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창작기(1893-1905)
1893년 부터 1905년 동안에는 까미유는 로댕의 그늘을 벗어나서 왕성하게 창작하는 시기다.
그때까지 로댕은 로즈와 정식으로 결혼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로즈를
그의 곁에서 떠나가게 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로댕과 로즈의 관계를 비난하면서 세점의 그림에서 독특한 개성으로
경멸감을 표현했다. 까미유는 1892년 경에 음악가 끌로드 드뷔시와 친분을
갖게 되었다.
그 둘은 예술가의 친선 모임에서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때 까미유는 24살이었고 드뷔시는 26살로 아직 세상에 알려져 있지 않았다.
까미유와 드뷔시를 연인으로 보는 것은 좀 과장된 표현이지만 그들은 서로
커다란, 매우 친밀한 우정을 나누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어느날 갑자기 까미유는 드뷔시와 헤어지고 후에 왈츠의 청동상을 드뷔시에게
주고 드뷔시는 죽을때까지 왈츠 상을 소장하였다.
1893년에는 그녀의 가장 유명한 작품[왈츠]가 전시되는데, 그녀의 개인적인
모든 예술의 특성이 표출되는 작품이다.
또한 예술가로서 까미유는 금전상의 문제보다 좀더 개인적인 탐구에 열정을
쏟는다.
1890년 부터 로댕은 벨기에의 예술가 모임의 관계자들에게 까미유를
그들이 전시회에 대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4년후인 1894년에야 비로소 그녀는 전시회의 초대를 받는다.
1894년 살롱에 까미유는 세인의 주목을 끌만한 작품을 출품했는데 그것은
1892년과1893년 두 해의 여름동안 아자이 르 리도 가까이에 있는
즐레뜨성에 머물면서 여주인의 6살짜리 손녀를 모델로 한 작품 청동으로
만든 [어린소녀 샤틀렌느](La Petite chatelaine)의 초상으로서
갸냘프지만 정열이 가득 담긴 눈으로 하늘을 응시하는 어린 소녀상으로
나이가 어린데 비해 성숙해 보이고 무언가를 꿰뚫는 듯한
총명함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모하르트는 그녀의 작품평에서 "겉으로 나타
나는 모양 그대로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정화하고 확대시켜 더
깊은 내면의 아름다움으로 접근하려했다"고 평했다.
1895년경부터 까미유는 로댕의 영향에서 벗어나 그녀만의 독창성을 나타내
보인다. 까미유의 작품은 각광을 받기 시작했고 많은 비평가들이 신문,
잡지등에서 찬사를 보내기 시작했다.
1898년 까미유는 로뎅과 이별을 고한 뒤,
그들의 관계는 편지를 통하여 재연되었으며 까미유는 그에게 자신의
작품을 좋아하지 않는 손님을 대신 만나 줄것을 부탁하기도 했다.
1897년 까미유 끌로델은 옥으로 만들어진 뜬 소문(Les Causeuses)을
샹 드 마리스의 살롱전에 출품하여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녀의 성공은 그녀에 대한 모멸 또한 부채질 했다.
'이제 그녀에게는 물질적인 어려움은 없겠군'하고 말하며 사람들은
그녀에 대해 수근 거렸다. 사람들은 그녀가 아틀리에서 추위와
배고픔을 잊기 위해 웅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1899년 까미유는 살롱전에 대리석올 된 클로토를 출품한다.
이것은 로댕과 까미유가 결정적으로 결별하게 되는 요인이 되었다.
까미유는 이 작품을 룩셈 부르크의 박물관에 전시하기를 원했으나
어찌된 일인지 몇년이 지나도록 그것은 박물관에 전시되지 않고
있었을 뿐 아니라 행방도 알 수가 없었다.
이에 로댕은 그 연유를 알기 위하여 모르하르트와 의논하였으나
사건은 점점 더 악화 되어갔다.즉 , 까미유는 로댕이 이 작품을
훔쳐갔다고
비난을 퍼붓기 시작했다.
까미유는 로댕이 자신의 영감을 도용했다고 하여 그에 대한 증오를
날로 쌓아갔다.
