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人物情報 參考

싱가포르와 리콴유

鶴山 徐 仁 2013. 9. 29. 09:04

  

 

 

 

 

싱가포르(Singap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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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위치
동남아시아
수도
싱가포르
환율
1싱가폴.. = 856.44원 (2013.09.27 17:58) 더보기
증시
싱가포르 ST 3,210.18 | 15.87 | 0.50%
(2013.09.27) 더보기
언어
말레이어, 영어, 중국어
인구
4,657,542명 (2010), 117위 전체순위
면적
697㎢, 181위 전체순위
기후
열대성기후
종교
불교 43%, 이슬람교 15%, 도교
종족
중국인 77%, 말레이인 14%, 인도인
정체
중앙집권공화제 
 
의회형태
 
다당제&단원제
국가원수
 
대통령
 
정부수반
 
총리
나라꽃
 
양난 Vanda Miss Joaquim O..
도메인
 
SG
홈페이지
www.gov.s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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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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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콴유
李光耀
Lee Kuan Yew

 

리콴유
리콴유
싱가포르 싱가포르제1대 총리
임기 1959년 6월 5일 ~ 1990년 11월 28일
대통령 유소프 빈 이샥
벤저민 헨리 시어즈
데반 나이르
위킴위
후임: 고촉통(제2대)

출생일 1923년 9월 16일
출생지 싱가포르 싱가포르
정당 인민 행동당
종교 불가지론
배우자 과걱추
자녀 리셴룽, 리웨이링, 리셴양

리콴유(이광요, Lee Kuan Yew 또는 Lee Kwan-Yew, 중국어: 李光耀, 병음: Lǐ Guāngyào, 1923년 9월 16일 - )는 싱가포르정치인이자 초대 총리(1959년부터 1990년까지)로 재직했다.

그는 싱가포르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정치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싱가포르의 두 번째 총리인 고촉통 내각에서도 수석 총리로서 정치에 관여했다. 현재 그는 싱가포르의 세 번째 총리가 된 그의 아들 리셴룽 총리를 조언하는 특별직을 맡고 있다. 그의 가장 가까운 친구들과 가족은 리콴유를 "해리"(Harry)라고 부르며, 공식적으로는 한번도 사용한 적이 없지만 "해리 리콴유"라고 지칭되기도 한다. 최근 그는 자신이 세상을 떠난 뒤 자신의 집이 '국가 성지'로 지정되는 일이 없도록 자신의 사후에 집을 허물라고 지시했다.[1]

가족 환경[편집]

리콴유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자신이 4세대 중국계 싱가포르인이라고 하였다. 그의 증조할아버지 리복분(1846년 태어남)은 중국 광동성으로부터 영국의 동남아 해협 식민지(Straits Settlements)로 1862년 이민을 갔다.

리친쿤과 추아짐니의 큰아들인 리콴유는 싱가포르의 캄퐁 자바 가의 92번지에 있는 큰 방갈로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그는 그의 할아버지 리훈렁이 가르쳐준 영어로 인해 영국 문화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의 할아버지는 그에게 콴유라는 중국 이름에 덧붙여 "해리"라는 이름을 더해주었다.

리콴유와 그의 아내 과걱추는 1950년 9월 30일 결혼하였다. 둘 사이에는 두 아들과 하나의 딸을 두었다.

그의 자녀들은 싱가포르 내에서 대부분 정부 고위관료로 재직하고 있다.

전 육군 장성이었던 큰아들 이현룡은 2004년도부터 싱가포르의 총리이자 재무부 장관이 되었다. 그는 또한 싱가포르 정부 투자 회사의 부의장을 맡고 있다. (리콴유가 의장) 역시 전 육군 장성인 둘째 아들 리셴양은 싱가포르 최대의 회사인 싱텔의 최고 경영자이다. 싱가폴 항공이나 DBS 은행과 같은 정부 관련 회사들의 지분을 가지고 있는 테마섹 지주 회사가 현재 싱텔의 지분 중 56%를 가지고 있다. 테마섹 지주 회사는 리콴유의 첫째 며느리인 호칭이 최고 경영자로 재직하고 있다. 국립 신경 학회를 운영하고 있는 리콴유의 딸 리웨이링은 여전히 미혼이다. 리콴유의 아내 과걱추는 예전에 법률 회사 리&리를 리콴유와 공동 운영했었다. 그의 동생 데니스, 프레디, 수산 유 또한 같은 회사의 파트너였다. 리콴유는 여동생 모니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리콴유 자신은 지속적으로 친척에 대한 특혜에 대해 부인해왔으며, 그의 가족들의 현재 위치는 그들의 성품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유년 시절[편집]

