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孔子의 부할]
중국 전역에 論語읽기 열풍
中華문화의 中核으로 복권된 孔子 像(제공 도서출판 열린당) |
중국에서 孔子(공자)가 화려하게 부활했다.
지난 9월28일 孔子 탄신 2556주년을 맞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최초로 국가 고위급 간부들이 참석한 대대적인 기념행사가 열렸다. 국영방송인 CC TV는 이날 孔子의 고향인 山東省(산동성) 曲阜市(곡부시·취푸시)를 비롯한 중국內 10여 개 도시의 孔子廟(공자묘)에서 진행된 제사현장을 장장 네 시간에 걸쳐 방송했다.
지금까지 孔子 문화제나 孔子 제사 등은 曲阜市 정부와 孔子 연구기관 등의 주최로 이뤄졌다. 올해부터 이 행사가 중앙 정부 주도로 전환됐다.
소설가 魯迅(노신·루쉰)으로부터 「봉건적 陋習(누습)의 근원」으로 비판받고, 문화대혁명 때에는 「봉건노예제 계급의 이익을 대변한 反動(반동)」으로 전면 타도의 대상이었던 孔子가 유구한 中華(중화)문화의 中核(중핵)으로 復權(복권)된 것이다.
孔子 탄신 기념행사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중국 전역에서 열린 「論語(논어) 낭송 경연대회」였다. 지난해 초부터 전개된 소위 讀經運動(독경운동)이 이제 全인민들 사이에 하나의 국민운동으로 전개되고 있다.
「論語와 孟子(맹자), 詩經(시경) 등 전래의 儒家(유가) 經典들을 암송해 국가와 민족에 충성하고 가정에 충실한 인민을 육성하자」는 취지에서 시작된 이 운동은 적잖은 반발에 부딪혔다.
반대파들은 『孔子사상은 21세기의 중국에 걸맞지 않는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하지만 주도하는 쪽은 『개혁 개방 이후 심화되고 있는 부정부패를 근원적으로 치유키 위해서는 忠孝(충효)를 강조한 傳來(전래)의 儒家 경전을 어릴 때부터 암송해 이를 실천해야 한다』고 반박했다.
廣東省 대학입시 수석 학생 孔子墓에 참배
毛澤東 |
중국인들은 讀經운동에 손을 들어 줬고, 반대 목소리는 완전히 잦아 들었다. 孔子의 부활은 讀經운동을 계기로 長江의 물살처럼 도도한 흐름을 형성했다. 인민 대중들의 讀經운동 참여로 孔子의 위상은 한층 강화될 전망이다.
지난 8월에 廣東省에서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 일이 일어났다.
올해 대학입시에서 廣東省 전체 수석을 한 학생이 옛날 장원급제자가 입던 예복을 그대로 입고 孔子廟에서 이른바 「장원급제식」을 치른 것이다. 당사자는 예복을 갖춰 입고 孔子像 앞으로 공손히 다가가 절을 올리고 향을 피운 뒤 孔子像을 향해 이같이 엄숙히 맹세했다.
『조국을 열렬히 사랑하고, 어른을 존중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친구들 간에 우애롭게 지내고, 열심히 공부하고, 훌륭한 人材가 되어 국가에 보답하겠습니다』
대학입시 수석합격자가 孔子廟에서 장원급제식을 치른 것은 廣東省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지난 9월 중국에서는 「스승의 날」을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일부 네티즌들이 『스승의 날을 孔子 탄생일인 9월28일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이들은 『아무 의미도 없는 현재의 9월11일 대신 「萬歲(만세)의 師表(사표)」인 孔子의 탄생일을 스승의 날로 정해야 한다』며 온라인 서명운동을 전개했다. 스승의 날이 바뀌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인다.
이런 사례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儒家사상을 비롯한 전통문화에 대한 再조명 운동은 급물살을 탄 형국이다.
중국의 學界 역시 「國學(국학)운동」을 전개하며 이런 흐름에 동조하고 있다. 중앙 정부의 정책 브레인 육성기관인 「중국사회과학원」이 이미 지난 6월에 儒家사상을 집중 연구하는 「유교연구중심」을 만든 데 이어 北京 소재 人民대학도 지난 9월 신학기부터 國學院을 설립하여 신입생을 모집하고 있다.
孔子사상이 새로운 통치 이념?
작년 9월 曲阜市 孔子廟에서 열린 孔子 탄생 2555주년 행사. 中國 관영 CC TV는 올해 이 제사현장을 4시간 동안 보도했다. |
출판계는 재빨리 여기에 부응해 儒家의 대표적인 경전들을 모아 출판하는 소위 儒藏(유장)운동을 벌이고 있다. 학술문화 차원에서 전개되고 있는 國學운동은 인민 대중의 讀經운동과는 차원이 좀 다르다.
國學운동은 「21세기 中華민족의 부흥을 도모하기 위해 반드시 孔子사상을 핵심으로 한 전통문화를 되살려야 한다」는 취지에서 출발하고 있다. 장차 孔子사상이 전통학술문화의 차원을 넘어 현재의 공산주의 이념을 대체할 새로운 통치이념으로 적극 검토될 가능성을 강하게 암시하는 대목이다.
불과 몇십 년 전만 하더라도 反動의 표상이었던 孔子가 어떻게 해서 일거에 21세기의 새로운 중국을 이끌고 나갈 상징이 된 것일까? 우리는 과연 孔子사상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고, 장차 어떻게 대비해야만 하는 것일까?
孔子사상의 실체와 형성과정, 시대에 따른 왜곡과정, 孔子에 대한 再평가의 의미와 향후 전망 등을 간략히 살펴보기로 하자.
