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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대구 대봉동 낡은 강당의 추억

鶴山 徐 仁 2015. 9. 28. 22:36

대봉동 낡은 강당의 추억

정소성(소설가, 단국대학교 명예교수)

대구를 떠나 객지에서 산 지가 어언 50 년이 넘었다.

이제 서울보다가 대구가 더 낯설다.

며칠 전 전국의 이름난 집성촌을 찾아 여행하는 ‘뿌리회’라는 단체를 따라 대구 달성을 방문하였다.

달성에는 김굉필을 낳은 서흥김씨와 문익점을 낳은 남평문씨 뱍팽년을 낳은 순천박씨, 그리고 곽재우를 낳은 현풍곽씨의 집성촌이 있다. 문씨 집안에서는 한때 민선 대구시장을 배출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조선 500년을 지배한 성리학의 대학자들이 성리학의 본고장인 영남의 웅도인 대구 출신으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는 사실이 언제나 나를 섭섭하게 하였다. 안동의 퇴계와 서애나, 파주의 율곡과 우계(성혼)), 그리고 창녕의 남명(조식), 경주의 회재(이언적), 안음의 일두(정여창), 인동의 여헌(장현광), 성주의 한강(정구), 그리고 누구보다도 유명한 조선 성리학의 선구자인 경주의 포은 정몽주와 선산의 점필재 김종직 등 그야말로 기라성같은 조선의 성리학자들이 경상도에 운집하고 있는데, 막상 그 중심도시인 대구에 이들과 겨룰 만한 대유학자가 없는 것같은 느낌을 언제나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여행에서 한훤당 김굉필의 존재를 분명히 깨닫게되어 이런 기우를 불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훤당은 대구달성 사람으로, 대유학자로서 필수인 문집을 남기지는 않았으나, 그가 금과옥조로 떠받드는 소학에 정통하여, 그의 모든 언행이 소학에서 나왔음을 주변인들이 인정하였으며, 그는 조선 5현으로 떠받드는 성리학자들(한훤당, 회재, 퇴계, 일두, 정암 조광조) 중에서 수현으로 공인되었으며, 포은 이후로 최초로 문묘에 배향되었다.

그를 제향하는 도동서원이 다른 여덜개의 서원들과 함께 곧 유네스코세계문화재로 지정될 예정이다.

고향 대구로 내려가는 감흥이 어떠냐고 총무가 물으면서 한 곡조를 부탁해서, ‘고향의 노래’라는 가곡을 불렀다. 돼지 목따는 소리였으나, 다들 박수를 쳐주었다. 일행 중에는 이성무(학술원부원장), 정해창(전법무장관), 오재희(전 주일대사)등 대구출신 노객들이 있어서 약간은 조심스러웠다.

서울보다 대구가 더 낯설다고 하는 말은 어쩌면 빈 말인지도 모르겠다. 이 말은 일년에 한 두 번 내려가는 대구의 변화하는 모습이 낯설다는 뜻이지, 대구가 가지는 내 마음 속의 그 영원한 이미지는 조금도 변함이 없고, 친근하기만 하다.

그것은 인간의 감성이 가장 환상적으로 예민해지는 시기가 중, 고등학생 시절인데, 나는 바로 이 시기를 대구에서 보냈다. 경북사대부중고가 바로 그 학교다.

초등학교 5 학년 2학기 때 시골에서 대구로 이사온 나는 삼덕국민학교에 전학했다. 그러니까 나는 대구에서 만 7년을 산 셈이다. 7년 중 6년을 사대부중고에 다녔으니, 나의 대구의 추억은 거의 이 학교생활일 수밖에 없다.

