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想像나래 마당

여러분들의 [잊을 수 없는 여행]기

鶴山 徐 仁 2005. 8. 16. 08:21
나를 찾아 떠난 히말라야에서 나는 自由를 만났다
 
權寧珉, 梁仁子, 安京煥, 정혜정, 李根厚,
崔潤姬, 표민수, 韓晶惠, 申鉉林, 智一煥

진행·정리 : 李相姬 월간조선 조사요원〈gwiwon27@ chosun.com〉

 權寧珉(일본 교토), 梁仁子(러시아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安京煥(페루 쿠스코), 정혜정(미국 뉴욕), 李根厚(네팔 히말라야), 崔潤姬(전남 완도군 보길도), 표민수(몰디브), 韓晶惠(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申鉉林(서해안 일주), 智一煥(네덜란드 파르쉐펠트)
 
 
  [잊을 수 없는 여행] 일본 교토
 
  가모카와(鴨川)에서 鄭芝溶을 생각하며
 
  흘러가는 물 속으로 손을 담가 보면서 나는 정지용이 그랬던 것처럼 물 아래 찬 모래를 손으로 가만히 쥐어 보기도 했어. 찬 모래알의 감각이 손끝을 타고 내 가슴까지 와 닿았지.
 
  權寧珉 서울大 교수(한국문학)
  1948년 충남 보령 출생. 홍성高·서울大 국문학과, 同 대학원 졸업. 월간 「문학사상」 편집주간, 美 하버드大 하버드엔칭연구소 초빙교수, 한국방송위원회 심의위원 역임. 저서 「한국 현대문학사」, 「태백산맥 다시 읽기」 등.
 
 
  간절한 그리움을 담은 차가운 모래
 
  당신, 이번 여름 일본 여행길에 교토(京都)까지 들른다지? 교토에 가거든 꼭 한번 가모카와(鴨川) 강변을 걸어봐. 그 강물 위로 흐르던 서늘한 바람이 지금도 내 가슴에 와 닿는 듯해. 나이 육십 줄에 들어서면서도 이 감성의 유치함을 어쩌지 못하는 나를 크게 비웃지는 않겠지.
 
  교토의 가모카와는 그리 큰 강이 아니지. 무슨 대단한 情景(정경)을 자랑하는 곳도 물론 아니야. 일본 문화의 중심지인 교토의 도심을 가로질러 흐르는 작은 강줄기에 불과하니까. 그렇지만 강물이라는 것은 어디서든지 흘러간 세월이 묻어 나는 법. 가모카와의 강둑은 너무도 가지런하게 다듬어져 있지만 그 위를 거닐게 되면 당신도 내가 왜 이런 부질없는 일에 시간을 쪼개 보라고 하는지 알 수 있을 거야.
 
  당신도 그렇고 우리 모두가 사랑하는 시인 鄭芝溶(정지용), 그가 바로 교토에서 대학을 다녔고 문학의 꿈을 키웠지. 鄭芝溶이 어찌하기 어려운 詩的(시적) 열정을 스스로 억누르면서 혼자 걸었던 곳이 바로 이 가모카와 강변이었어. 그의 詩에서 볼 수 있는 고향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 그리고 그 정서의 절제라는 것이 바로 여기서 비롯되었지. 그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일이지. 나는 그것을 「가모카와의 詩學(시학)」이라고 부르고 싶어. 당신도 그 강변을 걸으면서 교토의 가라앉은 듯한 분위기를 한번 벗어나 보라는 거야.
 
  당신도 알다시피 鄭芝溶이 노래했던 「교토 가모카와」에는 식민지 청년 유학생이 느꼈던 외로움과 고달픔이 함께 깃들여 있지. 내가 교토에 들를 때마다 가모카와 강변을 찾은 것은 순전히 鄭芝溶 때문이었어. 이 絶唱(절창)의 詩人은 그가 다녔던 도시샤(同志社) 대학의 캠퍼스를 빠져나와 교토 시내를 외둘러 흐르는 이 작은 강변에 서서 시름을 달래곤 했지.
 
  〈鴨川 十里 벌에/해는 저물어……저물어……/날이 날마다 님 보내기/목이 자졌다……여울 물소리……/찬 모래알 쥐어짜는 찬 사람의 마음,/쥐어짜라. 바수어라. 시원치도 않아라./역구풀 우거진 보금자리/뜸부기 홀어멈 울음 울고,/제비 한 쌍 떴다,
 
  비맞이 춤을 추어./수박 냄새 품어오는 저녁 물바람./오랑쥬 껍질 씹는 젊은 나그네의 시름./鴨川 十里 벌에/해가 저물어……저물어……〉
 
  이 작품은 鄭芝溶이 도시샤 대학 시절 1927년에 발표한 것. 원래 제목이 「교토 가모카와」였는데, 시집에 수록하면서 「압천」으로 바꾸었어. 대학 시절을 회상하고 있는 鄭芝溶의 수필을 보면, 「나는 이 냇가에서 거닐고 앉고 부질없이 돌팔매질하고 달도 보고 생각도 하고 하기 시험에 몰리어 노트를 들고 나와 누워서 보기도 하였다. 폭이 상당히 넓은 내가 되어서 다리가 여간 길지 않은 것이었다. 봄 가을 비오는 날 이 다리를 굽 높은 나막신에 지우산을 받고 거니는 정취란 업수히 여길 것이 아니었다」라고 적혀 있어.
 
  내가 처음 교토 여행을 한 것이 1980년대 말이었던가. 나를 이 강변으로 안내한 유학생은 내가 왜 이 도시의 강변을 찾는지 이해하지 못하였지. 나는 자세한 설명 대신에 鄭芝溶이 노래했던 「교토 가모카와」를 큰 소리로 외웠어. 그제사 그 유학생은 고개를 끄덕였지. 그 후 교토에 들를 때마다 나는 가모카와 강변을 둘러보곤 하였어. 가모카와라는 말 그대로 물가 어딘가에 오리 떼라도 있을 법하지만, 이 강가에는 군데군데 갈대가 키만큼 자라나 있고, 하얀 황새 두어 마리가 한가롭게 먹이를 찾고 있을 뿐이었어.
 
 
  식민지 한국을 압도하는 日本 문화의 거점에 선 초라한 유학생
 
  저녁나절 가모카와 강변에 나가 보면, 잘 가꾸어 놓은 공원과 둔덕 위로 규모 있게 늘어선 음식점 간판의 불빛들이 제법 운치를 더해 주지. 반듯하게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이름을 기억하기 어렵지만, 강폭이 다리 위에서는 생각보다 넓게 느껴지기도 했어. 강 아래 여기저기 드러나 있는 모래톱과 자갈밭. 강둑을 내려가 금방 물에 씻긴 듯 깨끗한 자갈돌을 밟으면 시원한 강바람이 물줄기를 따라 불어왔지. 흘러가는 물 속으로 손을 담가 보면서 나는 鄭芝溶이 그랬던 것처럼 물 아래 찬 모래를 손으로 가만히 쥐어보기도 했어. 찬 모래알의 감각이 손끝을 타고 내 가슴까지 와 닿았지. 鄭芝溶은 왜 이 강변을 자주 거닐었던 것인가? 얼마나 길게 저 강물을 한숨처럼 흘러 보냈던 것인가?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식민지 시대를 압도했던 일본 문화의 거점에 서 있던 초라한 유학생을 떠올리곤 했어.
 
  당신은 내가 말한 「가모카와의 詩學」이라는 말이 좀 과장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교토 가모카와는 鄭芝溶이 고국에 두고 온 고향에 대응하는 또 하나의 詩的 공간, 식민지 지배 세력인 일본의 문화가 前근대와 근대를 오가며 펼쳐지는 곳이지. 여기서 鄭芝溶은 이 모든 것을 끌어안으면서 동시에 초극하고자 하는 詩的 의지를 키웠지. 그는 휘황한 근대의 불빛에 열광하지도 않았고, 前근대의 高踏(고답)에 묶여 있지도 않았어. 그렇기 때문에 鄭芝溶은 가모카와의 강바닥 찬 모래보다 자신이 더 차가워져야 하는 법을 배운 셈이지. 그것을 우리는 절제된 정서라고 읽고 있는 것이 아닌가?
 
  교토 가모카와에 불어오는 바람은 제법 넓은 강폭으로 드리우며 여전히 서늘할 거야. 역구풀 우거진 강변에서 오렌지 껍질을 씹었던 鄭芝溶처럼 당신은 어떤 생각을 씹을 것인가? 물바람은 수박 내음 대신에 야키도리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고기 굽는 냄새를 실어올지 몰라. 어느 집인가 강변 선술집에서 흘러나오는 것이겠지만. 당신이 한 번 그곳의 첫 저녁손님이 되어봄직도 해. 거기 가서는 鄭芝溶의 「교토 가모카와」를 소리 내어 불러도 좋을 듯.●
 
 
  [여행메모] 이것만은 꼭!
  도시샤 대학에 갔다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노래했던 윤동주 詩人의 詩碑(시비)를 만나 보자. 교토시내는 고풍스럽고 유명 관광지가 많다. 지하철보다는 오밀조밀 편리한 노선으로 준비된 버스를 이용하자. 1일 승차권이 500엔! 관광객들의 호주머니가 즐겁기만 하다. 일본 관광청 한국사무소 http://www.jnto.go.jp
 
 
 

 
  [잊을 수 없는 여행] 러시아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그 남자는 닥터 지바고가 아니었다
 
  아름다운 기차였다. 밤새도록 어쩌면 그리도 눈이 휘몰아치는지… 그 눈은 사람을 절대 고요히 있게 내버려 두는 눈이 아니었다.
 
  梁仁子 작사가
  1945년 함북 나진 출생. 서라벌 예술大 문예창작과 졸업, 경희大 영문과 편입. 단편소설「외항선」으로 문단 데뷔. 노랫말 「그 겨울의 찻집」, 「킬리만자로의 표범」 등 200여 편. 저서 「돌아온 미소」, 「비오는 날의 군것질」 등.
 