[孔子의 생애와 사상]
혼돈의 春秋시대
孔子가 활약한 기원전 6~5세기는 春秋(춘추)시대의 말기에 해당한다. 이 시기는 周왕조의 封建(봉건)질서가 급속히 무너지던 시기이기도 했다. 孔子가 태어날 당시에 列國은 公室(공실·제후)이 有名無實(유명무실)해지면서 世族(세족)들과 그들의 家臣이 實權(실권)을 잡고 전횡하는 혼란스러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국제적으로는 蠻夷(만이)로 간주되던 吳(오)·越(월)이 흥기해 오랫동안 천하를 양분해 왔던 中原의 晉(진)나라와 남방의 楚(초)나라를 압박하며 새로운 覇者(패자)로 부상하고 있었다. 孔子의 고국인 魯(노)나라도 소위 「三桓(삼환)」으로 불리는 세 가문이 권력을 분점해 군주를 허수아비로 삼고 전횡을 일삼는 下剋上(하극상)이 연출되고 있었다.
春秋시대 말기는 한마디로 봉건질서가 급속히 해체되면서 새로운 기운이 밑에서부터 크게 꿈틀거리기 시작한 약동의 시기였다. 그러나 봉건질서를 대체할 새로운 통치질서가 아직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까닭에 사상적으로는 그 뒤의 戰國시대보다 훨씬 혼란스러웠다.
정치적으로는 봉건질서의 붕괴로 인한 無정부 상태가 지속되고 있었고, 사회적으로는 신분세습의 宗法制(종법제)에 근거한 신분질서의 혼란으로 도덕 不在의 상태가 지속되고 있었다.
하급무사의 아들로 출생
이러한 상황에서 전통문화의 정수를 계승해 새로운 문화의 창출을 선창한 위대한 선각자가 바로 기원전 551년에 하급무사의 후예로 태어난 孔子였다.
당시의 기준에서 볼 때 孔子는 신분세습의 장벽으로 인해 卿相(경상)과 같은 고관이 되는 일이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그 또한 다른 士族(사족)과 마찬가지로 射(사: 활쏘기)·御(어: 수레몰이)·禮(예: 의식집전)·樂(악: 악기연주)·書(서: 글읽기)·數(수: 숫자세기) 등의 六藝(육예)를 익혀 전문직에 종사하는 하급관원으로 살아 나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論語 「爲政」편을 보면 그가 만년에 자신의 생애를 회고하며 이같이 술회한 대목이 나온다.
『나는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30세에 자립했고, 40세에 의혹되지 않았고, 50세에 천명을 알았고, 60세에 만사가 귀에 거슬리지 않게 되었고, 70세에 마음이 좇는 바대로 행할지라도 법도를 넘지 않게 되었다』
어릴 때 부모를 여읜 孔子는 苦學(고학)으로 당시 하급士族을 위해 마련된 중등 수준의 교양과목인 六藝를 익혔다. 士族들은 六藝 중 하나만 익혀도 鄕黨(향당: 큰 마을 단위)에서 명성을 떨칠 수 있었다. 이에 반해 제후를 비롯한 公卿大夫(공경대부)의 자제는 장차 위정자가 될 신분이었던 까닭에 六藝 위에 詩(시: 문학)·書(서: 역사)·禮(예: 외교)·樂(악: 예술)의 고급 교양과목을 이수해야만 했다.
당시 하급士族 출신인 孔子는 특이하게도 六藝의 습득에 만족하지 않고 좀더 높은 곳에 뜻을 두었다. 그는 30代에 이르러 詩·書·藝·樂의 연구에 매진할 뜻을 굳혔다. 30세에 「而立(이립)」했다는 것은 이를 뜻하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孔子는 아직 이를 어떻게 연구해야 할 것인지 등에 관한 구체적인 복안을 갖고 있지 않았다.
이때 마침 魯昭公(노소공)이 三桓의 전횡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先制(선제)공격을 가했다가 이내 패배해 齊나라로 망명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30代의 孔子는 三桓의 전횡에 분개했으나 스스로의 한계를 절감하고 곧 자발적인 망명의 성격을 띤 齊나라 유학길에 올랐다.
이때 그의 나이 36세였다. 이후 그는 동방의 覇者를 자처한 齊나라의 도성 臨?(임치)에 머물며 학문을 연마했다. 이 기간 중 그는 齊나라의 權臣 陳씨의 전횡을 목도하고 천하정세에 눈을 뜨게 되었다.
孔子가 43세가 되던 해에 魯昭公이 망명지에서 객사하고, 三桓에 의해 魯昭公의 동생인 魯定公(노정공)이 즉위했다. 孔子는 이듬해 초 9년간에 걸친 齊나라 유학을 끝내고 마침내 귀국길에 올랐다. 孔子는 齊나라 유학기간 중 어지러운 천하를 治平(치평)의 길로 돌려 세울 수 있는 방안을 찾기 위해 고심했다.
孔子는 周왕조 건국의 元勳인 周公(주공)이 禮制(예제)를 만들어 천하를 평정한 데 착안해 전래의 詩書禮樂을 새로이 정비한 「君子學(군자학)」을 제창키로 이미 굳게 다짐하고 있었다. 「君子學」은 孔子가 종래 단순히 爲政者를 뜻하던 「君子(군자)」 개념을 새로이 규정하면서 정립된 것이다.
君子는 孔子에 의해 「全人的인 교양을 갖춘 爲政者」로 새롭게 규정되었다. 孔子가 40代에 「不惑(불혹)」에 이르렀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를 뜻하는 것이다. 「不惑」은 15세에 志學(지학)하여 30代에 而立한 후 평생을 두고 연구할 학문의 구체적인 내용을 두고 고심을 거듭하던 중 마침내 君子學에서 그 해답을 찾았음을 선언한 것이다.
9년간 私塾에서 君子學 강의
齊나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孔子는 私塾(사숙)을 연 뒤 신분의 高下를 막론하고 孔門(공문)에 들어와 배우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을 제자로 받아들여 최고 수준의 교양학인 君子學을 가르쳤다. 孔子가 세운 私塾은 사상 최초의 사립학교이자 일반인을 대상으로 최상의 교육을 실시한 최초의 학교이기도 했다.