리콴유는 텔록 쿠라우 초등학교와 래플즈 학교래플즈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1942년부터 1945년간의 일본의 지배로 인해 대학을 다니는 것은 미룬 채 타피오카를 이용해 만든 "스틱파스"라는 접착제를 암거래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1942년부터는 일본어와 중국어 수업을 듣고 동맹군의 전보를 번역하는 일과 일본의 호도부(정보 및 선전 부서)에서 영어 편집인으로 일했다.

전쟁이 끝난 후 영국 런던 정치경제대학교케임브리지대학교 소속인 필즈 윌리엄 칼리지에서 을 전공했다. 그는 1949년에 싱가포르로 돌아와 법률 회사에서 변호사로 일했다.

정치 생활 초기 – 1951 - 1959[편집]

인민행동당 이전[편집]

리콴유의 정치인으로서 첫 경험은 친영국적 당인 진보당에서 후보로 나선 그의 상사 존 레이콕을 위해 선거인으로 뛴 것이었다. 그러나 그 당이 대중, 특히 중국인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리콴유는 결국 당의 미래가 그리 밝지 않음을 직감하였다. 이것은 렌델 위원회가 선거권을 가진 사람의 자격을 싱가포르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으로 확대했을 때 중국어를 사용하는 인구가 엄청나게 증감함으로 인해 더 명확해졌다.(1953년) 결국 무역 노조과 학생 조합에 법률적 조언을 해주면서 중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의 연결고리를 가지며 그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나중에 그의 인민행동당은 이 역사적인 연결 고리를 파업에서의 협상에서 사용하기도 하였다.)

인민행동당의 창당[편집]

1954년 11월 21일 리콴유는 "맥주 마시는 부르주아들" 이라고 그가 지칭하던 영어를 배운 일군의 사람들과 함께 인민행동당(People's Action Party, PAP)을 결성하였다. 이 당은 친공산주의적 무역 노조와 정략적인 연계를 통해 만들어졌는데, 이는 영어를 사용하는 계층은 친공산주의자들의 대량의 지지가 필요했던 반면, 공산주의자들은 말레이시아 공산당이 불법이었기 때문에 이를 가리기 위한 지도층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리콴유를 이 정략적 연합을 편리를 위한 결혼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두 계층의 공동의 목적은 독자적인 정부를 구성하고 영국 식민 지배를 끝내기 위해 대중을 선동하는데 있었다. 창당식은 빅토리아 기념홀에서 1500명의 지지자와 무역 노조들로 가득찬 채로 이뤄졌다. 리콴유는 이 당의 사무총장이 되었으며 이 직책을 1957년의 잠시간을 제외하고는 1992년까지 유지하게 된다. 창당식에는 통일 말레이 국민기구(UMNO)의 툰쿠 압둘 라만과 말레이시아 중국인 연합(MCA)의 탄청록이 신당에 신뢰를 주기 위해 초청되었다.

