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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갑식의 세상읽기] '빵의 皇帝'는 왜 새 도전에 나선 걸까/ 조선일보

鶴山 徐 仁 2011. 10. 18. 16:34
사설·칼럼

[문갑식의 세상읽기] '빵의 皇帝'는 왜 새 도전에 나선 걸까

입력 : 2011.10.17 23:10

문갑식 선임기자

운현동 뒷골목 사무실, 천덕꾸러기 취급받는 名匠들 처지 같아…
무관심은 증오보다 무섭고 칼 든 적보다 두렵다, 한국 최고 기능
보고 싶다면 평생 땀으로 일군 작품에 박수라도 쳐 줘야

내비게이션도 헤맸다. 멀리서 그가 손을 흔들기에 가보니 연탄재에 포위된 대문이 보였다. 작업실은커녕 귀신(鬼神)이 툭 튀어나올 것 같은 집에 기름때 찌든 프라이팬이며 넝마가 널려 있었다. "저건 밥해 먹는 거, 저긴 잠자는 곳…."

백자달항아리는 그런 방의 선반 위에 있었다. 막 빚어 말리고 있을 뿐인데 꾀죄죄한 안이 환하게 빛났다. 창틈을 파고든 한 줄기 광선을 타고 그것은 하늘로 두둥실 떠오를 것 같았다. 미술사학자 최순우의 말대로, 욕심 없고 무심한 미(美)였다.

연전(年前)에 만난 도공(陶工)은 운명적으로 이 일을 해왔다고 했다. 아버지가 다짜고짜 "예술로 이름을 날리라"며 '흰 자기의 골짜기(白陶谷)'란 이름을 주곤 아들을 내동댕이쳤다. 그때부터 그는 흙을 벗삼았고, 오십이 되도록 결혼도 안 했다.

그는 제1회 세계도자기 엑스포 공모전에서 대상을 탔다.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에서 몇 차례 수상도 했다. 배용준·전도연이 주연한 영화 '스캔들'에 나온 작품도 그의 것이다. 분명 무명(無名)이 아닌데 생활은 아직 나락을 헤매고 있다.

가난한 예술가의 꿈은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분원리(分院里)에 가는 것이다. 조선시대 마지막 관요(官窯)에서 작품을 만들고 싶어한다. 돈이 없어 3년 만에 쫓겨난 마음속 이상향(理想鄕)에서 작품활동에 매진한다면 어느날 그는 명장(名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팔자를 고칠 수 있을까?

'빵의 황제(皇帝)' 김영모(58)도 백도곡보다 더한 괴로운 청춘을 보냈다. 어릴 적 부모의 이혼으로 친척집 천덕꾸러기였던 그는 눈물에 밥 말아 먹기 일쑤였다. 남을 즐겁게 하는 이에겐 전형(典型)이 있다. 정작 제 삶은 고단한 것이다.

일러스트=정인성 기자 1008is@chosun.com

그가 성공하겠다는 목표를 찾은 건 새하얀 설탕으로 뒤덮인 도넛과 곰보빵을 보면서다. 피를 토해 가며 기술을 익혀 제과명장(名匠)이 됐다. 거대 제과업체들의 공세에 동네제과점이 전멸해도 여전히 제 이름 석 자 붙인 그의 가게에는 사람이 붐빈다.

그렇게 성공한 그가 새 도전에 나섰다. 안분지족(安分知足)의 묘(妙)를 터득지 못했음일까…. 계기는 올 3월 '대한민국 명장회' 회장이 되면서부터다. 굶주림을 끼고 사는 예술가들이 그렇게 되고 싶어 하는 명장들의 모임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저도 사업하느라 몰랐습니다. 장인(匠人)들이 세상사에 무심하잖아요. 그런데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히게 됐어요." 우리 명장제도는 1986년 만들어졌다. 지금껏 배출한 명장이 24개 분야, 170개 업종에 496명이다.

칭호만 보고 구닥다리라고 예단하면 오산(誤算)이다. 전통공예·섬유부터 첨단기계·금속·광업·화공·농림·조선·건축까지 망라된다. 한마디로 한국이 세계에 자랑할 만한 보배들인데 그들이 받는 대우가 '88만원세대'는 저리 가라다.

작년까지 이들은 명장이 된 첫 해에 95만원을 받았다. 월 8만원도 안 된다. 올해에 119만원이 됐어도 월 10만원에 못 미친다. 경력 20년은 작년까지 1년에 285만원을 받다가, 올해는 24만원 오른 305만원을 수령했다. 이게 바로 '장려금'의 실체다.

없는 것보다는 낫지만 이 돈으로는 뭘 하려야 할 수가 없다. 몇 년 전 명장 119명을 조사해 보니 '후계자가 없다'는 사람이 33%였다. 이유는 '계승하려는 사람이 없다'가 59%, '3D업종으로 여긴다'가 15%, '나 살기도 어렵다'가 18%였다.

명장 증서에 휘장(徽章) 하나 달랑 주곤 끝이니 이들이 관심을 받을 리도, 신바람낼 일도 없다. "20일부터 제15회 대한민국 명장 작품전이 열립니다. 창피하지만 올해가 열다섯 번째인데 제대로 소개된 적도 없어요." 김영모는 피를 토하듯 말했다.

"운현동 뒷골목 건물 한쪽에 있는 사무실이 무관심 속에 버려진 우리들 같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종로구 장사동으로 두 달 전 옮겼습니다. 근데 그것만으론…." 평생 빵 팔고 과자 만들던 그가 가게 밖으로 뛰쳐나온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하긴 동·하계 올림픽만큼이나 각광받던 국제기능올림픽도 푸대접이니 명장 괄시를 탓할 것도 없겠다. 지난 8일 영국 런던에서 끝난 제41회 국제기능올림픽에서 한국이 17번째 우승을 차지했건만 누구 하나 관심 두는 이도 없고 알려지지도 않았다. 고용노동부한국산업인력공단의 노력이 없는 탓도 있겠지만 그걸 꼭 '홍보' 문제로 볼 순 없다.

무관심은 증오보다 무섭고 칼을 들고 정면으로 쳐들어오는 적(敵)보다 더 무섭다고 한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라는 말에 공감한다면 명장작품전도 구경가고 기능으로 나라 빛낸 젊은이들에게 뒤늦은 박수라도 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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