신분의 高下를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君子學을 가르친 것은 이제 고등교육이 봉건질서下에서 특권층인 公卿大夫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사상 최초로 선포한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당시 孔子의 제자들 중에는 公卿大夫의 자제를 포함해 일반 서민의 자제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했으나, 주로 하급士族의 자제들이 주류를 이뤘다. 이는 孔門이 六藝를 완벽히 습득한 뒤에 詩書藝樂의 고등학문을 정규 커리큘럼으로 편성한 사실과 무관치 않았을 것이다. 당시 孔門은 고등교육과 도덕의 수행을 연마하는 유일무이한 최고급 아카데미였다.
孔子는 私塾을 개설한 뒤 근 9년 동안 오직 제자들을 가르치며 君子學의 교재를 정비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魯나라 내에서 그의 명망이 높아지자 마침내 나이 52세 때에 이르러 魯定公이 그를 불러 公室의 영지를 관할하는 中都宰(중도재)로 삼았다. 孔子는 이때 비로소 처음 公室로 出仕(출사)하게 되었다.
孔子는 이후 승진을 거듭해 公室의 영지에서 빚어지는 각종 刑獄(형옥)사건을 총관하는 大司寇(대사구)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이는 三桓이 장악하고 있는 조정의 관직은 아니었다.
「史記」는 孔子가 조정의 고관인 대사구의 자리에 올라 魯나라 政事(정사)를 청평하게 만들었다고 기록해 놓았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당시 孔子는 아직 大夫의 반열에 오르지 못했던 까닭에 국정을 다루는 조정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다.
孔子는 얼마 후 魯定公이 동방의 覇者인 齊景公(제경공)과 회동하는 자리에서 魯定公을 보좌하며 뛰어난 외교술을 발휘해 齊景公으로부터 빼앗겼던 魯나라 땅을 반환받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를 계기로 그의 명성은 해외로까지 널리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이때 그는 처음으로 三桓으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아 下大夫(하대부)의 자격으로 三桓이 장악하고 있는 조정회의에 참여하게 되었다.
당시 魯定公은 三桓의 손에 휘둘리는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다. 이론과 실천의 겸행을 중시한 君子學을 가르치는 孔子의 입장에서는 이를 묵과할 수 없었다.
그는 大夫의 반열에 오른 것을 기회로 먼저 三桓의 세력을 제거해 君主權을 회복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판단했다. 그는 大夫의 자리에 올라 國祿(국록)을 먹으면서 權臣(권신)의 전횡을 좌시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겨우 三桓의 신임을 얻어 조정회의에 참여한 孔子가 오랜 기간에 걸쳐 막강한 세력을 구축한 이들 세력을 일거에 제거할 묘안은 존재하지 않았다.
周遊天下
孔子는 매우 은밀한 계책을 구사했다. 그는 먼저 실권자인 계씨의 신임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이는 三桓 스스로 자신들의 근거지인 소위 三都를 허물도록 만들기 위한 속셈에서 나온 것이었다. 孔子는 마침내 3년 만에 두 개의 城을 허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마지막 단계에서 孔子의 속셈을 간취한 일부 세력의 반발로 그간 은밀하게 추진된 三桓 타도 계책이 일거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입지가 좁아진 孔子는 미련 없이 辭職(사직)하고 이후 14년간에 걸친 천하유세의 대장정에 올랐다. 이때 그의 나이는 56세였다.
孔子는 열정적으로 列國을 돌아다니며 君子學의 이상을 설파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자신의 뜻을 이해해 주는 군주를 만나지 못했다.
어느덧 나이가 69세가 되자 孔子도 초조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좀더 효과적으로 이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마침내 孔子는 고국으로 돌아가 君子學의 교재를 비롯한 古典을 정리하고 제자들을 육성하는 데 여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14년간에 걸친 孔子의 천하유세는 사실 정치적인 측면에서 볼 때는 실패작이었다. 그러나 사상사적으로 볼 때 이 기간은 그의 사상을 더욱 원숙하게 만드는 일대 전환기로 작용했다.
爲政者를 위한 학문 君子學
당시 列國의 군주들이 다투어 孔子를 초대해 그의 얘기를 들으려고 한 것은 그가 魯나라에서 행한 일련의 개혁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이때 孔子는 世族들의 寡頭政(과두정)을 타도하고 군주권을 회복시켜야 한다고 역설했다. 實權을 쥐고 있던 世族들이 이를 좋아할 리 없었다. 孔子가 천하유세 기간 중 모두 네 차례에 걸쳐 수난을 당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孔子는 魯나라로 돌아온 뒤 죽는 날까지 불과 4년 반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君子學을 새로이 정리하고 이를 토대로 제자들을 육성하는 데 모든 것을 바쳤다.
이 기간 중에 君子學의 정규 교과목으로 채택된 중요한 古典이 크게 정비되었다. 대표적인 古典이 바로 「詩經」이다. 현전하는 詩經 300편은 당시 孔子에 의해 완결되었다.
孔子는 이같이 완비된 교과목으로 제자들을 가르쳤다. 훗날 孔學을 전파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제자들이 바로 孔子의 천하유세가 끝난 뒤에 入門한 후기 제자들인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당시 孔門에서 君子學을 습득한 제자들은 자부심이 대단했다. 비록 신분세습의 봉건질서에 의해 그 뜻을 펼치지 못해 在野에 머물지라도 그들은 「정신적 爲政者(위정자)」였다.
훗날 君子學을 배운 儒家의 門徒(문도)들이 公卿大夫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孔門의 기준에서 볼 때 아무리 신분이 높을지라도 君子로서의 교양을 갖추지 못한 爲政者는 한낱 「小人」에 불과했다.
