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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전쟁영웅 기리며… LA에 '김영옥 중학교'

鶴山 徐 仁 2009. 7. 17. 10:20



"군인으로서 김영옥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알렉산더 대왕 이후에 최고의 군인이다." -존 코백 미 육군 예비역중령

25일 MBC 스페셜이 ‘영웅, 김영욱 대령’을 통해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한 한국계 미국인 전쟁영웅의 삶을 재조명해 관심을 모았다.

방송에 따르면 김영옥(86) 씨는 2차대전에서 이탈리아 최고십자무공훈장, 프랑스 최고훈장, 등의 무공훈장을 받았다. 또한 육군 7사단 31연대 1대대장으로 한국 전쟁에 참전해 불패의 신화를 쌓아 미국 은성, 동성 훈장을 받으며 전설적인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인물이다.

1919년 미국 이민 1세대의 아들로 태어난 김 씨는 1941년 군대에 입대했다. 당시 아시아인은 차별이 심해 미군에 입대할 수 없었지만 2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법이 바뀌어 군 입대가 허용됐다. 김 씨는 이듬해 아시아인으로 유일하게 장교 후보생이 됐다.

그는 초급 장교가 됐지만 인종 차별 때문에 전투에는 참전할 수 없었다. 그런 그에게 기회가 왔다. 바로 일본계 미국인들을 지휘하라는 상부의 명령이 떨어진 것.

당시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은 자국에 살고 있던 일본인들을 소개해 수용소에 감금했다. 그들 중 일부 일본인들을 모아 442연대 100대대를 창설한 것이다. 김 씨는 100대대 2중대에 배치됐다.

기본적인 군사훈련조차 받지 않았던 일본인들을 모아 김 씨는 실전에 버금가는 강도 높은 훈련을 시켰다. 다른 부대원들이 기본 교육에 치중했던 것과 달랐다. 그는 스스로 엄격하게 규정을 지키며 훈련에 임했고 다른 부대원들에게 모범을 보였다.

이 같은 훈련은 실전에 투입되면서 효력을 발휘했다. 1943년 김 씨가 이끄는 부대는 유럽에 투입됐고 이후 탁월한 작전능력을 보이며 승리를 이끌었다. 그는 아시아인 최초로 작전참모가 됐다.

또한 2차대전 당시 연합군이 로마 입성을 앞두고 독일군과 대치하고 있을 때 그는 자원해 독일 진영에 침입 2명의 독일군을 납치했다. 이를 통해 독일군의 병력 배치 상황을 파악해 연합군은 손쉽게 로마에 입성할 수 있었다. 여기다 그가 속한 100연대가 독일 치하의 프랑스 브뤼에르나 비퐁텐 지역을 해방시키기도 했다. 이 지역에선 아직도 그를 영웅으로 기억하는 노인들을 만날 수 있다고 방송은 전했다.

한국 전쟁에서도 김 씨의 전공은 눈부셨다. 2차 대전 후 잠시 군을 떠났던 그는 자신의 조국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원입대했다. 그는 “한국을 위해 싸우고 싶었고 부분적으로 (전쟁에)미국의 책임이 있다고 느꼈다”며 입대 이유를 밝혔다.

참전 후 김 씨는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최전방을 지원, 교착상태였던 전선을 돌파해 60㎞나 북진해 휴전선 형태가 북쪽으로 치솟은 모양으로 만들어지는 데 기여했다. 그는 눈부신 활약으로 아시아계 최초로 백인들을 지휘하는 대대장으로 임명됐다.

그의 공적에 마크 클락크 전 유엔군 총사령관은 “내 휘하에 있던 500만 군인 중에 최고의 군인이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편 김 씨는 한국 전쟁의 참상을 겪은 후 자신이 한국인임을 다시 한번 깨달으며 이후 행보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한국 전쟁 중 전쟁고아들을 후원하는 ‘경천애인사’라는 고아원을 만들어 후원했고, 1963년에서 1965년까지 한국에서 미 군사 고문단으로 근무하면서 한국군의 현대화에 힘썼다. 뿐만 아니라 2000년 노근리 진상조사단의 일원으로 참여해 미군이 저지른 학살에 대한 진상을 밝혀내기도 했다. 이에 대해 그는 “정확한 진상을 알기 어렵지만 미군이 양민학살 했다는 것은 사실이다”며 미군의 치부를 드러내기도 했다.