 
  내 젊음의 宗敎, 러시아 文學
 
  아는 이의 아들이 러시아에 유학 가 러시아語를 공부한다고 한다. 「왜 러시아語를 공부하느냐」고 물었더니 대답이 걸작이다.
 
  『러시아語로 러시아 문학작품을 읽고 싶어서요』
 
  나의 20代를 돌이켜 보면 이 친구의 대답은 「죽음」이다.
 
  1991년, 남편이 모스크바로 음악녹음을 하러 간다고 했을 때 나는 심장이 터지는 것 같았다. 도스토예프스키를 배우던 대학 시절 우리를 사로잡았던 문학적 종교가 러시아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성지에 간다고 하지 않는가. 「야호, 여보 사랑해!」
 
  철의 장막이 걷혔다 해도 당시에는 러시아에 대한 정보가 미비해 과연 그곳에 가서 원하는 뮤지션들을 만나 녹음을 할 수 있는지 여러 가지가 불투명해 일단 답사여행부터 떠나기로 했다.
 
  마침내 모스크바! 6월인데 뭐가 이리도 더우냐. 어찌나 더운지 문학이고 나발이고 배신감만 들었다. 그때까지 읽은 러시아 문학 작품 중에 이렇게 덥다는 얘기는 없었다. 그러나 음악 파트 쪽에선 일이 잘 풀려 그해 10월 녹음 스케줄이 잡혔다.
 
  1991년 10월23일, 잊혀지지도 않는다. 모스크바의 공항에 내리니 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아이쿠, 이건 또 뭐야. 늦가을 옷차림으로 왔는데 10월에 웬 눈이야? 그것도 펑펑」
 
  그러나 무심결에 내렸다가 추위에 화들짝하긴 했지만 다시 한 번 바라보니 「아, 그래 이게 모스크바구나…」. 그제서야 명작의 감동이 물결쳐 온다.
 
  아름다운 장소나 멋진 풍경을 보면 꼭 이런 말을 하는 이가 있다.
 
  『너무 아름다워서 여기 있으면 글은 저절로 써지겠어요』
 
  「백날 있어 봐라. 글이 저절로 써지나」 아름답다는 표현을 그렇게 한 것뿐인데, 글이라는 말만 나오면 북북 이를 가는 과민현상을 보인다. 그런 내가 펑펑 눈이 쏟아지는 모스크바를 보고 있자니 이런 생각이 절로 든다.
 
  「닥터 지바고는 저절로 써졌겠다」
 
  가수 이동원씨의 음반작업은 한 달 정도 걸렸다.
 
  당시 환율이 1달러에 22루블이었는데 지폐가 거의 걸레 수준인데다 10달러쯤 바꾸면 부피가 커져 종이에 둘둘 말아서 갖고 다녔는데 이 돈을 쓸 데가 없는 것이다.
 
  녹음장소가 「러시아 국립라디오 스튜디오」였는데 외진 곳이어서 그런지 커피 한 잔 마실 데도 없고, 빵 한 조각 살 데도 없었다.
 
 
  「닥터 지바고」는 저절로 써졌겠다
 
  그 무렵 「맥도날드」가 막 입성했었다. 그러나 그건 두 가지 의미에서 「그림」이었다.
 
  맥도날드 햄버거를 사려는 사람들의 길고 긴 줄을 보면 그 뒤에 가서 설 엄두가 안 나 「그림」이고, 눈 내리는 하얀 천지에 긴 줄 하나가 그어져 있는 게 또 「그림」이었다.
 
  그러다 아르바트 거리에 나가게 되었다. 비로소 카페와 조그만 상점들이 보이고 파리의 몽마르트르 언덕처럼 거리의 화가들도 보였다.
 
  오랫동안 돈 쓰는 데 굶주렸던(?) 우리들은 카페에 가서 차도 마시고 상점에 가서 이것저것 먹을 걸 샀는데, 그때 우리는 「걸레 뭉치」의 부피를 덜기 위해 서로 자기 돈을 쓰려고 야단법석을 쳤다. 그리고 먹을 걸 사긴 했지만 도저히 먹을 엄두가 안 나 전부 눈만 껌벅거리고 있었다. 낯선 음식에 늘 호기심이 강하고 도전하기를 즐기는 남편도 이번만큼은 엄두를 내지 못했다.
 
  날마다 녹음실에 가야 할 이유가 딱히 없는 나는 게스트 하우스에서 눈 오는 창 밖만 내다보다 졸리면 자고, 자다가 깨면 다시 창 밖을 내다보고 했다. 눈이 오니까 날씨는 종일 어둡고, 어두우니까 우울하고, 또 이미 너무 많이 자서 잠은 안 오고… 내 생애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었다.
 
  이동원씨가 러시아 민요를 갖고 와서 우리말 가사를 붙여 달라고 하면 그날로 달콤 새콤 완성이 되는 것이었다. 이 가사가 필요하다고 하면 이 가사, 저 가사가 필요하다고 하면 저 가사…. 글 몇 자 쓰면서 도스토예프스키보다 더 몸부림을 쳤던 내가 원하기만 하면 척척 써 대는 것이었다.
 
  러시아의 겨울이 작가를 만든다더니, 잘 하면 「닥터 지바고」 속편도 쓰겠다.
 
  11월7일은 혁명기념일이었다. 일요일에도 일하던 러시아 팀이 이날은 세상 없어도쉬어야 한다고 했다. 쉬는 김에 며칠 푹 쉬라고 하고 우리는 레닌그라드로 떠났다. 바로 옆이라고 해서 떠났는데 기차는 밤새도록 달렸다.
 
  영화 「오리엔트 특급열차 살인사건」에 나오는 그런 아름다운 기차였다. 밤새도록 어쩌면 그리도 눈이 휘몰아치는지… 그 눈은 사람을 절대 고요히 있게 내버려 두는 눈이 아니었다.
 
  『여보, 안 되겠어. 우리 지바고 버전으로 가자. 우리는 지금 이룰 수 없는 사랑에 괴로워하면서 이 기차를 탔거든. 말하자면 작별 여행이지. 지바고는 잠든 라라 곁에서 편지를 써. 너는 내 운명의 전부였다…』
 
  어디선가 발라라이카 선율이 들리는 듯도 한 찰나 그 선율을 탁 깨는 소리.
 
  『어제 녹음 한 거 장부장이 잘 챙겼나 모르겠다. 어이, 동원이 어디 갔어?』
 
 
  아름다운 항구의 「무너진 순정」
 
  새벽에 도착한 레닌그라드는 유럽 문화를 받아들이는 관문답게 아름다운 항구도시였다.
 
  호텔 밖으로는 네바江이 흐르고 호텔 로비엔 팔등신 미인들이 북적댄다. 늦은 밤 무슨 일인가로 밖에 나왔던 나는 아무도 없는 7층 계단에 혼자 앉아 있는 이영갑씨를 보았다. 이영갑씨는 이동원씨의 친구며 사진작가다.
 
  『영갑씨 여기서 뭐해?』
 
  『전화가 자꾸 와서 잘 수가 없어요』
 
  『레닌그라드에 아는 사람이 어딨어서 전화가 와?』 그러다 집히는 게 있었다.
 
  『얼마면 된대?』
 
  『100달러요』
 
  『오라 그래. 영갑씨, 내가 100달러 줄게. 아까 보니까 다 미인이더라』
 
  『100달러면 필름이 몇 통인데요. 그리고 나한테 전화한 사람은 로비에서 왔다 갔다 하던 그 여자들이 아니구요, 카운터에서 전화 연결해 주던 이 호텔 직원이에요』
 
  여학생처럼 앳된 그 소녀가 은밀히 그러더란다. 『나도 가능해요…』라고.
 
  그리고 이 총각은 러시아 소녀의 무너지는 순정을 우울해했다. 레닌그라드를 옛 이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바꾸자는 길거리 서명운동에 사인해 주고 우리는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그리고 내가 한이라도 남을까 봐 그랬는지 모스크바 근교 자작나무 숲에 가서 영갑씨는 원없이 내 사진을 찍어 주었다.
 
  그로부터 14년이 흘렀다. 모스크바는 얼마만큼 변했는지 모르지만 그때 함께 갔던 일행 중에 영갑씨는 이 세상에 없다. 여러 여행지 중에서 러시아가 유독 「생각키우는」 것은 사람에 의한 추억 때문이다.
 
  「생각키운다」고 해서 다시 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이제는 「닥터 지바고」에도 내 가슴이 뛰지 않기 때문이다.●
 
 
  [여행메모] 이것만은 꼭!
  이제는 옛 이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되찾은 레닌그라드 방문은 러시아 여행의 꽃이다. 한여름 내내 해가 지지 않는 白夜(백야)로 유명한 이 도시를 두고 한 작가는 『이 도시를 만나게 된 것은 하나의 기적과 같다』고 했다. 6, 7월이면 백야를 볼 수 있다. 모스크바까지는 직항편이 있다. 상트페테부르크는 모스크바에서 다시 국내선을 타고 이동하면 한 시간 정도 걸린다.
 
 
 

 
  [잊을 수 없는 여행] 페루 쿠스코
 
  가슴에 남은 마리아의 눈빛
 
  산의 높이는 눈이 아니라 머리와 가슴으로 재는 것이다. 「쿠스코」, 우주의 배꼽임을 믿었던 잉카제국의 옛 수도는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 높이를 느낄 수 있다.
 
  安京煥 서울大 法大 교수
  1948년 경남 밀양 출생. 서울大 법대 졸업. 美 펜실베이니아 대학원 석사, 美 산타클라라 대학원 박사. 美 캘리포니아州 변호사, 영국 런던 정경대, 美 남일리노이주립大 방문교수. 저서 「미국법의 이론적 조명」, 「미국법 입문」, 「법과 문학사이」, 「이카루스의 날개로 태양을 향해 날다」 등.
 
