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唐)드림’일군 신라인
중국은 장보고 동상에 붉은 망토 입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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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7일 들른 중국 산둥성 룽청시 츠산 기슭의 관광지 ‘위해석도적산풍경명승구’.
중국인들이 존귀한 인물임을 나타내는 ‘붉은색 망토’를 씌운 황금색 동상은 놀랍게도 신라인 장보고였다. 사진은 산둥성 룽청시 츠산 기슭에 자리 잡은 장보고 기념관 내 동상.
장보고가 1200년 전 세웠던 사찰 법화원이 복원돼 있었다. 그 옆 기념관에 있는 황금색의 장보고 동상에는 ‘붉은색 망토’가 입혀져 눈길을 끌었다. 중국에서 동상에 붉은색 망토를 입히는 것은 ‘성공한 인물’을 뜻한다는 게 이곳 관리자의 설명이다. 관리업체인 위해석도적산여행사 장융창 총경리는 “한 해 약 5만 명의 한국인이 이곳을 찾는다”며 “장보고 대사는 자신의 업적이 1200년 지난 지금 한·중 양국을 이어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장보고는 처음부터 고국인 신라보다 중국·일본에서 더 많이 알려진 재계 인물이다. 당나라의 저명한 시인 두목(杜牧)은 번천문집에서 장보고를 인의(仁義)를 갖춘 인물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기근과 사회불안으로 한반도에서 고달프게 살아야 했던 신라인들에게는 ‘당(唐 )드림’이 있었다. 마치 근·현대의 ‘아메리칸 드림’처럼. 장보고는 어촌에서 태어나 당 드림을 실현한 최초의 한국 기업인으로 남아 있다.
◆부를 얼마나 쌓았나=장보고의 재산 규모는 우선 ‘흥덕왕과 면담’ 자체에서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 목포대 강봉룡(역사학) 교수는 “이들의 만남은 해적 소탕을 위한 청해진 설치가 공식적 이유이지만 당시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던 신라 왕실에 장보고가 상당한 지원을 약속해 이뤄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왕실재정을 지원할 만큼의 재산을 가졌 다는 뜻이다.
교역 규모로 파악할 수도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박남수 자료정보실장은 “장보고는 일본과 다양한 품목을 거래했다”며 “일본과 1회 교역 규모를 쌀로 환산하면 1만3000섬 정도 ”라고 설명했다. 현재의 시중 쌀값(10㎏ 약 2만5000원)으로 따져보면 한 섬은 두 가마(160㎏) 정도이니 약 52억원 수준이다. 일본과 한 번 교역액이 52억원이므로 일본과 다른 중국 거래 등을 고려하면 장보고 선단의 교역액은 상당한 수준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박 실장은 『8~9세기 한중일 교역과 장보고의 경제적 기반』논문에서 장보고 선단의 전체 교역액을 ‘상상하기 어려운 대규모’로 추정했다. 그는 “속일본후기와 같은 기록에 따르면 장보고 선단의 물건이 인기가 높아 비싼 값에 사거나 예약금을 미리 내야 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장보고는 신용을 바탕으로 물품 대금을 먼저 받고 나중에 상품을 건네는 방식의 거래도 했다. 그만큼 신용도가 높았다. 물물교역 시대에 이미 신용거래를 했다는 뜻이다.
중국에 세운 법화원의 규모로 추정할 수도 있다.
법화원은 당시 산둥반도에서 제일 큰 절이었다. 200여 명이 들어갈 수 있는 큰 강당, 승려 30여 명을 수용하는 승방, 수십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객방이 있었다. 땅도 많았다. 부산외국어대 권덕영(역사학) 교수는 “법화원에 머물렀던 일본의 고승 엔닌의 기록과 현지 토질 등을 고려할 때 법화원은 13만 평(약 43만㎡) 정도의 토지를 소유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이런 법화원을 장보고가 설립했다는 것은 그의 재산이 상당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어촌 출신에서 거상으로=삼국사기에는 ‘문성왕(839~856)이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려 할 때 조정 신료들은 그가 해도인(海島人·바닷가 출신)이란 점을 들어 반대했다’고 기록돼 있다. 골품제의 엄격한 신분사회에서 야망을 펼치기 어려운 처지였을 것이라는 게 학자들의 설명이다. 사회불안과 신분제의 한계를 느낀 장보고는 20세쯤 당으로 건너가 군인이 됐다. 장보고는 활을 잘 쏘는 등 무술에 능해 ‘궁파’ ‘궁복’으로 불렸다. 당시 당나라는 세계 제국으로서 개방된 국가였다. 장보고는 반당(反唐)세력 토벌 작전에 투입됐고 30세 즈음에 군중소장에 오른다. 현재의 연대장급으로 신라인으로서는 출세한 셈이다. 반당 세력 토벌이 마무리되는 821년을 전후해 그는 군대를 떠난다.
