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조조는 패국 초현 사람으로 조등의 양자인 조숭의 아들이다. 전한 시대 유방의 심복으로 재상을 지낸 조참의 자손인 조등은 환제 때 중상시를 맡았다. 조등이 환관이라 아들이 없었으므로 조숭을 양자로 삼았다(삼국지 주에 소개된 일설에는 조숭이 하후씨이며 하후돈의 숙부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 환관의 손자라는 콤플렉스가 나중에 조조의 인물상이나 생활 방식에 커다란 영향을 주게 된다.
조조의 어릴 적 이름은 길리(吉利), 또다른 이름으로 아만(阿瞞)이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교묘한 꾀와 기지를 발휘하는 일화가 많이 남아 있다. 소년 시절 매 날리기, 사냥과 노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는 조조를 보고 숙부가 종종 조숭에게 충고하곤 했다. 어느 날 조조가 숙부를 만나자 입이 마비된 듯한 시늉을 했다. 숙부가 조조에게 묻자 “마비증상이 갑자기 왔습니다” 라고 답했고 숙부는 이 일을 조숭에게 알렸다. 조숭이 이를 놀라 듣고 조조를 불렀는데 조조는 태연하게 “원래부터 마비증상은 없었습니다” 라고 답해 이후 아버지는 숙부의 말을 신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조조는 원소와 일찍이 장난꾸러기 친구 사이였다. 언젠가 이 두 사람은 갓 결혼한 신부를 훔치러 갔다. 일이 실패하여 추적자를 따돌리면서 도망하던 도중, 원소는 그만 가시덤불 속으로 굴러 떨어지고 만다. 원소가 가시에 찔려 통증으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자, 조조는 대뜸 범인이 여기 있다고 큰소리로 외쳤다. 원소가 기급하여 통증도 잊고 얼른 가시덤불 속에서 나와 도망가기에 바빴다고 한다.
이처럼 품행이 불량한 모습을 보고 누구도 조조를 좋게 봐주는 사람이 없었으나, 양나라의 교현과 남양의 하옹은 조조를 남다른 인물로 평가했다. 교현은 조조에게 “천하를 안정시키는 일은 아마도 그대에게 달려있다”라고 말했다. 조조는 교현의 권유로 허소와 깊은 친교를 갖는다. 어느 날 허소에게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지를 물었는데, 허소는 조조를 ‘’치세의 능신, 난세의 간웅(子治世之能臣, 亂世之姦雄也)’(《삼국지》 배송지주)으로 평가했다(한편, 후한서 허소전에는 조조를 ‘태평시대의 도적, 난세의 영웅(君淸平之奸賊, 亂世之英雄)’으로 평가한다). 이 말을 들은 조조는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조조는 20살에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낭관(郎官)이 되고 낙양북부위에 임명된다. 그는 권세를 휘두르고 있었던 건석이라는 환관의 숙부가 금지된 야간 외출을 하여 몽둥이로 때려 죽였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법을 어긴 자는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가차없이 처벌했다. 이어서 그는 돈구(頓丘)의 현령, 의랑(議郞) 등으로 출세 가도를 달린다.
황건적의 난에서 서주 공략까지
184년 조조가 30살 때 황건적의 난이 일어난다. 이때 기도위(騎都尉)에 임명되어 영천(潁川)에서 황건적을 토벌하고, 이 공적으로 재남국 재상으로 승진, 거기에서 그는 뇌물과 향락에 물든 상급 관리 8할을 파면하고, 당시 유행하던 사이비 종교나 미신 부류를 모두 금지시킨다. 그 후 동군태수로 임명되지만 부임하지 않고 돌연 사퇴했다. 그리고 고향에서 사냥과 독서를 즐기며 은거 활동에 들어갔다.