 
  客愁散錄(객수산록)
 
  (1) 가슴에 쌓인 여인의 눈동자
 
  『어차피 갖지 못할 여인이라면 눈동자만이라도 가슴에 담아 두자』
 
  여인의 신체 중에 절대로 애무할 수 없는 부위가 있다. 눈이다. 작가 조성기는 언젠가 「눈의 아니마」를 쓴 적이 있다. 평생토록 내 가슴에 차곡차곡 담긴 여인의 눈동자는 도합 얼마나 될까? 아주 젊지는 않았던 시절의 일이다. 갑자기 숨이 막힐 듯이 아름다운 눈동자의 여인을 만났다. 주변 공기도 동요했다.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다. 그리고선 그녀의 고향行 기차를 탔다. 뒤통수에 아침 햇살처럼 간지러운 눈의 애무를 느꼈다. 그런 눈동자의 여인을 낳은 땅이라면 내 수줍은 객수 한 줌 흘려도 무방하리라.
 
  (2) 희박한 공기에 쓰러진 발레리노
 
  불쑥 老眼(노안)이 찾아온 지 여러 해이다. 한동안 충격이었다. 그러나 이내 하늘의 뜻을 알 것 같았다. 「이제는 남의 글을 너무 많이 읽지 말라, 그래도 불안하면 큰 글자만 읽으라」는 뜻일 것이다. 「글 대신 산천과 시장을 보라」 산천은 쭈그러든 肺囊(폐낭)을 키우고, 치열한 삶의 시장은 비실거리는 두 다리에 힘을 솟구치게 만든다.
 
  산의 높이는 눈이 아니라 머리와 가슴으로 재는 것이다. 「쿠스코」, 우주의 배꼽임을 믿었던 잉카제국의 옛 수도는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 높이를 느낄 수 있다. 해발 3400m. 공기의 무게가 다르다. 그 외진 고원에서 뜻밖에 「키예프 발레단」을 만났다.
 
  「러시아 제2의 발레단」이라는 수식어를 벗고 「우크라이나 국립발레단」으로 개명했다. 그래서 그런지 더욱 애잔한 슬픔이 무희들의 눈동자에 스치고 긴 다리가 시려 보인다. 초라하기 짝이 없는 대학 강당에 오케스트라는커녕 초라한 피아노 반주조차 없이 확성기에 실어 내보내는 카세트테이프 음악이다. 애써 맞춘 레퍼토리도 독무와 페어댄싱뿐, 모두 합쳐 네 쌍이다. 푸르고 깊은 눈의 프리마돈나를 하늘로 받쳐 올리며 뛰던 남자 무용수는 유난히 헐떡인다. 뭔가 위태롭고 수상하다. 마지막 무대 인사에서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짐작한 대로 혼절했다는 것이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뛰더니만….
 
  (3) 맘보 박
 
  잠시나마 「맘보 박」을 만난 것은 실로 행운이다. 박만복 선생, 그의 남다른 나라 걱정에 새삼 가슴이 서늘하다. 1988년 복잡한 국내 정치와 국제 기류 속에 서울올림픽이 열렸다. 한 게임도 현장에서 보지 못했지만 그의 이야기만은 기억이 생생하다. 페루 「배구의 아버지」, 금메달 열 개 무게의 은메달을 선사한 그는 이 나라의 영웅이다. 맘보 박이 절정을 이룬 시절의 에피소드다. 그의 집에 도둑이 멋모르고 들었는데, 도둑은 경찰에 끌려 가기 전에 동네사람들에게 뭇매를 맞았다고 한다. 아무리 비천한 도둑놈이라도 어르신을 모르다니….
 
  「후지모리」와 「맘보 박」은 잉카 후예들에게는 더욱 핏줄이 당기는 존재다. 인구조사에서 인종요소를 제거하였기에 현재의 구성비는 불명, 1940년 통계가 최근 자료다. 인디언 46%, 유럽계 53%. 주변부 인물들은 모두 후지모리가 그립다고 했다. 가진 자들은 강력한 질서가 그립다고 한다. 1990년 「바꿔(gambio)」 구호 덕분에 대통령이 된 동양인 후지모리는 1992년 4월5일 이른바 「제도 쿠데타」를 단행한다. 의회를 해산하고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행정국가를 운영한다. 반군·테러단을 무차별 진압하고 마약과의 전쟁을 늦추지 않았다. 결과는 대규모의 인권유린이다. 그의 통치 방식에 의문을 지닌 많은 사람들도 부패 척결의 공로만은 인정한다. 망명 중의 그가 되돌아와서 대통령이 될 수도 있다고 한다.
 
  (4) 또 하나의 마리아
 
  여행 에세이집 「배를 타고 아바나를 지날 때」(2001)로 대중 앞에 등장한 이성형의 勞作(노작)들이 「라틴 아메리카」라는 먼 땅을 한껏 끌어다 놓았다. 이제는 면피 수준의 단편지식이라도 챙기지 않을 수 없다.
 
  『사랑하는 아이 지나타여, 내 함께 가리니 내게로 오라. 꿈꾸는 나라로』
 
  그 「지나타」가 중국계 밤의 여인임을 몰라도 좋다. 어둠에 잠긴 그녀의 눈동자만 기억한다면…. 대륙 어디를 가도 마리아 천지다. 아직도 눈동자가 내 가슴에 새겨져 있는 대륙의 마리아만도 수십 명이다.
 
  연신 서투른 입김으로 페루의 아리랑 「엘 콘도 파사」를 잠포냐로 들려 주던 소녀의 이름도 마리아다. 그녀는 분명 「몽고반점」이 있을 것이다. 한강의 환몽적 소설 구절과 함께 가슴에 왈칵 치미는 태고의 아픔이다. 천운영이 쥐어 뜯던 「세 번째 유방」도 있을 법하다.
 
  〈스무 살이 되면 보여 주렴. 그 점과 꼭지를. 당신의 실핏줄은 먼 나라로 향하는 도로…〉
 
  「My name is Maria」 또 하나의 마리아는 나그네의 하루살이 반려자. 검은 뿔테 안경에 학식이 걸려 있다. 깊은 눈만큼이나 프란체스코 성당에 걸린 페루판 「최후의 만찬」 그림 속의 식단에는 기니 픽이 탐스럽고 요한의 모습이 여성스럽다. 「다빈치 코드」는 만국 공통이다. 나도 뭔가 그녀에게 줄 게 있어야 하지. 도미니크 수도원에서 멜빌의 「베니토 세리노」 구절을 건네주었다. 「네 두목을 따르라」 돌아오는 눈빛이 다르다. 그러나 어쩌리, 마음에 가진 짐을 버리러 떠나는 여행인데 새 인연을 챙길까 보냐?
 
  아쉽게 헤어진 그녀의 당부는 지극히 진지하고 상세하다. 「절대로 첫 번째 택시를 타지 말라. 가능하면 서너 번째를 골라라」, 「달러인지 솔인지 화폐단위를 분명히 하라」, 「그리고 요금을 흥정하라. 당신 호텔까지는 7, 8솔이면 될 것이다」
 
  미국行 밤 비행기, 출국 수속, 지독한 검열에 짜증이 날 정도다. 『술은 왜 마셨나?』,『직업이 교수라는데 왜 이렇게 많은 나라를 다녔나?』 미국놈 앞잡이 노릇도 도가 지나친다. 그녀의 가슴에 달린 명찰에 「마리아」라고 적혀 있었다. 돌아서는 순간 곧바로 잊어야 할 눈동자다.●
 
 
  [여행메모] 이것만은 꼭!
  혹시 여행길에서 페루인과 아무리 친해졌어도 물건을 던져 전하지 않는다. 바로 옆이었다고 해도 실례가 된다. 쿠스코까지 가는 직항편은 없다. LA를 경유해 수도 리마에 도착, 쿠스코로 가는 국내선을 이용한다. 인터넷 영문 사이트(www.peru.com)를 참조해 보자.
 
 
 

 
  [잊을 수 없는 여행] 미국 뉴욕
 
  몇 번이고 다시 찾아도 새로운 도시
 
  아침에 일찍 나와 현대미술관(MOMA)이나 구겐하임 미술관,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을 돌아보고, 저녁 먹고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보고 나면 정신적 포만감을 느끼게 된다.
 
  정혜정 前 MBC 아나운서
  1966년 서울 출생. 연세大 신문방송학과 졸업. 美 뉴욕大 대학원 저널리즘 석사 수료. MBC TV 「뉴스데스크」 앵커, MBC TV 「장학퀴즈」 MC, MBC 라디오 「0시의 데이트」 등 진행. 한국아나운서대상 아나운서클럽상 수상.
 
 
  뉴욕 생활의 알뜰함을 알려 준 사라
 
  그녀의 이름은 사라. 가무잡잡한 피부에 동그랗고 커다란 눈, 웃는 모습이 참 아름답다. 무엇보다 그녀를 빛나게 하는 것은 환한 얼굴로 말을 붙이는 그녀 특유의 친화력이었다. 뉴욕에서 그녀와 나는 복도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살았다.
 
  내가 살던 아파트는 긴 복도를 가운데 두고 한 층에 열 집 정도가 있었는데, 뉴욕에 유학 간 첫해 크리스마스에, 그녀 덕분에 이웃들과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크리스마스 때마다 음식을 마련해 같은 층의 이웃들을 모두 초대하는 그녀, 이웃들이 서로 인사 나누고 사는 데 촉매제 역할을 하는 사라는 필리핀 여성이다. 김치 등 한국음식을 아주 좋아하는 그녀는 같은 층의 미국 40, 50代 주부들 모임에 유학생인 나를 끼워 줬다.
 
