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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際.經濟 關係

[스크랩] 노르웨이의 라면왕이 된 전쟁고아 이철호

鶴山 徐 仁 2009. 11. 1. 13:23

    노르웨이의 라면왕 노르웨이에서 'Mr. Lee, 주세요' 하면 라면을 준다. 'Mr. Lee' 라면의 겉표지에는 한 동양인의 웃는 얼굴이 꽉 차 있고, 포장지에는 한글로 '닭고기 맛', '소고기 맛' 이라고 씌어 있다. 세계 라면 시장은 일본이 장악하고 있지만 노르웨이에선 'Mr Lee' 가 노르웨이 라면의 78%를 점유하고 있다. 'Mr Lee' 라면의 주인공 이철호는 노르웨이 최초의 한국인이며, 이민자 최초로 노르웨이 국민훈장을 수상하기도 했고, '위대한 노르웨이인' 훈장을 받기도 했다. 초등학교와 고등학교 교과서에 소개될 만큼 유명하며 영화, 텔레비전, 라디오 광고에 출연하는 것은 물론 미스터 리의 팬 클럽까지 있을 정도다. 미스터 리 이철호 덕분에 라면은 북유럽 사람들에게도 친숙한 음식이 되었다. 국수를 좋아하는 이철호가 처음 라면을 들여왔을 때만 해도 노르웨이 사람들 은 라면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라면을 알리기 위해 애쓰는 이철호의 성실함과 언제나 긍정적이고 밝은 이미지에 호감을 느낀 사람들이 서서히 라면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입맛이 다른 노르웨이 사람들도 라면을 좋아하기까지 3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 거기에는 노르웨이 사람들 입맛에 맞춘 라면 개발도 큰 몫을 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에이, 왜 이 맛있는 라면을 안 먹을까? 이 사람들 입맛엔 맞지 않는가 보군' 하고 포기했을 텐데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고 밀어붙인 것이다. 이철호는 한국 전쟁 중인 열세 살 때 폭탄 파편이 온몸에 박혀 의학적 사망 판단을 받고 시체실에서 하루를 보냈다. 그때 한국에 파견되어 있던 노르웨이의 이동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었고, 노르웨이 의료진들은 본격적인 치료를 위해 그를 노르웨이로 데려왔다. 노르웨이에서 7년 간 40여 차례에 걸친 수술을 받은 뒤 다리를 절기는 해도 어느 정도 회복이 되자 이철호는 노르웨이에 남기로 결심했다. 고학을 시작한 그는 공부하면서 청소, 접시닦이, 벨보이, 변소치기 등 닥치 는 대로 일을 했다. 배고픔에 대한 서러움 때문이었을까, 그는 요리사의 꿈을 가지고 밤낮으로 일했다. 다른 사람이 그릇을 스무 개쯤 닦으면 그는 오십 개를 닦으며 남보다 더 깨끗하고 반짝반짝하게 닦으려고 애썼다. 그런 그를 눈여겨본 호텔 주방장이 요리 전문학교에 보내 주었고 이를 막물고 공부한 이철호는 최우수생으로 졸업할 수 있었다. 자신의 어릴 적 꿈인 구두닦이 대신 요리사 마스터가 된 것이다. 이철호가 어렸을 때 고생을 헤쳐나가지 못했더라면 철수세미 같다던 라면 으로 노르웨이에서 성공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라면을 노르웨이 사람들에게도 맛보게 하기 위해 개발 과 노력을 하지 않았다면 결코 라면왕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철호는 노르웨이에 코리아타운을 만들어, 낳아 준 조국과 길러 준조국을 연결시키려는 꿈을 키워 나가고 있다. 이제 편히 쉴 나이도 되었건만 그는 아직도 꿈꾸고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 유동철교수 지음 "아들아, 너는 세계를 무대로 살아라" 에서 ♣ 德 ♣
출처 : 스마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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