야당 활동[편집]

리콴유는 1955년선거에서 탄종 파가르 선거구의 의석을 획득하였다. 야당의 당수로서 데이비드 솔 마셜노동 전선 연립 정부와 대항한 그는 싱가포르의 미래 정세에 대한 런던에서 열린 두 차례 회의에도 인민행동당의 대표로 참가하였다. 첫 번째 회의는 마셜이 주최하였고 두 번째는 마셜의 후임자인 림유혹에 의해 개최대었는데 이 시기에 리콴유는 이 두 라이벌들과 정치적인 대립을 하고 있었다. 그의 친공산주의적 측근들은 간혹 폭력적이기도 한 대중 집회에 활발히 참여하였기에 적절한 거리를 둔 반면, 여당의 연립 정부는 정권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종종 그들을 무능력하다고 공세를 펼치기도 하였다. 하지만 1957년 친공산주의자들이 가짜 당원들을 이용해 당권을 장악하자 리콴유의 인민행동당에서의 위치는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림유혹은 친공산주의자들을 대거 구속하도록 명령하였고, 리콴유는 사무총장으로 복직하였다. 공산주의자들의 당내 위협은 다음 선거를 준비하는 동안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 이 시기에 리콴유는 공산주의 진영의 리더이자 그가 플렌이라고 불렀던 퐁총픽(또는 팡추앙피)과 처음으로 비밀리에 만나게 된다.

국무 총리, 독립 이전 - 1959년부터 1965년까지[편집]

자치 행정부 - 1959년부터 1963년까지[편집]

1959년 7월 1일 열린 선거에서 인민행동당은 51개 의석 중 43개의 의석을 차지하였다. 싱가포르는 국방과 외교를 제외한 국내 문제에 관한 자치권을 갖게 되었으며 리콴유는 1959년 7월 3일에 수석장관(Chief Minister)이었던 림유혹을 대신해 싱가포르 최초의 국무 총리가 되었다[2]. 국무 총리가 되기 전에 리콴유는 림유혹 정부 시절 구속되었던 림친시옹데반 나이르의 석방을 요청했다.

리콴유는 영국으로부터 자치권을 획득한 이후 교육, 주거, 실업 등 많은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리콴유는 주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규모 주택 건설을 위한 주거 및 개발 위원회(Housing and Development Board, HDB)를 세웠다.

1961년 7월 21에는 13명의 인민행동당 의원이 당론을 따르지 않으면서 투표를 거부한 내각 불신임 투표가 있었다. 6명의 교역 조합 출신 좌파 지도자들과 함께 이들은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당인 바리산 소시알리스창당한다. 바리산 소시알리스는 창당시기부터 인민행동당에 버금가는 지지를 얻었다. 인민행동당의 51개 지부중 35개의 지부와 23명의 간사 중 19명이 바리산 소시알리스로 자리를 옮겼고, 이 사건은 1961년의 분당 사태로 알려져있다. 의회에서의 인민행동당은 이제 26석만을 유지해 25석을 유지한 야당에 간신히 다수를 유지하고 있었다.

1961년에 인민행동당은 두 번의 보궐선거에서의 패배와 당원들의 탈당, 좌파의 노동운동에 직면했다. 리콴유의 정부는 1962년의 말라야 연방과의 합병과 관련한 국민투표 전까지 거의 무너질 위기에 처해있었다. 1962년의 투표는 정부에 대한 대중의 신임을 시험하는 자리였다.

말라야 연방과의 합병 및 분리 – 1963년부터 1965년까지[편집]

말라야 연방의 총리 툰쿠 압둘 라만이 1961년에 말라야 연방, 싱가포르, 사바, 사라왁 간의 연방을 제안했을 때, 리콴유는 말레이시아와 합병하고 영국의 식민지 통치를 끝내기 위한 사전 작업을 시작했다. 리콴유는 70%가 투표에 찬성한 1962년 9월 1일에 열린 국민 투표 결과를 이용해 국민들이 자신의 계획을 지지한다고 이야기했다.

1963년 9월 16일,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 연방의 일원이 되었다. 하지만 이 연방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말레이연합 국가조직(UMNO)는 싱가포르에 있는 다수의 화교가 말레이시아에 통합되어 인민행동당이 영향력을 갖게 되는 것을 걱정했다. 리콴유는 말레이계를 우대하는 부미푸트라 정책에 반대했고, 이를 주장하기 위해 말레이시아 연대회의의 "말레이시아 사람의 말레이시아!"라는 유명한 구호를 사용했다. 말레이계는 말레이시아의 토착 민족이고, 말레이시아는 다양한 민족이 통합된 나라를 뜻한다.

