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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9. 볼리비아의 음모

鶴山 徐 仁 2005. 9. 30. 13:10
9. 볼리비아의 음모

Is to fight, to die fighting - Che Guevara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쿠바는 그들이 라틴 아메리카를 지배하는데 있어서 고양이 목의
방울처럼 상당히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이었다.
왼쪽부터 체 게바라, 라울, 피델 카스트로 그 쿠바의 중심에는 피델 카스트로와 그의
동생 라울, 그리고 체 게바라가 있었다.
미 CIA는 그중에서도 피델과 체 게바라에게
상당히 위협을 느꼈던 것 같다.
일례로 피델 카스트로 한사람에 대해 무려 8번에 걸친 암살을 기도했지만, 실패한 것과 체 게바라 한사람의 게릴라를 잡기 위해, 당시 최고의 정보기관 CIA가 총력을 기울였고, 미국이 자랑하는 특전대 그린베레의 게릴라전 특별 고문관들까지 파견한 것으로 보아 미국이 이 두사람에게 얼마나 큰 부담을 갖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특히, 체 게바라에 대한 CIA의 보고서 중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는 두사람의 듬직한 동지를 가지고 있다.
한사람은 혁명의 도끼 역할을 하는 라울이고, 또 한사람은 그의 머리 역할을 하는 체 게바라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체 게바라는 하루 속히 제거 되어야 한다. 그가 쿠바의 카스트로에 두뇌로 건재하고 있는 한, 미국은 언젠가 그로인해 재앙을 맞을 것이다."
미국이 체 게바라 문제로 골치를 썩고 있는 와중에 희소식이 날아들었다.
미국은 게릴라 중 두 사람의 변절자 덕분에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게릴라가 있는 곳을
알아낸 것이다.
명령은 간단했다. 즉시, 사살하라......
두 사람의 변절자 바레라와 로카바드는 볼리비아 군대에서 게바라에 대해 아는 것을 전부
불어버렸다.
4월, 볼리비아군은 본격적으로 '게릴라 사냥'을 시작했다.
그 주역들은 2천명 이상의 병사와 대게릴라전 미국인 특별고문관들(그린베레), 그리고,
CIA의 앞잡이들이였다.
게바라는 게릴라전에 관한 논문 <
게릴라전-하나의 방법>을 쓰면서 연구를 거듭하였다.
그러나, 실패의 원인은 다른 데 있었는데, 그것을 미처 예측할 수 없었다.
그 실패의 원인이란
1. 아직 군대와 싸울 준비가 충분치 않은 상태에서 발견되어 버렸다.
2. 볼리비아의 민중은 쿠바의 민중처럼 움직여주지 않았다. 이것은 게바라의 큰 오산이었다.
3. 당시 지극히 미약한 상태였던 게릴라 활동에 미국의 CIA와 그린베레가 개입하리란 것을
예측하지 못했다.
4. 볼리비아 공산당(비합법이어서 지하활동만 하고 있었음)의 지원이 없어, 도시와 연대가
이루어 지지 않아 통일전선 구축에 실패한 게릴라는 고립되어 있었다.
5. 당시의 볼리비아는 혁명적 조건이 성숙되지 못했다.
예를들어 바티스타 같은 독재자도 없었고, "7.26운동연합" 같은 조직이 결성돼 있지도
않았다.
체 게바라는 마지막 일기에서 상황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관측하는 체 게바라"
정부군이 게릴라를 추격하고 있음,
쿠바와 연결이 안됨, 라 파스와 연락이 두절됨, 볼리비아
농민의 협력이 없음, 게릴라 내에 환자 속출, 식량 부족,
천식재발에 대한 초조함, 윤리의식의 저하, 부대가 둘로
갈라져 전투에 임했으나 한쪽이 전멸 (나머지 절반도
호아킨이 지휘하는 부대와 연락이 두절됨).
"
8월 31일, 볼리비아군은 게릴라들이 당일 오노라트
로하즈라는 농부의 집으로 간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로하즈는 엘 이에소의 얕은 곳으로 마시쿠리강을 건너
도록 게릴라를 안내할 예정이었다.
한달전, 게바라는 로하즈의 아이들을 치료해 준 적이
있었다. 결국 로하즈는 배신을 했다.