  일주일에 한 번씩 공연관람 모임을 갖는 그들에게서 뉴욕생활을 알뜰하게 즐기는 미국 주부들의 노하우를 배울 수 있었다. 뮤지컬 할인표를 사기 위해 길 건너에 있던 세계무역센터 로비에서 줄서는 것을 마다하지 않던 모습들. 특히 비용이 부담스러워 뉴욕 필의 낮 리허설 공연을 관람하는 모습은 참 인상적이었다.
 
  뉴욕은 연중 내내 펼쳐지는 공연 소식에 마음이 부자가 되는 도시이기도 하지만, 보고 싶은 공연을 다 보기엔 관람료가 무척 부담스러운 도시이기도 하다. 하지만 돈 없는 사람들도 부지런하면 그 혜택을 누릴 수 있다. 뉴욕 필의 낮 리허설 공연은 主관객이 老부부들이다. 시간은 많은데 넉넉지 않은 이들이 뉴욕 필의 공연을 10달러 정도 내고 원하는 만큼 볼 수 있다는 것은 큰 매력이다. 연습을 위해 음악이 수시로 끊겨 음악에 몰입하기 힘든 것이 문제이긴 하지만….
 
  집세 비싼 맨해튼에서 남편과 함께 공부하면서 아들 유아원비, 생활비에, 빠듯한 유학생활을 하느라 보고 싶은 공연을 다 보지 못하고 떠난 것이 못내 사무쳐 그 후 계속 뉴욕을 다시 찾은 것 같다. 「돈을 들고 반드시 이 도시에 다시 오리라」는 어찌보면 「삼순이스러운」 오기도 한몫 했다. 휴가 때 다시 찾은 뉴욕의 한 극장에서 좋은 자리에 앉아 공연을 보는 사치를 누리다 보면 사라와 함께 다니던 그때 생각이 떠올라 그녀가 그리워진다.
 
 
  뮤지컬 배우를 꿈꿔 보다
 
  뉴욕은 사람을 부르는 도시다. 적어도 내겐 그랬다. 경치가 아름다운 도시들은 한두 번 보면 볼 것 다 봤다는 느낌인데, 뉴욕은 보고 또 봐도 다 보지 못한 것 같은 미진함이 남아 계속 뉴욕行 비행기를 타게 된다. 아름다운 경치는 한 번 보면 다시 가지 않아도 마음에 잔상이 남지만, 뉴욕의 다양한 문화 콘텐츠(미술 전람회, 박물관 전시, 공연 등)는 매번 변화하기 때문에 항상 새로움을 준다. 내 경우엔 그중에서도 특히 뉴욕의 좋은 공연을 볼 때 느끼는 감동이 새로운 힘이 된다.
 
  뉴욕은 거리에서나 지하철역에서도 수준 높은 연주가들을 만날 수 있는 도시다. 그래도 뉴욕 「공연 예술의 꽃」은 역시 뮤지컬이 아닐까. 유학생활 동안 처음으로 큰맘 먹고 뮤지컬 「레미제라블」을 보며 눈물 흘렸던 감동이 되살아난다. 그 후 「레미제라블」을 다시 보기 위해 뉴욕을 네 번이나 찾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에서 공연된 「레미제라블」도 봤지만, 너무 큰 대극장 무대공연은 공연장소에 따라 감동이 차이가 날 수 있음을 확인하는 계기가 됐을 뿐이었다. 「캣츠」에 이어 이제 브로드웨이에서 「레미제라블」이 막을 내려 다시 볼 수 없는 것이 아쉽다.
 
  유학 시절 「레미제라블」·「오페라의 유령」·「미스사이공」·「캣츠」·「미녀와 야수」 등 장기공연 뮤지컬을 봤다면, 「아이다」·「라이온 킹」·「애니」·「시카고」·「가스펠」·「마마미아」 등은 휴가 때 뉴욕을 찾아 관람했다. 전형적인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기대한다면 지난해 처음 봤던 「42번가」를 권하고 싶다. 어린 시절, TV 「일요 명화극장」에서 봤던 프레드 아스테어나 진저 로저스가 나오는 영화처럼 배우들의 노래와 탭댄스가 화려하게 빛난다. 미국 체류 당시엔 극장 앞에서 노숙하면서 표를 구하려는 극성 팬들 때문에 보지 못했던 「렌트」도 인상적이었다.
 
  내가 뮤지컬을 보기 위해 뉴욕을 다시 찾은 것은, 노래만 잘했더라면 도전해 보고 싶었던 뮤지컬 배우의 꿈도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사실 내가 많은 사람들 앞에 처음 선 것은 방송이 아니라 초등학교 5학년 때, 교회 뮤지컬 무대이다. 그때부터 중·고등학교 시절 몇 번의 뮤지컬을 해본 경험이 수백만 시청자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길러 줬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매회 새로운 관객 앞에서 열정적인 공연을 하는 배우들을 보고 있노라면 매일 카메라 앞에서, 마이크 앞에서 수많은 시청자와 마주하는 아나운서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평가가 즉각적으로 내려진다는 점도 비슷하다. 그들의 노래·춤·연기에, 관객들이 감동받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방송에서 하는 말도 저렇게 사람들의 가슴에 「울림」이 됐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보게 된다.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꽉 찬 감동을 느낄 수 있는 뉴욕. 아침에 일찍 나와 새롭게 개관한 현대미술관(MOMA)이나 구겐하임 미술관,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을 돌아보고, 저녁 먹고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보고 나면 한 시간도 헛되이 보내지 않은 것 같은 정신적 포만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휴가 기간에 오히려 몸은 더 지칠 수 있지만, 다양한 정신적·정서적 자극을 원하는 욕심 많은 知人들에게 나는 여름 휴가지로 뉴욕을 추천한다.●
 
 
  [여행메모] 이것만은 꼭!
  인터넷 사이트 http://www.citypass.com 에서 「뉴욕」을 클릭, 뉴욕에 있는 여러 박물관과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관람 티켓 등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 동부지역의 나이아가라 폭포는 그 웅장함만으로 뉴욕여행의 절정을 이룬다. 가을에 뉴욕을 찾는다면 캐나다 퀘벡을 함께 여행해 보는 것도 좋다.
 
 
 

 
  [잊을 수 없는 여행] 네팔 히말라야
 
  나를 찾아 떠난 길에서 만난 自由
 
  히말라야의 깊은 눈 속에서 그런 통찰을 하다니 히말라야의 氣가 대단하구나 싶었다. 환희에 젖었다.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李根厚 의사
  1935년 대구 출생. 경북大 의과대학 졸업. 이화女大 신경정신과 교수. 대한신경정신의학회장 역임. 열린마음의원장.
 
 
  네팔에 숨겨둔 애인
 
  여행 하면 우선 즐겁다. 많은 것을 보고 생각하고 느끼게 만드니 여행만 한 활력소가 따로 없다. 여행이란 억지로 하거나 의무적으로 볼일을 보기 위해 가는 것이 아니라면 즐거울 것이다. 다른 일도 마찬가지겠지만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자발성이 여행의 즐거움과 불편함을 갈라 주는 것 같다. 세계 어느 곳을 가나 즐겁지 않는 곳이 있겠는가만 나는 네팔의 여행이 즐겁다. 곰곰이 생각하면 자발성이다. 누가 네팔을 가라고 한 것도 아니고, 오라고 한 것도 아니지만 그냥 내 자신이 그렇게 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 선생님은 네팔만 다녀오면 눈빛이 달라져요』
 
  나와 함께 오랫동안 근무한 간호사들의 이야기다. 나는 그 말이 듣기 좋다. 첫째, 여행을 다녀오더니 비실비실한다는 얘기보다 백배 낫고, 그 초롱초롱한 눈으로 환자를 집중적으로 볼 수 있다면 나의 즐거움을 나누는 것으로 연결되니 환자에게도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네팔에 애인이라도 숨겨 뒀나 보지?』
 
  이런 농담은 나와 가까운 친지들이 하는 말이다. 한두 차례도 아니고 매년 네팔을 이웃 동네 드나들 듯하니 나옴직한 질문이다. 나는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단호히 『그렇다』고 말한다.
 
  애인이 아니고선 나를 그토록 흡인력을 갖고 빨아 들이지는 못할 것이다. 나와 1990년 네팔을 함께 여행한 친구 詩人 조순애 님이 지어 준 짤막한 詩가 있다. 원래 이 詩는 조詩人이 연작으로 20편의 단시를 지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이다. 「히말 신랑」 연작의 열네 번째 詩다.
 
  〈복사꽃 진달래도/제 신랑 되라네/달려와 숨찬 소리로/오늘은 꼭 그래야만 된다 하네〉
 
  그런데 내가 여행을 떠나자면 묘한 두 가지 상반된 느낌이 저 마음 밑바닥에서 충돌한다는 게 히말라야 산을 이고 내가 생각하면서 느낀 과제다. 여행을 떠나는 기쁨과 두려움 같은 상반된 느낌이다.
 
 
  『자유! 자유!』
 
  여행을 자주 하게 되면서부터 「왜 그럴까」를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에베레스트의 베이스로 가는 길목에서 눈 속에 텐트를 치고 셰르파 「니마」와 단 둘이서 잠을 청하고 있었는데 아주 적막했다. 외로움에 감싸이면서 히말라야의 웅장한 氣(기)에 눌려 그 좁다란 텐트 속에 안전지대인 양 믿고 드러누워 있었다. 『닥터 리, 왜 웃으세요?』 내가 아마도 히죽히죽 웃었나 보다.
 
  고요함을 깨고 히죽이는 모습이나 소리가 니마에겐 평소 나답지 않은 모습으로 비쳤나 보다. 『내가 웃었다고?』 하고 크게 소리 내어 다시 웃었다. 니마에게 들킨 바엔 좀더 크게, 소리 지르며 웃어도 흠이 될 것 같지 않아 한참 웃었다. 니마는 영문도 모르면서 덩달아 큰 소리로 웃었다.
 