까미유의 로댕에 대한 강박관념적인 증오는 로댕이 죽은후에도
끊임없이 이어졌다.
1899년 까미유는 부르봉가 19번지로 거처를 변경한다.
이곳에서 그녀는 정신병원에 들어가지 전까지 약 14년간을 혼자서
살았다.1905년은 까미유에게 작품활동의 마지막해이다.
1905년 12월 14일부터 16일까지 으제니 블로의 주선으로 그의 화랑에서
까미유의 작품13점이 전시되었으나 그다지 큰 성공은 거두지 못하고
[애원],[소외된 사람들],[왈츠]등 몇몇 소품들만을 판매하는데 그친다.
까미유의 작품에 있어서 주목해야 할 것은 [비상하는 신(1894-1905)]및
[중년(1894-1900)]등 그녀의 작품에는 로댕과의 관계가 짙게 나타나고
있다.
[중년]의 최초 석고상에서는 한가운데 선 남자가 오른손으로 노파의
어깨를 껴안고 왼손은 웅크린 젊은 여성의 가슴에 대고 있다.
물론 이 남자는 로댕이며 노파는 로즈, 젊은 여성은 까미유 자신이다.
1899년에서 1913년에 걸쳐 만들어진 이 작품의 브론즈 상에서는 이미
남자는 완전히 노파의 수중에 들어가 있고, 젊은 여성은 웅크린 채
허공을 향해 양팔을 헛되이 뻗고 있는 것에 불과한데, 이러한 변화는
로댕과까미유 의 관계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대중의 까미유에 대한 첫 주문작인 [중년]이 청동으로 제작되는 것을
로댕의 영향력으로 정부가 막게 되는데, 이에 까미유는 본래의 석고상을
자신의 작업실에 보관하면서 비밀리에 두번씩이나 청동작품을 만듦으로써
정부의 처사에 이를 반박하게 되고,
경제적으로나,정신적으로 지쳐버린 까미유는 모든 창작활동을 중단하고
파괴적인 칩거생활에 인생을 맡긴다.
칩거생활(1906-1912)
1906년 [상처입은 니오미드]가 제작되었는데, 이작품은 보자르 측이 자체 결정한 재료로 까미유에게 주문의뢰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의 도움은 그 시기가 너무 늦어, 이미 크게 쇠약
해진 까미유에게는 별로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위잰느 블로는 부르조아 고객들이 기호에 맞추어 까미유에게 청동소품들을
제작할 것을 요구한다. 1906년에 사랑하는 남동생 폴 끌로뎅이 결혼을 하자
마자 중국으로 떠나게 되는데 이게 충격을 입은 까미유는 그 해의 모든
작품들을 고의적으로 부숴 버렸다.
그녀의 작업실은 점점 황폐해져 갔다. 그녀는 일꾼들을 불러 부숴진 파편들
을 어딘가에 묻어 버리라고 하곤 주소도 남기지 않은채 몇 달동안 사라지곤
했다. 차문이 열리지 않는 1층은 믿을수 없을 정도로 흐트러졌고
더러움이 끓 었고 견딜 수 없는 냄새가 새어나왔다.
까미유는 벽지를 갈기갈기 찢어버렸고 더러운 의자는 부숴진 채 놓아 두었다.
부르봉에 있는 까미유의 아름다운 작업실은 7년동안 자신을 가두어 놓고
전혀 외부 출입을 삼가한 채 고독한 예술가의 쓸쓸한 독방으로 전락했다.
옛연인이며, 영광속에 살고있는 로댕에 대한 강박관념이
그녀의 이성과 영감을 마비시켜버린것이다.
1906년부터 1909년 까지 폴은 중국의 텐진에서 그의 가족과 함께 살며 그곳의
시장과 경찰 국장을 지내다가 1906년 영사를 역임했다.
1909년 그는 프랑스로 돌아와서 까미유를 만났다.
폴은 전후사정을 아버지에게 편지로 알리게 되고 까미유의 광기에 의해
아버지는 정신적인 고통을 느끼게 된다.
1912년 여름 로댕이 반신불수가 되었다는 소문이 들려왔고 같은해
까미유 조카의 죽음이 있었다. 폴은 9월20일 함부르크로 떠났다.
