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에게 조직적으로 가혹행위
柳時敏(유시민) 진보당 공동대표는 1984년 9월17일~27일 서울대에서 잇달아 발생한 4건의 시민감금 폭행사건의 주동자이다. 柳 공동대표는 당시 사건을 ‘서울대프락치사건', ‘민주화운동경력’으로 표현해왔으나 실은 서울대에 출입한 외부인을 프락치로 몰아 감금 및 폭행을 주도, 학교에서 제명당하고 實刑(실형)을 산 사건이었다. 당시 서울대 경제학과 3학년이던 柳 공동대표 등은 서울대에 자료를 구하러 간 방송통신대생 전기동 씨와 정용범 씨를 프락치로 몰아 학도호국단 사무실에 감금한 뒤, 이들의 눈을 가리고 양손을 뒤로 묶고 무릎을 꿇게 한 상태에서 집단구타를 했다. 사건기록에 따르면 柳 씨 등은 전 씨 등에게 주전자로 입과 코에 물을 붓고, 세면대 물통에 얼굴을 집어넣어 숨을 못 쉬게 하는 등 가혹행위를 했다. 정 씨는 이튿날 오후 풀려났고, 전 씨는 정 씨가 풀려난 이후 계속 고문을 받던 중 실신, 앰뷸런스에 실려가 치료를 받았다. 전 씨는 당시 고문으로 신부전증을 얻어 고통을 겪고 있다고 한다. 2003년 11월 피해자 전 씨는, '柳 씨 등이 감금, 폭행, 고문을 가한 사건을 민주화운동경력으로 왜곡 표현해 나의 인격권이 침해됐다'면서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당시 전 씨는 “柳의원(당시 열린당 국회의원)의 親누나인 유시춘 씨가 상임위원으로 있는 국가인권위가 공정한 처리를 해줄지 의문이지만 柳의원의 거짓속임수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진정서를 내게 됐다”고 밝혔다.
北 인권 문제 제기에 반대
柳 씨는 국회의원 당선 이후인 2003년 7월1일 ‘북한인권개선촉구결의안’채택에 반대하며 ‘북한인권침해에 대한 언급은 北核문제의 평화적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었다. 2003년 4월29일에는 국회 본회의에 평상복 차림으로 첫 등원, 의원 선서를 하려다 품위문제로 선서가 연기되기도 했다. 이후 그는 ‘국기에 대한 맹세’를 파시즘과 일제(日帝) 잔재라며 “주권자로 하여금 공개적인 장소에서 국가 상징물 및 국가에 대해 충성을 맹세하게 하는 것은 민주공화국에서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었다. 네티즌의 비난이 쇄도하자 “시골마을의 경로잔치와 마을의 부녀회에서까지 굳이 국민의 례를 하는 것은 국민의례가 남용되고 있다는 생각이며, 특히 저는 애국심 을 가지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지만, 이는 내면적 가치인데 국기 앞에서 충성을 공개 서약케 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헌법정신에 어긋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고 했다.“국기에 대한 맹세는 박정희 정권이 남긴 국가주의 체제의 유물”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유시민에게 고문당하였던 전기동 씨 인터뷰(2003. 11.13. 독립신문. 윤경원 기자)
<독립신문>은 1984년 9월, 당시 서울대학 내에서 일부 학생들에 의해 시민이 불법감금 돼 폭행을 당한 '서울대 민간인 감금 폭행 고문사건'의 피해자 전기동(48·관악구청 녹지과 근무)씨를 만나봤다. 그는 20여년이 지난 사건이지만 아직도 그 때를 생각하면 몸서리쳐진다는 말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전씨는 '일부 언론과 유시민 의원은 이 사건을 '서울대 프락치 사건'이라고 잘못 표현하고 있는데 정확한 명칭은 '서울대 민간인 감금 폭행 고문사건'이라며 '유 의원의 이 같은 미화 표현을 끝까지 바로 잡을 것'이라고 밝히고, 조만간 이 모든 일들을 책으로 발간해 유 의원의 실체를 낱낱이 밝힐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당시 학생들에 의해 당한 고문을 떠올리며 '나는 학생들에 의해 화장실로 끌려가 물이 담겨진 세면대에 얼굴을 쳐 박혔고 복도에 눕혀 주전자로 입과 코에 물을 퍼붓는 물고문을 당하는 등 중상을 입고 반쯤 미쳤었다'며 '죽기 직전에 앰뷸런스에 실려 갈 때 쯤 사건에 가담한 한 학생이 '괜찮나'라는 말을 건넸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 학생이 유시민 씨였고, 또 수사기록을 통해 유 씨가 적극 가담했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전씨는 유 의원이 자신의 저서 '아침으로 가는 길'에 올린 약력에서 '서울대 프락치 사건'으로 구속됐다는 표현을 사용한 데 대해, 지난 97년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으로 서울지방법원에 손해배상 청구 및 사과를 요구했고 조정위원회에서 이를 받아들여 사과와 함께, 이 책을 폐기처분할 것을 명령했는데도 일부 언론에서는 아직도 이 사건을 '서울대 프락치 사건'이라고 표현하고 있다며 분노를 나타냈다. 전씨는 사건 당시 서울대에 논문자료를 받기 위해 법대교수를 찾았다가 서울대 학생들에게 끌려가 30여시간 감금, 물고문을 당하며 인권유린을 당했다. 그 충격으로 그는 신부전증이라는 병을 얻었고 아직도 무릎이 성치 않다고 호소한다. 그러나 현재 유시민 의원은 홈페이지 프로필 소개코너 '제가 저를 말합니다'에서 이 사건에 대하여 '유신과 5공화국 시절 포악한 권력에 대들다가 감옥에도 두 번 가 보았습니다'라는 말로 소개하고 있다. 지난 4.24 보선 국회의원 출마공보에서도 '민주화운동으로 두 번 구속됐다'는 표현을 쓰는 등 이 사건을 계속해서 민주화운동으로 칭하고 있다.