이와 함께 제대 후에는 미국에서 활동하는 시민 봉사 단체들을 만들어 후원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이름을 한 번도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다. 조용히 자신이 할일을 묵묵히 해 냈다. 때문에 그의 공적을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

이에 대해 한 한국인 이민 3세는 “자신이 한 일을 알리지 않고 댓가를 바라지도 않았다”며 “김영옥 대령의 삶과 업적에 경의를 표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와 같은 삶의 태도에 2차 대전 당시 그의 휘하에 있던 일본인 부대원들과 미국 내 백인주류사회 등 그를 아는 모든 이들이 본보기이자 지도자로서 존경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그의 삶은 소박했다. 그의 방은 꾸며지지 않았고 벽에 걸려 있는 한반도 지도가 유일한 장식품이었다. 안타까운 점은 현재 김 씨가 두 차례 암 수술을 받고 투병중이란 사실. 그는 다시 재수술을 위해 병원을 찾았다고 방송은 밝혔다.

한국에 많이 알려지지 않은 김영옥 씨의 삶에 많은 시청자들은 “그가 한국인임이 자랑스럽다”며 큰 관심을 나타냈다.

아이디가 ‘WHBEAN`이란 시청자는 “그 분이 한국인이란 사실이 정말 자랑스럽다”며 “김영옥 대령의 고귀한 정신이 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되었으면 한다”고 밝혔다.

아이디가 ’JS4019`인 시청자는 “전쟁영웅이면 어딘지 모를 이데올로기적 완고함과 편협함이 느껴져야 하는데 김영옥 대령은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다”며 “고귀한 양심, 이타적 리더쉽 등 민족을 뛰어넘는 보편적 가치를 화려한 수식어 없이 그는 행적으로 몸소 보여주었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많은 시청자들이 그가 걸어온 삶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한편 최근 국내에서는 김영옥 씨의 공적을 기려 무공훈장 최고 등급인 태극무공훈장 서훈이 추진되고 있다. 뛰어난 업적과 미국 사회에서 엄청난 존경을 받고 있지만 그는 미국에서 두 번째 무공훈장을 받는데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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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영웅 기리며… LA에 '김영옥 중학교'

  •  입력 : 2009.07.16 03:02 / 수정 : 2009.07.16 09:54
고(故) 김영옥 대령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 한국인 전쟁영웅 고(故) 김영옥 대령 이름을 딴 중학교가 생긴다. LA통합교육구교육위원회는 오는 9월 LA 한인타운에서 문을 여는 센트럴LA 3번 중학교 이름을 '김영옥 중학교(Young Oak Kim Academy)'로 결정했다고 14일(현지시각) 밝혔다.

김영옥 대령은 LA에서 태어난 한인 2세로 2차 세계대전과 6·25전쟁에 미군으로 참전, 많은 전공(戰功)을 세웠다. 프랑스·미국·이탈리아·한국 등에서 훈장을 받았으며, 예편 후에도 고아와 청소년 등을 도우며 사회봉사에 매진, 미국 사회에서 한인의 자긍심을 높여준 인물로 꼽힌다. 2005년 86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LA에 한국어 이름을 딴 학교는 이번이 세 번째로, 그동안은 '찰스 H. 김 초등학교'와 '나비 초등학교'가 있었고, 중학교는 처음이다. '김영옥 중학교'가 생기기까지는 2006년 그의 정신을 기리자는 뜻을 함께한 이들이 만든 '김영옥 대령의 친구들(Friends of Colonel Young Oak Kim)'이 많은 역할을 했다. 이들은 그동안 지역 사회와 정치계에 여러 차례 탄원을 보내고 서명 운동을 벌인 끝에 이번에 결실을 보았다.


 
 
 

 

2차 대전에 미군 이세부대로 활약했던 조선인 김영옥

boolingoo 2008.09.09 00:25

 

2차세계대전이 한창이던 40년대 초반에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정부는 일본계 미국인들의 준동을 염려해 이들의 재산을 압류하고 집단수용소에 가두어 버렸다. 당시 독일계나 이탈리아계 미국인들에게 아무런 제재가 가해지지 않았음에 비해 일본인에 대한 불공평하고 비인간적인 처사였다. 이에 반발한 일본인들이 거세게 항의하였고, 미국정부는 강제수용소의 일본계 미국인들중 지원자를 받아 부대를 편성하였는데  이것이 '니세이(二世)'부대이다다.

