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참전 옛소련군 조종사 "6·25는 비극…더이상 전쟁없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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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으로 위장해 한국전 전투 참여…확전 우려해 철저히 비밀로"
소련군 개입 증언한 크라마렌코 퇴역소장 인터뷰 | (모스크바=연합뉴스) 유철종 특파원 = 한국전쟁에 참전한 유엔군 얘기는 그동안 많이 소개됐지만 유엔군에 맞서 싸운 소련군 얘기가 소개된 적은 거의 없다. 무엇보다 옛 소련에 이어 개방 이후 러시아 정부마저 소련군의 한국전 참전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련 공군의 6·25 전쟁 개입 사실을 한국 언론에 상세히 증언해 주목받은 바 있는 러시아인이 있다. 소련 공군 조종사로 한국전에 참전해 약 10개월 동안 중국·북한 국경 지역과 북한 내륙 지역에서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 전투기들과 싸운 퇴역 장성 세르게이 크라마렌코(90)씨.
1941년 4월 공군에 입대해 1981년 5월 소장으로 퇴역한 베테랑 조종사인 크라마렌코는 한국전에 참전한 1천여 명의 소련 조종사 가운데 지금까지 생존해 있는 3명 중 1명이다.
나머지 2명은 건강이 좋지 않아 그는 당시 상황을 증언할 수 있는 유일한 조종사다. 그가 6·25 정전 60주년을 맞아 소련군의 참전 상황을 상세히 전했다.
크라마렌코씨는 모스크바 시내 남쪽 '프로프소유즈나야' 거리의 자택에서 23일(현지시간) 연합뉴스와 한 인터뷰에서 "소련 정부는 자국 공군이 전투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려고 조종사들을 중국 인민해방군으로 위장했다"며 "이들에게 중국군 군복을 입히고 소련제 미그(MiG) 전투기에는 북한 공군기 마크를 달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조종사들이 교신 때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고 사전 교육한 한국어 대화록을 보면서 소통하도록 지시했다"며 "그러나 막상 긴박한 전투 상황에선 어쩔 수 없이 러시아어가 튀어나오게 됨을 깨달아 나중엔 이같은 규정을 철회했다"고 공개했다.
미군이 러시아 조종사들이 모국어로 교신하는 내용을 포착, 녹음해 참전 사실을 숨기던 소련 정부에 항의했을 때 소련 측은 '그런 녹음은 얼마든지 가짜로 만들 수 있다. 생포된 조종사를 데리고 오라"며 오히려 큰소리를 친 것으로 안다고 크라마렌코는 전했다. 미군에 포로로 잡힌 조종사가 없을 것으로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실제로 소련 공군 조종사들에겐 적군에 포로로 잡히지 말라는 명령이 내려졌으며 이 때문에 일부 조종사들은 포로가 될 위기에 처했을 때 권총으로 자살하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크라마렌코씨에 따르면 소련은 1950년 10월 한국전에 개입한 중국과 북한 측의 요청으로 같은 해 11월부터 극비리에 자국 공군을 중국 동북 지역으로 파견해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과의 전투에 투입했다.
하지만 이같은 사실이 미국에 알려질 경우 제3차 세계대전으로 번질 것을 우려한 이오시프 스탈린의 지시로 참전 사실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크라마렌코씨는 1950년 11월 제176 근위전투항공연대 소속으로 대위 계급장을 달고 다른 조종사 31명과 함께 자원해 중국 동북부 지역으로 가 이듬해 4월부터 52년 1월 말까지 전투에 참가했다. 주로 미군의 F-84, F-86 세이버(일명 쌕쌕이) 등의 전투기와 B-29 폭격기 등을 상대했다. 그는 모두 149회 출격해 미군 F-86 8대, F-84 3대, 호주군 F-8 미티어 2대 등 모두 13대의 유엔군 전투기를 격추했다. 이같은 전공으로 전투에 참여 중이던 51년 10월 소련 시절 최고의 영예인 '소련 영웅' 훈장을 받았다. 종전 뒤엔 김일성의 초청으로 북한을 세차례나 방문하기도 했다. 한국전 기간 중 소련이 파견한 공군은 모두 12개 비행사단, 24개 연대, 참전한 조종사는 1천여명에 달했다고 크라마렌코씨는 증언했다. 그 가운데 125명의 조종사가 전사했고 325대의 전투기가 격추당했다.
수많은 사람이 희생된 전쟁의 기억은 40년을 전투기와 함께 산 베테랑 조종사에게도 여전히 아픈 상처로 남아있었다.
"전쟁의 원인에 대해선 논란이 많지만 6·25는 분명히 한국민에게 비극이었다. 한반도에 더 이상의 전쟁이 없기를 바란다." 인터뷰를 끝내는 노장의 바람이었다.
< 출처 :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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