동시에 봉건질서로 인해 비록 생산계층에 속하는 일반 서민일지라도 君子學을 습득해 높은 學德(학덕)을 지닌 자는 얼마든지 君子로 칭송받을 수 있었다. 이는 봉건제 질서가 仍存(잉존)한 당시의 상황에서 볼 때 가히 혁명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孔門의 君子學이 내건 君子는 仁(인)을 內在的 요소로 하고, 禮를 外在的 표현으로 한 이상적인 인격체를 의미했다. 소위 「內聖(내성 : 정신수양)」과 「外王(외왕 : 통치학 습득)」을 겸비한 자만이 君子의 자격이 있었던 것이다. 孔門의 君子學 교습은 미래의 爲政者를 위해 최고급 수준의 교양을 가르치는 데 일차적인 목적이 있었다.
적잖은 사람들이 당시 孔門 내에 詩書禮樂 이외에도 孝行忠信(효행충신) 등의 교과목이 존재했고, 이로 인해 外王보다 內聖이 강조된 것으로 알고 있으나 이는 잘못이다. 孝行忠信 등의 수양론은 어디까지나 外王이 되기 위한 실천론으로 강조되었을 뿐, 결코 교과목으로 채택된 적이 없었다. 內聖은 外王이 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요구된 것에 불과했다.
孔門 내에서 詩書禮樂에 대한 교습이 전제되지 않은 수양론은 무의미했다. 당시 孔門의 君子學 교습이 內聖을 위주로 하는 수양론에 치중했다면, 굳이 수업료를 내고 孔門에 와서 君子學을 교습받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이는 당시 孔子가 자신은 當代에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後學들은 반드시 새로운 시대의 爲政者가 될 것을 확신한 사실과 무관하지 않았다. 새 시대를 대비하기 위해서는 爲政者에게 요구되는 詩書禮樂의 습득이 절실히 필요했다. 孔門이 君子學 교습을 통해 外王을 지향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孔子의 이러한 확신은 그의 死後 100여 년이 지난 전국시대 중기에 이르러 현실화했다. 戰國시대 중기 이후에 君子學의 세례를 받은 수많은 士人(사인)들은 역사의 새 주역으로 부상해 신분세습의 낡은 봉건정을 무너뜨리고 하루아침에 宰相(재상)이 되는 세상을 만들어 냈다.
大사학자 錢穆(전목)은 孔門의 君子學을 두고 『平民學(평민학)의 효시이자 본격적인 王官學(왕관학·제왕학)의 개막』으로 극찬한 바 있다.
[儒家의 성립과 발전]
孟子와 荀子
王道정치를주창한 孟子. |
孔子 사후 孔門의 門徒들이 孔子사상을 널리 전파하자 이후 孔學을 연마하는 자들은 모두 「儒家」로 통칭되었다. 이들은 戰國시대에 우후죽순처럼 등장하는 諸子百家(제자백가)의 효시가 되었다. 「儒(유)」는 본래 「유약한 사람」을 뜻하는 말이었다.
孔子 때에 들어와 論語 「옹야」편에 나오는 「君子儒(군자유)」와 「小人儒(소인유)」 표현을 통해 알 수 있듯이 학문을 하는 선비나 선생을 뜻하게 되었다. 戰國시대에 들어와 「儒家」는 「孔門의 君子學을 습득한 일군의 學團(학단)」을 지칭하는 말로 전용되었다. 戰國시대에 儒家는 가장 막강한 학단으로 군림하면서 諸子百家의 출현을 자극했다.
儒家의 학단에는 수많은 학파가 있었다. 이들 중 戰國시대 말기까지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학파는 「曾子(증자)학파」와 「子夏(자하)학파」였다. 曾子학파는 孔子사상 중 개인의 德行(덕행) 부문에 무게를 둔 「修齊派(수제파)」에 속한다. 子夏학파는 孔子사상 중 학술문화 및 통치 부문에 무게를 둔 治平派(치평파)에 속한다.
두 학파는 각기 孔學(공학)의 嫡統(적통)을 자처하며 치열하게 다투었다. 曾子학파의 학통은 기원전 4세기경에 孟子에게 이어졌고, 子夏학파는 기원전 3세기경에 荀子(순자)에게 이어졌다.
禮法을 중시한 荀子. |
修齊派인 孟學派(맹학파)에서는 孔子사상 중 유독 「義(의)」를 강조하면서 이를 「正義(정의)」로 해석했다. 治平派인 荀學派(순학파)에서는 孔子사상 중 「禮」를 강조하면서 이를 「禮法(예법)」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원래 孔子사상에 나오는 義와 禮는 이들이 규정한 개념보다 훨씬 포괄적이고 절충적인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당시 孟子는 義를 孔學을 대표하는 仁과 결합시켜 「仁義(인의)」 개념을 창출해 냈다. 孟子는 보편개념으로 사용된 仁을 소위 仁義禮智(인의예지) 「四德(4덕)」의 한 개념으로 축소시킨 뒤 「仁義」라는 독특한 개념을 만들어낸 것이다. 孟子는 「義人」에 의해 다스려지는 正義의 나라를 王道를 실현한 이상국가로 간주했다. 그러나 孟子의 이상국가는 지나치게 높은 수준의 도덕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荀子는 孔子가 말한 「禮」를 도덕의 최고 기준으로 삼았다. 그는 禮를 「禮法」으로 해석한 나머지 法制와 禮制를 총망라한 개념으로서의 禮를 언급한 것이다. 이로 인해 그가 말한 禮는 용어만 동일할 뿐 孔子가 언급한 禮와는 그 함의가 매우 다를 수밖에 없었다.
韓非子와 秦始皇
法家의 완성자 韓非子. |
많은 사람들이 孟子가 孔子사상의 정맥을 이어받은 것으로 알고 있으나 실은 荀子가 그 주인공이었다. 이는 孔子와 荀子 모두 직분에 따른 책임완수와 학덕연마에 따른 계층 간의 이동을 역설한 사실을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孔子는 荀子와 마찬가지로 봉건정下의 고정된 신분질서를 옹호한 적이 없다. 孔子는 君民(군민) 모두 직분별 소임에 대한 헌신적인 奉公(봉공)을 역설했을 뿐이다. 孔子는 비록 「尊君(존군)」을 내세우기는 했으나 이는 韓非子의 「貴君(귀군)」 및 孟子의 「貴民(귀민)」과는 질적으로 다른 개념이다.