1964년의 싱가포르 인종분쟁은 무하마드의 생일(1964년 7월 21일)에 칼랑 가스회사 부근에서 일어났다. 이 분쟁에서 중국인들과 말레이인들이 서로를 공격하며 23명이 죽었고 수백명이 부상을 당했다. 분쟁의 원인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는데, 그 중 중국인이 무슬림 행렬에 병을 던졌다는 설도 있고, 말레이인이 이 분쟁을 시작했다는 설도 있다. 1964년 9월에는 더 많은 분쟁이 일어나서 사람들이 차량과 상점을 약탈하기까지 했다. 이에 따라 툰쿠 압둘 라만과 리콴유는 이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대중 앞에 나서야 했다.

툰쿠는 이 위기를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해 싱가포르를 말레이시아 연방에서 쫓아내며 "중앙 정부에 어떤 존경심도 보이지 않은 싱가포르주 정부와의 모든 관계를 단절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리콴유는 연방에 계속 머물기 위한 타협을 성사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그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리콴유는 1965년 8월 7일, 말레이시아와의 분리 뒤 관계를 다룬 분리 협정에 서명했다. 이 협정에서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는 분리 뒤에도 상호 국방과 교역 부문에서 협력하기로 했다.

합병의 실패는 합병만이 싱가포르가 생존할 수 있는 길이라 믿었던 리콴유에게 매우 중대한 위기를 가져왔다. 텔레비전으로 방영된 기자회견에서 리콴유는 분리를 발표하며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기자회견은 리콴유의 지지자들이 리콴유가 말레이시아의 분리를 선동하지 않았다는 증거로 사용되곤 했다):

"제게 이 순간은 매우 고통스런 순간입니다. 제 인생동안, 제가 성인이 된 뒤에 저는 두 지역의 통합과 합병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 지금, 저, 리콴유, 싱가포르의 총리는 싱가포르 인민과 싱가포르 정부를 대표해 1965년 8월 9일 오늘부터 싱가포르는 자유와 정의 위에 세워졌으며 인민의 복지와 행복, 평등한 사회를 추구하는 영원토록 주권을 가진 민주 독립 국가가 된 것을 선언합니다."

1965년 8월 9일, 말레이시아 의회는 말레이시아에서 싱가포르를 한 주로 인정하던 관계를 끊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싱가포르는 천연 자원과 수자원이 부족해 이런 자원의 공급을 말레이시아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매우 빈약한 국방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싱가포르 정부와 리콴유는 이런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3]

독립 이후의 총리 시절 – 1965년부터 1990년까지[편집]

리콴유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독립 이후 제대로 자지 못했고, 며칠 뒤 앓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영국 총리인 해롤드 윌슨은 영국 고등판무관 존 롭으로부터 싱가포르의 현재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우려를 표시하자 리콴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싱가포르에 대해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 동료들과 나는 고통의 순간에도 또렷한 정신을 갖고 있는 이성적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 정치의 장기판에서 한 수를 두기 전에 가능한 모든 결과를 고려할 것입니다..."

리콴유는 싱가포르의 독립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다. 싱가포르는 1965년 9월 21일, 국제 연합에 가입했고, 다른 4개의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함께 1967년 8월 8일 동남아시아 국가 연합(ASEAN)를 세웠다. 리콴유는 수카르노 집권 시절 보르네오를 두고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가 전쟁을 벌인지 몇 년 뒤인 1973년 5월 25일, 처음으로 인도네시아에 공식적으로 방문했다. 이 방문을 통해 싱가포르와 인도네시아 간의 관계가 급격히 발전했다.

싱가포르에서는 말레이어가 다수가 쓰는 언어이긴 했지만, 다양한 이민자들이 함께 공유할만한 주된 문화를 갖고 있지는 못했다. 정부와 여당의 협력을 통해 리콴유는 1970년과 1980년 동안 다문화와 다인종에 바탕을 둔 독특한 싱가포르의 문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리콴유와 리콴유 정부는 종교에 대한 이해와 인종간의 화합의 중요성을 역설했고, 인종과 종교에 대한 폭력을 일으킬만한 위협에 대한 법을 통과시킬 준비가 되어있었다. 예를 들어, 리콴유는 기독교인들의 말레이인들에 대한 전도를 "무감각적인 복음 전도"라며 경고했다. 1974년, 정부는 싱가포르 바이블 소사이어티가 말레이인들에게 종교적 매체를 출판하는 것을 중단하도록 권고했다.[4]

정책[편집]

리콴유는 독립 뒤에 국방, 경제, 사회문제의 세가지 걱정거리가 있었다.