  나중엔 서로 부둥켜안고 뒹굴면서 웃었다. 웃음이 좀 가라앉자 니마는 다시 왜 웃었느냐고 물었다. 『프리덤!』 내 체험을 그가 알아들을 리 없다. 『자유, 자유…』 나는 좁은 공간의 텐트 속에서 자유를 거창하게 이해하고 터득하고 실천해서 얻었다는, 뭐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즐거움과 두려움이 충돌하는 세력을 훔쳐볼 수 있었기에 웃음이 터진 것이다.
 
  나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외동아들이었다. 부모님은 내가 유아기에 장티푸스를 앓으면서 생명을 잃을 뻔했던 경험 때문인지 치마폭에 감싸 키웠다. 「그 울타리 치마폭으로부터 자유로움」 그러니 웃음을 참을 수 있겠는가.
 
  오십을 바라보던 당시의 나이에 걸맞지 않은 「금기를 지키려는 제동세력과, 금기를 깨고자 하는 일탈세력의 충돌」이랄까? 내 마음 저변에서 숨어 소용돌이치는 그 무의식의 모습을 보면서 웃었던 것이다. 「멀리 가면 안 된다」는 금기와 통제를 처음으로 벗어나 히말라야의 깊은 눈 속에서 그런 통찰을 하다니 히말라야의 氣가 대단하구나 싶었다. 환희에 젖었다.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금기가 많았던 어린 시절의 나는 자연 행동반경이 좁을 수밖에 없었다.
 
 
  6·25와 히말라야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소위 말 잘 듣는 모범생이었다. 초등학교 때는 집이 학교와 5분 거리에 있었는데, 집과 학교 그리고 변소로 이어지는 나의 행동반경을 벗어 나 본 적이 없다. 중학교 역시 학교가 30분 거리에 위치해 있었는데 학교에 이르는 거리를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친구들이 어디를 다녀왔다거나 학교에서 가지 말라는 곳을 다녀왔다고 으스대는 것을 보면 부럽기도 했지만 말 잘 듣는 모범생의 규범을 벗어나진 못했다. 중학교 3학년 때 6·25 전쟁이 터졌다. 전방으로 출격하는 비행기의 굉음, 부상병들이 몰려오는 아비규환의 수라장, 피란길… 말 잘 듣는 모범생이 경험했던 공식 같은 질서는 송두리째 무너지고 말았다.
 
  이 와중에 나는 고등학교에 진학을 했다. 역시 피란길 수업을 받으면서 밀고 밀리는 지루한 싸움 끝에 휴전협상이 시작되었는데, 하루는 교장선생님이 에베레스트에 최초로 오른 에드먼드 힐러리 卿(경)에 대해 말씀해 주셨다.
 
  『너희들도 장대한 기개를 가지고 히말라야를 오르길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전쟁 와중에 길을 잃고 방황하는 젊은이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하신 말씀일 게다. 그 말씀이 나에게 여행의 모티브를 심어 준 계기가 되었다.
 
  「에베레스트!」 그 모티브를 한시도 잊지 않고 가슴에 새겼으나 주변 사정이 허락하지 못했다. 1982년 느닷없이 한국산악회의 마칼루 학술원정대에 참여하지 않겠느냐는 주문이 왔다. 오랜 숙원인데 내칠 일이 아니다. 그 이후 매년 1~2회씩 네팔 땅을 밟게 되었는데 금기의 파기치고는 엄청난 파기다. 그러니 기쁨과 두려움이 교차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982년을 기점으로 봇물 터지듯 여행의 기회를 잡았으니 내 눈이 초롱초롱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히말라야와 네팔은 나 자신을 생각하게 하는 곳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직 알지 못하는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히말라야를 계속 가기 위해선 「내가 나를 모르는 것이 더 좋겠구나」 하는 어리석은 생각도 가져 본다.●
 
 
  [여행메모] 이것만은 꼭!
  가급적 낮에 도착하고, 낮에 떠나는 비행기편을 이용하는 게 좋다. 태양 아래 빛나는 네팔의 풍경을 한 눈에 담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발 동동 구르지 말 것! 숙소를 정할 땐 호텔이든 민박이든 창 밖으로 경치를 볼 수 있는 곳으로 정한다. 아침에 눈을 뜨면 심장이 멎을 만큼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다. 네팔 관광청 한국사무소 http://www.nepal.or.kr
 
 
 

 
  [잊을 수 없는 여행] 전남 완도군 보길도
 
  그 할머니는 아직도 살아계실까?
 
  질긴 사랑의 인연을 고이 간직한 그녀의 사랑은 시퍼렇게 싱싱했다.
 
  崔潤姬 방송인·카피라이터
  1947년 광주 출생. 이화女大 국문과 졸업. 기업체·공무원·대학원·주부·시민대상으로 강의 활동. MBC TV 「느낌표」 특강, KBS TV 명사특강, SBS TV 행복특강 등. 저서 「행복, 그거 얼마예요?」 등. SBS 라디오 「아름다운 세상- 손숙, 김범수입니다」 등 고정출연 중.
 
 
  횟집 주인 할머니의 5부작 인생극장
 
  내가 광고회사에 다닐 때 우리 팀원은 제각각 개성이 강한 사람들이었다. 이름을 밝히자면 그들의 명예에 살짝 흠집이 생길 수도 있어서 캐릭터별로 분류해 본다. 「꽃미남 카사노바」, 「성실진실맨 남자 천사」, 「오지랖 넓은 동네 발발이」, 「겸손배려의 지존」, 「아무 생각 없이 사는 헐렁이」, 「다짜고짜 흥분파 다혈질」, 그리고 「푼수 9단 최윤희」. 이렇게 총 7명이었다.
 
  우리는 어느 날 MT를 가기로 작정하고 회의를 했다. 강원도로 갈까, 전라도로 갈까, 경상도로 갈까? 바다가 좋을까, 산이 좋을까? 난상토론을 하다가 결국 최종 결론은 보길도! 산도 있고 물도 있으니 그만하면 모두의 희망사항을 충족시켜 주는 곳이었다.
 
  땅 끝 마을 해남까지는 9인용 자동차를 타고 갔다. 해남 선착장에 가면 보길도 가는 배가 있는데 꽃 피는 봄이 시작돼서인지 선착장은 꽤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1인당 운임은 3000원 정도였다고 기억되는데 배는 엄청나게 지저분했다. 「하긴 배를 왜 쳐다보나, 파란 바다를 바라보면 상쾌할 것을…」 그러나 일기예보에 따라서 배의 운명은 달라진다. 태풍이 불면 올스톱, 완전중단·비상체제로 돌입하는 것이다.
 
  보길도에 도착한 우리는 「민박」이라고 간판이 걸려 있는 「뾰족산 횟집」에 짐을 풀었다. 주인 할머니는 일흔이 넘었을까 말까 하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왠지 라일락 향기가 풍겨 나왔다. 보길도에서 웬 라일락? 물론, 나의 첫 느낌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고 지극히 감성적인 것이어서 그 이유를 충분히 설명할 수는 없다.
 
  나는 어딜 가나 「사람」하고 이야기하는 것을 제일 좋아하기 때문에 함께 간 직원들이 모두 잠든 어둠 속에서 할머니의 가슴을 「똑똑똑」 노크하고 들어갔다. 그야말로 칠흑 어둠의 고요함 속에 나비처럼 사뿐사뿐 날아다녔다. 모처럼 흥미롭게 이야기를 들어 주는 사람이 나타나자 할머니는 추억의 필름을 마음껏 풀어 냈다. 수더분한 사투리로 엮어 내는 질박한 인생 이야기는 그야말로 5부작 인생극장이었다.
 
  할머니의 고향은 경상도였다. 이곳까지 흘러와 어느덧 50년째 살고 있는 할머니의 사연은 정말 기구했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했고, 영화보다 더 애절했다. 「어머, 거짓말 같아! 설마 그런 일이 있었을까?」할 만큼 슬픈 내용이었다. 그래서 현실이 영화보다 더 절절하다는 말도 있잖은가?
 
 
  사랑을 저버린 남자를 찾아온 보길도
 
  꽃다운 22세 처녀 시절, 그녀는 친구들하고 보길도로 놀러왔다. 그런데 여기서 바로 평생의 운명을 결정짓는 남자를 만난 것이다. 그들은 서로 마주 보는 순간 심장에 강도 9 이상의 지진을 느꼈고, 가슴이 통째로 흔들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임신까지 했다. 뼈대 있는 남자 집안에서 완강하게 반대를 했다.
 
  가난하고 배운 것 없는 그녀의 집안이 문제였다. 결국 여자는 아기를 남자 집에 빼앗기고 부모에게서도 버림받았다. 처녀가 애를 낳았으니 동네 사람들 창피해서 얼굴을 못 들고 다니겠다는 아버지는 날마다 술을 마시고 딸에게 행패를 부렸다. 그녀는 오갈 데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버렸다고 느껴지자 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죽기 위해 보길도로 갔다. 「섬에 빠져 죽어 버리자…」. 그러나 그녀는 차마 죽을 수 없었다. 보길도 곳곳에 남아 있는 남자의 향기가, 초록색 웃음이 그녀를 「살아야 한다」고 붙잡았다. 「그래, 여기서 살자. 평생 그를 그리워하면서 여기서 살자」
 
  보길도 섬 바위에 앉아 있으면 남자의 향긋한 웃음이 떠올랐다. 바람에 살랑대는 들꽃들을 보며 남자의 달콤한 포옹을 기억했다. 그 추억만으로도 그녀는 행복할 수 있었다. 아니, 충분히 행복하다며 자신을 달랬다.
 
  그 후에 딱 한 번 만난 남자는 미국으로 이민 가게 됐다며 이별을 고했다. 여자는 엉엉 울었다.
 
  『이제 가버리면 난 어떡해? 그래도 가까운 어딘가에 살아 있다고 생각하며 견뎌 왔는데, 이제 나는 어떻게 살아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남자는 떠났고 여자는 보길도에 아직도 살고 있다. 늙어 가고 있다. 생명이 증발하고 있는 중이다. 남자는 그 후로 미국에서 편지를 보내왔다.
 