그럼에도 오랫동안 이 사실이 무시 내지 간과되었다. 이는 性理學이 「外王」으로 상징되는 君主 대신 「內聖」으로 상징되는 士大夫를 통치의 주체로 삼은 사실과 무관하지 않았다. 성리학의 이런 자세는 治世(치세)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으나, 外侵(외침)과 같은 비상시에는 적잖은 부작용을 낳을 수밖에 없다.
內聖에 치중한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중국의 宋나라와 조선조가 外亂(외란)에 제대로 저항도 못 하고 끝내 패망하게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外敵(외적)의 침략 앞에서 「外王」의 힘이 뒷받침되지 못한 「內聖」의 논리는 한낱 웃음거리밖에 안 되는 것이다.
이를 통찰한 사람이 바로 韓非子와 秦始皇(진시황)이었다. 荀子의 제자인 韓非子는 外王을 더욱 강조해 마침내 「法家사상」을 완성시켰다. 그가 집대성한 法家사상에는 內聖이 완전히 배제돼 있다.
그의 法治(법치)사상은 힘을 전제로 한 外王만이 어지러운 천하를 평정할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 위에 서 있었다. 이는 당시의 상황에서 볼 때 일면 타당한 것이기도 했다. 秦始皇은 韓非子의 이러한 「外王사상」을 적극 수용해 마침내 天下를 통일한 뒤 法家사상을 유일한 통치이념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秦始皇이 내세운 法家사상 속에는 이미 諸子百家의 사상이 적잖이 침투해 있었다. 여기에는 陰陽(음양)사상을 비롯해 儒家사상 등이 法家의 옷을 입고 제국의 통치이념으로 선전되었다.
秦제국 당시 유생들은 자유롭게 정치를 비판하던 百家爭鳴(백가쟁명) 시대의 행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들은 孟學派의 「內聖」과 「修齊」 논리에 입각해 秦제국의 嚴法주의에 맹공을 가했다.
승상 李斯(이사)는 제국의 건립이 불과 얼마 안 된 상황에서 이를 크게 우려했다. 그는 이를 방치할 경우 중앙집권적 제국질서를 다시 지방분권적 봉건질서로 되돌릴지도 모른다고 판단했다. 당시 이 유생들의 행동은 분명 시대조류에 거슬리는 反動이 아닐 수 없었다. 여기서 바로 「焚書坑儒(분서갱유)」의 참극이 빚어지게 되었다.
董仲舒와 朱子의 孔子사상 왜곡
性理學을 수립한 朱子. |
역사상 孔子사상에 대한 왜곡은 크게 두 번에 걸친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
첫 번째는 前漢제국 초기의 董仲舒(동중서)를 위시한 漢儒(한유)에 의한 왜곡이었다.
동중서는 漢武帝(한무제)를 설득해 儒家사상을 유일무이한 통치이념으로 격상시키는 데 공헌했으나 孔子사상에 미신적인 이론을 대거 혼입시키는 데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했다.
漢儒들은 天道(천도)를 人道(인도)와 동일시하는 미신적인 「天人合一說(천인합일설)」을 내세워 怪力亂神(괴력난신)에 대한 언급을 꺼린 孔子사상의 합리주의적인 측면을 극소화시켰다.
두 번째는 南宋代의 朱熹(주희)를 위시한 宋儒(송유)들에 의한 왜곡이었다.
이들은 소위 「天理人欲說(천리인욕설)」을 내세워 사물에 대한 二分法的 엄별을 강요함으로써 孔子사상의 중도주의적 입장을 압살했다. 이들은 治世 및 亂世의 治理(치리)에 대한 구분을 거부한 채, 모든 통치행위를 오직 王道(왕도)의 잣대로만 평가하는 극단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로 인해 亂世의 治道인 覇道(패도)는 여지없이 唾棄(타기)되었다.
儒家의 부활운동 전개
陽明學을 수립한 王守仁. |
南北朝시대에서 唐제국 때까지는 외래의 佛敎문화와 전래의 道敎문화가 크게 흥성했다. 唐제국 때 표면상 儒·佛·道 3敎가 병존했으나 불교의 우위가 두드러졌다. 이때 韓愈(한유)는 격렬하게 불교를 배척하면서 儒家의 회복을 역설했다.
唐제국에 이은 五代(오대)의 혼란은 儒·佛·道 3敎를 모두 심하게 파괴시켰다. 천하를 再통일한 宋代에 들어와 儒佛道 3敎사상을 합친 儒家의 부활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기 시작했다.
이는 二程(이정)으로 불리는 程明道(정명도)와 程伊川(정이천)이 단초를 열었다. 이들은 「天理(천리)」에 의지해 宋明代를 풍미한 理學(이학)의 기초를 닦은 것이다.
南宋代의 朱熹는 정이천의 道學을 기초로 周敦以(주돈이)와 邵康節(소강절) 등의 사상을 가미해 「程朱學(정주학)」을 만들어 냈다. 朱熹는 孟子의 4단설을 더욱 발전시켜 仁義禮智의 善性(선성)을 「本然之性(본연지성)」, 喜怒哀樂(희로애락)의 감성을 「氣質之性(기질지성)」으로 규정해 思辨的(사변적)인 「理氣論(이기론)」을 완성시켰다.
이후 통상 「朱子學」으로 불린 程朱學은 官學의 위치를 굳건히 함으로써 1000여 년 동안 사상계를 지배했다.
明代에 들어와 王守仁(왕수인)은 朱熹의 性卽理(성즉리)와 대립해 心卽理(심즉리)를 주장한 陸九淵(육구연)의 이론을 더욱 발전시켜 陸王學(육왕학)을 만들어 냈다. 통상 王守仁의 호를 따 「陽明學(양명학)」으로 불린 陸王學은 한때 程朱學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흥성했으나, 끝내 朱子學을 누르지는 못했다. 明代 말기에 王夫之(왕부지)는 張載(장재)의 氣論(기론)을 발전시킨 氣學(기학)을 집대성했으나 큰 세력을 떨치지는 못했다.