군을 떠난 장보고는 산둥반도를 중심으로 해운과 소금생산 등에 종사하며 재당 신라인을 조직화했다. 당뿐만 아니라 신라·일본과의 교역에도 나선다. 김문경 숭실대 명예교수는 “당나라군은 필요한 물품의 상당 부분을 자체 조달해야 했다”며 “장보고는 전투가 없을 때 군의 살림살이를 맡으며 장사에 눈을 떴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장대사가 824년 일본을 방문했다’는 구법승 엔닌의 기록으로 보아 재당 시절 일본과도 교역한 것으로 보인다. 모국인 신라와 네트워크가 많아 다른 상인보다 유리했다. 군인 시절 반당 세력 토벌을 위한 지원군으로 온 신라군과 당나라군 사이에 연락장교를 하며 쌓은 인맥이 많았기 때문이다. 장보고는 한·중·일 3국을 잇는 무역 네트워크를 구축하며, 특히 귀족들에게 인기 높은 희귀 상품 등을 팔며 부를 쌓았다.
장보고가 청해진 대사 된 828년, 한국 최초로 차 재배했다
장보고의 중국 교역항은 대부분 고급 차 생산지
장보고 국내 활동무대도 차 재배하기 좋은 기후
국내에서 차가 처음 재배되기 시작한 때와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한 때가 거의 일치해 흥미롭다. 삼국유사는 “흥덕왕 3년(828년)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대렴이 차씨를 가져와 지리산에 심었다”고 기록했다. 일부에서는 차가 인도의 불교와 더불어 1세기께 들어왔을 것으로 보지만 그에 관한 공식 문헌이 없어 학계에서는 828년을 우리나라 최초의 차 재배 연도로 본다. 828년은 장보고가 청해진 대사로 임명된 때이기도 하다.
당시 장보고의 해상무역물 중 핵심 품목은 도자기였다. 그런데 도자기는 차와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물건이다. 서강대 조범환(역사학) 교수는 “우리나라에서 발굴되는 상당수 도자기가 찻잔이라는 것은 차 문화가 그만큼 발달했다는 방증”이라며 “장보고의 교역물품 중 차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을 것으로 추론된다”고 말했다. 조 교수는 “당에 유학 간 신라의 구법승들에 의해 선종이 들어오면서 차문화가 발달했다”며 “선종 불교는 참선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승려들은 맑은 정신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차를 많이 마셨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차는 당에 유학 갔던 승려들이 직접 가져오거나 귀족의 도움으로만 구입할 수 있었을 정도의 고급 품목이었다”고 덧붙였다. 차가 도자기와 함께 신라 시대 경주의 귀족이나 승려들이 지니고 있던 필수품이었다는 것이다.
장보고의 교역항과 차 재배지가 거의 일치하는 것도 눈길을 끈다.
성균관대 강사인 김진숙(차학) 박사는 “장보고가 무역하기 위해 드나들었던 당나라 항구 주변을 보면 대부분 고급 차 생산지역과 일치하거나 근접해 있다”며 “거상이었던 장보고가 이런 물품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리 없다”고 말했다. 그는 “장보고에 의해 차 문화와 재배기술, 도자기 생산 기술 등이 우리나라 남해안 일대에 보급됐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장보고의 국내 활동 무대였던 남해안 일대 역시 차를 재배하기 좋은 기후를 갖춘 곳이다.
‘글로벌 종합상사 1호’ 였다
장보고 무역 활동 얼마나 활발했기에 … 834년 흥덕왕 “해외 사치품 쓰지 말라”
장보고의 전성기인 834년. 흥덕왕은 교서를 내려 ‘남해박래품’의 사용을 금지시킨다. 남쪽바다를 건너온 사치품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조치를 내린 것이다.
