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ahms - Symphony No. 1 브람스 / J.Brahms, 1833~1897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시는 분들께 '교향곡 1번'이라는 말을 듣고 연상되는 작품이 어떤 것이냐는 질문을 던져본다면 말러의 '교향곡 1번'이 혹은 시벨리우스의 '교향곡 1번'이 떠오른다고 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단연코 가장 많은 분의 입에서 나오는 답은 브람스의 '교향곡 1번'일 것이다. 그만큼 브람스의 교향곡 1번은 많은 사랑을 받는 곡으로 자주 공연되는 빈도수로 보나 시중에 발매된 음반의 종류로 보나 교향곡 중의 교향곡이라고 불러도 손색없는 곡이다. 브람스가 이 곡을 내놓은 1876년의 독일 음악계는 바그너가 주류를 차지하고 있던 때로 슈만은 이미 죽은지 20년이 지난 뒤였으며 브루크너의 교향곡 3번은 아직 초연되기 위해 일년을 더 기다려야했던 시기다. 이런 낭만파의 한가운데에서 고전파 음악의 이상을 지키면서 당대의 교향곡으로는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견고한 구성을 보여주며 내용면에서도 브람스 고유의 서정적이며 중후한 감정을 담고 있어서 그의 교향곡들은 음악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교향곡 1번은 '어둠에서 광명에로'라는 투쟁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나머지 세 교향곡과는 달리 베토벤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 그러나 브람스가 그려내는 인생사의 괴로움과 기쁨, 투쟁과 승리는 베토벤의 영웅적이고 개방적인 면모와는 구별되는 것으로 보다 무겁고 어두운 면이 있는가하면 비극과 승리의 순간에도 인간적인 모습을 잃지 않는다는 점에서 베토벤의 교향곡과는 다른 맛을 가지고 있다. 미려한 악상보다는 논리적인 형식미가 강조되어 다른 그의 교향곡들에 비해 곡을 처음 대하는 사람은 친숙하기 어려운 면이 있으나 1번 교향곡의 아름다움은 바로 철옹성같이 탄탄한 구조와 형식미에 있다. 악기 편성도 베토벤 시대에 비해 별로 확대되지 않은 규모여서 고전적인 울림을 만들어 내며 브람스 특유의 무겁고 어두운 오케스트레이션 때문에 당대의 작품으로는 상대적으로 색채효과가 억제되어 있다. 그러나 색채효과가 억제되어있다는 것이 반드시 화려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진짜 멋쟁이는 검은 옷을 즐겨 입는다'라는 말처럼 흰색, 회색, 검은색만 써서도 얼마든지 화려한 연출이 가능하듯 브람스 교향곡 1번의 진정한 멋은 절제된 색상으로 화려한 음향을 만들어내는 데 있다. 즉 브람스의 어두운 오케스트레이션은 곡을 전체적으로 모노토닉하게 하는 것은 사실이나 교향곡답지 않게 지나치게 절제되고 밋밋한 연주는 문제가 있다. 또한 지나치게 칼라풀한 연주도 좋지 않다. 지나친 색채감은 자칫 브람스만의 맛을 잃게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곡의 근본은 회색빛 흑백사진을 보고 있는 듯한 인상에 가까운 것으로 채색화나 칼라사진의 컬러풀한 화려함과는 차원이 다르다. 일견 비슷비슷해 보이는 수묵화나 흑백사진이 진정한 예술적 우위를 가지고 아름다움을 뽐낼 수 있기 위해선 미묘한 빛의 조탁과 잘 짜여진 구도가 더욱 요구되듯이 탁월한 형식미, 잘 연출된 음색의 대비, 질서정연한 오케스트라 밸런스 등을 모두 갖춘 연주는 흔하지 않다. 브람스는 22살이었던 1855년 고향인 함부르크에서 슈만의 "만프레드" 서곡을 듣고 감격하고 교향곡을 쓰기로 작정했다 한다. 