  단 한 통의 편지! 할머니는 비밀 유산이라도 되듯이 꽁꽁 숨겨 둔 편지를 나에게 보여 주었다. 종이는 너덜너덜 다 닳아져 있었고, 내용도 꺼져 가는 촛불처럼 가물가물했다. 내 식대로 재구성해 본다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혜자, 당신이 이 편지를 볼는지, 못 볼는지 잘 모르겠어. 아직도 당신이 보길도에 살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이 편지를 써. 미국에 온 우리 가족들은 고생 많이 했어. 우선 말이 잘 안 통하니까 여간 힘든 게 아냐. 괜히 왔다 싶지만 우리의 영애가 한국에 살면 더 힘들 것 같아 미국으로 도망쳐 버린 거야. 영애를 볼 때마다 어쩜 그렇게 당신을 닮았는지, 신기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슬프기도 해. 사람의 인연이라는 것이 어쩌면 이렇게 질긴지…. 난 당분간 소식도 못 전할 것 같아. 이제 새로운 곳에 적응하려면 죽기 살기로 열심히 살아야 하니까…. 당신은 언제나 그랬듯이 나를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해… 이 죄인을 용서해 줘. 그리고 혜자! 당신은 항상 건강해야 해. 혼자 살아가려면 건강만은 꼭 챙겨야 해, 알았지? 자나 깨나 건강 건강!〉
 
  『그 사람은 결국 서른여덟 살에 교통사고로 죽었대. 새벽부터 일하러 다니다가 차에 치인 사고였어. 그렇게 죽을 것을 왜 그리 죽기 살기로 살았는지…. 내 가슴에 시커먼 멍을 남기고 왜 먼 곳까지 가서 죽었을까』
 
 
  보길도 새벽 안개를 담은 뽀얀 눈빛
 
  할머니의 아득한 시선을 아직도 나는 기억한다. 보길도의 새벽 안개를 다 길어 올릴 것처럼 뽀얗게 아슴푸레해지던 할머니의 눈빛! 그 눈빛은 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그 순간의 「사랑」을 꼭 껴안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걸핏하면 잘 울어서 별명이 「고장 난 수도꼭지」인 나는 할머니 손을 붙잡고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이튿날 아침, 할머니는 우리들에게 된장국을 끓여 주셨다.
 
  『사람한테는 그저 된장이 최고 아이가? 건강하게 살라면 자나 깨나 된장만 묵고 살면 된다는 말이제』
 
  할머니가 발음해 내는 「건강」이라는 단어 속에서 나는 시간이 흘러도 낡지 않는 사랑을 느꼈다. 할머니의 사랑은 유효기간이 없는 것인가. 50년이 흘러도 여전히 파랗게 싱싱할 수 있는 사랑!
 
  그 할머니는 아직도 살아계실까? 나는 가끔 보길도에 가보고 싶지만 왠지 할머니를 다시 만나고 싶지는 않다. 만나면 내 추억 속의 할머니는 다른 사람으로 변해 있을지 모른다. 나는 그것이 두려운 것이다. 그냥 이 상태로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싶다. 아름다운 추억이 남아 있는 여행지의 필름을 돌려 보니 여기저기 꽤 많은 곳이 「나도 나도!」 하면서 소리친다. 내 추억의 첨부파일 속에는 멋진 여행지가 제법 많이 모여 있는 셈이다.
 
  열심히 살아왔다는 증거인가, 재미있게 살아왔다는 증거인가.●
 
 
  [여행메모] 이것만은 꼭!
  전남 완도군에 속한 보길도를 가기 위해선 완도 화흥포나 해남 땅끝마을에서 배를 타야 한다. 여행 일정이 넉넉하다면 완도대교를 지나 드라마 「해신」 촬영지도 들러보자. 보길도에 도착하면 상록수림과 깻돌밭이 특이한 예송리해수욕장, 고산 윤선도 유적인 세연정은 필수 코스다. 보길도 안내와 배편은 보길도面 홈페이지(http://wando.koreadong.com/bogil) 참조.
 
 
 

 
  [잊을 수 없는 여행] 몰디브
 
  文明을 등진 아름다운 유배지
 
  『멋져! 멋져!』를 연발하던 아내가 어느 순간 『악!』 하고 비명을 질렀다. 아내는 사색이 되어 곧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표민수 드라마 연출가
  1964년 부산 출생. 서울大 독어독문학과 졸업. KBS공채 18기 입사. KBS 드라마국, 팬엔터테인먼트 드라마제작팀 PD 역임. 드라마 「아직은 사랑할 시간」, 「거짓말」, 「바보같은 사랑」, 「푸른 안개」, 「고독」, 「풀하우스」 등 연출. 現 김종학프로덕션 드라마제작 PD.
 
 
  신발을 벗어 들고 들어선 원시의 땅
 
  지난해는 KBS 미니시리즈 「풀하우스」를 연출하느라 바쁘게 보냈다. 5월부터 촬영에 들어가 4개월 동안 거의 밤잠도 못 자고 초긴장 상태로 지냈다. 특히 태국 푸껫과 중국 上海 촬영이 끼어 있어서 더욱 힘들었다. 해외 촬영 때 여행도 하고 즐겁게 보낼 거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지만, 촉박한 시간에 최고의 화면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국내 촬영보다 더 고달프다. 작품이 끝나면 여행도 싫고 집에서 아무 생각 없이 쉬고 싶은 마음밖에 안 든다.
 
  1995년에 결혼한 이후로 아내와 매년 한 차례씩 여행을 갔는데, 그때마다 충돌이 생기곤 했다. 여행지에서 가능한 한 즐겁게 지내려는 아내와 그냥 호텔에서 쉬고픈 내가 티격태격하기 일쑤였다. 요즘은 서로를 배려해 여행을 가면 적당히 놀고 적당히 쉰다.
 
  드라마 「풀하우스」가 끝나자 아내는 몰디브로 여행을 가자고 했다. 언젠가 가보고 싶었던 곳이라 선뜻 찬동했다. 9월에 떠나려고 했지만 예약자가 많아 11월에서야 가게 되었다. 마침 결혼기념일 주간이어서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몰디브로 향했다. 중간 기착지에서 쉬지 않고 가는 노선을 택했는데도 몰디브까지 17시간이나 걸렸다. 몰디브 수도 말레에서 배를 타고 최종 목적지인 섬으로 향할 때의 기쁨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맑은 공기와 따가운 햇볕, 옥빛 바다, 아름답고 위대한 자연이 우리를 반겨 주었다.
 
  배에서 내리기 전에 선원이 「신문도 신발도 필요없다」라는 글이 새겨진 봉투를 하나씩 나눠 주었다. 섬에서는 신발을 신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반신반의하면서 맨발로 섬에 발을 디뎠다. 보드라운 흙이 발가락을 간질였다.
 
  숙소인 수상가옥에 짐을 풀고 섬을 한 바퀴 돌아보았는데, 15분이면 족했다. 몰디브의 작은 섬들은 각각 하나의 리조트로 구성되어 있다. 리조트의 전체 객실이 40여 개에 불과해 사람들과 부닥칠 일이 거의 없다.
 
 
  400장의 사진을 일순간에 다 지워 버리고 다시 찍은 300장의 사진
 
  몰디브 섬이 무엇보다도 마음에 드는 것은 놀이시설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다이빙을 하거나 30분쯤 나가서 돌고래를 보는 것 외에 딱히 할 게 없다. 전화도 인터넷도 연결되지 않는다. 몰디브는 아름다운 유배지다. 그저 섬을 거닐다가 자동차가 한 대도 없는 그곳을 자전거로 달리거나, 허리밖에 차지 않는 바다에 들어가서 물놀이를 하다가 바닷가에 앉아 쉬었다. 바다를 걸어 들어가 봤는데 1km 정도의 얕은 바다가 계속됐다. 훤하게 비치는 바닥에는 부드러운 산호모래를 헤치며 물고기 떼가 헤엄치고 있었다. 물고기들은 우리가 묵고 있는 수상가옥 아래까지 몰려왔다. 빵을 들고 나가 뜯어 주었더니 맛있게 먹으며 내 손을 살짝살짝 물기도 했다.
 
  닷새간 섬에 머물기로 했는데, 첫날은 잠깐 답답한 마음이 들었지만 점차 마음이 차분해졌다. 아침에 일어나면 물고기에게 밥을 주고 섬을 돌아다니며 아내와 사진을 찍었다. 밤이면 아내와 음악을 들으며 밀린 얘기를 나누었다. DVD로 「미래소년 코난」을 보다가 생각에 빠져들기도 했다. 방안에 TV가 있었지만 켤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나흘이 느린 듯 빠르게 지나갔다. 여행 일정은 하루 남았고 그 하루 가운데 반나절만 섬에 머물수 있다고 생각하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다음날 오후 1시면 섬을 떠나 몰디브 수도 말레로 가서 점심을 먹고 시내구경을 한 뒤 오후 7시 비행기를 탈 예정이었다.
 
  아내는 디지털카메라의 LCD창에 눈을 박고 나흘 동안 찍은 400여 장의 사진을 넘겨 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멋져! 멋져!』를 연발하던 아내가 어느 순간 『악!』 하고 비명을 질렀다. 아내는 사색이 되어 곧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내가 디카를 잘못 만져서 사진이 다 지워졌어』
 
  나흘간 온갖 포즈를 취하며 찍은 사진이 다 사라졌다니, 순간 나도 허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할 수 없지 뭐. 그냥 마음속에다, 눈에다 몰디브를 담고 가자』
 
  아내를 달랬지만 아내는 너무나 아쉬운지 방바닥을 뒹굴며 계속 소리를 질렀다. 평소 조용한 성격인 아내가 얼마나 안타까우면 저럴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다음날 새벽 5시에 리조트 프런트로 전화를 해 체크아웃을 다섯 시간 미루기로 했다. 그때부터 12시간 동안 우리는 그야말로 여행 복습시간을 가졌다. 우리가 다녔던 장소를 돌며 그때의 의상과 포즈·표정·분위기·기분을 재현해 다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다음 장소로 옮길 때 마구 달려 숙소로 돌아와서 의상을 갈아입었다. 패션 디자이너 출신인 아내는 갑자기 패션모델이 되고, 감독인 나는 배우가 된 기분이었다.
 
