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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라마와 포탈라 궁전(포탈라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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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높은 희말라야 산맥으로 둘러쌓인 티벳 고원, 포탈라 궁은 그 신비롭고 경건한 곳에 있다. 중국 티베트자치구의 주도 라사[拉薩(납살)] 북서쪽의 홍산(紅山) 위에 있는 마르포리(붉은언덕)라는 곳의 경사면을 따라 건설된 포탈라 궁.... 라사시의 근교인 포탈라에 위치하기 때문에 츠에[山頂(산정)] 포탈라궁전이라 통칭하고 있다. 특히 이곳은 지형적으로도 험난한 곳이기도 하지만 중국정부가 의도적으로 봉쇄정책을 편 탓에 21세기 들어 건설된 청장철도가 들어서기 전까지, 지구상에 가장 고립된 지역 중 하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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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탈라라는 이름은 남인도에 있는, 관세음보살이 산다고 하는 보타락(補陀洛;Potalaka)에서 유래하였다. 따라서 포탈라 궁은 관세음보살이 거처하는 곳이 되고, 그곳의 주지승은 관세음보살의 화신(化身)이 되는 것이다.
이 경이로운 사원을 7세기의 손첸 간포왕이 창설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그가 관음(觀音)의 화신으로 존경을 받았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이 궁전은 포탈라라 불리게 되었다. 전설상에는 포탈라 궁전이 신이 만든 것으로 되어있지만, 최초의 포탈라 궁전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현재의 포탈라궁은 제5대의 달라이라마인 로산 갸초가 1645년부터 건립하기 시작하여, 50여 년에 걸쳐 완공한 것이다.
이 대규모 공사를 위해 건설자재 상당부분은 붉은 언덕 뒷편의 땅을 파서 조달하였으며, 그렇게 생긴 대형 웅덩이는 후일 용왕지로 불리우는 인공연못으로 조성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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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5년에 건설을 시작한 이 궁전은 3년 후인 1648년에 바깥쪽의 하얀색 건물인 白宮(백궁)이 완성되었으며, 안쪽의 紅宮(홍궁)은 1692년에야 완공되었다.
이곳에는 하얀벽과 황금색으로 빛나는 지붕외에도, 수백여개의 창문과 그 속에 수십여개의 대집회장, 예배당과 도서관 그리고 몇몇이 달라이 라마 미이라가 안치되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 경이로운 건물은 원래의 목적을 상실한체, 오늘날에는 박물관으로 이용된다고 하며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보호를 받고 있다.
이후 역대의 달라이라마의 왕궁으로서 티벳 종교·정치의 중심기구가 되었다. 사원은 산의 사면(斜面)을 따라 성새(城塞)를 이루고 있으며 13층으로 되어 있고 길이가 400m나 된다. 궁전이면서 동시에 사원 구실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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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 라마(Dalai Lama)
달라이 라마란 특정 인물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우리나라로 말하자면 조계종이나 법화종의 총장과 같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달라이 라마는 라마교라고도 불리는 티베트 불교의 가장 대표적 종파인 켈루크파(黃帽派)의 수장(首長)인 법왕(法王)의 호칭이다.
이 칭호는 주로 중국·몽골·인도 등 외지사람들이 사용하고, 티베트인들 스스로는 걀와린포체(보석 같은 승리자) 또는 이신노르부(여의보주) 등으로 부르며 직접 달라이라마로 부르는 것을 피한다.
달라이라마의 명칭은 1578년 내몽골의 최고실력자 알탄칸이 당시 그곳을 방문한 황모파(황교) 제3대 종정 소남 걈초(1543∼1588)에게 부여한데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 뒤 제1대와 제2대 최고지도자에게도 이 이름을 추증하였다.
이름의 뒷부분 '걈초'에 해당하는 몽골어가 '달라이'로서 '바다'를 뜻하고, '라마'는 티베트어로 '스승'을 뜻한다. 따라서 달라이 라마는 직역하면 바다와 같은 넓고 큰 도량을 가진 스승이 되겠지만, 우리나라어로 굳이 번역하자면 원효대사나 의상대사등이 받았던 칭호인 國師(국사)정도에 해당할 것이다.
제4대 달라이라마인 욘텐갸초(1589∼1616)는 알탄칸의 증손으로, 내몽골지방의 티베트불교화를 촉진시켰다. 제5대 로산갸초는 탁월한 지도자로서, 청해몽골(靑海蒙古) 구시칸의 협력을 얻어 구파불교 세력을 추방하여 티베트 전지역을 통일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1642년 달라이라마 정권이 수립된 후, 티베트 국왕의 신분과 간덴 좌수(座首) 위에 올라앉는 황모파 법왕의 지위를 얻었다. 제5세 달라이 라마의 제자이자 섭정이던 상게 걈초(1653∼1705)는 달라이라마의 국가 원수로서의 정당성을 「문수리근본의궤경(文殊利根本儀軌經)」의 예언을 인용 증언하며, 티베트는 원래 관음보살의 교화의 땅으로 정해져 있고, 달라이라마는 관음보살의 화신이라고 선언하였다.