그러나 程朱學의 「理學」과 陸王學의 心學(심학), 王夫之의 氣學 모두 孟子에 그 사상적 뿌리를 두고 있었다. 이로 인해 「外王」을 중시하는 荀子의 「治平派」는 존립할 근거를 잃고 말았다. 荀子의 위패는 이미 南宋代에 文廟(문묘)에서 이단으로 몰려 쫓겨난 상황이었다. 단지 明代 말기에 陽明學의 세례를 받은 李卓吾(이탁오)가 荀子를 私淑(사숙)해 이를 부활시키고자 했으나 그의 죽음으로 인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특이하게도 治平派의 이념은 일본으로 건너가 소위 「고가쿠(古學)」 출현의 밑거름이 되었다. 당시 朱子學은 조선에 큰 영향을 미친 데 반해 陽明學은 일본에서 흥기했다. 「外王」과 「治平」을 중시한 고가쿠는 훗날 陽明學과 더불어 明治維新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20세기 중국과 批孔]
근대화 물결과 함께 「食人之敎」로 매도돼
外勢에 항거한 5·4 운동. 당시 많은 지식인들은 孔子사상을 亡國의 근원이라고 비판했다. |
儒學은 淸代 말기에 들어와 대포·아편 등과 함께 새로이 들어온 西歐문화와 접하면서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중국의 지식인들은 西歐문화의 강력한 힘 앞에서 西歐의 사상을 儒學의 仁義사상으로 흡수하고자 했다.
이에 儒學은 新學(신학)을 표방하면서 새로운 시대에 대응하고자 했으나 이미 「內聖」과 「修齊」에 너무 깊이 함몰되어 있었던 탓에 효과적인 대응이 불가능했다. 康有爲(강유위)가 소위 公羊學을 기치로 「外王」와 「治平」을 중시하는 새로운 儒學을 외치고 나섰으나 이미 때가 늦었다.
중국이 열강의 침탈로 半식민지로 전락하자 孔子는 중국 패망의 원흉으로 지목되었다.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5·4 운동이었다. 서양식 근대화를 열망한 중국의 많은 지식인들은 이미 5·4 운동 이전부터 孔子사상에 대해 무조건적인 거부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5·4 운동을 계기로 孔子는 일거에 「만세의 師表(사표)」에서 중국을 봉건의 질곡에 얽매이게 한 元兇(원흉)으로 전락되었다. 그들은 「孔子타도」의 구호 아래 儒敎를 「食人之敎(식인지교)」로 매도하면서 孔子를 「전제군주의 사부」로 규정하고 나섰다.
서양에만 존재했던 「전제군주」에 대한 연구가 전무했던 상황에서 이들의 이런 自虐的(자학적)인 행태는 이내 끝없는 자기비하를 초래했고, 궁극적으로는 제국주의자들의 침탈을 합리화해 주는 결과만을 낳았다.
20세기에 들어와 孔子사상에 대해 가장 신랄한 비판을 가한 一群의 학자들은 중국의 古代문명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표명한 소위 「古史辨派(고사변파)」였다. 胡適(호적)을 비롯한 서구주의자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고사변파는 중국 전래의 역사문화에 대해 가차 없는 비판을 가했다. 孔子 또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공자는 혁명가였나?
고사변파의 대표적 논객인 梅思平(매사평)은 孔子를 두고 중국사회의 변화를 저지하고 과거를 부활시키려고 한 反혁명분자라고 매도했다. 梅思平은 孔子 이전에 이미 그보다 훨씬 유능한 사람들의 사상이 존재했고, 孔子는 우연하게 명성을 얻은 것에 불과하다며 孔子를 혹평했다. 이는 훗날 문화대혁명 당시 중국 대륙을 광풍의 도가니로 몰아간 「批孔(비공)」의 단초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 지식인들이 모두 「批孔」에 서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당대의 지식인인 郭沫若(곽말약)은 「十批判書(십비판서)」를 통해 『孔子는 단순히 인민의 옹호자에 그친 게 아니라 무장혁명을 선동했다』고 주장하면서 孔子를 적극 옹호하고 나섰다.
곽말약은 墨子(묵자)와 莊子(장자)에 散見(산견)되는 일련의 기록을 토대로 孔子는 기존의 낡은 제도와 관행을 무력을 통해 혁파하고자 한 혁명가였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는 梅思平의 「批孔」과는 정반대되는 것으로 孔子를 일거에 무장혁명론자로 규정한 셈이다.
梅思平의 주장은 論語에 나온 孔子의 발언 중 일부 대목을 지나치게 확대해석하는 「斷章取義(단장취의)」의 잘못을 범했다는 지적을 면하기 어렵다. 論語를 살펴보면 孔子사상은 특이하게도 두 가지 측면을 모두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孔子가 일견 周公(주공) 등을 들먹이며 봉건제를 옹호하는 듯한 발언을 자주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봉건질서를 옹호한 것이 아니라 周公이 禮制를 만들어 「治平」의 기틀을 마련한 功業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오히려 孔子는 당시의 기준에서 볼 때 혁명가에 가까웠다.
그러나 孔子는 무장혁명을 주장한 적이 없다. 論語를 비롯한 그 어떤 문헌에도 孔子가 무력 등과 같은 강제력을 동원해 일거에 기존의 제도를 뒤엎으라고 주장한 내용은 없다. 곽말약 역시 孔子사상을 「牽强附會(견강부회)」했다는 지적을 면하기 어려운 것이다. 결국 매사평과 곽말약 모두 孔子사상의 한쪽 측면만을 지나치게 부각시켜 孔子사상의 요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을 수밖에 없다.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들의 批林批孔 집회. 홍위병들은 쿠데타를 시도하다 죽은 林彪 국방부장과 孔子를 싸잡아 비판했다. |
「批孔」은 思辨的인 性理學 때문
이후 20세기 중반 문화대혁명이 일어날 당시 중국 내에서는 새로운 중국의 탄생을 위해 孔子로 상징되는 「위대한 과거」를 철저히 청산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바로 「批孔운동」이었다. 이로 인해 孔子는 문화대혁명 기간 중 역사를 결정적으로 후퇴시킨 反動의 표상으로 매도되었다.