금성의 한수와 변장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수도 방위를 위해 전군교위(典軍校尉)로 임명된다. 그 무렵 영제가 죽고 대장군 하진과 원소는 환관 주살을 계획한다. 그런데 황태후가 이를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동탁 등 각지의 제후를 소집하여 황태후에게 압력을 행사하려고 했다. 조조는 이 소식을 듣고 “일부러 제후들을 부르지 않더라도 환관의 우두머리만 처형하면 될 뿐, 그들을 모두 죽이려고 한다면 일이 탄로나 실패할 것”이라고 말했다. 과연 조조가 예상한 대로 동탁이 아직 도착하지 않는 사이에 하진은 환관들에게 주살되고 만다. 또한 환관들도 원소에게 모두 주멸되고, 이 와중에 실권은 동탁의 수중으로 떨어진다. 권력을 장악한 동탁은 조조에게 협조를 구하지만 조조는 거절하고 성을 탈출했다. 이때 조조가 왕윤에게 빌린 칠보검으로 동탁을 암살하려다 실패하여 도망쳤다는 이야기가 있다.
189년(중평 6년) 12월, 조조는 사비를 털어 군사를 모으고 원소를 맹주로 하는 반동탁 연합군에 가담하여 분무장군을 맡는다. 그런데 동탁군이 워낙 강력했으므로 제후들 중 누구도 선뜻 선두에 나서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조조가 진군했지만 변수에서 동탁의 부하 서영에게 패하고 만다. 조조는 제후들이 주둔한 산조로 돌아오지만 그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군사를 움직이지 않자 결국 연합군은 와해되고 만다.
191년(초평 2년) 조조는 동군에 침공한 흑산적을 토벌해 원소로부터 동군 태수로 임명된다. 192년 4월, 동탁이 여포에게 살해된다. 같은 해 청주의 황건적 100만 명이 연주에 침공하자 군대를 이끌고 격파한다. 황건적이 항복하자 조조는 이들을 자기의 세력으로 영입하고, 그 가운데 정예 병력을 선발해 ‘청주병’으로 불렀다. 이때부터 유능한 인재가 그에게 부하로 들어오게 된다.
같은 시기에 원소와 원술은 사이가 나빠진다. 원소는 형주의 유표와 연합하고, 원술은 유주의 공손찬과 서주의 도겸과 손을 잡는다. 조조는 유표와 연대해 각지에서 원술의 군대를 격파하고 있었는데, 그때 도겸이 연주 동쪽 태산군에 침공해 조조의 아버지 조승을 살해한다. 이 소식을 접한 조조는 193년부터 194년(흥평 원년)에 걸쳐 2차례 도겸 정벌에 나서 서주에서 무차별 살육을 자행했다.
《후한서》에는 “주민 수십만 명을 살해하고 개와 닭 등 가축도 가차없이 도살하였다. 이 때문에 사수(柶水)는 흐름을 멈추고 말았다”라는 처절한 기록이 남아있다. 이 사건은 《삼국지연의》에서 조조가 악역으로 묘사되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조조가 서주를 공격하는 사이에 친우였던 장막과 연주를 지키던 진궁이 조조에게 반기를 들고 여포를 연주목에 영입한다. 조조는 복양에서 궁지에 빠지고 메뚜기의 피해로 굶주림에 허덕이지만 2년에 걸친 공방 끝에 마침내 연주를 평정하는 데 성공, 196년(건안 원년)에는 헌제를 옹립하여 대장군으로 임명되고 수도를 허창으로 옮긴다. 이때 유비가 여포에게 하비를 빼앗겨 조조 밑으로 도망온다. 부하 정욱은 “유비는 끝내 남의 밑에 남아있을 인물이 아니다” 라고 말하면서 제거할 것을 진언하지만, 조조는 “지금은 영웅의 마음을 붙들 시기” 라며 유비를 잘 대우한다. 같은 해에 둔전제를 실시해 농경을 전문으로 하는 농민을 널리 모집, 허도(허창) 주변에서 농업에 종사시켜 곡물 100만 석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이리하여 전쟁에 없어서는 안될 식량을 충실히 마련하여 천하를 장악할 수 있는 기반을 쌓는다.
