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복음 12장 49절 - 50절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예수님은 세상에 계시는 동안 안타깝고 답답한 일을 많이 당하셨습니다.
우리도 답답한 친구를 보면 속이 답답하고 타는 것을 경험하듯 하나님의 아들께서 우리 인간을 대할 때에 얼마나 답답하였을까를 짐작하게 됩니다.
교회에서도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성령을 받지 않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을 대할 때에 답답함을 느끼고 있는 것과 같이 예수님은 성령 세례를, 불 세례를 받지 못한 우리들을 볼 때에 답답함을 표현한 것이 이 불이 붙었다면 내가 무엇을 더 원하리요 하는 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 여러 가지이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목적이 세상에 불을 던지려고 오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고 이 성령의 불세례를 받으면 더 바랄 것이 없다고까지 말씀하신 주님이십니다.
목사들 간에도 가끔 답답한 목사를 대하게 됩니다. 이 길이 아닌데 다른 길로 가고 있는 목사들이 있습니다. 장차 멸망을 당할 길인데 이를 옳은 줄 알고 잘못 가는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볼 때에 얼마나 답답하였으면 탄식을 하시며 한탄을 하였겠습니까?
창세기 6장 6절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 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하나님께서 나를 볼 때에 답답하고 한탄스러운 사람이 되지 않도록 우리는 노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보실 때에 밤낮 생각하는 것이 죄를 지을 생각,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함을 보시고 하나님이 답답하여 한탄하시지 않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우리에게 율법을 주시며 최소한 이러한 율법만이라도 지키면 하나님이 덜 답답할 것이라는 의미로 구원의 법을 주신 것입니다.
오늘날은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주셨는데 예수를 믿지 않고 그 말을 멸시하며 자기의 생각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볼 때에 하나님은 탄식을 하시며 안타까워하십니다.
도울이라는 사람이 예수를 왜 믿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면서 예수 믿는 사람이 답답하다고 말하였는데 내가 볼 때에는 하나님을 모르는 도울이라는 사람이 더 답답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얼마의 소수의 무리가 하나님의 하신 말씀을 믿고 순종하고 따르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 받으시고 그러한 사람에게 성령을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녀로 삼으신 성도들이 하루에도 열 두 번 이상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 하지 않고 자기의 생각대로 살려고 하니 하나님이 지금 나를 볼 때에 안타깝고 답답한 심정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아버지의 심정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답답함을 풀어 드리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이 불을 던지러 세상에 오셨다고 하였으니 성령을 받고 성령의 불을 번져 가며 활활 타오르게 하면서 살 때에 하나님의 답답함이 조금 풀어지리라 생각합니다.
주님은 세상에 평화를, 화평을 주시러 오신 것이 아니요 도리어 분쟁케 하려고 오셨다고 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성령의 불을 받아 예수를 열심히 뜨겁게 잘 믿는데 아들은 불을 받지 못하여 인간적인 면에서 생활을 할 때에 부자간에 불화가 일어납니다.
광신자라고 말하고 지옥 갈 자라고 서로 말함으로 매우 감정이 상한 불화가 이루어집니다.
어머니와 딸이,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주일이 되면 싸움이 시작됩니다. 분쟁이 일어납니다.
교회에 가자, 일하러 가자, 놀러 가자라는 일로 불화가 흔히 일어납니다. 아내와 남편 간에도 예수 믿는 일로 인하여 불화가 일어납니다.
마음으로 믿으면 된다며 쉬겠다는 아버지와 교회에 꼭 가야 한다는 어머니의 주장이 서로 굽히지 않아 다툼과 분쟁이 일어납니다.
헌금을 많이 한다. 교회에서 미쳐서 산다. 교회 일 밖에 모른다 하면서 가족간에 분쟁이 일어납니다.
이런 분쟁은 불이 있는 자와 불이 없는 자의 분쟁이 항상 계속되는 것입니다. 불을 더 붙이지는 못할지언정 불을 끄는 소방수는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답답함을 조금이나마 풀어 드리는 성도가 되기를 노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타깝고 답답하게 하여 드리는 사람은 되지 말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 드리고 시원하게 하여 드리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안타깝고 답답함의 고통을 우리가 경험하여 알 듯 우리도 하나님을 답답하게 하여 드리지 말고 시원하게 하여 드리는 믿음의 성도, 성령의 불이 훨훨 타오르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1. 우리가 속을 까뒤집어 보일 수 없을 때에 답답합니다.
