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출 대기업이 외환시장에 달러를 내다 팔면서 가파르게 오르던 환율이 수그러들기 시작한 지난 10일, 서울 롯데호텔에서는 재계단체인 전경련 주최로 국내 주요 그룹 재무담당 임원 회의가 열렸다. 대기업이 달러를 시장에 내놓지 않고 사재기에 나서 환율 상승을 부추겼다는 정부와 여론의 따가운 시선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하지만 모임은 정부와 은행을 성토하는 격앙된 분위기였다고 한다. "금융 부문의 유동성 위기를 기업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정부가 먼저 외환보유고를 풀어야 하는 것 아니냐" "시장에 달러 공급을 끊고, 무역금융 한도를 줄여 기업이 달러 확보에 나설 수밖에 없게 만든 것은 바로 은행이었다"는 등의 발언이 쏟아졌다.
물론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곳은 정부일 것이다. 이번 환율 폭등의 주요인은 외환수급 사정보다 시장 참가자들의 불안한 심리였다는 게 대다수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10여년 전 외환위기를 치러본 정부라면 신속하게 이런 불안 심리를 차단할 대책을 내놓았어야 했다.
은행도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달러 공급과 무역 금융 한도를 줄이면서 국내 기업의 불안감을 한껏 고조시킨 장본인이 바로 은행이었다.
그럼에도 이번 환율 폭등기에 국내 대기업이 보인 행태는 씁쓸한 뒷맛을 남겼다.
우리 외환시장은 구조적으로 취약하다. 외환시장의 규모가 일본의 10분의 1에도 못 미칠 정도로 작아 조그만 충격에도 극단적인 '쏠림' 현상이 나타난다. 외환시장 규모를 늘리려고 해도 원화의 국제적 위상이 떨어지는 탓에 한계가 있다. 원화가 결제통화 역할을 할 수 있어야 달러를 들고 바꾸러 오는 손님이 많아지는데, 사정이 그렇지 못한 것이다. 결국 달러를 시장에 내놓는 '큰손'은 수출 대기업일 수밖에 없다.
이달 초 환율이 갑작스럽게 폭등하면서부터 국내 대기업들은 시장에 내놓는 달러의 규모를 대폭 줄였다. 삼성·현대차·LG 그룹 등 주요 수출 대기업들이 정상적으로 달러를 매각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었지만, 서외환시장의 일일 달러 공급량은 평소 100억~120억 달러에서 50억~60억 달러로 절반이 뚝 줄었다. 일부 대기업은 달러를 매집하는 움직임이 포착되기도 했다. 기업이 환율 폭등의 원인 제공자는 아니었지만, 이런 공급 부족이 환율 상승을 더 부채질한 측면이 적지 않았다.
환율 폭등이 시작됐을 때 국내 주요 그룹들은 "실물 경제 흐름과는 상관없는 비정상적인 불안 심리에 따른 것"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실제로 1달러당 1400~1500원을 정상적인 환율로 보는 그룹은 없었다. 그러나 겉으로 하는 얘기와 달리 상당수 대기업이 뒤로 달러를 쟁이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다.
정부가 각 대기업에 달러 매각을 요청하고 나섰을 때에도 볼멘소리가 나왔다. "달러를 내놓을지 여부는 각 기업의 형편과 시장 논리에 따라 결정할 일인데, 왜 정부가 간섭하느냐"는 것이었다.
일리 있는 말이지만, 시장 메커니즘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시장의 실패(失敗)'가 분명한 상황에서 대기업의 이런 반응은 '나만 살겠다'는 모습으로 비쳐졌다. 시장 논리로만 따진다면 외환위기 당시 국민들이 왜 금 모으기에 나섰겠는가.
재계는 그동안 '반(反)기업정서'를 우리 경제 발전의 걸림돌로 지목해왔다. 그런 측면에서 이번 사태는 대기업이 책임 있는 경제주체로서 성숙한 모습을 보여줄 좋은 기회였다. 대통령의 질책과 여론에 등 떠밀려 달러를 내놓는 모양새가 되면서 그 소중한 기회가 한순간에 날아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