그후 만들기 시작한 것이 서주가 빠진 지금의 1악장에 해당하는 부분이나 역시 교향곡으로 준비했다가 결국 협주곡으로 1859년에 발표한 피아노 협주곡 1번 준비에 쉽사리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틈틈이 하노버, 피팅겐 또는 뒤셀도르프 등지에서 써나가서 1862년까지는 거의 완성되어 그해 7월엔 친구인 디트리히와 슈만의 미망인이며 브람스의 친구였던 클라라 슈만에게 보여줄 수 있었다. 그 후 다른 악장을 만들어 갔지만 본격적으로 매달리지는 못하다가 1873년 "하이든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완성하고는 관현악곡에 상당히 자신을 가지게 됐고 이듬해 1874년경부터 본격적으로 이 교향곡에 몰두하여 그 해 여름 쮜리히에서, 다음해엔 하이델부르크 근처에서, 1876년 여름엔 함부르크 근교 저스미츠에서 계속 써나가다, 같은 해 9월에 클라라의 저택이 있는 바덴 바덴 근처의 리히텐타르 저택에서 마침내 완성할 수 있었다. 그의 나이 43세 되는 때였다. 착상부터 완성까지 21년이 걸렸으며 이렇게 늦은 나이에 교향곡을 완성했다는 점에서 브람스가 얼마나 교향곡의 작곡에 신중했는가를 미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베토벤이 남긴 9개의 교향곡의 거인과 같은 모습에 자신의 교향곡이 가려지길 원하지 않았으며 그만큼 그의 작품에 자신을 가지고 있었다. 브람스가 특히 주의를 기울인 것은 바로 관현악의 색채적인 효과로서 곡이 완성되기까지 몇 번이고 악기를 바꾸어 보거나, 더하거나 빼보면서 그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데 고심했다 한다. 1876년 11월 4일 칼르스르에 대공의 궁정 극장에서 오토 데소프의 지휘로 초연된 뒤 이듬해 출판되기까지의 사이에도 몇 번이고 손질을 했다. 브람스(J.Brahms, 1833~1897) 브람스는 북독일 함부르크에서 태어나 5세 때부터 아버지에게 바이올린과 첼로를 배우고, 7세 때 O.코셀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10세 때 음악회에 나가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자, 부모는 미국으로 건너가 그의 재능을 이용하여 치부(致富)할 생각이었으나 코셀은 이를 반대하고 그의 스승인 E.마르크센에게 브람스를 사사받도록 하였다. 여기서 그는 작곡법, 고전음악의 가치, 음악의 견실한 구성법과 이론을 배웠는데, 이는 그의 음악적 생애의 초석이 되었다. 그러나 이 후 1850년까지는 브람스의 고난의 시대가 계속되었다. 가정 사정으로 학교를 중퇴하고, 가계를 돕기 위해 술집 ·식당 ·사교장 등을 돌면서 피아노 연주를 하였으며 여가가 나면 피아노 개인지도, 합창단의 지휘, 합창곡의 편곡 등으로 동분서주해야만 했다. 그러다가 1850년 헝가리의 바이올리니스트 J.요아힘을 알게 되어 1853년 그와 함께 연주여행을 떠나 이 여행에서 그의 생애를 통해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슈만부처를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브람스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고 각 방면에 소개하여 음악계에 진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1854년 신경쇠약으로 인한 슈만의 자살미수와 입원, 그리고 1856년의 사망에 이르는 약 2년 동안에 브람스는 작곡에 몰두하는 한편, 어려움에 처해 있는 슈만가(家)를 도우면서 클라라와도 밀접한 곤계에 들어갔으나 원래 내성적이었던 브람스는 스승의 부인인 그에게 의리 때문에 어쩌는 도리가 없어 결국은 독신으로 늙었다. 1857∼1859년 그는 처음으로 공적인 직위를 얻어 데트몰트궁정에서 피아니스트로 근무하면서 작곡에도 몰두할 수 있었다. 