그렇다면 20세기에 들어와 孔子는 왜 5·4 운동과 문화대혁명의 기간 중 줄곧 反動의 표상으로 매도된 것일까. 그것은 사실 동중서와 주희 등이 孔子사상을 왜곡한 데 따른 반작용으로 볼 수 있다.
20세기 초에 서양문명의 충격을 받은 중국의 지식인들은 현상타파의 탈출구를 「孔子타도」의 구호에서 찾고자 했다. 당시 「孔子타도」의 구호는 지리멸렬한 중국의 현실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오직 그 길만이 중국을 半식민지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로 여기게끔 만들었다.
그러나 사실 중국의 근대화가 西歐의 충격 없이 중국인의 자각에 의해 주체적으로 진행되었다면 5·4 운동과 문화대혁명과 같이 그토록 전통문화의 총체적인 파괴를 주장하는 황당한 움직임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원래 孔學과 性理學은 孟子를 통해 접속하고 있으나 사실 완전히 다른 학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性理學의 뿌리인 孟學 자체가 이미 孔學으로부터 크게 일탈해 있었다는 점은 앞서 지적한 바와 같다. 儒·佛·道 3敎를 뒤섞어 만들어 낸 性理學은 더 이상 말할 것도 없다.
性理學은 우주와 귀신, 인성 등을 논하는 면에서는 나름대로 탁월한 면이 있기는 하나 「怪力亂神」에 대한 언급을 꺼렸던 孔學과는 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다. 孔子가 20세기에 들어와 처참할 정도로 폄훼를 당한 데에는 性理學의 책임이 컸다고 볼 수밖에 없다.
孔學은 君子인 爲政者의 「治平」과 「外王」을 중시한 교양정치학인 데 반해 性理學은 전적으로 개인적인 「修齊」와 「內聖」을 중시한 思辨철학에 불과했다. 성리학에서는 修齊와 內聖이 이뤄진 연후에 비로소 여력이 있을 때 治平과 外王에 나설 것을 주문하고 있다.
이는 일종의 수양론에 가깝다. 孔學의 본령인 治平 및 外王과는 한참 거리가 먼 것이었다. 孔學의 正脈이 孟學이 아니라 治平과 外王을 강조한 「荀學」으로 이어진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明治維新의 과정에서 荀學의 세례를 받은 「고가쿠」가 주요한 사상적 기반이 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孔子사상과 민주주의는 相通
그럼에도 불구하고 宋代 이래 근 1000년이 넘게 性理學이 마치 孔學의 전부인 것으로 여겨지는 왜곡현상이 지속되었다. 20세기의 중국인들이 孔子사상의 第一義(제일의)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른 채 조국의 패망한 책임을 모두 孔子에게 덧씌워 애꿎은 화풀이를 근 1세기 가까이 자행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이를 통해 짐작할 수 있듯이 孔子사상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선 동중서와 주희 등에 의해 덧씌워진 흉측한 덧칠을 말끔히 제거해 내야만 한다. 이어 당시 孔子가 무엇을 고민했고, 무엇을 찾으려고 애썼는지를 그의 시대로 돌아가 역사문화적 맥락에서 종합적으로 판단해야만 한다. 성리학의 잣대로 孔子를 바라보는 것도 잘못이지만 이미 퇴출선고를 받은 마르크스주의의 잣대로 孔子를 재단하는 것은 더욱 위험하다. 일찍이 孔子는 論語 「위령공」편에서 이같이 말한 바 있다.
『사람이 능히 「따오(道)」를 넓힐 수 있는 것이지 「따오」가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다』
이를 두고 일찍이 孔子 연구에 뛰어난 족적을 남긴 크릴(H.G. Creel)은 현대 민주주의의 지침으로 해석하면서 孔子를 수천 년 전에 광야에서 「민주」를 소리 높여 외친 선구자로 극찬했다. 크릴은 『동서고금을 통틀어 孔子를 능가하는 철학자도 없었고, 비견될 만한 사람도 없었다』며 감탄을 금치 못한 것이다.
사실 孔子사상의 기본원리는 민주주의 원리와 상통하고 있다. 이는 그가 인간의 합리적인 이성을 신뢰하고 그 바탕 위에 인간의 평등에 기초한 공동체의 번영 방안을 제시하여 당시의 참담한 현실을 구제하려고 한 사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21세기의 중국과 孔子]
胡錦濤 체제는 儒家민족주의 체제로 갈 것
江澤民(오른쪽)과 胡錦濤(왼쪽). 江澤民 이후 통치 이데올로기로 부각되기 시작한 儒家사상은 胡錦濤 공산주의를 대체하는 중국의 통치 이데올로기로 복귀했다. |
그렇다면 과연 孔子는 어떻게 해서 21세기에 들어와 급작스럽게 反動의 표상에서 중국문화의 표상으로 극적인 변신을 하게 된 것일까. 원래 중국은 소위 「四人幇(사인방)」이 몰락한 뒤 실용주의자들에 의한 개혁 개방이 본격화하면서 孔子를 조심스럽게 復權시키기 시작했다.
