.

 

 

항일전쟁 초기의 등소평.

 

 

개혁개방초기의 등소평.

등소평은 중국인들로부터

개혁개방의 총 설계사로 인정받는다.

 

 

중국 초대 국무총리 주은래[오른쪽]와 함께 있는 등소평.

 

 

 

2] 화국봉[화궈펑,華國鋒]에 대한 평가

 

화국봉은 마음이 너무 고와,

그런데 마음이 너무 고우면 못써.

그를 올려놓는 이유[중공 부주석으로 승진시키면서]는

중간파이기 때문이야,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니어서

양측에 다 접수가 될 수 있어.

그러나 아직은 때가 아니니 좀 더 봐야 돼.

이 말은 강청[모택동의 부인]에게 하지 말아야 되지만

화국봉에게도 말하지 말아야 돼.

 

결국 화국봉은 중간파의 역할로 끝난 것이다.

모택동이 사망한 다음 화국봉이 중공 주석으로 되었고,

화국봉은 등소평을 재기시켰다.

 

 

 

모택동 기념관을 찾은 화국봉과 그의 부인.

뒤의 조각상이 모택동 기념관에 있는 모택동 조각상.

 

 

 

현지 고찰을 하는 화국봉.

화국봉의 뒤가 바로 그를 중공주석의 보좌에 올라갈 수 있도록

군부를 동원햇던 엽검영.

 

 

화국봉이 중공 주석으로 된 다음

중국 전역에 나붙었던 선전화.

그림 아래 글은

[화주석은 우리와 한마음].

 

 

3] 강청[쟝칭, 江靑]에 대한 평가

 

강청은 모택동의 세번째 부인으로

모택동이 사망하기까지 곁에 있었던 부인이며

모택동을 도와 문화대혁명을

고조로 이끈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강청에 대한 모택동의 평가는 좋지가 않았다.

 

강청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일을 너무 많이 해.

남을 죽음으로 내모니까 결국은 그들이 반란을 하게 되는거지.

내가 죽으면 안돼.

지금 사람들은 건성으로 그의 말을 듣는 것 처럼 하지만

그를 바로 보지 않거든.

닉슨[당시 미국대통령]이 나보고 세계를 개변했다고 치하할 때

나는 세계가 아니라

북경주위를 좀 개변시켰을 뿐이라구 했는데

지금 보면 자기 여편네도 개변시키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세계를 개변시켰겠어?

그러나 강청에게 우점이 하나도 없는 건 아냐.

강청은 대세를 거슬러 나가는 용기가 있고

생각하면 금방 움직여.

 

모택동의 추측은 어긋나지 않았다.

모택동이 1976년9월 9일 사망하자

얼마 가지 않아

엽검영, 왕동흥, 화국봉을 주자로 한

중공 고층들에서 반기를 들고

강청을 비롯한

왕홍문, 장춘교, 요문원 등 [4인무리]를

영창에 집어 넣었다.

 

 

문화대혁명시기의 강청.

 

 

문화대혁명 후기 중국을 방문한

닉슨과 담화를 나누는 강청.

 

 

모택동이 사망한 다음

모택동이 기거했던 곳에서

기념사진을 남긴 강청.

 

4] 왕홍문[왕훙원, 王洪文]대한 평가

 

왕홍문은 너무 빨리 발탁했는데,

이는 깊이 생각하지 않은 나의 잘못이야.

왕홍문은 큰 일을 많이 겪어 보지 못해

앞으로 좀 더 학비를 내야 할 걸.

 

역시 어김없는 판단이었다.

벼락승진을 한

왕홍문은 모택동의 후계자로

중국공산당 장정에까지 올랐지만,

모택동이 사망하자 결국

역적으로 사형판결을 받았다.

 

 

 

문화대혁명시기의 왕홍문.

 

 

모택동의 계승자로 된 후

공식장소에 걸렸던 왕홍문의 사진.

 

 

심판대에 오른 [4인무리]

오른쪽으로부터

강청, 요문원, 왕홍문, 장춘교.

 

 

5] 장춘교[장춘챠오, 張春橋]대한 평가

 

장춘교는 사상가로 진백달[중공 이론가,

한때 모택동의 총애를 받은 적도 있으나

림표(동을 반역해 전 쏘련으로 망명하다가

비행기 폭발사고로 몽골에 떨어져 사망함]의 모사로 되었던 관계로

림표가 도주한 9.13사태가 발생하면서 반혁명죄로 판결받음)]보다 한 수 위야.

머리가 잘 돌아가나 경제에 약해.

그리고 군에서도 위신이 없어.

엽검영과 허세우[당시 중국인민해방군 남경군구 사령.

[4인무리]를 제거할 때 엽검영이 허세우를 북경으로 불러 들였음]는

다 내 낯을 봐줄 뿐이야.

 

결국 그랬다.

[4인무리]의 [모사]였던 장춘교는

결국 엽검영과 허세우에 의해 제거되게 되었던 것이다.

 

 

 

 

문화대혁명시기의 장춘교.

 

 

판결석에 오른 장춘교.

 

 

 

[4인무리].

오른쪽으로부터

요문원, 강청, 장춘교, 왕홍문.

 

 

6] 엽검영[예짼잉, 葉劍英]대한 평가

 

엽검영에 대한 모택동의 평가는 퍼그나 높았다.

엽검영은 못된 말은 하지 않는다.

이는 누구도 따를 수 없어.

그는 큰 일에는 주견이 있어.

등소평은 작은 일까지 깐깐하게 하는 사람이고.

당신들은 엽검영과 비교가 안 돼.

지금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구 있지만

사실상 등소평과 벌써 단짝이 되었어.

당이 총[군부]을 지휘한다고 하지만

당도 누군가가 일을 해야 지휘가 될 거 아닌가.

엽검영은 문건을 보는 법이 없어.

문건은 허튼소리들만 하는거 아냐?

옛날 척부인이 한고조[유방]에게

한 말이 있어.

기러기 높이 날아 천리를 날으고

날개가 굳어지면 4해를 넘으리.

라고.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당신들은 알기나 해?

 

엽검영은 모택동이 사망한 다음

화국봉을 보좌해

왕동흥, 허세우, 등과

강청을 비롯한 [4인무리]를 중공당에서 척결했다.

그리고 등소평을 재기시키는데

결정적인 작용을 한 사람이며

중국 전국인대상무위원회 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중국의 10대 원수 가운데

엽검영은 10번째 순위에 올라 있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초기,

원수직함을 받은 후의 엽검영.

 

 

중국초대국무총리 주은래[오른쪽]과 이야기를 나누는 엽검영.

 

 

노년기의 엽검영.

 

 

7] 중국의 미래에 대해서

 

나는 역시 그 한마디야.

위성은 하늘에 올라가고

붉은기는 땅에 떨어진다.

 

 

 

 

뒷줄 좌로부터

라서경, 섭영진, 서향전, 도주, 엽검영

앞줄 좌로부터

진의, 유백승, 임표, 하룡, 라영환

 

여기서 도주를 빼고

주덕을 넣으면

중국인민해방군 10명 원수.

后由左至右: 罗瑞卿,聂荣臻,徐向前,陶铸,叶剑英

前由左至右: 陈毅,刘伯承,林彪,贺龙,罗荣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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