모든 것을 잊고 작업에 열중인 카미유 클로델 (1911)
1898년 로댕과 헤어진 카미유 클로델.....그녀는
로댕으로부터 따로 독립하여 조각가로 활동중일 때 찍은 사진으로서
그녀 나이 47세 때의 모습으로 그녀의 얼굴 모습에서 고통스런 고독과
실연의 아픔 및 배신감에 따른 분노가 가득 차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녀의 동생 폴은 이때의 상황이 그녀가 로댕에게 모든 걸 다 잃어 버린
비참한 시기라 하였다.
감금기(1913-The end)
1913년 3월 2일 일요일 아버지가 86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까미유는 이 소식을 몰랐기 때문에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없었다.
아버지의 사망에 앞서 폴은 이미 빌 에브라르 요양소 원장과 면담을 가졌고
아버지의 사망후 급히 귀국한 폴은 장례식 후 미쇼 의사에게 까미유의
정신병원 수속절차를 위한 증명서를 발송하게 했다.
까미유끌로델은 1912년 3월10일 빌르 에브라르의 수용소에 집어넣어졌다.
로댕은 까미유의 감금 소식을 알지 못한 것 같다. 아마도 소란한 신문의
사설에 의해 그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이소식은 그를 혼란시켰다.
로댕은 마지막으로 모르하르트를 중간에 내세워 까미유를 도와주려 시도하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파리가 곧 위험에 빠질 상태에서 로댕은 로즈와 함께 런던으로 떠난다.
그러나 가을에는 로마로 내려가 흉상 제작에 들어갔다.
폴 끌로델은 함부르크 영사를 떠나 스웨덴과 노르웨이를 거쳐 파리에
도착하고 까미유는 앙김으로 이송됐다.
9월 9일 다른 환자들과 함께 앙김에서 몽드베르그 수용소로 다시
이송되었다.
이곳에서 그녀는 1943년 10월 19일 사망하기 까지 마지막 인생의 30년을
보냈다.
1919년 2월 25일 몽드베르그로부터 까미유는 처음으로 정신 병원에서의
편지라 불리우는 서신을 미쇼 의사에게 보냈다.
그는 그녀에게 감금 증명서를 발부한 사람이다.
빌뇌브로 되돌아온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가족들이 수모를 당하느니 그녀 혼자 고통 받게 두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녀가 수용소에 있는 동안 그녀의 어머니와 여동생 루이즈는 그들이
죽을 때까지 단 한번도 방문하지 않았다. 까미유의 간곡한 애원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어머니는 물론 남동생도 절망에 빠진 그녀를 구해주지
않았다. 환자를 가족들 가까이 살게 하거나 퇴원시키는 것에 대해서
의사들이 별로 반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외교관인 폴이 간혹 휴가 때 그녀를 보러 왔고 그때마다
그는 받은 느낌을 일기에 적었다.
1915년 5월경 그의 첫번째 방문에는 <까미유는 많이 수척해지고 눈이
누런 빛을 띄었지만 정신적으로는 나아진 것 같다>고 적었으나, 5년
후에 <매우 여위었고 회색빛 얼굴에 치아도 몇개 빠졌다>고 적었다.
그 후 또 5년이 지난 1925년 폴은 다시 까미유를 볼 수 있었는데 그때는
치아가 모두 빠져 없어지고 건강 상태도 몹시 나빴으며 허옇게 센 머리는
늙은 여자를 연상 시킬 뿐이었다.
1927년의 방문에는 낡아 구멍이 뚫린 밀짚 모자와 누런 베 치마의
서글픈 까미유의 모습을 보았다.
1930년 6월 8일 일기에는 <그녀는 너무 늙어 버렸다. 머릿속은 온통
불안에 싸여 있고 아무런 생각없이 낮은 목소리로 내 귀에 아무 뜻도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까미유는 한 수녀가 그녀를 위해서 만들었다는 '용의 눈물'이라는
회색 구슬 묵주를 나에게 주었다>고 적었다.
1939년 부터 유럽은 다시 전쟁에 휩싸였다.
몽드베르그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환자들의 사망이 두드러졌고 이들의 안전 대책은 전무한 상태였다.