  오후 5시까지 부지런히 사진을 찍었더니 300여 장을 복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호텔에서 특별히 마련해 준 「캔들 디너」의 멋진 모습만은 연출할 수 없었다. 형형색색의 초를 켜 놓고 와인을 마시는 우아한 포즈는 복원하지 못했지만 아내는 만족했다.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컴퓨터에 사진을 다운받아 놓았다. 여행에서 돌아온 아내는 자신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사진을 한 장 한 장 올리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10여 장의 사진을 올리고, 가장 잘 나온 사진 10여 장을 인화하여 앨범에 꽂아 두었다.
 
  몰디브에 다녀온 지 두 달쯤 지났을 때, 컴퓨터가 자꾸 이상이 생겼다. 용량이 넘쳐 과부하가 걸린다는 생각이 들어 무심코 자료를 다 지워 버렸다. 사이트에 올릴 사진을 찾던 아내가 또 『악!』 하고 소리를 질렀다.
 
  『컴퓨터에 있던 몰디브 사진 다 어디 갔어?』
 
  이번에는 내가 사고를 친 것이다. 아내와 나는 허탈한 표정으로 마주봤다.
 
  『대체 몰디브 사진은 왜 자꾸 사라지는 거지?』
 
  더 이상 복구할 방법이 없는 우리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그래, 올해 결혼 10주년 기념으로 다시 몰디브에 가는 거야. 가서 또 찍는 거야!』●
 
 
  [여행메모] 이것만은 꼭!
  평소 몰디브 여행을 꿈꿨다면 지금이 적기다. 쓰나미 영향으로 패키지 가격이 많이 저렴해졌다. 직항편은 없다. 쇼핑을 생각한다면 잘 알려진 대로 싱가포르 경유 항공편이 좋고,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두바이 경유 항공편도 색다른 경험이다. 몰디브 관광청 한국사무소 www.visitmaldives.or.kr
 
 
 

 
  [잊을 수 없는 여행]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우리의 맛을 알리러 떠난 두 번의 세계일주
 
  아르헨티나 라디오 방송에 출연했는데 뚱뚱한 여자 점술가가 내 점을 쳐 주었다. 「세계를 돌아다니며 큰일을 할 사람」이란 것이었다.
 
  韓晶惠 요리연구가
  1931년 함남 북청 출생. 일본 江上요리학교 졸업. 동국大 경영대학원 수료. 일본 Savoir Vivre 국제매너 및 테이블 코디 졸업. 1986년 아시안게임, 1988년 올림픽 급식전문위원. 1995년 사회교육공로 대통령표창 수상. 저서 「한국요리 일어판 2권 전집」, 「세계의 메뉴판」 등. 現 한정혜요리학원장.
 
 
  나 홀로 세계여행
 
  1975년 3월, 당시 영화평론가로 유명했던 검은 뿔테 안경의 정영일(作故)씨로부터 생각지도 않던 제의를 받았다. 3개월 동안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요리 이야기를 朝鮮日報에 써 달라는 거였다. 2년간의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방송과 요리학원 운영에 정신 없던 시기였다. 당시로선 미국 가기도 어려웠던 때였다. 그런데 세계여행이라니! 일본에서 공부했으니 영어도 신통치 않았고 여자 혼자서는 무리였지만, 거절하기엔 요리에 대한 내 열정이 너무 컸다. 결국 친구와 함께 간다는 조건으로 제안을 받아들였다.
 
  기대와 희망으로 들뜬 우리는 하와이를 지나 미국 LA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꿈같은 3일을 보내고 워싱턴을 향해 본격적인 기행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好事多魔(호사다마)라고 했던가, LA에 사는 동생을 만나고 오겠다며 씩씩하게 걸어나간 친구가 업혀 들어오는 게 아닌가! 넘어져 다리를 접질렀다고 했다. 좀 쉬면 나을까 싶었지만 친구의 다리는 낫지 않았다.
 
  「괜찮아지겠지…」 희망을 가지고 기다렸지만 코끼리처럼 커진 친구의 발은 점점 더 부어올랐다. 놀란 우리는 병원을 찾았지만 결과는 엄청났다. 「3개월간의 깁스」였다. 하루아침에 나는 외로이 길을 떠나는 기가 막힌 신세가 됐다.
 
 
  유럽풍의 아름다운 도시, 부에노스아이레스
 
  여행 中 가장 어려웠던 일은 기사송고를 위해 우체국을 찾는 일이었다. 취재는 대사관 협조가 있거나, 간혹 특파원의 안내를 받아 쉽고 즐겁게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낯선 他國(타국)에서의 우체국 업무는 쉽지 않았다. 한국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영어가 능통하지 않던 나는 지도를 가져오라고 했다. 『중국이냐?』, 『일본이냐?』 물어오는 직원에게 『그 사이』라며 정확히 한반도의 남쪽을 손가락으로 짚어 주었다. 한국을 잘 모르는 외국인과의 만남에서 자존심이 상한 나는 「우리나라를 세계에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커져만 갔다.
 
  사명감이란 그래서 무서운가 보다. 출발할 때 서툴던 영어가 여행 한 달쯤 뒤, 스위스에 도착했을 즈음엔 말이 통하기 시작했다. 미국을 시작으로 유럽을 거친 여행은 동남아로 이어졌다.
 
  3개월의 세계요리여행은 1984년 한국관광공사 위촉 정부사절 활동으로 이어졌다. 동남아와 유럽, 남미를 순회하며 각국 대사관 초청으로 한국요리 전시회를 통해 우리 문화를 알리는 일이었다. 그 가운데도 아르헨티나는 정말 멀었다. 오랜 비행으로 고생스러웠지만 「南美의 파리」라는 명성대로,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유럽풍의 아름다운 도시였다. 11월, 추운 겨울이 다가서 있던 서울을 떠나 며칠 만에 봄 날씨를 맞았다.
 
  다음날, 한국을 알리기 위해 한 시간의 특별 라디오 방송이 예약되어 있는 스튜디오를 찾았다. 詩人이기도 한 이국적인 마스크의 미녀 진행자와 인사를 나누었다. 이어진 방송진행이 참 특이했다. 한국을 알린다는 취지가 목적이라고는 하지만 대담 10분에 패티 김 노래 한 곡씩이 꼭 이어지는 거였다. 그 반복은 60분 동안 정확히 이루어졌는데, 정작 특별했던 추억으로 간직하게 된 사건은 따로 있었다.
 
 
  당신의 운세는…
 
  진행자와 인사를 나누기 전부터 방송국 한쪽에는 뚱뚱한 부인이 한 명 앉아 있었다. 처음 들어설 때는 「나랑 대담할 손님인가?」 싶었지만 별다른 소개나 인사 없이 방송이 시작됐고, 이름 모를 그녀는 말없이 앉아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방송 중간에 알게 된 부인의 정체는 상상을 초월했고 알고 난 후에 꽤나 당황스러웠다.
 
  그녀는 역술가였다. 아르헨티나 상류계급이나 교양인의 점을 쳐 준다고 했다. 이 방송은 특별한 게스트가 나오면 늘 역술가를 불러 출연자의 운세를 봐준다는 거였다. 놀란 마음을 수습하고 있는 내게 그들은 생년월일을 물었다. 그리곤 방송이 끝나기 10분 전 진행자와 함께 나에게 『발표를 할까요?』 하며 친절하게 물어 왔다. 순간의 빠른 고민과 대답이 필요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 동안 얼른 갈등을 결정지어야 했다.
 
  「그래…, 이 먼 곳에서 누가 나를 알겠어…」 결심과 동시에 환하게 미소지어 보였다.
 
  정작 들어야 할 나를 제외하고, 내 운세는 알아듣기 어려운 에스파냐語로 풀이되기 시작했고 방송은 끝이 났다.
 
  나중에 현지 한국대사관 직원을 통해 듣게 된 내 점괘는 「참 좋았다!」였다.
 
  『이분은 세계를 다니면서 큰일을 할 사람인데 일도 성공하고, 그에 못지않게 가정도 충실하게 지켜 낼 사람』이라는 거였다.
 
  멀고 먼 他國에서 들은 이 말에서 묘한 위로와 용기를 느꼈다. 사실, 너무 바쁜 엄마를 둔 아이들에게 늘 미안했었다. 「내가 이렇게 사는 게 과연 옳은 것일까」 싶은 마음에 고민하는 날도 많았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동안 은근한 편안함이 나를 감쌌다.
 
  내 손엔 아르헨티나 역술가의 사인이 적힌 내 운세 풀이를 써 내린 종이가 들려 있었다. 짐작하기조차 어려운 에스파냐語를 한참 내려다보는데 작은 웃음이 났다.
 
  『그래, 힘내자! 결국 내 팔자가 인생살이 편안하다는 얘기 아니겠어?』
 
  열린 창을 통해 불어오는 따스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바람에 탱고의 선율이, 짙은 장미 향이 묻어났다.●
 
 
  [여행메모] 이것만은 꼭!
  일단 우리나라에서 南美, 그중에서도 끝에 있는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아주 멀다. 이왕 오랜 시간을 투자해서 갔다면 브라질·칠레 등을 함께 여행코스로 잡는 계획은 어떨까? 물론 이과수 폭포 관광은 두말하면 잔소리!
 