"목도리(재료)에는 금은실(金銀絲), 공작꼬리(爵尾), 비취털(翡翠毛) 사용을 금했다. 빗(梳)은 슬슬전(瑟瑟鈿)을 금했다. 수레 재목은 자단(紫檀), 침향(沈香)을 금했다.”(삼국사기 권 제33)
비취털은 동남아산인 비취새의 털로 매우 귀하고 사치스러웠다. 빗은 신라시대 귀족 여인들이 뒷머리에 꼽는 장식으로 슬슬전은 타슈켄트산의 에메랄드로 장식한 것을 말한다. 자단은 자바·수마트라 등에서 산출되는 나무로 향기롭고 견고하며 색이 아름다워 건축 및 가구재로 쓰였다. 또 침향은 동남아시아에 분포하는 견고한 나무다. 당시 신라 귀족들 사이에는 이처럼 해외에서 수입한 에메랄드, 유향, 공작꼬리 등으로 만든 사치품이 큰 인기를 끌었다.
흥덕왕이 신기하고 비싼 외국 물품을 좋아하는 사회 풍토를 비판해 금지령을 내린 것이다. 당시 신라가 당으로 수출한 품목은 금속공예품, 금·은·동 제품, 견직물, 약제, 모피, 피혁 등이었다. 수입품은 여러 가지 공예품, 견직물, 차, 서화, 칠기 및 이슬람과 동남아 지역의 물건들이었다.
중국의 대표적 무역항 닝보로 들어가는 바다 길목에 있는 암초를 현지인들이 ‘신라초(新羅礁)’라고 불렀다. 장보고 무역선이 수없이 들락거리다 이 바위에서 자주 좌초해 이 같은 이름까지 생겼다고 한다. 눈에 보이는 바위 길이는 100여 m지만 물 아래는 최고 300여m에 달해 지금도 잦은 사고를 불러온다. 약 1200년 전 장보고 선단의 무역선이 지났을 바닷길에는 많은 무역선과 어선이 지나 다닌다. | |
숭실대 김문경 명예교수는 “왕이 금지령을 내릴 정도로 사치품이 범람한 것은 달리 보면 그 당시 해외 무역이 활발했다는 증거”라며 “대부분은 장보고 선단에 의해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장보고는 청해진을 설치한 뒤에 ‘대당매물사’라는 이름 아래 무역선단을 당으로 보내 교역활동을 했다. 당시 양저우와 닝보를 비롯한 중국 남부에 아라비아 상인이 자주 왔던 만큼 이들과도 교역하며 희귀품을 수입해 신라와 일본에 판매했다.
장보고의 청해진을 외부 침입으로부터 막기 위해 설치했던 장도 지역의 목책 흔적들. 윗부분은 소실되고 밑동들만 남아 있다. 이런 목책은 장도 서남해안 일대 300여m를 둘러싸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 |
목포대 강봉룡(역사학) 교수는 “일본에서도 수입 사치품 범람을 우려해 장보고 선단의 물품 수입을 제한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고 말했다. 흥덕왕의 이 같은 금지령은 평민까지 사치품을 쓰는 풍토를 막기 위한 조치라는 지적도 있다. 금지령에는 진골, 6두품 등 신분별로 사용할 수 있는 물품을 제한하고 있다. 당시 무너져 가는 통일신라의 신분제를 바로 세우려는 목적도 있었다는 얘기다.
고려청자일까, 신라청자일까
“고려청자를 탄생시킨 인물이 장보고다.”
전남 강진군 일대의 청자 도요지에서 수년 동안 현지조사를 한 일본 고고학자 요시오카 간스케(작고)의 주장이다. 강진은 장보고가 활발한 해상교역을 하던 당시 도자기 생산기지로 발전했고, 이곳에서 장보고의 후원으로 해무리굽 청자를 만들어 일본까지 수출했다는 것이다. 해무리굽 형식은 학계에서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초기 고려청자의 특징이다.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장보고가 해상 교역로를 통해 해무리굽 형태를 띤 중국의 웨저우요 도자기 생산 기술을 들여옴으로써 고려청자가 탄생할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최건 경기도자박물관장 역시 장보고가 활동하던 9세기를 고려청자의 탄생 시기로 보고 있다. 강진군 대구면 용운리 등에서 발견된 통일신라시대의 가마터는 이런 주장을 더욱 뒷받침해 준다.