다음은 전기동씨와의 일문일답이다.
-당시 사건 경위를 설명해 달라. "나는 당시 방송통신대학교 3학년 학생이었다. 사건 당일인 1984년 9월26일 4시경, 나는 독도에 관한 리포트 작성을 위해 서울대 법대 이상면 교수를 찾아가 관련도서를 추천받고 구내서점을 들려 나오던 중이었다. 갑자기 학생들이 몰려와 '잠깐 볼 일이 있다'며 나를 무작정 학생회관 총학도 호국단(단장 백태웅)실로 끌고 갔다. 이곳에서 그들은 내 소지품을 뒤지다 주민등록증과 방송통신대학생증을 확인하고는 '너 학원 프락치지?', '안기부가 어디냐'라며 나를 정보원 프락치로 몰아갔다. 나는 계속해서 '방송통신대학생'이라고 말했지만 그들은 내 말을 믿으려 하지 않고, 총학도 호국단과 같은 층에 있었던 서클연합회사무실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서 그들은 천으로 내 눈을 가리고 양손을 뒤로 묶고 주먹과 발길질로 내 온몸을 무수히 구타하며 자백을 강요했다." -물고문도 당했다는데? "그렇다. 내가 계속해서 자백을 거부하자 그들은 날 화장실로 끌고가 물을 채운 세면대에 얼굴을 쳐 박아 숨을 못 쉬게 했다. 또, 복도 시멘트 바닥에 눕혀놓고 여러 명이 내 팔다리를 붙잡고 재갈을 물리고 숟가락 등으로 강제로 입을 벌려 주전자로 입과 코에 물을 퍼부었다. 물고문 뿐 아니라 날 앉혀놓고 양 무릎안쪽에 각목을 끼우고 위에서 밟는 등, 그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나를 고문했다." -당시 몸 상태는 어땠나? "나는 중상을 입고 반쯤 미쳤었다. 거의 죽기 직전이었다. 앰뷸런스에 실려갈 때는 모든 게 흐릿했고 팔다리가 비정상적으로 움직였다. '신부전증'이라는 병도 얻었다." -당시 유시민 씨에 대한 기억은? "난 감금 내내 눈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엔 몰랐다. 단, 내가 앰뷸런스에 실려 갈 무렵 한 학생이 '괜찮나?'라고 말을 건넨 기억이 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 학생이 유시민 씨였고 수사기록을 통해 적극 가담했었다는 것도 알았다." -다른 피해자들과는 연락을 하나? "그들과 연락은 하지 않지만 소식은 알고 있다. 피해자 4명중 000씨는 그 때의 충격 때문에 정신병자가 됐다. 지금 장가도 못가고 완전히 폐인이 돼버렸다." -그 후에도 이와 관련된 일로 법적 대응을 했다는데…. "유시민씨는 출감 후 책을 몇 권 냈는데 그 중 '아침으로 가는 길'이라는 책에서 자신의 약력을 소개하며 '서울대 프락치 사건'으로 구속됐다고 밝히고 책 본문에서도 이런 표현을 무수히 많이 썼다. 정확한 명칭은 '서울대 민간인 감금 폭행 고문사건'이다. 나는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으로 서울지방법원에 손해배상 청구 및 사과를 요구했고 조정위원회에서 사과와 폐기처분 명령을 내려 피고 '학민사' 대표와 유시민씨는 원고인 나에게 사과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그는 언론을 통해서나 지난 4.24 국회의원 보궐 선거 출마시에도 마치 사회를 위해 좋은 일을 한 사람인양 이 사건을 '민주화 운동'이라고 미화하며 왜곡된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내가 몇 차례나 언론중재위원회를 찾아다니며 바로잡아 가고 있다." 그는 지난 3월, 경향신문의 3월12일자 17면 '검사들 특권의식 ·오만으로 범벅' 제하의 유시민 씨 관련기사에서 1984년 '서울대 프락치 사건'이라는 표기를 지적, 언론중재위원회에 중재신청서를 제출해 경향신문으로부터 정정보도를 이끌어냈다. -현재 유시민 의원에 대한 생각은? "그는 원죄를 안고 있기 때문에 크게 되지는 못할 것이다. 조만간 나는 내가 경험했던 모든 일들을 책으로 발간해 유시민씨의 과거 죄상을 밝힐 것이다. 그의 거짓과 가식의 삶이 드러날 것이다."