관도대전부터 삼국정립까지
197년 조조는 완(宛)에 출진하여 장수(張穗)를 항복시키지만 나중에 그는 조조를 배신한다. 이 싸움에서 조조가 패하고 맏아들 조앙과 부하 전위가 전사한다. 198년 조조는 장수, 유표의 연합군을 안중에서 격파하고, 하비에서는 여포를 사로잡아 처형한다. 다음해에는 원술을 토벌하고 장수를 다시 굴복시켜 그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원술 토벌에 유비를 파견한 일이 문제가 된다. 유비는 하비에서 반기를 들어 서주자사 차주(車胄)를 살해했다. 그러나 200년에 조조가 친히 출진하여 유비를 격파하고 관우를 항복시켰다. 유비는 원소 밑으로 도망치고 마침내 원소와 천하를 놓고 자웅을 겨루게 된다.
원소와 천하 패권을 다투는 전초전은 먼저 백마에서 치러진다. 여기에서 조조는 원소의 부하인 맹장 안량과 문추를 물리치고 전투를 유리하게 이끈다. 그러나 관도에서 대치가 길어지자 아군의 식량이 고갈되고 그 대담한 조조도 마음이 약해진다. 그래서 순욱에게 허도로 귀환하고 싶다는 편지를 보내 상담을 구했는데, 순욱은 격려의 답장을 보내와 그곳에서 버티게 한다. 마침내 원소의 부하 허유가 투항하고 고시와 오소에 있는 원소의 식량기지를 습격하기를 진언하여 형세는 역전, 원소군은 완전히 무너지고 만다. 이때 몰수한 전리품 중에서 원소와 내통하고 있었던 조조의 부하의 편지가 무더기로 나왔다. 조조는 “원소의 대군을 상대로 해서 나 자신조차도 어찌 될지 알 수 없었다. 하물며 다른 사람들은 어떠했겠는가?”라고 말하면서 편지를 읽지 않고 모두 불태웠다고 한다. 그 후에도 북진을 계속하여 원씨 잔당 세력을 철저히 격파했다.
삼국지연의에 따르면, 이때 조조는 군사를 몰아 장성을 넘어 모돈(冒頓 또는 묵돌)을 죽였다고 한다. 모돈은 기원전 209년부터 기원전 174년까지 흉노의 선우(대족장)를 지냈던 사람으로 조조와는 4백년 가까이 시차가 있는 인물이다. 조조의 모돈 살해는 나관중이 삼국지연의에서 꾸며낸 이야기다.
원소 토벌 이후 중국 대륙의 최강자로 자리매김한 조조는 208년 승상(丞相)의 지위에 오르고, 형주의 유종을 항복시켜 적벽대전에서 유비와 손권의 연합군과 대치하다가 대패하여 조조는 가까스로 도망친다. 《삼국지연의》에서는 도망치는 도중에 3번이나 유비를 바보라고 비웃으며 “나라면 여기에 복병을 놓겠다”라고 말하는데, 그때마다 조운, 장비, 관우에게 차례로 습격당한다. 이후 중국 대륙은 위, 촉, 오 삼국의 삼국 시대에 접어들어 완전한 통일의 꿈이 멀어지지만 조조의 우세한 세력 기반은 변하지 않았다.
삼국정립과 조조의 죽음
210년에 조조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구현령과 술지령을 공포한다. “구현령”이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재능있는 사람이면 인재로 등용하는 것이다. “술지령”에서는 수여받은 4현 3만 호 가운데 3현 2만 호를 황제에게 반환하고, 제위 찬탈 등 야망이 없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히는 제도다.
213년 위공(魏公)으로 책봉되었고, 216년 조조가 위왕(魏王)에 봉해지면서 위나라의 건국이 이루어졌다. 헌제는 사실상 허수아비였으며 이 무렵 후한의 실권자는 조조였으나 황제가 되지는 않고 죽을 때까지 위왕으로 남았다. 그러나 여기에는 비판도 만만찮다. 조조의 위공 취임을 반대한 순욱에게 자살을 명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자신의 의지에 반대하는 자는 비록 공로자라고 할지라도 가차없이 처분했다는 것이다.