일부 학자는 신라 말기에 고려청자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든든한 자기 생산 후원자였던 장보고가 갑자기 사라졌기 때문에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본격적인 고려청자를 만들어낼 수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반론도 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고려청자로 인정받는 ‘순화4년명호’ 항아리(이화여대 소장) 때문이다. 제작 연대(993년)와 만든 사람, 사용처가 명확하게 드러난 이 자기를 근거로 명지대 윤용이(미술사학) 교수는 고려청자가 10세기 이후에 탄생했다고 반박한다. 1989년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에서 발굴한 황해도 봉천군 원산리 가마 출토의 ‘청자 순화3년명 굽 높은 잔’ 역시 비슷한 시기로 측정됐다.
G20 시대 … ‘장보고 리더십’에서 배운다
‘장군 → 무역인’ 재조명 활발
“바다로 나갈 때 나라 부강”
‘貿易之人間(무역지인간)’.
9월 4일 오전에 들른 국립경주박물관 수장고의 흥덕왕릉비 조각(약 가로 15㎝, 세로 20㎝)에 씌어진 한자들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들 글자는 깨진 파편 위에 한 개씩 음각으로 돼 있다. 왜 통일신라 왕릉비에 ‘무역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한자가 새겨져 있을까. 그날 밤 신라 궁궐 터인 ‘경주 월성’. 국립경주박물관 북서쪽으로 길게 반달 모양으로 뻗어있는 이곳에 둥근 달이 떠 있었다.
약 1200년 전(828년) 무역상인 장보고와 통일신라 흥덕왕의 만남이 있었던 바로 그 장소다. 당시 흥덕왕은 헌덕왕의 뒤를 이은 재위 3년째였다. 숭실대 김문경(역사학) 명예교수는 흥덕왕과 장보고의 만남을 ‘해양국가 부흥의 계기를 마련한 절묘한 만남’이라고 평가했다.
이같이 개혁군주로서 ‘흥덕왕’과 글로벌 개척정신을 지닌 기업가 ‘장보고’의 만남이 최근 재조명되고 있다.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한국 개최를 계기로 장보고의 리더십을 재활용해야 한다는 주장(한창수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도 있다. 장보고는 한때 중국에서 군인으로 명성을 날렸지만 제대를 한 무역상인 신분이었다. 통일신라 왕인 흥덕왕 눈으로 볼 때는 일개 장사꾼에 불과한 인물이다. 삼국사기는 이 무렵 상황을 ‘신라 사람 170여 명이 중국에 넘어가 양식을 구하려 했고 기근 때는 자식까지 파는 일이 생겼다’고 기록했다. 한창수 연구원은 “9세기 통일신라는 많은 재앙과 궁핍에 시달렸다”며 “우리가 겪은 외환위기(1997년)나 금융위기(2008년)보다 훨씬 더 위기감이 팽배한 사회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흥덕왕은 이같이 어려운 국가 경제 현실을 타파할 묘책을 찾기 위해 고심했다. 그는 중국을 왕래하던 사람들로부터 당나라에서 무역상인으로 성공한 장보고 얘기를 자주 들었다고 한다. 장보고도 평소 조국의 어려운 처지를 안타까워했다.
서영교 중원대 박물관장(역사학)은 “당시 두 사람의 만남은 1960년대 산업화 시기 고 박정희 대통령이 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과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등을 인정해준 리더십과 비슷하다”고 해석했다.
박 전 대통령은 이른바 ‘축소 재생산’으로 가난을 벗지 못하던 국가경제에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당시로서는 시선이 곱지 않던 재벌의 역할까지 인정해 줬다는 것이다. 이후 대기업의 수출을 통한 ‘확대 재생산 사이클’로 침체된 한국 사회에 활기를 불어 넣었다는 평가를 받는 대목이다. 흥덕왕도 파격적으로 장보고를 불러 청해진을 만들고 해상로를 개척할 권한을 줘 무역을 통한 해상강국을 만들었다는 설명이다. 결국 역사적 기록과 연구를 종합해보면 흥덕왕릉비의 ‘무역지인간’은 장보고를 지칭하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필수 한국종합물류연구원장은 “흥덕왕과 장보고가 만든 해양강국을 이후에 계속 잇지 못한 것이 가장 안타깝다”며 “조선시대에는 심지어 ‘해금(海禁) 조치’ ‘공도(空島) 정책’으로 해양 진출을 막기까지 한 것은 역사적 교훈으로 되새겨야 한다”고 말했다. 해금 조치란 일종의 쇄국정책으로 먼바다를 못 나가게 한 것이고, 공도 정책이란 도적의 은신처를 없애기 위해 섬을 비워두게 한 것을 말한다. 그는 이어 “어느 역사나 해양 지향일 때는 번성하고 대륙 지향일 때는 쇠퇴했다”고 덧붙였다.