당시한반도는 일본의 식민지였고, 미국에 살던 한국인들도 일본계로 분류되어 함께 수용소에 갇혀 있었던 탓에 니세이 부대에는 한국인들도 여럿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이들은 일본이 아니라 독일과 싸우는 유럽전선으로 대서양을 건너가게 되었는데 그 중에는 전후 미군 대령까지 승진한 조선인 김영욱씨도 있었다.

 

 

짐승처럼 끌려간 우리도 '아메리칸'이었다

            

미일 전쟁이 터지자 잇세이(일본 이민 1세대)와 니세이(일본이민 2세대)에 견해차가 생겼다. 이민

1세대로서 일본 신문밖에 볼 줄 모르던 대부분의 잇세이들은 일본 군국주의를 지지하는 세력이 된 반면, 니세이들은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 그리고 일본의 군국주의를 대단히 부정적으로 보게 된 것이었다. 잇세이들이 본국의 승전을 기뻐하는 동안에 니세이들은 반일본 가두시위를 벌이곤 했다. 니세이들은 자신들이 미국에 얼마나 우호적인 사람들인지를 증명하고자 잇세이를 배제한 조직인 JACL(Japanese American Citizens League)을 만들기도 했다.

그런데도 니세이들은 여전히 미국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했다. 일본 어부들이 캘리포니아의 미 해군기지에 독극물을 풀려 했다거나, 미국에 25만명의 일본 병력이 있다는 등의 루머가 수도 없이 흘러다녔다. 2차대전이 심화되면서 미국내 일본인들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고, 41년 여름에는 잇세이들이 미국의 은행을 이용하는 것도 금지됐다. 대출은 물론, 예금해뒀던 돈조차 찾을 수 없게 됐다. 니세이들도 미국 시민권자임을 증명하는 ‘호적등본’을 제출해야 은행과 거래할 수 있었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니세이들은 자신들이 충성스러운 미국 시민임을 더 적극적으로 증명하려고 애를 썼다. JACL은 FBI 산하조직을 자청, 민간경찰 노릇을 하거나, 미국기를 흔들며 가두행진을 했고, 1940년에는 “나는 열렬하고 적극적으로, 어떠한 제한이 있더라도 미국 시민으로 살아갈 것이며, 위대한 미국의 더 나은 시민이 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라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그래도 미국은 그들을 믿지 않았다. 여기에는 문화적인 이질감도 크게 작용했다. 예컨대 일본인들은 미국인들과 달리 속내를 표정에 잘 담지 않기 때문에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41년 12월7일의 일본의 진주만 공습은 그런 이질감에 기름을 부은 꼴이었다. 캘리포니아의 일본인들을 격리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정치권, 언론, 민간단체들을 가리지 않고 거칠게 쏟아졌다.

일본인들이 그후 3년 동안 겪은 수난의 시작으로 본다.

이듬해 봄 격리되기 시작할 때까지 니세이들은 주유소에서 기름 한 방울도 살 수 없었을 만큼 철저하게 따돌렸다. 주유소와 상점마다 ‘일본인 출입금지(Japs are not wanted)’라는 글자가 씌어 있었다. ‘잽스(Japs)’란 ‘칭크’ ‘조센징’ ‘깜둥이’ 같은 말들처럼 일본인을 격하시켜 부르는 말이다. 그것말고도 일본인들은 ‘미친 개들(Mad dogs)’, ‘황색 쓰레기(Yellow vermin)’ 등으로 불렸으며, 외국 여행도 전면 금지됐다.

캘리포니아 지역의 일본인들은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42년 봄부터 일제히 수용소로 격리됐다.

격리 방침이 정해진 지 4개월 만에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일본인들은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일본계 혈통을 가진 이들 가운데 수용소로 끌려가지 않은 유일한 부류는 미국인 백인 남자와 결혼한 일본 여성들이었다.

 

일본인들의 캠프 이동과 거주는 ‘전쟁 재배치군(War Relocation Army)’이라는 이름의 특별 부대가 관장했다. 명령이 발효된 지 28일 만에 10만명이 이송됐으니 ‘재배치’의 신속함을 짐작할 만하다. 일본인들이 운영하던 상점은 모두 폐쇄됐고, 문 앞에는 ‘이 상점은 미국 정부 통제하에 있으므로 어떠한 사람도 허가 없이 출입하는 것을 금한다’는 경고문이 붙었다.

일본인들은 무장군인들의 감시를 받으며 일단 임시 집결처에 모인 뒤 번호가 쓰인 흰색 천을 가슴에 붙인 채 기차에 실렸다. 그들의 최종 목적지는 아칸소에서 캘리포니아 동부에 이르는 사막지대에 설치된 10곳의 포로수용소였다.