孔子의 부활은 개혁 개방의 시간표와 더불어 서서히 표면화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중국이 경제대국으로 부상하면서 다양한 개혁 개방 조치를 취한 것과 동시에 孔子의 부활 또한 2005년을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표면화한 것이다. 우리가 그 흐름을 간과해 급작스럽게 보이는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중국의 수뇌부는 왜 올해를 기점으로 孔子를 이처럼 대대적으로 선전 하고 나선 것일까. 이는 개혁 개방 조치 이후 이제 더 이상 기존의 마르크스-레닌주의나 毛澤東 사상만으로는 인민들을 효과적으로 통치할 수 없다는 수뇌부의 현실적인 고뇌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江澤民(강택민) 체제는 이미 「위대한 中華민족 부흥」이라는 구호 아래 도덕정치를 강조하고 전통문화를 중시하는 운동을 전개한 바 있다. 현재의 胡錦濤(호금도) 체제 역시 儒家사상에서 빌려 온 「조화로운 사회건설」과 「사람을 근본으로 하는 통치」를 새로운 國政이념으로 내세우고 있다. 중국 수뇌부의 이러한 일관된 행보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가속도를 내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 해답을 올해 초에 중국사회과학원의 한 연구원이 발표한 매우 주목할 만한 논문을 통해 찾아낼 수 있다.
이 논문은 「江澤民 체제 이후 중국의 통치 이데올로기는 사실상 儒家사상으로 방향전환을 했고, 현재의 胡錦濤 체제는 조만간 孔子사상을 바탕으로 한 儒家민족주의를 새로운 통치 이데올로기로 채택할 공산이 크다」고 전망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현재 중국은 21세기에 들어와 놀라운 변신을 시도하고 있는 셈이다. 조만간 서양의 역사를 토대로 하여 만들어진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차원을 넘는 세기사적 차원의 새로운 통치이념이 등장할지도 모를 일이다.
현재 이럴 가능성은 매우 높다. 중국은 이미 노동자 중심의 교조적인 공산혁명 이론을 버리고 중국의 역사문화에 부응하는 농민혁명을 채택해 현대중국을 창건한 바 있다. 이어 비록 참담한 실패로 끝나기는 했지만 自力更生(자력갱생)을 내세워 소련의 간섭을 거부하기도 했다.
지난 세기 말에는 사회주의 시장경제로 불리는 독특한 개혁 개방 정책을 추진해 놀라운 성공을 거두고 있다. 이를 감안할 때 중국 수뇌부가 경제대국化에 따른 통치질서의 안정을 위해 조만간 儒家민족주의를 내세우며 孔子사상을 새로운 통치이념으로 채택할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보인다.
공산주의 대체할 이념은 孔子사상뿐
올해의 대규모 행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현재 孔子사상은 중국에서 가장 거대하면서도 유일한 知的인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거대한 경제대국으로 부상한 현재 이미 그 효용이 끝난 공산주의 이념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오직 孔子사상밖에 없다. 林語堂(임어당)은 일찍이 「孔子사상은 중국 민족 안에 살아 움직이는 힘이고, 앞으로도 계속 중국 민족의 행동을 결정할 것이다」라고 호언한 바 있다. 林語堂의 호언이 점차 현실로 드러나고 있는 셈이다.
孔子사상으로 무장한 중국 수뇌부 앞에서 「批孔」을 논하려나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좋은 것일까. 당초 孔子가 새로운 세상을 향해 준비한 것은 인민교육을 통한 광범위하면서도 점진적인 개혁이었다. 이를 위해 孔門의 君子學이 제시한 구체적인 목표는 수준 높은 교양을 몸에 익힌 君子에 의한 「治平」이었다.
孔子가 君子의 治平을 달성하는 구체적인 방법론으로 제시한 것은 바로 「溫故知新(온고지신)」과 「中庸(중용)」이었다. 이같은 관점에서 볼 때 盧武鉉 정권 출범이래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소위 「保革논쟁」은 국가경쟁력을 극히 피폐하게 만드는 소모적인 논쟁에 불과할 뿐이다.
진정한 保守(보수)는 스스로 변화해 나가는 개혁 없이는 존재할 수 없고, 진정한 進步(진보) 역시 전래의 역사문화적 전통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과거 일본이 明治維新을 전후로 「脫亞入歐論(탈아입구론)」을 내세워 서양학문과 기술을 배우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을 때 조선의 지식인들은 그 배경과 의미를 세밀히 뜯어 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이를 비웃었다.
그 결과 조선은 얼마 후 日帝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중국이 이제 낡은 이념을 폐기하고 「콘푸시아니즘(Confucianism)」을 새로운 代案으로 적극 모색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이를 너무 한가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지 찬찬히 되돌아볼 일이다.
과거 조선조는 수백 년 전에 이미 얘기가 끝난 宋代의 朱子學을 들여다 놓고 500 년 동안 朱子의 주석에서 한 글자라도 벗어나면 가차 없이 「斯文亂賊(사문난적)」으로 몰아붙이는 사상적 폐쇄성을 보였다. 이에 반해 일본은 뒤늦게 性理學을 접했으면서도 그 한계를 통찰해 「고가쿠」라는 새로운 학문을 만들어 낸 뒤 이를 토대로 明治維新이라는 천고의 걸작을 만들어냈다. 우리는 왜 明治시대의 일본과 같이 사상 면에서 중국이나 일본보다 한발 앞서 나가지는 못하는 것일까.
현재 중국은 과거 일본이 「脫亞入歐論」을 내세워 明治維新을 성사시켰듯이 「黑猫白猫論(흑묘백묘론)」을 내세워 무서운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바로 곁에서 세기사적 변화가 진행되고 있는데 우리는 중국이 이미 수십 년 전에 내다버린 문화대혁명 때의 「흑백론」을 들여와 과거사나 뒤지면서 소모적인 이념논쟁을 벌이고 있다.
작금의 한심한 작태는 100년 전의 先祖들이 보여 준 행태와 얼마나 다른 것일까. 論語 등을 암송하며 孔子사상으로 再무장한 중국의 수뇌부와 만나 문화대혁명 때의 「批孔」 얘기나 할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아직도 우리나라의 책방에 진열돼 있는 「論語」 등의 儒家 경전은 孔子사상과 하등 상관없는 朱子의 주석을 마치 孔子사상에 관한 가장 권위 있는 해석인 양 부기해 놓은 贅書(췌서)들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