호아킨의 게릴라 부대가 얕은 내를 건너기 시작할 때,
매복해 있던 정부군은 집중 사격을 가했다.
순식간에 열 명의 게릴라가 쓰러졌다.
그중 오직 한 사람 파코만이 살아 남았다.
게바라의 일기와 볼리비아 군인들과 행동을 같이 했던
볼리비아인 저널리스트 호세 알카사르의 기록에 의하면
게바라부대는 겨우 달아났음에도 불구하고, 탈출에는
실패하여 결국은 다시 포위되었다.
게릴라는 둘로 나뉘어 행동했다. 게바라의 부대와 호아킨의 부대로 게릴라를 나눈 게바라는
그의 부대를 이끌고 고군분투하고 있었지만, 2000명 이상의 병력과 20여명의 게릴라는 너무
큰 전력차가 있었다. 체 게바라가 아무리 게릴라전의 귀재라 할지라도 역부족이었다.
3월 3일 : 게릴라, 매복하여 정부군을 기다림.
군측 7명 사망, 4명 부상, 10명 생포. 게릴라들은 야영지를 떠남.
4월10일 : 이리피티에서 군과 전투. 군병사 10명 사망, 6명 부상, 쿠바인 게릴라 루비오 전사.
4월20일 : 정부군을 속이기 위해 무유팜파로 내려감.
그곳에서 일행과 떨어져 있던 드브레와 브즈토스 두 사람이 체포됨.
게릴라는 길을 바꿈.
4월25일 : 정부군과 전투. 쿠바인 롤란도와 군측 병사 2명 사망.
항공부대가 지역 전체에 폭탄 투하.
5월 8일 : 매복하여 정부군을 기다림.
정부군 수색대 병사 3명 사망, 포로 10명(후에 즈봄만 석방).
게릴라 전원 병에 걸림.
5월30일 : 매복, 수색대 병사 3명 사망.
5월31일 : 다른 장소 매복, 수색대 병사 2명 사망.
6월26일 : 군과 전투, 수색대 병사 4명과 게릴라 도우미 사망. 게릴라 전체 인원은 24명이 됨.
7월20일 : 다른 그룹에 의한 매복. 군병사 4명과 게릴라 1명 사망.
7월27일 : 정부군과 전투. 4명 사망.
7월30일 : 군과 전투. 게릴라 라울 전사, 3명 부상, 군병사 6명 사망.
부상자가 속출하지만 약이 없었다.
8월26일 : 정부군과 전투. 사상자 없음.
8월31일 : 후위부대의 와나로 후퇴. 호아킨외 8명의 게릴라 전사.
9월26일 : 게릴라(게바라가 이끄는 그룹)에 대한 정부군의 매복 공격. 게릴라 2명 전사.
캄바와 레온은 적의 포로가 되었다.
10월6일 : 계곡에서 게릴라는 정부군 1천 8백명에게 포위됨. 도망갈 길이 없었다.
10월8일 : 운좋게 탈출한 세 명의 게릴라 중 한 사람이었던 베니그노는 게바라의 최후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볼리비아 군은 우리를 발견했다. 촌장이 정보를 제공했던 것이다.
촌장은 마을의 한 노파와 사원의 경내에서 감자를 파는 그의 아들 두 사람에게서 우리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던 모양이다.
병사들이 산의 계곡에 배치되었다.
정부군은 우리가 그들에게 유리한 지점으로 이동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우리는 그날 오전, 2시 반에 이동하기로 했다. 환자가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두 시간의 착오가 생겼다.
잠에서 깬 게바라는 내가 있는 곳으로 와서 몸은 어떠냐고 물었다.
내게 어디 아픈 곳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괜찮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정찰에 나갈 수 있겠느냐고 묻고는 '이 부근 전체를 정찰해 주었으면 좋겠네.
특히, 오른쪽에 있는 산을 말이야'라고
말했다.
체 게바라 사령관과 게릴라 전사들 전투가 벌어질 경우를 대비하여 파쵸를 동반했다.
나는 그때, 한쪽 손밖에 쓸 수 없었다.
백미터 정도 나아가 전방의 구릉을 살피기 위해 덤불에
몸을 숨겼다.