일본인들은 이송되는 과정에 별다른 말썽을 일으키지 않았다. 훗날 ‘산세이’(일본인 이민 3세대)들이 수치스러운 일로 여기기도 하고, 권위에 복종하는 일본인들의 전통의식 때문이라고 해석하기도 하는 이 ‘조용한 이동’에 대해 미국 언론은 ‘잽스, 추방에 순응’이라는 헤드라인을 뽑기도 했다.  

일본인들의 수용소 생활 가운데 주목할 만한 또 한 가지는 니세이들의 참전이었다. JACL은 “이런 상황일수록 더욱 국가에 충성해 미국 시민임을 보여줘야 한다”고 주장하며 자신들을 전쟁에 참가하게 해달라고 정부에 거듭 요청했다. 당시 JACL 지도부의 일원이었던 마이크 나사오카는 “니세이들이 이 캠프 저 캠프에 흩어져 있으면 우리의 충성심을 증명할 길이 없다고 생각했다. 니세이들로만 조직된 부대를 만들어 나가 싸움으로써 그 전적이 우리의 충성심을 입증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고 회고했다.

43년 2월1일 루스벨트 대통령은 니세이들로만 조직된 군부대 창설을 발표하는 성명서를 냈다. 그는 이 성명서에서 “미국은 인종과 관계없이 하나의 가슴과 정신으로 이뤄진 나라이며… 혈통과 무관하게 누구라도 미국의 승리에 이바지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인종’과 ‘혈통’ 때문에 수용소에 감금된 일본계 미국인들에게는 분통 터지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지만 니세이들은 오로지 충성심을 보여주기 위해 전장에 뛰어들었다. 그들은 ‘442연대 전투부대’에 소속됐고, 시원찮은 무기와 배급에 만족하면서 유럽전선 최전방에 배치되어 죽어갔다. 외모 때문에 적군으로 오인한 미군들의 총알 세례를 받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후 이 일본인 부대는 미군 전투부대 중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내고 가장 많은 전공을 세운 부대로 평가됐다. 그야말로 미국을 위한 ‘가미카제’를 자처했던 것이다.

 

전후에도 잇세이와 니세이들은 수용소에서의 생활에 대해 그 동안 한결같이 입을 다물었다. 미국이 2차대전 때 저지른 가장 큰 ‘실수’의 하나가 오래도록 과거에 묻혀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언론통제도 한 몫 했다. 당시 신문들에 실린 수용소 사진에서 일본인들은 모두 밝게 웃음짓고 있었다.

그렇지만 ‘실수’는 그대로 묻혀지지 않았다. 인권 변호사들과 사회운동단체들이 꾸준히 이 문제를 조명했고, 산세이들은 함구로 일관하던 잇세이들과 니세이들을 인터뷰해 기록을 남겼다.

일본인들에 대한 보상절차도 마련됐다. 1945년 법학자 유진 로스토 박사가 예일대 법학과 학술지에 이 문제에 대해 기고하면서 이슈로 떠오른 재미 일본인 인권유린 문제는 76년 제럴드 포드 대통령 때 처음으로 공식 인정됐고, 보상 문제는 88년에 의회에서 최종 통과됐다. 대통령의 공식 사과와 함께 보상금을 지급하겠다는 것이 그 골격. 조지 부시 대통령은 90년부터 희생자들을 수소문해 사과문을 보냈다.

그 후 사과문과 함께 2만달러씩의 보상금을 받은 일본계 미국인은 8만1800명에 달한다. 그런데 보상과정에 잇세이나 니세이보다 더 억울한 사람들이 있었음이 밝혀졌다. 2200여명의 일본계 라티노가 그들인데, 이들은 2차대전 당시 미국이 아닌 남미 13개 국가에서 평화롭게 살던 일본인들이었다. 그런데 미국이 일본인 격리정책을 펴면서 이들까지 강제로 이송해 수용소에 함께 배치한 것이다. 이들은 뉴멕시코 몬태나 아이다호 등지에서 수용소 생활을 하다 전쟁 후 300명을 제외한 전원이 일본이나 남미로 추방됐다.