국방[편집]

공산주의자, 인도네시아(대결 구도를 통해), 싱가포르를 말레이시아로 다시 통합하려는 UMNO 극단주의자들의 위협은 싱가포르의 취약한 국방에 큰 골치거리였다. 싱가포르가 국제 연합에 가입한 뒤, 리콴유는 싱가포르의 독립된 지위를 국제적으로 인정받기를 바랐다. 그는 스위스의 모델을 따라 중립과 비동맹 정책을 선언했다. 동시에 그는 고켕쉬싱가포르 국군(Singapore Armed Force, SAF)를 세우도록 부탁했고, 다른 나라들에 조언을 비롯해 훈련, 장비 지원을 부탁했다.

정부 정책[편집]

싱가포르도 다른 나라처럼 정치적 부패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리콴유는 부패행위조사국(Corrupt Practices Investigation Bureau, CPIB)을 세우는 법을 통과시켰다. 부패행위조사국은 부패 용의자 및 그의 가족들의 체포와 수색, 증인 소환, 계좌 및 소득세 환급 추적 등의 권한을 갖고 있다.

리콴유는 깨끗하고 정직한 정부를 유지하기 위해서 장관의 소득이 높아야한다고 생각했다. 1994년에 리콴유는 장관, 판사, 고위 공직자의 연봉을 사기업의 전문직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맞추는 안건을 제출하며, 이런 높은 소득이 공공 부문으로 인재를 끌어오는 데에 도움을 줄 것이라고 주장했다.[5]

1960년말, 싱가포르의 인구가 늘어나자 경제 성장에 방해가 될 것을 우려한 리콴유는 '둘만 낳자'는 강력한 가족 계획 캠페인을 시작했다. 두 아이를 낳은 부부는 불임 수술을 권고받았다. 셋째 또는 넷째 아이에게는 교육 혜택을 낮추었으며, 이렇게 자식들이 많은 가정은 받을 수 있는 세금 환급도 줄어 들었다.[5]

1983년, 리콴유는 싱가포르 남자들이 고학력 여성을 배우자로 맞도록 권고했고, 이는 '대 결혼 논란'을 촉발했다. 리콴유는 많은 고학력 여성이 결혼하지 않는 것을 걱정했다. 대졸 이상의 여성을 비롯한 일부 사람들은 그의 관점을 불쾌히 여겼다. 하지만 결혼을 알선하는 사회개발부(Social Development Unit, SDU)가 설립되어 고학력의 남녀가 어울리는 것을 도왔다.[5] 리콴유는 과도하게 성공적이었던 '둘만 낳자' 가족 계획 정책을 뒤집기 위해 고학력의 여성이 아이를 셋 내지 넷을 가질 경우 세금 환급, 교육, 주택에 인센티브를 주는 정책을 도입하기도 했다. 1990년 말, 출산률이 극심하게 떨어지자 리콴유의 후임 고촉통 총리는 이 인센티브를 모든 기혼 여성에게 확대하고, '베이비 보너스'와 같은 별도의 인센티브를 주기도 했다.[5]

태형[편집]

리콴유는 태형의 효과에 굳은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자서전 싱가포르 이야기에서 그는 1930년대 래플스 학교에서 그의 끊임없는 지각에 학생주임 D. W. 맥레오드씨에게서 매를 맞았던 것을 묘사했다. "나는 의자에 엎드려 바지를 입은 채로 세개 세대를 맞았다. 나는 그가 살살 때린 것 같지는 않다. 나는 서양 교육계에서 왜 매질에 그렇게 부정적인지 이해할 수 없다. 내 친구들이나 나에게는 체벌이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았다."[6]

