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正熙는 風雲兒요 英雄이었다.
한국은 세계 속 희망의 나라고, 朴正熙는 이 신화의 주인공이다. [글쓴이 : 미국 일리노이대 김상기 교수]
영웅이 많지 않은 우리 역사에서 朴正熙는 풍운아요 영웅이었다.
나는 순결한 도덕의식도 없으면서 하인배의 의식수준으로 자꾸 내려가는 나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고 싶다. 5·16은 아직도 우리에게 시간적으로 너무 가깝다.
5·16과 朴正熙에 대한 역사적 조명은 미래에 더욱 정당한 평가를 받을 것이다. 박정희는 찬연히 빛나는 큰 별이 되어 계속 추앙을 받을 날이 올 것이다.
특히 제3세계를 보면 의인이 많은데 朴正熙 같은 인물이 없어서, 그들의 희생이 알찬 발전의 물질적 기반을 얻지 못한 결과 도로아미타불에 그치고 마는 것이 사실이다. 심지어는 산업화의 토대 없이 앞질러간 정치투쟁은 산업화마저 어렵게 하고 쟁취한 자유와 민주 그 자체를 망가뜨리는 비극적 결말도 흔히 가지고 온다.
朴正熙를 이토록 높이 평가하는 필자의 마음 바닥에는 그에게 허심탄회하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이다. 박정희는 나 같은 책방서생이 반대하는 일만 골라가며 했기에 큰일을 해낼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이 옳다. 그는 절대로 하면 안 된다고 내가 굳게 믿은 일들을 무서운 집념으로 추진하여 번번이 성공시킴으로써 나를 부끄럽게 했다.
교과서만 읽고 원칙론을 맹신하는 선비, 수신제가 좋아하는 군자, 서구식 민주주의 좋아하는 사람 좌파이론에 중독되어 무아경에 빠져 있는 사람을 모두 철저히 무시하고 그는 오로지 마키아벨리의 군주처럼 철두철미 권력의 논리만을 따라 통치권을 극대화하여 경제개발을 박력 있게 이끌어갔다. 이것이 바로 그 의 위대함이다.
朴正熙의 개발독재에 대한 학문적 연구가 지금 나라 밖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으므로 세계에서 그의 위상이 높이 드러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전혀 다른 역사적 배경과 경험을 가지고 있는 소련을 비롯한 동구의 나라들이 그의 성공에서 배우려고 노력하고 있고, 산업화를 추구하는 후진국에서 그가 누리는 존경은 대단한 것이다.
이즈음에서 朴正熙가 18년간 앉은자리에서 국가와 국민을 위해 똑같이 고뇌했을 김영삼, 김대중의 진솔한 심정이 무척 궁금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영삼, 김대중에 이어 노무현이 정권을 잡은 이 나라 안에서는 3공, 4공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기 때문에, 주로 朴正熙는 멜로드라마의 부역, 비화의 주인공 처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시간이 해결할 수밖에 없는 문제이나 간단한 상식에 속하는 몇 가지 이슈는 짚어볼 필요가 있다.
누구나 아는 뻔한 사실마저 분위기에 눌려 은폐하려는 것은 우리 자신을 자기 기만의 족쇄로 묶어두는 어리석은 짓이다.
이른바 대권주자 한 분이 어느 잡지에 朴正熙를 평가하여 경제개발에 약간의 공이 있었던 것은 인정하지만 발전할 여건이 갖추어졌기 때문에 경제가 발전했던 것이라는 뜻의 글을 쓴 것을 읽은 적이 있다. 어떤 정치 지도자는 국민이 모두 허리띠를 졸라매고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고도성장이 이루어진 것이지 朴正熙가 정치를 잘했기 때문은 아니라고 했다.
이런 정치인들을 보면 암담한 생각이 든다. 국민이 모두 열심히 일해야 발전할 수 있는 것은 하나마나한 얘기지만...
이들의 얘기를 뒤집어 보면, '경제가 발전하지 못하는 것은 국민이 열심히 일하지 않기 때문'이 된다. 한국경제가 성장한 것은 '朴正熙 때문이라기 보다 국민이 열심히 일한 결과이다'라는 주장은 '북한경제가 낙후한 것은 김일성 부자의 위대한 영도력에도 불구하고 북한 동포가 게으르기 때문에 생긴 결과이다' 라는 주장과 꼭 같은 낮은 수준의 오류이다.
문제는 어떤 지도자의 어떠한 정책이 국민으로 하여금 열심히 일하게 하는 가 이다. 여기서 朴正熙는 성공했고 김일성은 실패했다. 경제가 어느 수준에 이르게 되면 정부 통제의 효율성이 내려가고 심지어 역기능까지 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경제 발전의 첫 단계에서 정부의 역할은 개발의 성패를 좌우하게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잘못된 일은 모두 정부의 책임이고 잘된 일은 국민의 공 이라는 것이 유치한 발상이다. 그 당시는 공산당의 조직을 논하면서 이를 군대와 장군의 관계로 비유했다.
그는 군대를 창군하는 일은 유능한 장군을 양성하는 것보다 쉽다고 했다. 장군들을 잃어버리면 군대가 와해 하지만, 한 무리의 유능한 장군들이 군 수뇌부를 이루어 공동의 목표를 위하여 힘을 모으면 없던 군대가 순식간에 생겨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엘리트주의는 공산당 조직뿐 아니라 후진국 개발체제에 전적으로 타당한 것이다.
한 후진국의 지도자가 朴正熙 만큼 경제개발을 세차게 밀고 나갈 수 있다면 나는 그가 장기집권을 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겠다. 유신체제가 어느 경우에나 무조건 나쁜 것인지는 따져볼 가치가 있다.