다섯 명의 일본계 라티노들이 미 정부를 상대로 벌인 기나긴 법정 투쟁 끝에 승소했지만, 수확은 대통령의 사과문과 5000달러의 보상금 전부였다. 그나마 일본계 미국인들이 보상을 다 받은 뒤에 보상금을 지급한다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

                                                             

     **우리가 그동안 너무나 몰랐던 "전쟁영웅"**


"군인으로서 김영옥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알렉산더 대왕 이후에 최고의 군인이다." -존 코백 미 육군 예비역중령
25일 MBC 스페셜이 ‘영웅, 김영욱 대령’을 통해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한 한국계 미국인 전쟁영웅의 삶을 재조명해 관심을 모았다.
방송에 따르면 김영옥(86) 씨는 2차대전에서 이탈리아 최고십자무공훈장, 프랑스 최고훈장, 등의 무공훈장을 받았다.

또한 육군 7사단 31연대 1대대장으로 한국 전쟁에 참전해 불패의 신화를 쌓아 미국 은성, 동성 훈장을 받으며 전설적인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인물이다.
1919년 미국 이민 1세대의 아들로 태어난 김 씨는 1941년 군대에 입대했다.

당시 아시아인은 차별이 심해 미군에 입대할 수 없었지만 2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법이 바뀌어 군 입대가 허용됐다.

김 씨는 이듬해 아시아인으로 유일하게 장교 후보생이 됐다.
그는 초급 장교가 됐지만 인종 차별 때문에 전투에는 참전할 수 없었다.

그런 그에게 기회가 왔다.

바로 일본계 미국인들을 지휘하라는 상부의 명령이 떨어진 것.
당시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은 자국에 살고 있던 일본인들을 소개해 수용소에 감금했다.

그들 중 일부 일본인들을 모아 442연대 100대대를 창설한 것이다.

김 씨는 100대대 2중대에 배치됐다.
기본적인 군사훈련조차 받지 않았던 일본인들을 모아 김 씨는 실전에 버금가는 강도 높은 훈련을 시켰다.

다른 부대원들이 기본 교육에 치중했던 것과 달랐다.

그는 스스로 엄격하게 규정을 지키며 훈련에 임했고 다른 부대원들에게 모범을 보였다.
이 같은 훈련은 실전에 투입되면서 효력을 발휘했다.

1943년 김 씨가 이끄는 부대는 유럽에 투입됐고 이후 탁월한 작전능력을 보이며 승리를 이끌었다.

그는 아시아인 최초로 작전참모가 됐다.
또한 2차대전 당시 연합군이 로마 입성을 앞두고 독일군과 대치하고 있을 때 그는 자원해 독일 진영에 침입 2명의 독일군을 납치했다.

이를 통해 독일군의 병력 배치 상황을 파악해 연합군은 손쉽게 로마에 입성할 수 있었다.

여기다 그가 속한 100연대가 독일 치하의 프랑스 브뤼에르나 비퐁텐 지역을 해방시키기도 했다.

이 지역에선 아직도 그를 영웅으로 기억하는 노인들을 만날 수 있다고 방송은 전했다.

한국 전쟁에서도 김 씨의 전공은 눈부셨다.

2차 대전 후 잠시 군을 떠났던 그는 자신의 조국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원입대했다.

그는 “한국을 위해 싸우고 싶었고 부분적으로 (전쟁에)미국의 책임이 있다고 느꼈다”며 입대 이유를 밝혔다.
참전 후 김 씨는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최전방을 지원, 교착상태였던 전선을 돌파해 60㎞나 북진해 휴전선 형태가 북쪽으로 치솟은 모양으로 만들어지는 데 기여했다.

그는 눈부신 활약으로 아시아계 최초로 백인들을 지휘하는 대대장으로 임명됐다.
그의 공적에 마크 클락크 전 유엔군 총사령관은 “내 휘하에 있던 500만 군인 중에 최고의 군인이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편 김 씨는 한국 전쟁의 참상을 겪은 후 자신이 한국인임을 다시 한번 깨달으며 이후 행보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한국 전쟁 중 전쟁고아들을 후원하는 ‘경천애인사’라는 고아원을 만들어 후원했고, 1963년에서 1965년까지 한국에서 미 군사 고문단으로 근무하면서 한국군의 현대화에 힘썼다.

뿐만 아니라 2000년 노근리 진상조사단의 일원으로 참여해 미군이 저지른 학살에 대한 진상을 밝혀내기도 했다.

이에 대해 그는 “정확한 진상을 알기 어렵지만 미군이 양민학살 했다는 것은 사실이다”며 미군의 치부를 드러내기도 했다.
이와 함께 제대 후에는 미국에서 활동하는 시민 봉사 단체들을 만들어 후원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이름을 한 번도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다.

조용히 자신이 할일을 묵묵히 해 냈다.