 
 

 
  [잊을 수 없는 여행] 서해안 일주
 
  빚더미의 고난을 딛고 떠난 가족여행
 
  벌말 앞바다는 아주 예쁜 포구를 끼고 흔들렸다. 가볍고 상쾌하게, 한 번씩 흔들릴 때마다 달콤한 푸른색 주름치마처럼 예뻤다. 내 마음을 새처럼 자유롭게 날아오르게 하였다.
 
  申鉉林 시인
  1961년 경기 의왕 출생. 아주大 국문과, 상명大 디자인대학원 순수사진 전공. 시집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져라」, 「세기말 블루스」, 「해질녘에 아픈 사람」. 첫 사진전과 함께 산문집 「아我! 인생찬란, 유구무언」, 「나의 아름다운 창」, 「신현림의 너무 매혹적인 현대미술」 등.
 
 
  30년 만의 가족여행
 
  곧 뜨거운 바람 속을 뚫고 자연의 향기와 음악이 넘실대는 공간으로 떠날 것이다. 뭔가 새롭고 신선한 것을 만나 내 스스로 조금 달라져야 한다는 의지가 생긴다.
 
  내 삶이 뭐가 뭔지 알 수 없을 때쯤엔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사람을 만나 얘길 하든지, 여행이라도 떠나야 하고 나를 되돌아볼 책들을 읽어야 한다. 현기증 나는 여름일수록 느긋하게 내면으로 돌아갈 가장 좋은 때다. 그렇지 않으면 또 헤맬 것이므로.
 
  30년 만에 떠나는 첫 가족여행.
 
  바다로 간다는 기쁨도 기쁨이지만 식구가 함께 모여 떠난다는 그 사실 자체만으로 빛으로 가득한 설렘 속의 여행이었다. 그동안 IMF 외환위기 때 터진 빚더미로 말로 다할 수 없이 힘든 일이 많았다. 거의 1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매일 울고 싶을 만큼 힘들고 고단했다. 울고 화낸다고 뭐 하나 달라질 상황이 아니었기에 더 과묵하고 강인한 인내심을 키워야 했다.
 
  결국 고난이 식구들을 더욱 검소하고 서로를 감싸안고 똘똘 뭉치게 했다. 형부나 제부까지 끈끈한 정이 생겨 고난이 준 선물이라고 여겨진다. 상황이 특별히 달라지진 않더라도 우리는 좀더 강해졌다는 것, 비로소 마음의 여유와 균형감을 찾았다는 것이다.
 
  이 여유와 균형감각이란 느긋한 삶을 지혜롭게 이끌어 가는 아주 중요한 기술이다. 이런 기술을 알기 위해 고난의 터널을 지나야 하는 건지 모른다. 각자의 바쁜 시간들 속에서 느긋한 시간의 리듬을 되찾고 숲과 들과 산의 향기와 아름다움을 다시 맛본다. 그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일의 즐거움, 그 사소한 기쁨과 그 가치를 재발견해야 한다.
 
  생존하기 바빠 떠나지 못한 가족여행을 이제라도 갈 수 있는 것이 참 기쁘다. 차 석 대로 나누어서 3代에 걸친 대가족이 떠나는 여행. 12명도 대가족일까? 아무튼 창 밖으로 흘러가는 나무와 숲, 그 생명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자신을 응시했다.
 
  우리의 목적지인 안면도 꽃지해수욕장을 가기 전에 삼길포항의 한 횟집으로 들어갔다. 오후 2시. 점심은 조금 늦었지만 조촐한 낮술을 들기엔 적당한 시간이다.
 
  횟집에 들어서자 에어컨 바람 소리가 무섭게 돌아가고 있었다.
 
  『여기도 에어컨을 펑펑 트네. 버스건 전철이건 도서관이건 에어컨을 적당히 틀어야지, 너무 추워. 아무리 덥더라도 이렇게 흥청망청 에너지 소비하다간 나라 망하겠어』
 
  『이모, 또 애국지사 발언 시작됐네. 우린 에어컨 없으면 못 살아요』
 
  중학생 조카가 노래하듯 하는 말에 나는 열이 거품일 듯 부글대었다.
 
  『그래도 자연 바람이 최고인 거야. 더위도 참다 보면 견딜 수 있는 거야』
 
 
  아버지가 읊어 준 「적벽유」
 
  나는 더위나 추위에 잘 견디고자 내공을 쌓아온 터라 이렇게 더위를 못 참고 에어컨만 틀고 지내는 사람들은 이해하기가 좀 어렵다. 물론 습관인 것은 알지만 석유 한 방울 안 나오는 나라에서 이렇게 주제파악을 못 하는 일은 답답했다.
 
  『장난 치지 말고 이모 말을 귀하게 여겨야지. 다들 오랜만에 가족이 모인 자리니, 조용히 하고… 아버지 말씀을 듣자구』
 
  조카들을 나무라는 작은이모인 여동생. 다들 아버지에게 시선이 모아졌다.
 
  『이렇게 가족이 모이니 좋구나. 함께 먹는 식사는 더 맛있는 법이다. 노산 이은상의 詩 「적벽유」를 보면, 이렇다.
 
  〈백년도 잠깐이요/천년이라도 꿈이라건만/여름날 하루해가 그리도 길더구나/인생은 유유히 살자 바쁠 것 없으니〉
 
  인생은 어차피 산수갑산이다. 그래도 바쁠 것 없으니 유유하게 즐겁게 지내야 한다』
 
  『와~』
 
  다들 아버지의 말씀에 감동을 받아 함성을 질렀다. 조카녀석이 휘파람을 불어 댔고, 식구들은 저마다 취향대로, 소주·맥주·한 컵의 물로 건배를 했다.
 
 
  가족들이 안겨 준 이해와 격려
 
  가족이란 이렇게 좋은 거구나!
 
  조금은 취한 상태로 기분은 좋았고 발걸음은 구름처럼 가벼웠다. 횟집을 나와 식구들을 데리고 잠시 대산읍 오지리로 향했다. 언젠가 「오지리」란 이름 때문에 우연히 들렀다가 그 어떤 친밀감으로 인상깊게 바라본 바다. 삼길포항에서 15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 오지리 벌말 앞바다는 정말 손에 쥘 듯 아주 가까웠다. 바다 끝까지 가면 소나무 숲을 지나 아담한 기암괴석이 있다. 그 기암괴석 앞바다는 출렁거려도 시끄럽지 않았고, 내 팔로 안아질 듯 푸근하고 아늑했다.
 
  벌말 앞바다는 아주 예쁜 포구를 끼고 흔들렸다. 가볍고 상쾌하게, 한 번씩 흔들릴 때마다 달콤한 푸른색 주름치마처럼 예뻤다. 식구들과 바라본 바다는 더 깊고 파랬고, 바람도 한결 기분좋게 내 마음을 새처럼 자유롭게 날아오르게 했다.
 
  아직 상업화되지 않은 오지의 한적하고 평화로운 포구에 머물며 조개구이를 먹던 추억을 그리는 동안 꽃지 해수욕장으로 차는 달리고 있었다. 서해안을 끼고 가는 동안 갈매기는 낮게 춤추고 잔잔히 물결치는 파도에 눈이 부셨다.
 
  교사 겸 명상지도자인 「이스워런」의 글 중에 다음 대목이 유난히 가슴에 와 닿는 시대란 생각을 해보았다.
 
  〈현대적인 생활방식에서 우리가 신경 써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는 인간적인 친밀한 접촉과 관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고속화된 사회는 이런 관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시간과 기회를 앗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생활에서 인간적 접촉이 필요하며, 우리는 모두 가족이나 친구들과의 친밀한 관계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가진 최상의 것을 줄 때, 그들도 자신의 방어벽을 낮추기 시작합니다〉
 
  그렇다. 「내가 가진 최상의 것을 준다」는 게 쉽지 않겠으나, 못 줄 것도 없잖은가. 삶은 나누는 것임을 잊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렇게 시간을 내서 함께 모인다는 것도 「자신이 가진 최상의 것을 나누려는 마음」이 바탕이다. 그런 면에서 그날은 살아서 나누는 최상의 시간들이었다.
 
  우리는 바닷가 펜션가옥에서 오붓한 시간들을 보냈다. 저녁 식사 후 식구들이 비디오테이프를 돌리고, 빔프로젝트로 쏜 영화를 보는 동안 나는 2층 한 귀퉁이에서 책을 읽었다. 어딜 가나 일거리를 싸가지고 다니는 일을 이젠 접어야 하는데, 싱글맘이니 틈나는 대로 일할 수밖에 없다. 식구들의 충분한 이해와 격려로 맘 편히 일할 수 있음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한갓진 밤 바닷가로 나가 온 가족이 바다를 바라볼 때 행복이 이런 거구나 싶었다. 거친 듯 부드럽게 애무하듯이 움직이는 파도가 오갔다. 검보라색으로 출렁이는 바다 앞에서 「가족이란 이렇게 좋은 거구나. 어떤 고난도 꿋꿋이 이겨 나간다면 결코 불행하지 않은 것」이란 생각을 했다. 언제나 고난 뒤에는 뒤늦은 평화와 잠시라도 행복의 물결이 기다리고 있음을 기억하겠다.
 
  어느 새 한없이 깊은 내면의 바다를 펼쳐 보여 준 가족여행도 따뜻한 추억 속에 잠겨 간다.●
 
 
  [여행메모] 이것만은 꼭!
  피곤하고 지친 일상의 끝에서 「어디로든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휴식처를 찾는다면 안면도는 언제라도 좋다. 붉은 단풍보다 짙은 꽃지해수욕장의 일몰과 맨발에 닿는 백사장 모래밭의 부드러움은 「편히 누워 쉴 수 있다」는 이름 그대로를 안겨 준다. 가까운 곳에 위치한 안면도 자연휴양림을 30분 정도 산책해 보자. 소나무 향을 맡으며 거닐면 어디선가 청아한 노랫소리가 들려올 듯 맑고 촉촉하다. 태안군관광사이트 http://tour.taean.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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