1942년 여름 이후 까미유의 건강은 점점 악화되었다.
그녀의 나이 78세였다.
그해 말, 상태는 더욱 악화되어 까미유는 부종 상태였고 음식물을
삼키지 못했다.
게다가 탈수 증세도 보였다.
1943년 9월 20일이 되어서야 폴 끌로델은 까미유를 방문했다.
1913년 3월 10일 빌르 에블라르 Ville-Evard 정신병원에 강제로
감금된지 30년 후인 1943년 10월 19일 오후 2시 까미유 끌로델은
몽드베르그 Montdevergues 정신병원에서 7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까미유끌로델" 영화에선 이자벨 아자니와 제랄드 드빠르듀가 열연했다.
깊은 생각 1905년
젊은 로마인 (16세의 폴 클로델: 1884년, 브론즈, 21세 때 제작
인간의 음탕함과 탐욕스러움의 결과로 나타난 일그러진 표정과 거친 얼굴의 특징이
적나라하게 표현된 마스크 작품은 카미유 클로델이 초기에 제작한 습작 중의 하나이다.
A Phygrian Cap (Phygrian 두상 : 1886년,브론즈, 22세 때 제작)
젊은 로마인 (16세의 폴 클로델: 1884년, 브론즈, 21세 때 제작
인간의 음탕함과 탐욕스러움의 결과로 나타난 일그러진 표정과 거친 얼굴의 특징이
적나라하게 표현된 마스크 작품은 카미유 클로델이 초기에 제작한 습작 중의 하나이다.
A Phygrian Cap (Phygrian 두상 : 1886년,브론즈, 22세 때 제작)
젊은 로마인 (16세의 폴 클로델: 1884년, 브론즈, 21세 때 제작) 인간의 음탕함과
탐욕스러움의 결과로 나타난 일그러진 표정과 거친 얼굴의 특징이 적나라하게
표현된 마스크 작품은 카미유 클로델이 초기에 제작한 습작 중의 하나이다.
A Phygrian Cap (Phygrian 두상 :
1886년,브론즈, 22세 때 제작) 카미유 클로델의 초기의 작품 중 로댕의 영향이
가장 짙게 나타나는 작품 중의 하나로 Phygrian사람의 얼굴을 섬세한 터치와
아울러 비교적 정확한 데생에 의하여 인체의 특징을 잘 표현한 작품이다.
로댕은 까미유의 이 작품에서 자신의 조각과의 내적인 유사성을 느끼고는
까미유가 조각에 대한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한번에 알아보고
그녀의 작품에 나타나는 표현력에 감탄을 했다고 한다
The Implorer(애원하는 여인) (1900년, 브론즈, 36세 때 제작)
The Implorer(애원하는 여인)
(1900년, 브론즈, 36세 때 제작)
이 애원하는 여인은 1893년에 제작된
성숙 (The age of maturity)에 있는
웅크리며 손을 내밀고 있는 여인을 다시 한번 독자적인 작품으로 제작한 것이다.
이 작품에서 카미유는 자신에게서 멀어져 가고 있는 자신의 영원한 연인
로댕을 놓치지 않고 잡아 보려는 혼자만의 몸부림이 아닌가 한다.
성숙 (The age of maturity : 1893년, 브론즈, 29세 때 제작,
파리 로댕박물관 소장)
이 작품의 브론즈 상에서는 이미 남자는 완전히 노파의 수중에들어가 있고,
젊은 여성은 웅크린 채 허공을 향해 양팔을 헛되이 뻗고 있는 것에 불과한데,
이러한 변화는 로댕과 카미유 의 관계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의 카미유에 대한 첫 주문작인 이 작품이 로댕의 영향력으로 정부가 막게 되는데,
이에 카미유는 비밀리에 두번씩이나 청동작품을 만듦으로써 이를 반박하게 되고,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지쳐버린 카미유는 모든 창작활동을 중단하고
파괴적인 칩거생활에 인생을 맡긴다.
천재적인 소질을 타고 났으나...
로뎅이라는 남자를 만나면서
사랑도 재능도 제대로 꽃 피우지 못하고
그렇게 스러져 간 끌로델의 재능이 마냥 아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