이 곳에서의 근무를 마친 후 1862년 가을까지는 고향인 함부르크로 옮겨 합창단의 지휘, 합창곡의 작곡 등을 하다가 1862년 9월 빈으로 이주, 1863년 징아카데미합창단의 지휘자로 초빙되었다. 그는 그 곳에 머무는 동안 많은 뛰어난 작품들을 작곡하였다. 1865년 2월부터 어머니의 죽음을 추도하는 작품에 착수, 1868년에 대작 《독일레퀴엠》을 완성하고 1869년에는 슈만의 셋째 딸 유리에에 대한 그의 실연을 노래한 《알토랩소디》를, 1871년에는 프로이센의 대 프랑스전쟁의 승리를 기념하는 《승리의 노래》를 작곡하는 등, 관현악부 성악곡을 많이 만들었다. 1872년 가을부터 1875년까지는 빈 음악인협회 회장으로 있으면서 그 합창단과 관현악단의 정기연주회를 지휘하였는데, 이때의 관현악단을 통한 실지 체험은 1876년에 완성된 《제1교향곡》에 잘 나타나 있다. 브람스의 작곡가로서의 진면목은 이때를 전후하여 발휘되기 시작했고 대가로서의 품격도 갖추게 되었다. 1878년 이후 매년 걸작을 발표하였는데, 《바이올린협주곡(라장조)》(작품 77) 《바이올린소나타》(작품 78) 등은 모두 이 무렵에 발표된 것들이다. 1879년 브로츨라프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게 되자, 이에 대한 사의로 그 이듬해 《대학축전(祝典) 서곡》(작품 80)을 작곡하였다. 이어 1890년까지 《비극적 서곡》(작품 81) 《피아노협주곡 제2번》(작품 83) 《현악 5중주곡》(작품 88) 등 수많은 작품을 완성하였으나, 1890년부터는 체력과 창의력의 쇠퇴를 자각하고 대곡의 창작을 단념, 신변 정리를 결심하였다. 그러나 1891년 3월 뛰어난 클라리넷 주자 R.뮐펠트의 연주를 접하자, 다시 영감과 창의력을 얻어 1891년 《클라리넷 3중주곡》(작품 114) 《클라리넷 5중주곡》(작품 115)과 1894년 두 곡의 클라리넷 소나타 등 일련의 클라리넷을 포함한 실내악곡을 쓰게 되었다. 1896년 3월 그의 평생의 친구인 클라라가 졸도한 후 병세가 악화되자,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하며 성서를 토대로 한 《4개의 엄숙한 노래》(작품 121)를 작곡하였다. 5월 20일 클라라가 세상을 떠난 뒤 브람스의 건강도 눈에 띄게 쇠약해졌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오르간용의 종교적인 오르간곡 《11의 코랄전주곡》(작품 l12)을 작곡하였다. 그러나 1897년 4월 3일 마침내 간암으로 이 세상을 떠났다. 브람스는 오페라 이외의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작품을 남기고 있다. 그의 음악은 독일음악의 전통을 보수적일 만큼 존중하며, 견고한 구성감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형식주의적인 단순한 것이 아니라, 매우 풍부하고 다양한 감정을 내포하고 있다. 때로는 북독일적이며, 때로는 빈(Wien)적이지만, 인간 브람스의 피가 흐르는 매우 소박한 풍격이 그의 음악의 큰 매력이 되고 있다. 그만큼 브람스의 작품에서는 호화스런 색채감각은 찾아볼 수 없다. 그는 신앙심이 두터운 프로테스탄트 신자이었기 때문에 종교적이면서도 죽음의 예감이 감도는 장중한 작품들이 많으며, 특히 만년에 발표한 성악곡에는 이러한 것들이 많다. 브람스는 낭만주의의 화려한 시대에 있어 고전파음악의 전통을 지킴으로써, 시대의 풍조에 휘말리지 않는 독자적 작풍을 견지한 작곡가이다. 또한 그는 R.슈트라우스, A.드보르자크 등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두산세계대백과에서 발췌) ▲ 브람스의 상징인 고슴도치. 그가 자주 가던 레스토랑의 이름에서 따 왔다 |
출처 : 표주박의 오늘이 마지막이듯
글쓴이 : 표주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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