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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통령과 불멸의 구국혼

鶴山 徐 仁 2009. 7. 26. 17:59

                                            <농민들과 담소하는 박대통령(1967.12)>
 
 
박대통령과 불멸의 구국혼
 
박정희는 생명을 걸고 대한민국의 존엄을 지켰다
                                                                                                                                                 [ 조규석(曺圭石)│전 세계일보 논설실장 ]
 
존엄성을 위한 사투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정신세계를 짧은 언어로 정리하면 어떤 표현이 적절할까. 적어도 나로서는 그 분의 삶과 죽음을 생각할 때마다 떠올리는 소설 구절이 있다. 미국 작가 헤밍웨이의 노벨상 수상 작품인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주인공 산티아고 노인의 독백이다. 물론 이제 역사가 된 전 대통령의 생애를 그것에 빗대어 풀어 보는 것이 외람된 일일 수 있다. 하지만 오늘과 같이 정치 리더십이 실종된 거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다시 얘기하려 하니 소설 속 한 구절의 상징적 함의(含意)가 새삼 절실하게 다가온다.
 
  널리 알려진 대로 소설의 내용은 비교적 단순하다. 늙고 외로운 어부 산티아고는 83일간이나 고기 한 마리 낚지 못하다가 84일째 다시 바다에 나가 자기가 탄 조각배보다도 훨씬 큰 다랑어를 낚는다. 그러나 잠시 후 상어 떼가 몰려들어 사정없이 다랑어를 공격한다. 사흘 낮과 밤 동안 그 상어 떼와 사투를 벌이는 과정에서 노어부는 낮으나 단호한 음성으로 토로한다. “인간은 파멸할지언정 패배할 수는 없다(A man can be destroyed, but not be defeated).”

  
  문학적으로 해석하면 노인의 독백은 의미심장하다. 사람은, 누구나 어떤 가혹한 운명에 직면해도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생명을 걸고라도 맞서 싸워야 한다는 메시지를 작가는 소설을 통해 전하려 했던 것이다. 노어부가 결국에는 상어 떼에게 뜯겨 가시 뼈만 남은 다랑어를 뱃머리에 달고 귀항해서 바닷가 언덕 초막에서 잠들고 다시 '사자의 꿈'을 꿀 수 있었던 것은 인간으로서의 자존을 지켰기 때문임을 독자는 감동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하 '대통령 박정희' 혹은 '박정희'로 표기)의 정치적 궤적은 한마디로 처음부터 끝까지 파멸을 각오한 결단의 연속이었다고 할 수 있다. 위대한 혁명가가 대개 그러하듯이 혁명을 계획하고 드디어 한강을 넘기까지 그 역시 죽음을 각오했을 것이다. 1961년 5월 16일에 결행한 그 도강(渡江)은 루비콘 강을 건널 때의 케이자르처럼 파멸을 각오하지 않고는 내릴 수 없는 결단이었다.
 
리더십의 본질은 구국신념
 
             
                <흑산도 어린이 박정희 대통령 예방(66. 9. 13)>
 
그 결단이 가능 했던 것은 구국(救國) 혹은 애국을 위해서는 다른 길이 없다는 신념에서였을 것이다. 그런 신념에 의한 결단이야말로 그가 집권 기간 동안 일관되게 견지해온 리더십의 본질이라고 볼 수 있다. 혁명의 결단뿐만이 아니다. 집권기간 동안 그는 국가를 보위하기 위해 정치적 파멸까지를 각오한 결단을 했다. 1976년에 일어난 북한의 '도끼 만행'에 대한 그의 단호한 대처는 위기에서 통치권자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일깨우는 역사적 사례의 하나다.
  
  「1976년 8월 18일 오전 10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안에서 전방 시야를 가리는 미루나무의 가지치기를 하던 미군 대위·중위 2명이 북한 인민군이 휘두른 도끼와 방망이로 무참히 살해된 사건이 터졌다. 대한민국은 이내 아수라장이 돼버리면서 박정희의 입만을 주시했다. 박정희 입에서 응징의 결기가 튀어나온다.
“미친개는 몽둥이가 약이다.” 이 한마디가 국민의 공분에 불을 댕겼다. 
  
  위기는 통치권자에겐 국민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중앙정보부 판단기획국장 김영광(전 국회의원)이 박정희에게 건의한다. “이 사건에 대한 언론의 호칭부터 혼선입니다. ‘8·18 판문점 도끼 만행사건’으로 통일하면 어떨까요?” 국민의 공분은 더 폭발했다. 박정희는 미국에 이렇게 말했다.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은 미군이 아니라 우리 한국군이 끝내겠다.” 미국도 깜짝 놀랐다. 박정희의 응징 의지가 저렇게 강할 줄이야! 한국군이 JSA에 들어가 미루나무 가지치기를 시작했다.
 