누명을 썼을 때에는 아주 답답합니다. 나는 절대로 그러지 않았는데 저 사람은 내가 하였다고 우기고 뒤집어씌우고 오해 할 때에 답답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창세기 44장에는 요셉이 베냐민의 곡식 자루 속에 은잔을 숨겨 놓고 사람을 보내어 은잔을 도적질하여 갔다 하며 증거가 나타났다 하며 베냐민을 잡아 갈 때에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여 유다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창 44장 16절 “유다가 가로되 우리가 내 주께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무슨 설명을 하오리이까 어떻게 우리의 정직을 나타내리이까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적발하셨으니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다 내 주의 종이 되겠나이다”
자기의 정직함을 나타내지 못할 때에 사람은 억울함이 최고로 당하게 됩니다. 개중에는 자기의 정직함을 나타내기 위하여 죽음으로 유서를 씀으로 자기의 정직을 말하기도 합니다.
사람인 세상에 살다가 보면 이런 억울함을 많이 당합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모함을 받아 누명을 쓰게 되고 감옥에 갔지만 요셉은 이러한 때에 하나님은 아신다. 라는 마음으로 묵묵히 나아 갈 때에 하나님은 이를 합력 하여 선한 길로 인도하였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 잘하는 일의 하나는 거머리를 잡으면 흙가루를 뿌리고 손바닥으로 찰싹 찰싹 세 번 때리어 정신을 잃게 한 후에 풀줄기를 거머리 입에다 대고 살살 밀어 올리면 거머리를 까뒤집어 집니다. 이것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내 피를 빨아먹은 놈이라 하며 피의 복수를 한 일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서라도 내 속을 뒤집어 보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누명을 쓰고 억울함을 당할 때는 이루 답답함을 말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실 때에 이보다 더 답답해하실 때가 있습니다. 주님은 보다 못하여 이 세상에 오시어 십자가에 죄인의 누명을 쓰시고 죽으시며 까지 이 안타까움을 풀어 드리려고 하신 것입니다.
2. 앞뒤가 콱 막히고 캄캄하고 숨쉬기 힘이 들 때에 답답합니다.
중환자 입원실에 방문하여 보면 얼마나 답답할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고개가 부러져서 나사로 마리를 쇠로 만든 기구에 고정시키고 있는가 하면 온 몸과 코에 호스를 끼고 혈관에는 주사 바늘을 곶아 두고 전기 줄로 온 몸을 기계에 연결하고 누어있는 사람들을 볼 때 그들의 행동의 자유 함이 없는 것을 보며 나까지 답답함을 느끼게 됩니다.
어린아이들은 이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이러한 호스들을 뽑아 버리니 손과 발을 꼭꼭 묶어 두고 있습니다.
사람은 행동의 자유가 없을 때에는 답답하고 안타까운 것입니다.
나도 교통사고를 당하고 얼굴을 수술하고 진통, 마취제의 약기운이 있을 때에는 아픔과 답답함을 몰랐는데 약기운이 떨어지니 답답하고 아픈 것을 참기 어려움을 당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붕대로 내 얼굴을 감은 것을 답답함을 견디다 못해 가위로 잘라 버린 일도 있습니다.
우리가 수술을 하고 묶여 있는 고통보다도 더 큰 고통을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로 인하여 아픔의 고통을 당하고 계십니다.
왜 하나님은 이러한 고통을 당하시고 계실까요?
1. 멸망의 길을 가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그 길을 갈 때
마태 복음 7장 13절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이 세상에서 편하고 좋은 길은 사망으로 가는 고속도로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좋은 곳으로 가는 길은 길도 험하고 좁은 길임으로 찾는 사람도 적고 가기도 힘든 길입니다.
좁은 길은 고독한 길입니다. 좁은 길은 고통의 길입니다. 제약이 많은 길임으로 정신을 차리지 않고 가다가는 넘어지고 떨어지기 쉬운 길임으로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길을 가기를 싫어합니다.
6:25 전쟁이 났을 때에 서울을 철수하면서 한강 인도교를 폭파시켜 끊어 버렸습니다. 이 다리가 끊어 진 줄을 모르고 많은 사람들과 차량이 인도교로 들어갔지만 이미 다리가 끊어진 것을 알고 뒤로 돌이키려 하였지만 뒤에서 밀려오는 인파에 밀려서 알면서도 돌이키지 못하고 한강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한강에 배를 띄우고 한강 다리에 기중기를 매어 놓고 잠수부를 물밑으로 들여보내어 차량을 건져내어 고철로 팔기 위하여 그 당시에 빠진 많은 물건을 건져 올리는 것을 본 일이 있습니다. 트렁크 속에 돈이 가득 찬 가방도 건져냈지만 이미 화폐 개혁이 되어서 쓸데없는 돈이 된 것이요 간혹 패물을 건져 올려 수지를 맞추기도 하였습니다.