때문에 그의 공적을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
이에 대해 한 한국인 이민 3세는 “자신이 한 일을 알리지 않고 댓가를 바라지도 않았다”며 “김영옥 대령의 삶과 업적에 경의를 표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와 같은 삶의 태도에 2차 대전 당시 그의 휘하에 있던 일본인 부대원들과 미국 내 백인주류사회 등 그를 아는 모든 이들이 본보기이자 지도자로서 존경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그의 삶은 소박했다.

그의 방은 꾸며지지 않았고 벽에 걸려 있는 한반도 지도가 유일한 장식품이었다.

안타까운 점은 현재 김 씨가 두 차례 암 수술을 받고 투병중이란 사실.

그는 다시 재수술을 위해 병원을 찾았다고 방송은 밝혔다.
한국에 많이 알려지지 않은 김영옥 씨의 삶에 많은 시청자들은 “그가 한국인임이 자랑스럽다”며 큰 관심을 나타냈다.
아이디가 ‘WHBEAN`이란 시청자는 “그 분이 한국인이란 사실이 정말 자랑스럽다”며 “김영옥 대령의 고귀한 정신이 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되었으면 한다”고 밝혔다.
아이디가 ’JS4019`인 시청자는 “전쟁영웅이면 어딘지 모를 이데올로기적 완고함과 편협함이 느껴져야 하는데 김영옥 대령은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다”며 “고귀한 양심, 이타적 리더쉽 등 민족을 뛰어넘는 보편적 가치를 화려한 수식어 없이 그는 행적으로 몸소 보여주었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많은 시청자들이 그가 걸어온 삶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한편 최근 국내에서는 김영옥 씨의 공적을 기려 무공훈장 최고 등급인 태극무공훈장 서훈이 추진되고 있다.

뛰어난 업적과 미국 사회에서 엄청난 존경을 받고 있지만 그는 미국에서 두 번째 무공훈장을 받는데 그쳤다. 

 


소련파거두 남일이야기


그 유명한 스탈린 그라드 전투, 바르샤바 공방전외 다수의 폴란드 전투,

마지막으로 베를린공방전에 참여한 러시아 적군의 한국인 장교가 있었죠.

남일이라고. 6.25직전에는 남로당 경기도당 위원장인가 하다가. 6.25도

야전사령관으로 참전 대담무쌍 잔인무도 흉폭 한 지휘관으로 유명. 

이 양반이 6.25 종전시 휴전회담때는 북측 휴전회담 부대표로 나왔었죠.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부하들을 엄청 몰아쳤을 만 할 정도로 엄청나게

표독스럽게 생겼더군요. 휴전 후 북한내에서 몰락 소련으로 망명 사망.

 


김영욱 대령 이야기<추가>

 

그 유명한 튀니지 전투, 몬테 카시노 전투, 프랑스 해방시 공방전 벨기에

전투에 참전한 미군 장교로 김영옥 대령이라고 계시죠. 몬테 카시노에서

팔슈름예거에게 당해서 한참 병원신세를 졌다고 하시죠. (그래서 개인적

으로  FJ 얘들을  좋아합니다. 너무 쎈놈들이라. 쎈놈이 좋죠)

60년대-70년대의 월남전시에 한-미간의 군사동맹 밀월관계를 이끌어 낸

실질적 주역이시자 미군들도 인정한 최고로 유능하신 분이시죠.

아깝게도 노근리 사건 재조사과정을 미국정부의 부탁으로 참관하시고 미군

들의 한국인 양민학살사건에 너무 괴로워 하시다 암으로 타계. 평소 존경하고

좋아하던 체제가 실은 전쟁 범죄도 많이 저질렀다는 사실이 받아들이기 힘드

셨던 모양입니다.

 

 

황석영의 손님이라는 책 보면 황해도 쪽에서 기독교도 친남한계 민병대

무지하게 무섭더군요. 질서가 붕괴된 진공상태에서는 과거의 작은 원한

관계가 엄청난 폭력과 보복의 악순환을 불러 오는 관계로.

뭐. 겉으로 깔금한 전쟁영화와는 전혀 다른 실상은 엄청나게 까칠한

눈을 돌리고 싶은 사건들의 연속입죠. 전쟁시의 실상이라는게 그렇

다는 말입죠.


p.s : d-day떄 101공수사단 소속으로 뛴 프랭크 초이 대위도 한국계였음.

출처 : [기타] http://gall.dcinside.com/list.php?id=history&no=296359&page=1&search_pos=-287780&k_type=1000&keyword=jipak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