리콴유 정부는 영국으로부터 사법적 태형을 물려받았지만, 적용되는 범위를 훨씬 더 넓혔다. 영국에서는 태형이 개인적 폭력이 수반되는 경우에 한해 처벌을 위해 일년에 몇 번의 태형을 선고했다. 리콴유가 이끄는 인민행동당 정부는 더 많은 종류의 범죄에 대해 태형을 선고할 수 있게 했다.[7] 1993년에는 42개의 범죄에 대해 태형을 의무화했고, 42개에 대해서는 선택적으로 적용했다.[8] 법원에서 태형이 자주 선고되는 범죄는 약물 중독이나 불법 이민 등이 있다. 1987년에는 602번의 태형이 선고되었지만, 1993년에는 3,244번으로 증가했고,[9] 2007년에는 6,404번이나 선고되었다.[10]

1994년에 미국 청소년인 마이클 페이가 기물 파괴법 위반 혐의로 태형을 선고받자, 이 사법적 태형은 전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학교 신체형(남학생에게만 해당됨)은 역시 영국에서 물려받은 것이지만, 1957년에 제정된 법에 의해 반항하는 학생들을 다스리기 위한 방법으로 여전히 많이 쓰인다.[11] 리콴유는 싱가포르 국군에도 태형을 도입했고, 싱가포르는 군 규율을 위해 신체형을 사용하는 몇 안되는 국가 중 하나다.[12]

말레이시아와의 관계[편집]

마하티르 빈 모하마드[편집]

리콴유는 마하티르 빈 모하마드와의 더 나은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했다. 리콴유는 마하티르가 차기 말레이시아 총리가 될 것으로 알게된 뒤, 1978년에 마하티르를 싱가포르로 초청했다. 마하티르의 싱가포르 방문을 통해 리콴유와 마하티르간의 개인적 및 외교적 관계가 개선되었다. 마하티르는 리콴유가 민주행동당의 화교 지도자와의 친교를 중단할 것을 요청했고, 그 댓가로 마하티르는 싱가포르의 말레이인들에 관한 문제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했다.

1988년 6월, 리콴유와 마하티르는 쿠알라룸푸르에서 조호르 강에 링구이댐을 짓는 협정을 맺었다.

참고 문헌[편집]

  1. 이동 [1]
  2. 이동 Hoe Yeen Nie. “State of Singapore came into being 50 years ago on 3 June”.
  3. 이동 Pillai, M.G.G.의 "Did Lee Kuan Yew want Singapore ejected from Malaysia?", Malaysia Today, 1 November 2005.는 이런 일련의 사건을 저널리스트의 관점에서 서술해 놓았다.
  4. 이동 Public-domain information from the US State Department Country Guide.
  5. 이동: Jacobson, Mark, “The Singapore Solution”.
  6. 이동 Lee Kuan Yew, "The Singapore Story", Time Asia, Hong Kong, 21 September 1998.
  7. 이동 Judicial caning in Singapore, Malaysia and Brunei at World Corporal Punishment Research.
  8. 이동 Singapore: Table of offences for which caning is available at World Corporal Punishment Research.
  9. 이동 Singapore Human Rights Practices 1994, US State Department.
  10. 이동 Country Reports on Human Rights Practices for 2007, US State Department, released 11 March 2008.
  11. 이동 Regulation No 88 under the Schools Regulation Act 1957 (extract).
  12. 이동 Armed Forces Act, 1972.
전 임
초대
제1대 싱가포르의 총리
1965년 ~ 1990년
후 임
고촉통


 

 


<아래는 옮겨온 글>


 


 

"역사에는 짝이 맞지 않는 것들이 많은데, 그 중의 하나가 리콴유와 같이 지도자의 능력과 

그가 다스리는 나라의 힘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헨리 키신저-


"만약 리콴유가 다른시대, 다른국가에서 살았다면 그는 처칠, 디스렐리, 글래드스턴 같은 인물이 됬을것이다."

-리처드 닉슨-



싱가포르의 정치가이자 독재자. 리콴유.