넓은 길이 어떤 때는 사망의 길인 줄을 알고 돌이키려 하지만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어 돌이키지 못하고 멸망당하는 일도 있습니다.
예레미야 7장 13절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제 너희가 그 모든 일을 행하였으며 내가 너희에게 말하되 새벽부터 부지런히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였고 너희를 불러도 대답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부지런히 하나님의 종들을 보내어 그 길은 사망의 길이니 가지 말라고 일렀지만 사람들은 그 말을 듣지 않고 계속 고집 부리며 사망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을 볼 때 심히 답답하고 안타까워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멸망을 자초하는 자를 볼 때에 넓은 길을 가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 사망을 모르고 넓은 길로 가는 사람은 우리가 볼 때에도 답답하고 안타깝지만 하나님은 우리보다 천배나 더 답답해하실 것입니다.
2. 거짓 선지자에게 미혹이 되어 죽을 줄도 모르고 따라 갈 때
열왕기 상 22장에는 아합 왕이 거짓 선지자의 말을 듣고 미혹이 되어 내일 죽을 줄도 모르고 참 선지자 미가야의 뺨을 때리며 참 선지자를 박해한 기록이 있습니다.
아합 왕은 거짓 선지자 시드기야와 그 일당 400명의 거짓말을 하는 미혹의 영의 말을 듣고 전쟁에서 승리할 줄로 알고 나갔다가 아합 왕은 화살에 맞아 죽었습니다.
오늘날에도 귀에 좋은 말을 하는 거짓 선지자의 말을 듣고 참 선지자를 박대하는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하나님의 주신 말씀을 하다가 감옥에도 갇히고 고난도 당하였습니다. 거짓 선지자는 아첨하는 예언을 하면서 사람 듣기에 좋고 상식에 맞는 말을 지어내어 합니다.
이러한 말을 따르다가는 결국 나라가 망하는 꼴을 당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듣기 좋은 말을 하는 선지자는 거짓 선지자입니다.
무교회 주의자가 있어서 꼭 교회에 다녀야만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는 다는 듣기 좋은 말을 하는 목사도 있습니다. 십일조를 하지 말고 마음과 정성을 바치면 된다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의 편리한 대로 쉬운 일을 골라서 편리하게 말하는 사람들은 조심하여야 합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참된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참 선지자입니다.
마가 복음 13장 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로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마지막 때에는 미혹하는 사람이 많이 나타나는 미혹의 때입니다.
이단에 미혹되어 진리를 잘못 따르는 사람들도 많은 때입니다.
우리는 거짓 선지자에게 속아서 따르는 멸망을 모르고 속아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볼 때에 우리도 답답하지만 하나님께서도 답답하실 것입니다.
3. 천국과 지옥이 분명히 있는데도 모르고 있을 때
마태 복음 10장 28절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천국과 지옥은 분명히 있습니다. 지옥이란 말은 원래 “게헨나”라는 말로 쓰레기 소각장이란 뜻입니다.
유대 나라에는 도시밖에 쓰레기 소각장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인간쓰레기들을, 죄인을 불태워 벌하는 형벌의 장소입니다.
베드로 후서 3장 7절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이제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하신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과 같은 말씀을 하실 때에 이 지구는 몽땅 불못 속에 던져 지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떨어지기 전에 예수를 믿는 사람은 이 세상을 탈출하는 구원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분명히 있습니다. 이 사실을 나이가 드신 분들은 얼마 안가서 죽음을 맞는 순간 확인이 바로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새로 만드신 신천신지에서 영원한 생명의 복을 누리며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옥에 가고 있는 사람을 볼 때에 내가 답답하여 돈을 써 가면서 전도를 하여 지옥에 제발 가지 말고 예수 믿고 구원을 얻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확신을 갖고 살아가며 지옥에 가는 사람을 볼 때에 답답하거늘 하물며 하나님께서 인간이 지옥이 있는 줄도 모르고 그곳으로 가고 있으니 얼마나 답답하실까? 생각하여야 하겠습니다.
4. 한 시간만 더 참으면 되는 데 참지 못하고 포기 할 때
사울왕은 사무엘을 7일 동안이나 어려운 역경 속에서 참고 기다렸지만 한 시간을 더 참지 못해서 자기가 제사장 이외에는 드릴 수 없는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한 일로 인하여 왕권을 빼앗긴 안타까운 일을 당하였습니다.
사울왕은 168시간을 잘 기다렸지만 마지막 한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여 심히 안타까운 일을 당한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한 시간을 더 참지 못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는 자가 많이 있습니다.