  바로 그때 대통령 집무실에서 박정희를 목격한 당시 민정수석 박승규의 살아 있는 증언. “박 대통령 집무실에 철모와 군화가 놓여 있었다.” 북한에 대한 응징을 대한민국 국군통수권자인 바로 자신이 진두지휘하겠다는 결의였다. 북한군이 가지치기를 막거나 도발해오면 ‘황해도 사리원’까지 치고 올라가는 계획을 한미 간에 완벽히 세워놓고 실천에 들어갔다. 미국은 F-4, F-111 전폭기 2개 대대 증파, B-52 폭격기 출격, 항공모함 미드웨이호 한반도 해역으로 항진. 
  
  그런데? 김일성이 ‘인민군 최고사령관’의 이름으로 유엔군 사령관에게 사과문을 보낸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에서 사건이 발생한 데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김일성의 완전한 굴복으로 이틀 만에 끝이 났다. 제2의 한국전쟁 발발 위기는 그렇게 막이 내렸다. 이게 대통령인 것이다.」
                                                                                                          (4월 3일자 문화일보의 윤창중 논설위원 칼럼) 
  
  
  필사즉생(必死卽生) 필생즉사(必生卽死)
  
 
그렇다. 그런 결단이 위기 상황에서 대통령이 보여줄 ‘통치’의 요체다. 전쟁을 막기 위해서는 전쟁을 각오해야 한다는, 도발을 응징하기 위해서는 응징의 준비가 철저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결단하고 실행하는 것이 대통령의 기본적인 통치자세여야 한다. 대통령 박정희는 집권기간 동안 흔들림 없이 그런 자세를 견지했다. 박정희의 그와 같은 리더십은 어디서 나왔는가. 그가 숭모했음이 분명한 충무공 이순신의 필사즉생(必死卽生) 필생즉사(必生卽死)의 애국정신이 그의 정치적 생애를 지배한 ‘교훈’이 아니었을까. 
  
  당대에는 강한 비판과 반대에 부닥쳤던 한일회담- 월남 파병 등도 극단적으로는 정치적 파멸까지를 각오한, 바로 ‘필사즉?rsquo;의 결단으로 가능했다고 나는 이해한다. 나라를 살리기 위해 스스로의 정치적 죽음까지를 무릅썼다는 뜻이다. 중화학 공업-고속도로 건설 등도 마찬가지다. 박정희는 그가 대통령으로서 확고한 신념에 의해 정책적 결단으로 추진한 이들 국책사업을 통해 대한민국의 경제적 도약을 위한 기반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그의 시대가 막을 내린 지 30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러 대한민국은 세계 10위권의 경제적 위상을 확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10월 유신은 결단의 정점
 
        
            <삽교호 준공식에 참석한 박대통령 생전의 마지막 모습(1979.10.26)>
 
앞서 예로 든 북한의 그 '도끼 만행'이 발생하기 4년 전에 단행된 10월 유신이야말로 그가 정치 생명의 파멸까지를 각오하고 내린 결단의 정점이라고 나는 해석한다. 10월 유신 이전까지 남한은 북한에게 공업 생산력에서 뒤져 있었다. 따라서 적어도 경제적 능력으로 북한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일정기간 국민의 기본권에 대한 어느 정도의 제약이 불가피하다는 대통령 박정희의 판단은 옳았다. 개인적 견해를 말하고 있는 게 아니다. 한국의 경제 성장 연구자들의 인식뿐 아니라 개발도상국들의 개발전략이 대체로 한국의 산업화 과정의 답습이라는 사실에서 이는 확연히 입증된다.
 
  유신단행 이후 끊임없이 이어졌던 일부 정치 세력과 지식인들의 반 정부 투쟁에 대해 그는 엄혹한 법집행과 함께 사면도 반복했다. 내 짐작이지만 대통령 박정희는 저항-반대세력을 법의 이름으로 ‘단죄’ 하면서도 속으로는 깊이 고뇌했을지 모른다. ‘황성옛터’를 즐겨 불렀고 논두렁이에 앉아 농민들과 스스럼없이 막걸리를 마신 ‘독재자 박정희’의 내면에는 원한과 증오의 정서가 있을 리 없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내편-네편의 개념이 없었던 게 분명하다. 그는 정치적으로 강했지만 인간으로서는 온유했다는 것이 나의 믿음이다. 따라서 박정희는 절대로 유신독재를 영구히 지속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나는 추정하고 있다. 물론 그것을 논증할 자료를 갖고 있는 건 아니다. 그러나 그의 생애를 살펴볼수록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저항을 잠재우고 어느 때인가 나라가 경제-안보 측면에서 안정을 확보했다고 판단되면 그는 유신독재를 끝내지 않았을까-라고 여겨지는 것이다.
 
  ‘유신 독재’ 시절에 그에게 저항했던 원로 지식인들이 지금에 와서 내놓는 이런 저런 술회는 박정희 시대의 역사적 무게를 새삼 일깨운다. 얼마 전 전해들은 얘기가 있다.
반유신 투쟁에 앞장섰던 대표적 지식인 김동길 교수의 회고다. 유신 독재를 ‘격렬하게 비판하며 투쟁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은 어떤 일이 있어도 박정희 통치 아래서는 국가 안위가 흔들리는 사태는 없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박정희 시대는 그랬다. 
  
