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여인들
빨래하는 여인들
조선조에 여자는 관직에 나갈 수 있는 과거를 볼 수 없어 관직에
진출할 길은 전혀 없었다.
조선여인들의 널뛰기
물론 관직에도 내명부라 하여 남편의 지위에 따라
그 부인도 관품이 주어졌다.
전형적인 촌부
하지만 실권이 없는 명예직이며 여성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한
행위라고도 볼 수 있다.
친일파 이완용의
처
조선사회에서
결혼은 개인의 만남이 아니라 집안간의 결합이었으므로 각자의 가문에 대해서는 존중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명성황후 (1890년대)
조선시대 전체에 걸쳐 여성이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보면
곤란하다.
평민의 아낙
조선전기에는 유교적 가치관의 남녀관이 정립되지 않아
여성의 사회, 경제적 지위가 남성과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1890년대 서민의 아낙
재산의 상속도 남녀의 차별 없이 균등하게 이루어졌으며 조상에 대한 제사도
형제간에 돌아가면서 지내는 윤회봉사(輪廻奉祀)가
보편적이었다. 또한 아들이 없어도 딸이나 사위, 외손이 제사를
지낼 수 있어서 대를 잇기 위해 양자를 들일 필요가 없었다.
1890년대 초의 이화학당
학생들
특히 남녀간을 맺어 주는 결혼은 여성의
입장이 더 유리하였다.
결혼식은 신부집에서 치러졌으며 자식을 낳아 한 가정을 이룰
때까지 친정살이를 하는 경우도 많았다. 조선사회의 남녀 관계는
17세기 이후 성리학의 지배이념이 확고하게 성립되면서
반전된다.
1890년대 말 양반 아낙
이후 조선사회는 철저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질서가 강요되어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점점 열악해진다.
조선
기녀(기생)
특히 결혼이 시집살이를 강요하는 형태로 변모하자 여성들의
지위 향상은 물론이고 사회진출은 완전히 차단되게 된다.
1900년대초의 가족
전통사회의 결혼은 임신, 출산,
양육, 가사노동 등을 의미한다.
따라서 결혼에 따른 시댁에 대한 여러 가지의 의무사항은
여성으로 하여금 더 이상 사회활동에 관심을 두지 못하게
하였다.
결혼식의 한장면(1900년대 초)
이러한 사회적 제약이 성립된 후의
조선시대 여성은 일반적으로
방갓을 쓰거나 장옷을 입고 얼굴만 조금 내민 소극적이고
폐쇄적인 모습이다.
양반댁 규수
그렇지만 모든 여성이 집안일에 매몰되지는
않았다.
농민과 하층민의 부녀자들은 얼굴을 가리지도 가릴 것도 없었다.
기녀의 모습
오히려 19세기가 되면 영남의 일부와 관북지방에서는 여자가
장터에 나가 상인과 상대하며 흥정을 벌였다. 특히 관북의 여성은
목축과 밭일을 남자 이상으로 하였다.
양반집 아이
이것은 제주도의 여성이 바다에 나가 일하는
것과 같은
현상으로 삶의 터전이 척박한 곳의 일반적 현상이었다.
왕실 아낙
18세기 이후 사실주의를 바탕으로
민중의 생활상을 그려낸
풍속화를 중심으로 조선 여성들의 생생한 삶의 체취를
느껴볼 수
있다.
윤비(순종비)와 궁중의 여인들
당시사진들은 대부분외국인에
의해 촬영되어
대부분의 자료가 국외에 소장되어
있다.
이화학당의 소풍행렬(1908)
16세기 이후 서양인의 눈에 비친 한국여성을 삽화를 통해
살펴봄으로 우리 여성의 또 다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서민층 가족사진
신식결혼 1910년대
이화학당 졸업생들
1911년
죄 지은 여인의 매질 '행정도첩 (刑政圖帖)'
중에서19세기 말
작품
기방무사 (妓房無事) '혜원풍속도첩 (蕙園風俗圖帖)'
중에서
1805년 이후 작품으로
추정
조선회화:
청금상연 (聽琴賞蓮)'혜원풍속도첩 (蕙園風俗圖帖)'
중에서1805년 이후
작품으로 추정
여인풍속 (女人風俗) 18세기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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