그때 파죠가 구릉위에 서있는 한 사람을 발견하고,
'저기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목동인가 했지만, 목동이 나오기에는 너무
이른 시각이었다. 그때가 아침 6시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보초병의 행동으로 보였다.
이윽고 구릉의 전체에 걸쳐 차례차례로 병사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캠프로 돌아와 게바라에게 전했다.
'최악이다. 저 구릉 전체에 적이 깔려 있다.' 그러자, 그가 대답했다.
'좋다. 오른쪽 계곡으로 나가서 적어도 오늘 하룻동안만이라도 발견되지 않도록 하자.
밤이 되면 봉우리를 넘어 포위망을 뚫고 탈출한다.'
계곡에는 숨을 곳이 없었으므로 우리는 위장을 하였다.
봉우리는 5백미터 정도 앞에 있고 그곳에 군인들이 있는 것이다.
게바라는 모두를 격려하면서 방어체제를 조직하고, 탈출경로를 지시하고, 흩어졌다가 어느
장소에 재집결할 것인가도 결정했다. 계곡의 입구에 안토니오를 지휘관으로 하여 파쵸,
아르투로, 윌리가 복병으로 배치되었다. 계곡의 깊은 곳은 폼보와 나토, 우르바노가 맡았다.
계곡의 바위 근처에 나무 한 그루가 서있었는데 게바라는 나에게 그리고 가라고 했다.
내 위치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지만, 지시한 그곳은 적군의 움직임을 잘
관찰할 수 있는 유리한 장소였고, 공격을 받을 경우 탈출지점으로도 용이했기 때문에 가야
만 했다. 아침 8시, 나는 인티와 다리오의 도움을 받아 그곳으로 갔다.
그리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아침 11경, 군대가 이동하기 시작했다.
우리 쪽으로 오고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에 나에게로 다가온 게바라에게 보고했다.
곧 우리의 말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운 지점에까지 적이 바짝 다가왔다.
우리는 나무 뒤쪽에 몸을 숨겼다.
나무는 둥치는 곧았고 뭄을 숨기기에도 매우 작은 은폐물이었다.
게바라가 있는 곳에 윌리와 함께 몸을 감추고 있던 아니세트와 엘나토가 폼보와 우르바노가
있는 쪽으로 파견되었다.
폼보 등을 게바라가 있는 쪽으로 다시 집결시키기 위해서였다.
아니세트가 계곡의 중앙으로 한발자욱씩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언덕 위의 병사들에게 발견되어 버렸다.
그는 즉시 사살되었다. 그리고 나서 총격전이 시작되었다. 오후 1시 반 경이었다.
다른 동지들이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인티와 다리오 그리고 나 세사람은 높은 위치에 있었으므로 적을 쏠 수 있었지만, 나머지
동지들은 낮은 곳에서 몸을 숨기고 있었기 때문에 높은 곳에서 내려오는 적들을 미처 볼
수가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다른 동지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른 채 우리는 총격전을 계속했다.
적군 5명 사망, 부상자 6명 발생.
오후 늦게 폼보가 우르바노와 엘 나토와 함께 우리들이 올라왔던 지점으로 계곡을 건너
오려고 했다.
우리는 몸짓으로 그렇게 하면 전멸할 것이라고 필사적으로 전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어두워지길 기다리면서 우리가 내려갈 때까지 숨어있었다.
우리가 모두 다시 집결했을 때, 폼보가 '게바라는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우리도 동시에 그들에게 반문했다.
그때서야 비로소 게바라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지시한 집합장소 어디에서도 그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배낭과 발자국이 남아있어서 부상당했을 것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더 멀리 떨어진 집합장소로 갔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날 밤 우리는 포위망을 뚫고 탈출했다.
"봉우리를 넘어서 라 이게라 시가로 돌아가려 할 때 한바탕 총격전이 벌어졌으나 그 이후
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우리는 라 이게라시가에서 6백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관목지대에 몸을 숨겼다.
아침 9시 반 경, 마을 쪽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11시 쯤 다시 몇 발의 총소리가 더 들려왔다.
후에 그것이 윌리와 엘치노, 또 체 게바라를 살해하는 총소리였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가져온 곳: [꿈깡끼꾀꼴]  글쓴이: 가인 바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