211년 마초와 한수 등이 관중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조조가 토벌에 나섰다. 그런데 군대가 먼저 강을 건너 세력이 약해진 틈에 마초에게 습격당하여 위기에 빠졌지만 다행히 허저의 도움으로 구조된다. 또한 이때 흙을 쌓아올려 성벽을 만들고 물을 뿌려 하룻밤 사이에 얼음성을 완성시켰다고 한다. 결국 가후의 이간책으로 마초와 한수 사이가 벌어져 적을 물리치고 관중을 평정한다. 212년 오나라 정벌에 나서고 다음해 유수구에서 그를 격파한다. 이때 다시 군사를 일으킨 마초를 토벌, 215년에는 한중의 장로를 항복시키는 등 매년 지칠 줄 모르고 전투를 벌였다.
217년에는 손권과 다시 싸우고 219년 유비에게 한중을 빼앗기지만, 대신 손권과 연대해 형주의 관우를 멸한다.
관우가 죽은 이듬해, 220년 1월 23일, 조조가 낙양에서 향년 66살의 나이로 서거했다.
조조의 최후에 대해서는 여러 일화가 있다. 건시전을 지을 때 탁용사의 신목(神木)을 베자 나무에서 피가 흘러 이를 본 조조가 기절하고 말았다든가, 배나무를 옮겨심을 때 뿌리에 상처가 나 피가 흐르고, 이것을 본 후 병상에 눕게 되었다는 등의 이야기가 있다.
한편 문인으로서도 뛰어났던 조조는 훗날 아들 조비, 조식과 함께 당대의 문학계의 이름 있는 사람들이라 해서 삼조(三曹)라 불리기도 한다.
평가
진수가 《삼국지》 〈위서〉 무제기에서 평하기를, “사사로운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합리적으로 일에 대처했으며, 구악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는 과거의 잘잘못을 따지지 않고 이성적인 판단으로 대처해 사람을 등용했다는 뜻이다.
조조의 친족 관계
아들과 손자, 증손자
- 조앙 (풍민왕) 유부인 소생으로 정실 정부인의 양자
- 조삭 (상상왕) 유부인 소생으로 정실 정부인의 양자
- 조비 (문제) 변황후 소생
- 조예 (명제)
- 조방 (애제)
- 조림 (동해정왕)
- 조모 (폐제)
- 조예 (명제)
- 조창 (임성위왕) 변황후 소생
- 조식 (진사왕) 변황후 소생
- 조웅 (소회왕) 변황후 소생
- 조표 (초왕) 손희 소생
- 조충 (등애왕) 환부인 소생
- 조우 (연왕) 환부인 소생
- 조환 (원제)
- 조곤 (중산공왕) 두부인 소생
- 조거 (팽성왕)환부인 소생
- 조상(임성위공자) 손희 소생
- 조준(진류공왕) 진부인 소생
- 조간(조왕) 왕소의 소생
- 조무(낙릉왕) 조희 소생
딸
- 청하공주(하후무의 처) 유부인 소생
- 헌효황후 조헌(헌제의 처)
가까운 친족
- 조안민
- 조조
- 조진
- 조휴
- 하후무
- 하후상
- 하후위
- 하후패
기타
- 조순
- 조인
- 조홍
- 하후돈
- 하후연
- 헌제 (사위)
- 원담 (사위)
- 원소 (사돈)
'人物情報 參考'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벤자민 프랭크린 이야기 (0) | 2009.12.11 |
---|---|
박정희 (0) | 2009.11.01 |
<스크랩> 박사들에 대통령 몇배 월급…박정희의 'KIST 사랑' (0) | 2009.10.19 |
시대별 대표 음악가 (0) | 2009.10.15 |
드가 (Edgar Degas 1834∼1917) (0) | 2009.10.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