장보고 장군 동상 투구 벗기고 칼 없애고 … 왜 바꿨을까
장군에서 무역인으로 재조명
9월 1일 전남 완도군 완도읍에 도착하자 높이 31.7m짜리의 거대한 장보고 동상이 눈앞에 나타났다. 동상이 있는 장소는 장보고가 약 1200년 전 해상무역의 전초기지로 삼았던 청해진 일부 지역. 장보고는 갑옷을 입고 있었지만 머리엔 상인을 상징하는 머리띠가 둘러져 있었다. 왼손에는 교역물품이 적혀 있는 ‘도록’을 들고 있었다. 그런데 왠지 어색한 모습이었다. 김종식 완도군수는 “원래 설계도에는 투구를 쓰고 왼손에는 서울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처럼 긴 칼을 들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학자 등 전문가들의 반대가 심했다고 한다. 김 군수는 “역사학자들이 장군의 모습으로 장보고 동상을 만들면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것이라는 장문의 탄원서를 보내와 전문가 심의를 다시 해 투구를 벗기고 칼 대신 도록을 쥔 모습으로 바꿨다”고 덧붙였다.
장보고가 재조명되고 있다. 해적을 소탕하는 장군의 모습이 아닌 해상무역왕으로 새롭게 탄생하고 있다. 강봉룡 목포대 교수(역사문화학부)는 “장보고의 본질은 무역왕이지 칼을 쓴 무인이 아니다. 해적 소탕은 무역을 활발하게 하기 위해 한 활동일 뿐”이라고 말했다.
1200년 전 해상 강국 만든 장보고·신라배의 비밀은 …
신라 배는 … V자형 가까운 첨저형 추정
작지만 날렵 … 파도에 강해
해상왕 장보고를 만든 신라배의 흔적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해상왕장보고기념사업회 주도로 이원식(한국해양대 명예교수) 원인고대선박연구소 소장, 김용한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연구실장 등이 연구해 복원한 배는 첨저형(V자·사진)에 가까운 배다.
◆“장보고는 해류 이용한 천재”=고선박연구가인 마광남씨는 “거친 파도를 이겨내려면 바닥이 평평하기보다는 뾰족한 형태여야 한다”고 설명했다. 먼바다를 다니려면 현대의 원양어선처럼 뾰족한 형태일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울산과학대학 이창억(해양조선학과) 교수는 “장보고의 무역 항로는 북방항로뿐 아니라 서해 남부 항로도 다녔다”며 “이런 곳을 다니기 위해서는 밑바닥이 평평한 배로는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신라 배도 한국 고유의 배 형식과 같은 밑바닥이 평평한 모양”이라고 주장한 고 김재근 서울대 명예교수 등을 반박하는 논리다. 일본의 구법승인 엔닌은 ‘입당구법순례행기’에서 ‘신라 배는 작지만 날렵하고 강하다’고 표현했다. 또 신라 배는 동남풍과 서남풍을 이용해 남쪽으로 항해하는 ‘역풍항해’까지 했다고 기록했다.
마광남씨는 “역풍 항해를 하려면 지그재그 방식으로 이동을 해야 하고, 능숙한 돛 조절 능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배의 항해 각도는 목표지점을 향해 50도에서 60도 정도로 움직여 줘야 한다는 얘기다.
장보고 선단은 항법도 앞서 있었다. 정필수 한국종합물류연구원장은 “장보고 선단 항해사는 지문항법·천문항법·수문항법 등을 모두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지문항법은 육상이나 섬의 모양과 목표물을 보고 항해하는 것이고 천문항법은 해와 별자리 등 천체를 활용하는 것이다. 수문항법은 물의 깊이나 색깔을 파악해 위치를 알아내는 것이다. 장보고는 이들 항해술로 해류와 바람이 다른 한반도 남해와 서해, 남중국해 등을 자유자재로 다녔다. 1992년 완도 일대를 답사한 동서교역사 권위자인 휴 클라크(미국 얼시누스 대학) 교수는 장보고의 동북아 해상 장악을 아라비아인들의 남해무역 지배와 비교하면서 “지형과 해류를 잘 이용한 장보고는 천재”라고 평가했다.
