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24.04.20. 03:00
미국의 25센트(쿼터달러) 동전은 주차장·자동판매기·패스트푸드점 등 일상에서 널리 쓰인다. 내년부터 한국계 미국인 장애인 인권 운동가 스테이시 박 밀번(1987~2020·한국 이름 박지혜)의 얼굴이 새겨진 25센트 동전을 볼 수 있게 된다. 미 연방 조폐국이 미국 사회에 공헌한 여성 20명을 선정해 2022~2025년 발행되는 25센트 뒷면(앞면은 조지 워싱턴 초대 대통령)에 얼굴을 새겨 넣어 기리는 ‘아메리칸 위민(American Women·미 여성) 쿼터 프로그램’의 헌정 대상자로 지난해 선정됐기 때문이다. 미국 화폐에 한국계 인물이 등장하는 최초의 사례다. 밀번의 얼굴이 새겨진 동전은 총 5억개 이상 발행이 예정돼 있다.
활짝 웃고 있는 스테이시 박 밀번. 부모는 "배려와 따뜻한 마음으로 모두를 행복하게 해주는 아이였다"고 회고했다. /스테이시 박 밀번 부모 제공.
밀번은 주한미군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지체장애를 앓으면서도 장애인 인권 운동에 앞장서다가 2020년 5월 신장 수술 합병증으로 서른셋에 세상을 떴다. ‘아메리칸 위민 쿼터 프로그램’ 선정 인물들이 대부분 19~20세기에 활동하며 세계적 명성을 쌓은 인물들이라는 점에서 밀번의 존재는 더욱 주목받고 있다. 장애인의 날(20일)을 이틀 앞둔 18일 미 노스캐롤라이나주(州) 페이에트빌에서 본지와 전화로 인터뷰한 어머니(진 밀번)와 아버지(조엘 밀번)는 “내년에 동전이 나오면 딸아이를 기억하는 가족·친구들에게 쥐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스테이시 박 밀번이 세상을 떠나기 1년전인 2019년 교회에서 세례식을 받고 난 후 찍은 사진. /스테이시 박 밀번 부모 제공
어머니 진씨는 2년 전 연방 조폐국에서 연락받던 순간을 또렷이 기억한다고 했다. “25센트 동전 뒷면에 새길 여성 인물 후보로 (딸을) 추천했는데 동의해줄 수 있겠느냐는 거예요. 처음엔 ‘가짜 뉴스’인 줄 알았습니다.” 부부는 1년 반 정도 이어진 추천·심의·선정 결과를 차분히 기다리면서 딸과 함께한 33년을 돌아봤다. 1987년 5월 용산 기지 내 121 미군 병원에서 태아가 거꾸로 들어서 있다고 해 제왕절개로 얻은 첫딸이었다. 태어난 후 팔다리에 유난히 힘이 없던 아기가 5만명 중 한 명꼴로 걸리는 근육 퇴행성 질환(선천성 근이영양증)을 앓고 있다는 의사의 말을 들었다. 이후 진씨는 18년 동안 딸을 자전거나 휠체어에 태워 통학시켰다.
진씨는 “힘들었지만 아이의 미소를 볼 때마다 기운이 솟아났다”고 했다. “햇살처럼 밝은 아이였어요. 말투에는 친절함과 배려가 있어 주변의 모두를 미소 짓게 했죠. 제 아빠를 닮아서 자기 생각을 조리 있게 말했죠. 글로 생각을 풀어 쓰는 솜씨는 또 얼마나 뛰어난데요. 인권 운동을 안 했으면 워싱턴 DC로 가서 정치인이 됐을 거예요.” 부모는 아이가 혹시라도 남들과 다른 처지에 주눅 들까 염려해 늘 성경 구절을 인용한 말로 용기를 북돋워줬다. “하나님께서 너를 만들어 엄마 배 속을 통해 세상에 보내주신 건 뜻하신 바가 있어서란다. 이 얼마나 놀랍고 신비한 일이니.”
미국 수도 워싱턴DC에서 열린 장애인 인권 집회에 참석해서 연설하고 있는 스테이시 박 밀번. /스테이시 박 밀번 부모 제공
초등학생 때 학교에서 겪은 낙상 사고를 계기로 ‘장애인이 일상에서 겪는 불편함’의 문제에 눈뜬 밀번은 문제 의식을 담은 블로그 글을 쓰고 인터뷰를 하면서 청소년 장애인 인권 운동가로 지역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부모가 거주하는 노스캐롤라이나에서 대학을 마치고 4500㎞ 떨어진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로 가서 장애인 인권 운동가로 활동했다.
아버지 조엘씨는 “딸아이는 장애인들에게 ‘아무도 우리를 구해주러 오지 않는다’며 스스로 권익을 찾자고 독려했다”며 2019년 샌타크루즈 캘리포니아대에서 장애 학생들을 상대로 한 강연의 한 토막을 들려줬다. “우리의 지금 모습을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우리 모습이니까요. (모습이 이렇다 해서) 우리가 성장할 수 없거나, 미래를 더 좋은 방향으로 바꿀 수 없다는 걸 뜻하진 않습니다. 우리는 사랑받아 마땅한 아름다운 인간이니까요.” 밀번은 미국 젊은이인 동시에 한국 젊은이였다. 1990년 걸프전이 발발한 이라크로 아버지가 급파되자 육아를 도우러 한국에서 건너온 외할머니와 가깝게 지냈다. (할머니는 이후 한국에 돌아가지 않고 미국에 머물렀다.) 덕분에 한국말도 곧잘 하고 호박을 숭숭 썰어 넣어 걸쭉하게 끓인 수제비에 환호하는 ‘된장 입맛’이었다. 캘리포니아에서 인권 운동을 할 때는 한인 입양 청년들을 집으로 불러 명절 음식을 먹이며 각별히 돌봤다.
내년 발행될예정인 25센트 동전의 시안. /미 연방 조폐국
2020년 코로나가 전 세계에 확산하고 미 전역이 봉쇄되자 밀번은 응급 의료에서 소외된 중증 장애인과 저소득층을 돌보기 위한 긴급 대응팀을 꾸려 활동했다. 하지만 지병인 신장 질환 수술 합병증으로 몸 상태가 급속히 나빠지면서 33살 생일이던 그해 5월 19일 세상을 떠났다. 밀번의 장례식 책자 표지에는 장애인 인권 운동을 함께 하는 동료들을 향해 하던 말이 인쇄됐다. “우리는 있는 모습 이대로 강하고 아름답습니다.” 외손녀에게 수제비를 끓여주던 외할머니도 그해 7월 눈을 감았다. 둘은 밀번 부부의 집 부근에 나란히 잠들어 있다.
밀번은 고향 한국을 사랑해 생전에도 여러 차례 다녀갔다. 장애인 기반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점을 늘 안타깝게 여겼다 한다. 지난해 11월 연방 조폐국이 스테이시 얼굴을 새긴 25센트 동전 발행을 공식 발표했을 때 부부는 마침 서울에 있었다. “예전에 비해 휠체어를 타고 자연스럽게 지하철을 이용하는 승객이 많았고, 몸이 불편한 분들을 위한 여러 시설들이 많이 생겼더라고요. 우리 딸이 하늘에서 이걸 보면 참 좋아하겠구나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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