윤경원 기자 kwyun715@hotmail.com
............................. *유시민 대표의 문제 발언 모음
“北核문제가 풀리지 않는 것은 美강경파 때문”
▲ “북핵문제가 풀리지 않고 이는 것은 미국 내 강경파가 동북아에서 주도권을 유지하기 위해 가상의 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북한 체제가 갑자기 붕괴되는 것은 전쟁에 버금가는 비상사태가 될 것이며 이 같은 사태를 막기 위해서라도 대북 지원에 소요되는 비용을 더 써야 한다.”(2005년 5월12일, 대구 계명대 특강 「북한의 핵문제, 어떻게 풀 것인가」)
▲ “억울하지만 말 못했던 것이 참 많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경제를 살렸다고 하는데 (朴 전 대통령이 시해된) 1979년도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였고, 장기간의 독재가 대대적인 경제혼란으로 이어졌다. (2005년 7월16일, 열린우리당 상임중앙위원회에서)
▲ “선동하는 보도를 내는 조선, 동아는 신문이 아니라 독극물이다.” (2005년 10월17일, 열린우리당 상임중앙위원 회의)
▲ “농촌 노인들이 멧돼지의 공격으로 불안해하고 있는데, 이는 멧돼지들이 적정수를 넘어서면서 민가로 내려와 인간과 거주영역 싸움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되면 첫눈 내리는 날 공수부대를 동원해 멧돼지를 잡겠다.” (2007년 8월21일, 기자간담회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전임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폭군”
▲ “이명박 대통령은 집권 1년 만에 전임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폭군으로 기억될 것이다…(중략) 이명박 정부가 부자를 더 부자로 만들기 위해 국가를 가난하게 만드는 행위를 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의 박희태 대표가 그런 반(反)국가적 행위의 주역이다.” (2009년 10월14일, 경남 양산 민주당 송인배 후보 지지 긴급 기자회견에서)
▲ “넓게 연대하고 협력해 노무현 정신을 이어나가야 한다. 盧 전 대통령은 자기 시대의 과제를 직시했고 시대가 지워준 십자가를 맸다. 그것을 위해 노력하다가 아무 일도 할 수 없고 자신의 존재가 짐이 된다고 생각해 스스로 목숨을 거뒀다.” (2009년 10월23일, 「노무현 시민학교」 강연에서)
▲ “만일 북한이 개입돼 비극이 일어났다면 군 지휘관과 현 정권이 책임져야 할 문제다. (정부가) 어뢰 공격으로 배가 동강 난 것 같다고 판단할 수 있는 사실적 근거를 못 주고 있다…(중략)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이 사실에 따라 대처하는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끝까지 국민을 속이고 협박하고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이것을 통제하고 있다는 의혹을 지우기 어렵다.” (2010년 5월17일, 평화방송 라디오 「열린세상, 오늘! 이석우입니다」에서)
“내가 그 위치에 있었더라도 對北 송금 했을 것”
▲ “대북 송금 사건은 남북 정상회담과 한반도 평화 유지라는 대의를 위한 사소한 절차적 실수였다. 박지원 원내 대표가 당시 산업은행을 움직여서 북한에 4억여 달러의 뒷돈을 준 일은 절차적 법률 위반으로 사소한 것이고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켜 한반도 전쟁 위협을 제거하는 것은 큰 일이여서 작은 불법을 한 것 뿐…(중략) 내가 그 위치에 있었다 하더라도 그렇게 했을 것. (2010년 5월31일, 경기 수원 아주대에서 가진 국민참여당 선거유세)
※박지원은 대북 불법 송금을 주도한 혐의 등으로 기소돼 징역 3년에 추징금 1억 원을 선고 받아 2006년 5월25일 법정 구속됐다. 그 후 8개월 뒤인 2007년 2월9일 특별사면 돼 형 집행이 정지됐으며, 2007년 12월31일 복권됐다.
▲ “국민참여당이 없었다면 민주노동당에 입당했을 것이다. 민노당과는 정치적 이념과 노선이 비슷하고 윤리적 책임도 공감하고 있다. 연대도 잘 될 것이다.” (2010년 10월14일, 전라북도를 방문해 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2012-04-30,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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