1959년, 35살에 총리가 되어서 1990년 물러날때까지 싱가포르를 이끈 인물.

 

이 사람은 한마디로 설명될수 있다. 싱가포르라는 나라를 설계한 사람.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그는 싱가포르의 국부이며

현재의 싱가포르를 만든 큰 인물임을 부정할수 없다.



긍정적인 면

 

 

"리콴유는, 아테네 이후 가장 놀라운 도시국가를 건설했다."

-필립 무어-


1965년 당시 싱가포르의 1인당 GDP는 500달러에 불과했고 인구증가율은 4%라는 세계 최고수준에

실업률은 12%에 달했다. 싱가포르는 자원도, 인구도 부족했으며 공업발달에 필요한 내수시장도 없었고, 부정부패가 만연해 있었다. 공산주의자들과 정치싸움을 벌이고 있었고 노사갈등, 민족갈등 등 수많은 문제가 산적해 있었다. 이에 리콴유는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법을 엄격하게 세웠으며,

 국가주도의 산업화를 비롯, 여러 정책을 시행했다.

 

리콴유는 싱가포르가 관광지로 명성을 날리게 하기 위하여 녹지조성에 신경써서 굉장히 발달된 도시문화와 동양적 자연을 가지고 있는 관광지로 인기가 높은데다가 중계무역항으로의 이점으로 금융, 무역의 허브가 되었고

리콴유의 산업화도 대박을 터뜨려 아시아에선 넘볼 나라가 없을 정도로 발전했다.

 

 

2011년, 싱가포르는 1인당 GDP 50714달러를 달성했으며 실업률은 1.9%였다.

복지에도 상당히 신경을 쓰고 있어, 싱가포르는 태어나기 좋은 국가 5위에 랭크되었고,

2012년 세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1위에 선정되었다.

부정부패를 얼마나 엄격하게 다뤘는지에 대한 일화가 있다. 리콴유에겐 태 치앙완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그는 리콴유의 가장 친한 친구중 하나였으며, 국가개발부장관을 하고 있었고, 매우 유능해 평이 좋은 인물이었다. 그런데 치앙완은 약 20만달러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조사를 받게 되었다. 치앙완은 억울함을 호소하며 리콴유에게 해명하려 했으나 리콴유는 이건 공정하지 않다며 그와의 면담을 거절했고 치앙완은 치욕을 느껴 자살로 생을 끝마치게 된다. 이러한 그의 노력에 힘입어, 싱가포르는 세계에서 가장 부정부패가 없는 나라로 유명하게 되었다.

싱가포르의 법에 대한 일화도 있다. 마이클 훼이라는 미국소년이 페인트로 자동차에 

서를 하여 태형 6대를 선고받았다. 싱가포르의 태형은 한대만 맞아도 피와 살점이 튀고 정신을 유지하기 어려우며  10대를 넘어가면 살아남기 어렵다고 한다. 심한 경우 그 충격때문에 고자가 되는 경우도 있다고. 이에 미국언론은 싱가포르를 비인도적인 나라라고 비난했으며, 각종 인권단체가 들고 일어났다.

당시 미합중국 대통령 클린턴이 직접 리콴유에게 전화를 걸어서 태형집행 중지를 요청했다. 리콴유는 이에 거절하고 원칙대로 태형이 집행될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에 미국과 싱가포르의 외교 관계는 건국 이후 최악으로 약화, 결국 싱가포르도 이런 대내외적 압박에 견디지 못하고.... 6대에서 4대로 태형을 줄여서 집행했다.


부정적인 면


"아시아인들이 가치를 두는 것이 꼭 유럽이나 미국인들이 가치를 두는 것과 똑같을 필요는 없다. 유교적 전통이 강한 아시아에서는 권위주의 통치가 개발에 효과적이다."

"민주주의는 본질적 요소가 아니다."

-리콴유-

 

 

 

싱가포르는 독재국가이다.

(기실, 아시아내에서 완전한 민주주의 국가는 일본과 한국밖에 없긴 하다.

한국은 2011년 최초 등재. 이코노미스트 선정.)

