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에게 아주 대표적인 거짓말은 성적을 속이는 것이다. 대개는 어설프게 했다가 금세 들켜 버리는 귀여운 수준의 것이지만 조금 더 간이 큰 아이들은 시험지나 성적표 일부를 위조하기도 한다. 학력을 위조해 이익을 얻고자 하는 것은 아마 그런 행동이 좀 더 조직화되고 정교해진 것에 다름아닐 것이다. 물론 거짓말을 하는 과정의 복잡성과 당사자의 악의(惡意)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차이가 있겠지만, 그 밑에 내재하는 마음에는 유사한 부분이 있고, 아마도 위에서 이야기한 이유 중 몇 가지가 복합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아마 자신이 가진 것을 사용해서 살아 남고 경쟁에서 이기기엔 세상의 기대 혹은 기준이 턱없이 높다고 느꼈는지도 모른다. 스스로의 목표를 실제 능력치 혹은 조건에 맞춰 조율하기에, 세상의 기준은 마치 부모의 그것처럼 너무 절대적이라고 느낀 것은 아닐까. 혹은 자신이 실제로 갖고 있는 능력에 대해서는 충분히 보상 받지 못한 채, 미처 갖지 못한 어떤 것들 때문에 손해를 보고 있다고 느꼈을 가능성도 있다.
아마도 “멈추고 싶었는데 참으로 오랜 기간을 와버렸다”는 영어강사의 사과 글에서 보듯이, 어쩌면 세상이 등을 돌리게 될까 봐 두려운 마음 때문에 아주 사소한 첫 단추가 악순환을 멈추지 못하게도 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들 마음의 일부에는 “세상이 내 말에 속는지 안 속는지”를 시험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거나 처음에는 없었지만 차츰 거기에 재미를 느꼈을 수도 있다. 그렇게 해서 결국 얻어내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지만 정작 더 우려되는 것은 그런 일련의 사건이 일어난 이후에 드러나는 많은 사람의 반응이다. 병역문제에 대해서는 대체로 엄격한 잣대를 대던 사람들조차 학력 위조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대한 것 같다. 물론 자의든 타의든 자신의 학력이 그 동안 알려져온 것보다 훨씬 낮음을 고백하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일종의 안쓰러움이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피도 눈물도 양심도 없는 사이코패스(psychopath)가 아닌 다음에야, 증명서며 팩스 문서를 위조하며 얼마나 여러 차례 가슴을 졸였을 것인가. ‘성공적으로’ 거짓말을 해놓고 나서도 그것이 발각되어 대중 앞에 끌려나와 돌팔매를 맞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얼마나 오랜 불면과 불안의 나날을 보냈을 것인가.
하지만 적지 않은 사람이 그 사건들을 학력 중심 사회의 부작용, 나아가 학력이 제일이 아니라는 것의 방증이라고 해석하는 것을 보면 좀 걱정이 된다. “20·30대의 20%가 구직 시에 학력 위조의 유혹을 느꼈다”는 조사 결과 역시 그런 설명을 뒷받침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는 것 같다.
부모가 “공부만 잘하면 무엇을 해도 묵인된다”는 메시지를 자녀에게 주는 것이 자녀로 하여금 성적을 속이게 하는 데 일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능력치를 평가하는 최고의 잣대로 학벌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사회 분위기가 그런 거짓말을 하고 싶게 만드는 것이 사실일 것이다. 조금 천천히 단계를 밟아가고, 단기간에 돌진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 에둘러 가서 개인의 또 다른 가능성을 탐색하도록 기다려 줄 수 있는 지혜가 없는 사회가 연예인들로 하여금 병역비리를 저지르도록 압박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바람과 유혹을 실제 행동으로 계획하고 옮기게 하는 것은 순전히 개인(혹은 그 개인의 거짓말을 도와주는 소수)의 열등감, 양심 혹은 생존방식의 문제다.
어쩌면 그들이 거짓말을 하게 만든 것은, 그리고 그 거짓말을 딛고 올라 성공의 계단을 오르도록 부추긴 것은, 어떤 행동이든 “사회가 그렇게 만들었다”고 쉽게 투사하고 합리화하게 만드는 분위기가 아닐까? 그래서 결국 당사자들마저 자신의 거짓말에 대해 “사회 분위기 탓” 혹은 “쉽게 속아 버린 대상들” 탓을 하게 된다면 아마 더 슬플 것 같다. 거짓말을 하는 아이는 고칠 수 있지만, 그것을 묵인하는 부모를 고치기는 훨씬 더 힘들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