교회에 충성 봉사하던 자가 어찌 잘못되어 하나님이 계시다면 이럴 수가 있는가 하면서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 시간만 더 말을 더 참았으면 구원을 받을 것인데 남을 판단하고 비방하고 저주하다가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한 시간만 더 기도하면 성령을 받을 터인데 한 시간을 더 하지 못함으로 성령을 받지 못하는 사람을 볼 때에 안타깝고 답답합니다.
한 시간을 빠져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마지막 남은 한 시간이 가장 힘이 드는 것입니다. 마귀와 결판이 나는 싸움의 한 시간이 마지막 한 시간입니다.
마귀에게 한 시간을 빼앗겨 성령을 받지 못하고 은혜에 참례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일이 우리 주위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힘이 들고 어렵습니까? 이제 한 시간만 더 참으시기를 바랍니다.
나에게 한 시간은 가장 중요한 결단이 나는 때입니다.
한 시간 후에 화를 내자. 한 시간 후에 다시 생각하지 하는 마음으로 모든 일을 한 시간을 미루고 한 시간을 더 참는 지혜를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한 시간 때문에 10년을 헛되게, 일생의 삶을 헛되게 하는 어리석고 답답한 자가 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5. 축복의 길을 외면하고 저주의 길로 달려 갈 때
신명기 16장 26절 -28절 “내가 오늘날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좇으면 저주를 받으리라”
우리의 앞에는 언제나 두 길이 놓여 있습니다. 복을 받는 길과 저주를 받는 길을 날마다 시간마다 선택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사람은 모두 복을 받아 잘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선택은 저주의 길을 선택하고 마음은 복 받기를 원하니 모순이 있는 것입니다. 많은 선지자들이 축복의 길과 저주의 길을 밝히 보이며 축복의 길을 선택하라고 외쳤습니다.
전도서 10장 2절 “지혜 자의 마음은 오른편에 있고 우마 자의 마음은 왼편에 있느니라”
오른편은 구원의 길이요 왼편은 사망의 길, 저주의 길입니다.
오른편 강도는 구원을 받았고 왼편 강도는 예수님을 욕하다가 죽었습니다.
오른편에 있는 사람은 양이요 왼편에 있는 사람은 염소입니다.
우리는 항상 지혜로운 자가 되어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어 153의 고기를 잡되 그물이 찢어지지 않는 축복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성도는 목사의 눈에 뜨이는 성도가 되어야 목사는 그 성도를 위하여 더 간절한 축복의 기도를 하게 됩니다. 주의 종의 마음에 합치어 주위 종이 축복의 기도를 항상 할 수 있도록 하는 우리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병 고침의 역사도 오른편 길을 택하여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 할 때에 병 고침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정리:
옛말에 선생의 똥은 개도 안 먹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얼마나 제자를 가르치고 잘되게 하기 위하여 속을 태웠으면 선생의 똥은 써서 개도 먹지 않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오늘날은 목회자의 똥은 개도 안 먹을 것 같습니다. 얼마나 성도들이 목회자의 속을 태우는지 말하기가 부끄럽습니다.
사람을 안타깝고 답답하게 하는 것은 그래도 괜찮은 편입니다.
우리 하나님을 답답하고 안타깝게 하지 말고 하나님의 속을 태우는 우리가 되지 않도록 항상 노력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1. 돈이 제일이다 하고 돈을 하나님보다 낫게 여기고 살 때
2. 교회의 직분 자이다 하면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서 살 때
3. 예배 시간에 딴 생각하고 건성으로 예배를 드릴 때
4. 내 생각을 항상 하나님 보다 앞세울 때
5. 기도한다 하면서 잠을 잘 때
6.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하지 못할 때
나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하나님이 내게 대하여 안타깝고 답답한 것이 무엇 인가하고 물으며 기도하니 알려 주었습니다.
이 여섯 가지가 하나님은 내게 대하여 안타깝고 답답하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여러분도 각기 나와 다르게 하나님 보시기에 안타깝고 답답하게 하실 일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 하나님을 답답하게 하였던 일을 모드 청산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여 드리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의 마음을 답답하게, 안타깝게 하고서는 도무지 복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명심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고 시원하게 하여 드림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아 누리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순종함으로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며 선한 열매를 많이 맺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던져 주시는 불을 받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시원하게 하여 드릴 수가 있습니다.
항상 하나님을 기쁘시게 시원하시게 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도록 믿음으로 힘쓰면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Faith - Hymn'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접붙임 (0) | 2005.12.19 |
---|---|
[스크랩] 바꾸어 주시는 하나님 (0) | 2005.12.19 |
[스크랩] 주목 (0) | 2005.12.19 |
[스크랩] 기독교관련 동영상자료 종합 모음집 (0) | 2005.12.19 |
[스크랩] 주제별 말씀 요약 100선 (0) | 2005.12.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