◆파손돼도 침몰은 안 돼=고선 전문가들은 신라 배는 한 쪽이 바위 등에 부딪쳐 파손돼도 가라앉지 않도록 앞부터 뒤까지 칸막이를 여러 개 한 것(수밀격벽구조)으로 보고 있다. 엔닌의 기록에 선체의 밑바닥이 모두 부서지고 찢어진 가운데 밀물이 밀려왔지만 계속 항해을 했다는 대목이 있기 때문이다. 선체에 물이 차도 한번에 침몰하지 않고 긴급 항해가 가능했다. 이원식 소장은 “2006년 중국 산둥성 펑라이시에서 발견된 고려 선박이 이런 구조인 것으로 보아 원양항해를 했던 신라 배 역시 비슷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또 신라 배는 튼튼했다. 강상택 전 한국해양대 교수는 “신라 배는 배 측편을 만들 때 판끼리 겹치는 방식으로 한 뒤 참나무 쐐기를 박아 고정시켰을 것”이라며 “일본 배는 판자들을 수평으로 이은 뒤 못으로 고정시켜 약했다”고 설명했다.
장보고를 재평가한 사람들
육당 최남선 ‘해상왕’이라고 처음 불러
이병철 회장 ‘개척정신 이어받자’ 강조
김재철 회장 ‘장보고 재조명’ 위원장 맡아
장보고를 ‘해상왕’이라고 칭한 사람은 육당 최남선이다. 최남선은 1929년 잡지 ‘괴기(怪奇)’에 ‘일천년전 해상왕 신라 장보고’라는 제목으로 처음 소개했다. 그는 “신라 해운의 영광을 표상하는 천고의 위인”으로 평가했다. 장보고에 대한 국내 역사자료는 많지 않다. 장보고는 정사에 왕권을 위협한 반역자의 낙인이 찍혔기 때문이다.
그 이전까지 장보고의 활약상을 알 수 있는 문헌으로는 엔닌이 쓴 ‘입당구법순례행기’와 당 말기의 시인 두목의 ‘번천문집’이 있다. 엔닌은 일본에서 당에 간 838년부터 9년 반에 걸친 고난과 수련을 거쳐 일본으로 돌아오기까지의 행적을 일기로 정리했다. 에드윈 라이샤워 전 하버드대 교수는 1955년 ‘엔닌의 당 여행기(Ennin’s Travels in T’ang China)’라는 제목으로 엔닌 일기를 영역했다. 라이샤워는 장보고를 ‘9세기 신라인들의 해상활동의 중심축’이었다고 평가했다. 또 장보고가 ‘당·일본·신라에 걸친 해상 상업제국의 무역왕’이라고 했다.
국내에서는 고 이병철 삼성 회장이 장보고에 관심이 컸다. 1981∼83년 이 회장 비서팀장을 맡았던 정준명 전 삼성재팬사장은 “바다를 통해 중국·동남아까지 활발히 다녔던 장보고의 정신을 이어받아 해상무역로를 개척해야 한다고 이 회장은 수차례 강조했다”고 전했다. 이건희 전 삼성 회장도 장보고 기념사업회가 출범한 99년 장보고 연구를 위해 10억원을 기부했다. 이명희 신세계 회장은 임직원들에게 보내는 글에서 “아버지(이병철 회장)는 우리나라에 왜 장보고 동상이 없는지 늘 궁금해 하셨다”며 “장보고가 ‘창업의 거장’이라는 점에서, 또 뜻을 세계제일에 뒀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했다”고 강조했다.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은 장보고 재조명에 가장 적극적이다. 98년 학계 및 관련업계 인사 100명으로 구성된 ‘해상왕 장보고 재조명 평가사업 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그는 “장보고는 세계화를 실천한 ‘한국 제1호 종합무역상사’이자 무역입국 전략을 실천에 옮긴 전략가”라고 평가했다. 이명박 대통령도 17대 대선 후보였던 2007년 12월 10일 선거유세에서 ‘강력한 리더십을 갖춘 경제 대통령’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며 장보고를 내세웠다. 그는 “지금 우리나라에 필요한 리더는 장보고와 같은 글로벌 리더”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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