 
  박정희 향수 불러일으킨 신념과 결단의 리더십
 
  새삼 되돌아보면 좌파 정권 10년은 바로 ‘박정희 지우기’ ‘박정희 폄훼’를 사회 기류로 확산-고착시키기 위해 갖가지 정책적 방책을 동원한 시기였다. 그러나 상황은 반대로 돌아갔다. 오히려 박정희 향수가 그동안에 국민 대부분의 정서가 됐다. 
  
  정권이 보수 우파로 바뀐 지금은 어떤가. 박정희 향수는 다시 국민의 마음속에 지난 10년과는 다른 측면에서 절실해 지고 있다. 적어도 보수 우파진영의 눈에는 ‘실용정부’의 해온 일이 하나같이 ‘무(無)신념-무 결단’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대북정책에서부터 '반(反)대한민국' 세력들의 폭력에 대처하는 자세에 이르기까지 이 정부의 하는 일 대부분이 그렇다. 따라서 지금의 박정희 향수는 현 정권의 이념적 성향 때문이 아니라 신념의 정치-결단의 리더십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는 데서 연유한다. 
  
  핵과 미사일로 무장한 북한 김정일 정권이 선량한 우리 동포를 사살하고 ‘서울은 휴전선에서 50킬로에 불과하다’라는 식으로 전쟁위협을 노골화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김정일의 호사한 식단과 핵-미사일 무장에 자금을 대준 격이나 다름없는 전직 대통령은 아직도 북한 지원을 강조하고, 그 전직 대통령과 똑같은 대북 지원을 지속했던 또 한 명의 전직 대통령은 자살했다.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의 나라 북한은 그의 죽음에 조문을 전하고도 곧바로 핵 실험을 하고 대륙간탄도미사일도 발사할 모양인데 청와대 지하에 설치된 ‘워룸’
에 철모와 군화를 갖추어 놓겠다는 집권층의 각오는 아직 보이지 않고 ‘논의’만이 무성한 형국이다. 그뿐인가. 남한 안에서 ‘반(反) 정부’의 깃발아래 사실은 반 대한민국을 공공연히 획책하는 세력에게도 속수무책인 듯이 비친다.
  
  
  국가 존엄성 고양시킨 불멸의 위대성
 
  얼마 전 인터넷에서 대통령 박정희 일상적 모습을 담은 사진들을 보았다. 정보공개청구 전문 시민단체인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가 입수-공개한 사진들이었다. 19장의 사진 가운데에는 수영복을 입은 모습, 한가롭게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모습, 골프와 배드민턴을 치는 모습 등이 포함돼 있었다. 사진들은, 말하자면 대통령으로서의 면모가 아니라 남편- 아버지 그리고 자연인 그대로의 박정희의 꾸밈없는 모습이다.
 
  5·16을 군사 쿠데타로만 규정하고 10월 유신을 박정희의 영구집권을 위한 헌정파괴라고만 매도하는 사람들의 의식에는 검은 색안경을 쓰고 시청 앞에 서있는 군복차림의 육군소장 모습만이 각인돼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새로 공개된 사진은 벌거벗은 그가 육체적으로는 마르고 왜소한, 그리하여 평범하기 그지없는 한 사람의 남편-아버지였음을 사실적으로 보여 준다.
 
  인간 박정희, 그는 그만큼 소탈했다. 실제로 그는 물질적으로는 거의 아무것도 유족에게 남긴 것이 없다. 그의 시대 이후 권력과 그 주변의 부패를 지겹도록 보아온 이 나라의 국민들이 박정희의 위대성을 새삼 추모하는 이유의 하나일 것이다.
 
  위대한 통치자는, 뛰어난 국가의 최고 리더십은 항상 나라를 위해 생명을 거는 자세이어야 한다는 것을 역사는 일깨운다. 대통령 박정희가 그랬다. 문학적 수사를 빌리면 그의 삶에는 파멸의 위험이 숙명처럼 따라다녔고 그것을 스스로 각오하는 정신으로 일관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결국 그의 최후는 장렬한 파멸이었다. 불굴의 의지로 패배를 거부한 결과였다. 그는, 그렇게 생애를 마감함으로써 그가 통치한 대한민국의 존엄성을 지키고 고양시켰다. 그의 위대성은 역사의 갈피에서 ‘불멸(不滅)'일 것을 확신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필자약력
  신아일보 사회부기자-외신부차장-동경특파원 (1967-1980)
  문화방송 외신부 차장 (1980-1982)
  도서출판 文音社 편집 주간(1982-1984)
  서울올림픽대회조직위원회 홍보 전문위원(1984-1988)
  세계일보 특집기획부장- 국장대우 정치부장-논설위원 -편집국장(직대)- 논설위원실장(1988-2001)
  동남일보(현 경북도민신문) 논설고문(2004-2005)
  뉴스앤뉴스 논설위원 (2004-현재)
 
  저서
  ‘소리의 시대’(1973), 일본인 그들은 누구인가(1982), 大韓國人 안중근(1992), ‘아직도 그곳엔 이태백이 살아 있었네’ (양쯔강 기행: 2000)
 
  수상
  한국기자상(1992·한국기자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