독재국가인 북한도 공식적으론 민주주의 체제를 표방하고 있고, 대부분의 독재자들이

경제를 발전시킨뒤 민주주의를 추구할 것을 약속하는데 반해

리콴유는 아예 서구의 민주주의는 아시아에 맞지 않다며 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한다.

건국이래 지금까지 일당독재가 계속되고 있으며 언론은 통제를 받아

정치 관련 뉴스는 넣지 않는다. 물론, 정책에 대한 비판도 허용되지 않는다. 

2013년, 싱가포르의 언론자유도는 179개국중에서 149위였다. (한국은 50위)

싱가포르는 정부가 언론을 고소하기 매우 쉬운데다가 언론들이 공기업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비판이 불가능하다.

싱가포르의 어느 교수는 싱가포르에 대한 완곡한 비판을

인터넷에 글을 올렸다고 해임당하기도 했다.

싱가포르의 정치체제로는 내각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의원들의 지명을 받아 총리를 선출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야당의 후보가 나오면 바로 엄청난 검증에 들어가 먼지까지 털어버리고, 출마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넣으며 만약 출마되어서 당선되어버리는 경우

해당 지역구의 예산을 대폭 삭감해버린다.

어느정도냐 하면, 대부분의 나라의 선거를 보도해주는 외국언론이

싱가포르의 선거는 보도하지 않는다. 그건 선거가 아니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다만, 리콴유도 100% 일당독재는 찔리는지, 어느정도 야당이 지역구를 확보하도록 배려해주고 있긴 하다. 근데 역대 야당이 가장 많은 지역구를 확보한게 고작 6석이였다. (전체 지역구는 87석.)


리콴유는 1990년 총리직에서 물러났지만 총리직을 자신의 측근인 고촉통에게 이양했고 자기는 그보다 위인 선임장관이라는 직책을 만들어 취임했다. 그리고 15년뒤, 아들 리쉔롱이 장성하자 그를 총리로 만들고 자신의 선임장관을 고촉통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그보다 더 위인 스승장관(;;)에 취임했다.


이런 독재국가임에도 불구하고, 번영을 이룩하고 있기에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개발독재의 이상향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에겐 민주주의의 가치를 부정하는 시발점이라며 비판한다. 거기다 싱가포르의 준법정신도 비판의 여지가 많은데, 싱가포르는 거리에 사복경찰이 넘쳐난다. 곧, 국가가 국민을 감시하는 경찰국가이며 이런 나라에서는 법을 안지키는 사람이 바보다. 거기다 지나치게 가혹한 형벌을 규정하고 있어 인구대비 사형집행률 1위. 매년 약 25명이 사형당하고 있다고 한다. 거기다가 동성애의 경우 태형 12대를 처하고 껌을 씹으면 벌금형을 받는등 말도 안되는 법도 많다. 교육면에서도 꽤 골때리는 면이 많은데,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석차 공개. 나라가 작은 탓도 있지만,  전국의 학생 성적을 전부 공개한다. 그냥 성적표만 돌리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주요 일간지에다가 실어버린다. 이 때문에 발표 직전이나 직후 자살하는 애들도 많다고 한다. 중학교 갈 때부터 공부 머리가 있으면 인문계,  공부 머리가 없다고 판단되면 학생이나 학부모 의사와 상관없이 실업계로 보내버린다. 그러나 이런 막장에도 불구하고 싱가포르는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지 않는다. 집회, 결사의 자유는 법으로 금지되어 있으며, 싱가포르 사람들도 약간의 불편함만 느낄뿐, 민주화 운동에 나설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경제적으로 번영하고 있는데다가 복지에도 나라에서 매우 신경써주고 있기 때문.

이에 학자들은 싱가포르야 말로 독재국가의 표본이며 민주주의의 가치를 위협하는

위험한 존재로 평가한다.

여담이지만, 한국과도 관계가 꽤 깊은데 리콴유는 한국의 박정희 전 대통령을 존경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민주주의의 투사인 김대중 전 대통령과 아시아적 가치와 보편적 민주주의의 가치에 대하여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물론, 리콴유와 김대중 전 대통령 모두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