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지 ‘제주작가’는 다른 지역과의 유대를 갖고자
각 지역 작가회의 시인들의 작품을 초대하여 싣고 있다.
오랜 기간 교류를 잇다보니
전국대회라든지 기타 행사 때
한 인사 더 할 계기가 되어 너무 좋다.
이번 호부터는 그것 말고 다시
‘우리 함께 여기에’라는 공간을 마련하여
회원과 독자를 구별하지 않고
함께 글을 쓰며 고심을 하자는 취지인데
이번에 대전의 이종섶 시인의
제주의 ‘구름떡쑥’과 ‘검멀레동굴’을 소재로 한 시,
대구의 정학명 시인의 ‘말의 모서리에 대하여’와
‘용불용설’을 보내 왔다.
작지만 품위가 있는
참마 꽃과 함께 내보낸다.
***공감과 연대 : 경남작가회의
♧ 시민과 함께 - 노창재
시옷이 하늘로 올라간다 슈우욱
시옷들이 일렬로 꼬리를 물고 하늘로 올라간다 슝슝슝슝
긴꼬리연이다 아니 종이비행기다
미음이 따라간다 뒤뚱뒤뚱 때로는 건들거리기도 하면서
마구마구 소란스럽다 한참 느리다 미음도 하늘로 올라간다
와와 함성소리가 들린다 주먹이 올라온다 손바닥도 올라온다
하늘엔 주먹과 손바닥이 대세다
아아니 저럴 수가 어머나 이럴 수가 하늘이 시옷이 미음이
하늘에서 하늘에서 벌거벗고 벌거벗고
♧ 탁상시계 - 표성배
예약해 놓은 아침이 째깍째깍 밤을 갉아먹고 있다
이 밤의 어둠을 다 먹어 치우지 않고는
올 것 같지 않다는 듯 사각사각 갉아먹고 있다
순전히 저 초침과 분침과 시침이 가위질하는
능숙한 손놀림 덕에 나는 아침을 맞는다
가끔은 저 손놀림이 어긋나기라도 하면
아침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 보다 눈 감으면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은 아침 때문에
나는 밤이 더 두렵다
한참 몸을 누이고도 잠 못 드는 날은
초침 소리를 따라 길을 찾아 나서보기도 했지만
길은 쉽게 찾을 수 없었다
이런 날은 퉁퉁 부은 두 눈두덩 사이에 걸린 늦은 아침을
시침과 분침이 성큼성큼 잘라 먹고 있었다
어둠이 짓누르는 이 불안을 어찌 해 볼 수 없을 때
탁상시계 초침 소리는 망치소리 보다 더 크게 가슴을 친다는 것을,
이런 날은 아내도 밤새 초침 사이를 넘나들고 있다는 것을
이미 탁상시계는 잘 알고 있다
오늘은 저 탁상시계 속으로 탁상시계도 모르게 들어가 봐야겠다
초침과 초침 사이를 아무도 모르게 사뿐 다녀와야겠다
***우리 함께 여기에
♧ 검멀레동굴 - 이종섶
그녀는 언제나 뒷걸음질만 치며 살아왔다
한 발자국 물러서는 만큼 번지는 그늘 한 줌, 고래눈망울에 어린 심연의 물
꽃을 보았던 것일까 바람에 저린 슬픔으로 허기를 채우며 말없이 웅크리고
있는 그녀, 동굴로 돌아오면 존재 자체가 사라져버리는 그림자가 차라리 편
안하다고 자신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달래주고 있다 눈물이 말라도 벽화가 되
지 못하는 숙명을 알고 있다는 듯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는 그녀, 먼 바다를
향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일까 입을 항상 벌리고 있었으나 단 한 번도 말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바깥을 향해 등을 돌려 앉는 오래된 습관이 그녀의 말문을
닫게 했을지도 모른다 물렁한 뒤편에서 적막한 바람이 불어와 젖은 말의 물
기까지 징발해가는 나날, 외진 바닷가 동굴 속에 쓸쓸한 그리움을 몰래 숨겨
놓은 바람이 밀물을 타고 들어왔다가 한바탕 질펀한 울음을 채워놓고는 썰물
과 함께 속절없이 빠져나가는 하루하루, 썰물도 바람도 먼 바다로 나가지 못
하고 언제나 그 자리에서 맴돌며 우우 동굴 속에서 들은 검은 울음을 토해놓
기만 했다 뒤돌아보면 주춤주춤 물러가기만 하는 물그림자, 그 위에 몇 자라
도 써서 줄 끊어진 부표처럼 세상 밖으로 띄워보고 싶은 마음을 추스르기 위
해 지금도 안간힘을 쓰며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멍울을 적시고 있을 그녀
수명을 다한 바람이 돌아와 죽는 그 곳
상복을 입은 그녀의 품이 고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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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도팔경에 속하는 검멀레동굴은 해안의 모래가 검정색이라는 제주말 ‘검몰레(검은 모래)’에서 유래했으며, 우도 사람들은 ‘고래콧구멍동굴’이라 부르기도 한다. 밀물 때는 입구를 찾을 수 없고 썰물 때 물이 빠지고 난 후 모습을 드러낸다.
♧ 말의 모서리에 대하여 - 정학명
말은 모서리를 가지고 있다.
말이란
생각을 토막쳐 꺼낸 것이기 때문이다.
때로 어떤 말들은
모서리가 창이나 칼처럼 길어진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그 모서리에 찔려 피흘린다.
말의 칼에 찔려 죽은 사람을 기억한다.
그의 비명은 불면의 밤,
이명이 되어 운다.
날카로운 부리들이 편두를 쫀다.
예민의 새들은 곧
두개골 안에 둥지를 틀 것이다.
아아, 전에 나는 묘지에 서서
이소한 두개골들의 텅빈 둥지를
얼마나 쓸쓸히 바라보았었는가.
달아날 수 없다,
내가 서서 슬픔에게 몸을 내어 줄 때
나는 이미 거기 뿌리내려버린 것이다.
말은 모서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누구도 그 모서리로 벽돌을 만들어
성전을 지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떤 이들은 말에 의한 구원을 꿈꾸지만
슬픔은 시간의 통로를 드나드는 바람일 뿐,
어떤 말도 생각 이전에 가 닿을 수 없고
어떤 생각도 심연의 슬픔에게 가 어깰 두드려 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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