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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기는 누구인가] "민혁당 넘버5 이석기… 김영환(강철서신·민혁당 창당 주역) 전향 후에도 지하활동"/ 조선일보

鶴山 徐 仁 2012. 5. 19. 00:03

[이석기는 누구인가] "민혁당 넘버5 이석기… 김영환(강철서신·민혁당 창당 주역) 전향 후에도 지하활동"

  • 최재혁 기자 최경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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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 2012.05.18 03:07

    [민혁당 관련자 증언 잇따라]
    '강철서신' 김영환·하영옥과 반제청년동맹·민혁당 결성, 수배·투옥 생활로 이혼까지
    "수사관에 주먹 날릴 정도로 완력·담력 세 리더로 불려"

    통합진보당이석기 비례대표 당선자는 당권파가 뿌리를 둔 경기동부연합의 핵심이다. 그는 1990년대 후반 '김일성 주체사상'을 지도 이념으로 한 민혁당의 지도급 조직원이었다.

    대학 입학과 반제(反帝)청년동맹 활동

    이씨는 1962년 전남 목포에서 출생했다. 청소년기는 경기도 성남에서 보냈다. 1980년 2월 성남의 S고를 졸업한 이씨는 1982년 한국외국어대 용인캠퍼스의 중국어통번역학과에 입학, 1988년 8월 졸업했다. 이씨는 1985년 6월 학내 불법 시위로 제적된 뒤 '6·29선언' 직후인 1987년 9월 '제적학생 구제 조치'에 따라 재입학했다. 이씨는 '가면극연구회' 등 학내 이념 서클을 무대로 활동했다.

    1989년 3월 이씨는 주사파 운동권인 하영옥(서울법대 82학번)·박모씨 등과 함께 '반제청년동맹' 결성에 참여한다. 하씨가 중앙위원장, 이씨와 박씨 등 4명이 중앙위원을 맡았다. '동맹'은 지도 이념을 '김일성 주체사상'으로 채택하고 강령에는 '주체형의 새세대 청년 혁명가들을 육성·단련시킨다'는 내용을 담았다. 1989년 4월 이른바 '강철서신'으로 대학가에 주체사상을 전파시켰던 김영환씨가 중앙위원으로 합류했다.

    지하당(민혁당) 활동

    1991년 2월부터 전국적 조직사업을 하기엔 한계에 달했다는 김영환씨의 제안에 따라 반제청년동맹은 지하당 조직으로의 개편을 시작했다. 1992년 2월 김씨는 북한의 지시를 받았다는 사실을 하씨와 박씨에게 알렸고 같은 해 3월 서울대 공대 뒤편 관악산 입구에서 민족민주혁명당 창당식을 열었다.

    민혁당은 김영환·하영옥·박모씨 등 3인을 중앙위원으로 하고 중앙위 산하에 경기남부위원회, 영남위원회, 전북위원회를 뒀다. 이씨는 경기남부위원장을 맡았고 그를 지도하는 지도책은 하영옥씨였다. 또한 지난 총선에서 서울 관악을에서 당선된 진보당의 이상규 당선자와 이의엽 전 공동정책위의장이 각각 수도남부지역사업부, 부산지역위원회를 책임졌다. 두 사람도 경기동부연합으로 분류된다.

    이석기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당선자가 17일 오후 한 방송사에서 인터뷰를 마친 후 걸어가고 있다. /성형주 기자 foru82@chosun.com

    당시 민혁당 사업부장을 맡았던 한 인사는 "김영환·하영옥·박모씨가 당 서열 1~3위였다면 이씨는 서열 5위쯤 되는 인물"이라고 했다. 이씨의 1·2심 판결문에 따르면 1994년 8월 하씨에게 '1994년 경기남부위 상반기사업총화'를 보고하면서 "각급 조직들은 자기 몫을 다하고자 열성을 높였으나 (김일성) 서거 이후 놈들의 탄압으로 자체 역량 보호에 내몰리면서 군중사업을 수세적으로 전개, 상반기 사업의 탄력성을 떨구는 안타까움이 남았다"고 했다. 민혁당은 1994년 김일성 사망 이후 주체사상에 회의를 느낀 김영환씨가 1997년 7월 공식 해체했다. 민혁당 관련자들은 "하지만 이에 반대한 하영옥씨가 이석기씨 등과 함께 재건 활동을 했다"고 증언했다.

    민혁당의 존재는 1998년 여수에서 격침된 북한 반잠수정에서 하씨가 북한 간첩과 연계활동을 했다는 증거가 나옴으로써 드러났다. 1999년 이씨를 제외한 관련자들이 줄줄이 검거됐다. 이씨와 민혁당 활동을 함께한 한 인사는 "이씨는 곱상한 외모와 달리 완력과 담력이 셌다"며 "공안 당국의 조사를 받을 때 수사관에게 선제적으로 주먹을 날렸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언더(지하운동권)의 리더급이었다"고 했다.

    출소 후 비례대표 당선까지

    이씨는 2년 넘게 도피하다가 2002년 5월 체포돼 징역 2년6개월을 선고받은 뒤 2003년 8·15 특사로 풀려났다. 진보당의 이상규 당선자(서울 관악을)는 언론에 "수배와 투옥 생활을 하면서 (이씨가) 이혼도 당했다"고 했다. 당시 진보당의 전신인 민주노동당에선 이씨와 같은 NL(민족·민주)계열이 PD(민중·민주)계열을 상대로 당 장악사업을 전개하던 시점이었다.

    이씨는 NL계의 전국연합 산하 경기동부연합 출신 인사들이 주축이 된 당권파의 핵심 사업을 맡았다. 경기동부연합의 '돈줄'로 알려져 있는 이씨는 2005년 2월 정치 컨설팅, 홍보 기획 등을 업종으로 하는 'CNP전략그룹'을 만들었다. 자본금 4억원인 이 회사는 작년까지 총 120억원의 매출을 올렸고 그 가운데 40억원은 진보당과 관련된 것이었다. 이씨는 총선 직전인 지난 2월 대표직을 내놨다.

    여론조사업체인 사회동향연구소 대표도 이씨가 맡았었다. 이씨는 경기동부그룹에서 만든 인터넷 매체 '민중의 소리' 이사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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