제6대 찬얀갸초는 연애시를 쓰는 등 경건치 못하여 추방되었으며, 제7대 켈산갸초는 학덕 겸비의 고승으로 나르탄사판 티베트대장경 판각을 시작하였다. 그뒤 종주권 확립을 꾀하는 청나라 조정과 그 주재대신, 티베트인 귀족의 섭정, 종파 내외의 굳은 고집, 외국 열강의 세력다툼 속에서 국정이 불안정하게 됨으로써, 희생되어 일찍 죽는 달라이라마가 속출하였다.
제13대 툽텐갸초는 청나라·영국·러시아의 세력확장 소용돌이 속에 말려들면서도 티베트의 국권보존과 근대화에 부심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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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중국에선 티벳의 분리독립운동이 진행되고 있다. 티벳의 분리독립운동은 어제 오늘일이 아니지만, 현재에는 14대 달라이 라마에 의해서 자치권을 인정받는 소극적인 독립운동을 진행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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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14대 달라이 라마인 텐진갸초(bstan hdsin rgya mtsh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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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살 때 라마교 고승에 의해 티베트 수호신의 현신(現身)으로 발견되어 4살 때 수도 라싸로 옮겨졌다. 5살 때 달라이라마 13세가 사망함에 따라 티베트의 정치·사회·종교상 최고지도자인 달라이라마 14세로 선출되었다.
1950년 중국군이 티베트를 침공하자 마오쩌둥(모택동)·저우언라이(주은래)와 협상하기 위해 베이징을 넘나드는 등 현실적인 정치인으로 변하였다. 그러나 1959년 중국에 대항하는 티베트봉기를 중국정부가 유혈진압하자, 자신의 추종자 8만여 명을 이끌고 인도로 망명, 다람살라에서 티베트망명정부를 세웠다. 그는 그 후 티베트 고유문화 보존에 힘을 쏟는 한편, 티베트의 완전독립을 위해 활동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들어 중국의 현실적 지배권을 인정하고, 외교·군사면을 제외한 자치권회복으로 독립운동 방향을 수정했다. 비폭력평화주의에 입각한 그의 독립운동은 국제사회에서 인정되어 1989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1995년 자신의 승계자이며 라마교 서열 제2위인 판첸라마에 게둔 초에키리마(당시 6세)를 지명하여 후계체제를 갖췄다. 그러자 중국정부는 그를 납치하여 베이징에 감금한 뒤 지아인카인 노르부(9세)를 판첸라마로 임명하는 등 탄압정책을 계속하였다.
그 후 티베트가 세계적인 인권·종교의 탄압지역으로 떠오르자, 중국정부는 1999년 이곳에 철도부설계획을 발표하고 티베트에 대한 봉쇄정책을 포기했음을 선언하고 2006년에 청장철도를 완공해 개통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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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것은 겉으로 보이는 개방정책에 불과하다. 중국의 봉쇄정책에서 개방정책으로 전환한 이유는 외래의 문화를 대량으로 유입시킴으로써, 그들의 고유한 문화를 파괴시키려는 의도가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중국은 봉쇄정책으로 티벳의 독립운동을 탄압할 때에도, 대대적인 이주정책을 강행하여 티벳의 고유문화와 정서의 훼손을 유도한 봐 있다. 하지만 오랜동안의 고립생활과 종교적 신념으로 뭉친 그들의 문화가 좀처럼 약해지지 않자 이러한 개방정책을 표방하고 나서게 된 것이다. 달라이 라마는 종교적 상징이지만, 정치적 지도자로써 역활을 동시에 수행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현재 달라이 라마 14세가 강경분리독립에서 현실적인 자치권획득 방향으로 선회한 것도 중국정부가 가진 폭력성과 고립주의적 성향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 할 수 밖에 없는 강경 분리독립운동에서, 보다 현실적이고 정치적으로 타협가능한 자치권 획득운동으로 선회한 것은 어쩌면 지극히 생명을 사랑하는 궁극적인 인류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여진다. 개인적으로도 그들의 자치권 인정 요구가 받아들여져, 조용하고 평화로운 삶을 추구하는 티벳인들의 소박한 희망이 이루어졌으면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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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야후 블로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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