원컨대 북한이 하루속히 유신체제를 채택하여 일인독재와 효율적 시장경제 체제를 구축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남한과 북한이 국가 연합체를 배격하고 완전한 단일 통일국가를 추구하면 남한에 의한 북한의 흡수 통합 이외의 방법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어떠한 형태의 남북화해에도 제일 큰 걸림돌은 남북한의 경제의 격차가 너무 크다는 사실이다.
공연히 1995년에 조국을 통일한다고 인민을 우롱하지 말고 북한은 朴正熙 유신체제를 채택하여 10년 정도 경제개발과 생활수준 향상에 전력을 다하는 것이 진정한 통일로 가는 길이라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朴正熙를 폄하하는 또 하나의 시각은 절대빈곤을 없앤 것이 무엇이 그리 대단한가? 그까짓 것을 하려고 장기 독재를 했는가 하는 비판이다. 젊은 학생들이 주로 하는 주장인데 절대빈곤을 전혀 겪어보지 않은 세대가 당연히 가질 수 있는 의문이다.
그런데 제3세계의 절대빈곤을 얘기해보면 미국 학생들이 오히려 더 참을성 있게 귀를 기울인다. 굶주림이 무엇인지 모르는 한국 학생과 미국 학생이 다르지 않은데 한국 학생이 더 참지 못하는 것은 절대빈곤 이야기를 지겹게 들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졸부의 아이들이 부모가 고생하던 이야기를 늘어 놓으면서 '너희는 복에 겨운 줄 알아'라고 하며 공치사하는 것을 견딜 수 없어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더구나 배곯은 자랑 다음에는 현실영합까지 강요하려 드니 젊은이들이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산업화에 따르는 계급모순의 첨예화에서 이들이 정치화는 그 사실이 바로 한국 사회의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고, 보릿고개 이야기는 궁상떠는 기성세대의 푸념 정도로 무시되는 것이 이해가 된다.
그러나 젊은이들이 상대적 빈곤이 절대적 빈곤보다 결코 덜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고 기세등등하게 주장하는 것은 딱하게 보인다. 굶주림은 간디 옹처럼 한달 넘게 단식하다가 숨을 거두는 상태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일의 삶, 동물적 생존 그 자체의 불확실성이 만들어 내는 도덕적 타락과 병리현상의 전체를 포괄하는 무서운 진실을 뜻하는 것이다.
배고픔을 체험할 수 없는 사람들은 남의 체험을 통해서라도 알려고 노력해야 한다. 아직도 인류의 삼분의 일이 굶주리고 있지 않는가. 배고픔을 모르는 우리 젊은이들이 단 한세대 전의 체험으로부터 단절되어 있을 뿐 아니라 50억 인류의 3분의 1이나 되는 사람의 삶으로부터도 차단되어 있음을 예사롭게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절대빈곤의 극복은 어떠한 경우에도 '그까짓 것'이 될 수 없는 이유다.
지난 20년 동안 한국인에 대한 평가가 해마다 높아지는 것을 피부로 느끼며 해외에서 살아왔다. 한국의 학생들이 이념서적을 200권씩 독파한다는 소문이 퍼져서가 아니다. 이념서적 독파 정도가 아니라 그 책들을 써내던 사람들이 한국인의 각고에 찬 노력과 성공을 깊이 존경하게 되었으며 朴正熙라는 개인의 지도력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산업화는 후진국 국민들에게 큰 희망을 준 성공의 모범이요, 전형인 것이다. 세종대왕 이순신을 뒤로하고 우리국민의 존경대상 1위가 된 朴正熙의 업적을 모델로 세계 여러나라들이 선망 하는 것이다. 절대빈곤 속에서 질식 상태, 빈사상태에 놓여 있는 한 백성들이 강력한 지도자에 의하여 큰 생산적 에너지로 동원될 수 있으며,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최소한의 물질적 토대를 만들어내는 것은 어느 나라에서나 가능하다는 확신을 朴正熙는 이들에게 심어주었다.
한국은 세계 속의 희망의 나라가 되었고 朴正熙는 이 신화의 주인공이다. 朴正熙의 공로를 인정하면서도 그의 청년시절의 일본육군의 장교로서 일년 남짓 복무한 과거를 거론하여 거품을 물며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다. 65년 개방화를 위해 필수적이었던 한일국교정상화가 굴욕외교이라고 거품 물며 외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일본에 대한 한국의 위상은 굴욕 종속과는 반대 방향으로 발전한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의 실용주의 노선은 결국 어떤 명분론보다도 민족자존의 길임이 입증된 것이다. 이 시점에서 朴正熙를 적극적으로 평가하는 글은 누구를 위하게 되는가? 필자는 나 자신에게 정직하기 위하여 내가 보는 대로 진실을 말하고 싶은 것뿐이다.
3공, 4공 세력에 이 글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지도 않으며, 설사 약간의 도움이 된들 나쁠 것이 무엇인가? 과거에 우리는 흑과 백, 선과 악을 명확히 가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흑과 백을 포괄하여 파악하는 정치적 성숙성이 요구되는 더 높은 단계로 왔다.
지난날 우리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 주던 양심인사들이 민주화가 시작된 이래 보여 온 치졸무쌍한 작태도 볼만큼 봤고, 朴正熙의 큰 업적들이 새삼 돋보이는 것 또한 사실이다. 朴正熙에 대한 올바른 평가 없이는 우리는 자기 기만 속을 한동안 헤매게 될 것임을 지적하고 싶은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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