6학년 2학기 말에 담임선생님을 따라서 부중에 입학시험을 치러갔다. 당시 이 학교는 특차라 해서 일 월이던가 아주 일찍 입학시험을 쳤다. 당시 연구학교로 지정되어 있던 이 학교는 학생들을 수험지옥에서 구한다는 명목으로, 각 학교의 일정 등수의 학생들만 뽑아서 시험을 치르게 하는 ‘표집’이라는 새로운 제도를 시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입학시험을 치르러 온 대표학생들이 모인 데가 강당이었는데, 나로서는 정말 신비스러웠다. 국민학교에는 그런 큰 강당이 없기도 했지만, 그것은 온통 담쟁이 덩쿨로 뒤덮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현실을 실제로 보지 않고 꿈 속으로 보는 연령대 탓이었을까, 나는 정말 이 강당이 무슨 꿈 속의 건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선생님요, 당쟁이덩쿨이 와 이래 많은교? 구신이 나올 것같십니더.”

“역사가 오래 돼서 그렇다마. 일제시절부터 있었다 아이가. 대구사범이라고.”

나는 이 강당에서 있었던 교내백일장대회에 나가 ‘강변의 숲’이라는 시를 써서 장원을 한 기억이 새롭고, 개교기념일에 춤옷을 입고 춤을 춘 여학생들의 모습이 기억에 남아있다. 내가 일생 처음으로 타보는 문학상이었고, 춤옷 입은 여학생들의 모습이 촌놈인 나에게는 너무나 신기해 보였다.

당시 대구시민들 사이에서는 ‘약골이 부중고’라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공부는 잘 하지만 건강이 영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유명한 유도선생님을 모셔와서 바로 이 강당에서 유도교육을 시켰고, 유명 코치를 모셔와서 강당 앞 운동장에서 배구를 집중적으로 가르쳤다. 모교는 그 후로 배구명문으로 소문이 났고, 몇 차례나 전국을 제패하였다. 작년에도 전국고교배구대회에서 준우승을 하였다.

수년 전에 모교에서 강연초청이 와서 이 강당을 머리에 그리면서 내려갔으나, 막상 내가 교장선생님에 의해 안대된 곳은 장소를 옮겨 새로이 지어진 이층의 대강당이었다. 담쟁이가 뒤덮힌 그 강당은 무슨 문화재로 지정되어서 폐쇄되어 있었다.

그리고 대구사범 시절부터 강의실로 쓰이던 교사는 학교박물관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박물관의 한쪽 귀퉁이에 ‘모교를 빛낸 동문들’이라는 안내판이 서 있었다. 국회의원 장관 장군 정치인 공기업의 사장, 재벌기업의 CEO등의 이름이 도열한 가운데, 삼류소설가의 이름도 끼어 있어서 적이 놀란 적이 있었다.

모교의 위치가 대구시의 중심이라 주변에 고층아파트들이 들어서서 교육환경이 나빠진데다가, 대구교육의 중심이 범어동 쪽으로 나갔다 하여 한 때 모교의 부지를 이전하자는 운동이 벌어졌다. 당시 재경총동창회장을 맡아있던 선배 윤종용(전삼성전자부회장)씨가 나보고 대구 내려가는 기회에 이런 여론이 맞는지 확실하게 알아보라는 부탁을 한 적이 있었다.

과연 옛 상고 자리에 들어선 고층아파트가 모교를 덮치듯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모교이전운동이 활발히 추진되었으나, 결국 무산되었다. 문화재로 지정된 강당이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부모님이 묻혀계시는 곳이 대구이지만, 아울러 나의 청년의 추억을 간직한 모교 강당이 있는 곳이 대구이다. 대구에 내려가면 나는 묘역에 예를 올리고나서 언제나 모교에 들러본다.

그렇게 커보이던 강당은 아주 작고 낡은 건물로 보여서 신기했다.

(위의 글은 대구은행의 청탁으로 쓰여졌슴)

*정소성(鄭昭盛)약력

경북봉화 출생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중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문리대, 동 대학원 졸업

프랑스 그러노블대학교 문과대학에서 불문학박사학위 수득

단국대학교 명예교수, 소설가(현대문학 추천)

동인문학상, 윤동주문학상, 류주현문학상, 월탄문학상 등 수상

출처 : 경대사대 부중고1215회 동기회
글쓴이 : 정소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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