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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조선 단독] 박연차 가족 첫 인터뷰-박연차 회장 동생 박연희씨

鶴山 徐 仁 2009. 5. 12. 15:19
사회
 

[주간조선 단독] 박연차 가족 첫 인터뷰-박연차 회장 동생 박연희씨

"盧, 퇴임 후 가볍게 움직인 게 화근… 자승자박인 셈"
<이 기사는 주간조선 2055호에 게재되었습니다.>

“형님은 어떤 대가를 바라고 주변에 후원을 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지난 5월 1일 부산 모 호텔에서 만난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의 동생 박연희(59)씨는 5시간 가까이 진행된 인터뷰 내내 형을 옹호했다. 형이 전직 대통령까지 옭아맨 대형 비자금 사건의 장본인으로 세상에 알려진 게 너무 안타깝다는 태도였다. 형처럼 신발 사업을 하고 있는 박씨는 “형님은 ‘노의 남자’가 아니라 오히려 피해자” “여야 정치권에만 후원을 한 게 아니다. 수백억원을 써가며 선행 사업을 한 부분은 가려져 있다”고 강조했다.

작년 12월 조세포탈과 뇌물공여 혐의로 박연차 회장이 구속된 이후 박 회장의 가족들이 공식 인터뷰를 가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박 회장의 가족은 그 동안 언론과의 인터뷰를 모두 거절해왔다. 박 회장이 언론의 표적이 돼 시시콜콜한 과거사까지 기삿거리로 등장하는 데 대해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받아온 듯했다. 박연희 사장 역시 처음에는 짙은 경계심을 갖고 인터뷰 요청을 거절했다. 하지만 거듭된 요청에 입장을 바꿨다. 박 사장은 “가족 모두가 고통스럽다. 적어도 형님에 대해 왜곡된 부분만이라도 바로잡아 달라”며 인터뷰에 응했다. 그는 “(인터뷰에 응할지 말지) 형수님(박연차 회장의 부인)을 비롯한 가족들과 상의를 거쳤다”고 덧붙였다.

작년 12월 조세 포탈·뇌물 공여 등의 혐의로 구속된 태광실업 박연차 회장(왼쪽에서 두번째). / photo 조선일보 DB

이날 인터뷰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 및 박연차 회장 모두와 30년 지기라고 하는 강모(63) 회장도 배석했다. 창신섬유 강금원 회장과는 다른 인물이다. 그는 인터뷰 중간중간에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며 박 사장에게 조언을 하기도 했다. 경남 진주 출신의 사업가인 강 회장은 “노 전 대통령과 동갑내기로, 나는 그냥 ‘노무현’이라고 부르는 사이”라고 말했다.

박 사장과 강 회장은 인터뷰 도중 박연차 회장을 ‘Y씨’라고 호칭하기도 했다. 자신들끼리 흔히 사용해온 별칭인 듯했다. ‘연차씨’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기사에선 독자들의 혼란을 줄이기 위해 편의상 Y씨를 모두 ‘박 회장’으로 표기했다. 동생 박 사장과 강 회장 모두 사진 촬영은 끝내 거부했다.

박연차 회장 비자금 사건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까지 검찰에 출두해 조사를 받았다. 사건의 진정한 배경이 뭐라고 생각하나. “전·현 정권의 대립구도 같은 느낌도 있고, 이념적 대립에서 불거진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나는 형님(박연차)이라고 해서 무조건 옹호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검찰은 본연의 의무를 다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육십 평생을 보아온 형님은 어떤 목적이나 특혜를 위해 돈을 주는 사람이 아니다. 모두가 말 한마디 못하고 등을 돌리고 있지만 부산, 경남 지역 인사들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가 어느 순간부터 통합보다는 대립의 구도로 가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서로 한 발씩 뒤로 물러서서 보면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번 사건도 큰 그림에서 볼 필요가 있다. 지난 대선에서도 일부 사안을 두고 여야가 첨예하게 맞섰지만 결국 국민은 국가를 위해, 그리고 경제를 위해 이명박 대통령을 선택했다. 그 기대에 부응하는 방향으로 (이번 사건이) 진행됐으면 좋겠다.”

가족으로서 이 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검찰이 야속할 법도 한데.  “개인적 의견을 말할 사안은 아닌 것 같다. 지금 야당에서 말하는 것처럼 살아 있는 권력에 관대하고 죽은 권력에 강한 그런 상황으로 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형님은 대기업 회장도 아니고 지역에서 자수성가한 중소기업인일 뿐이다.”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아쉬움도 있을 것 같다. “노 전 대통령과 형님의 관계는 당사자가 아닌 만큼 뭐라 말하기 어렵다. 다만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개인적 의견을 밝히자면, 노 전 대통령이 퇴임 후 존경받는 원로로서 가볍게 움직이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이다. 그 동안 인터넷이다 뭐다 해서 말들이 많지 않았나. (정치적) 욕심을 버리지 못한 게 못내 아쉽다.”

‘노 전 대통령과 30년 지기’를 강조하며 강 회장도 이 대목에서 말문을 열었다. 그는 “대통령에서 물러난 뒤에는 현 정권에 협조하고 조용히 원로로서 역할을 했어야 했다. 작년에 촛불시위로 이명박 정권이 적지 않은 고초를 겪었다. 그 사건이 결정적이었다. 지금 상황은 자승자박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고 말했다.

박 회장의 사업과 관련한 각종 특혜 의혹이 불거지고 있다. “대표적인 게 농협 자회사였던 휴켐스 인수가 아닌가 싶다. 그러나 그 매물은 정상적인 절차를 밟았다. 어느 사업가도 물건을 구입할 때 주인이 달라는 대로 주지는 않는다. 공자가 사업을 한다 해도 아마 네고(협상)를 했을 거다. 언론에서 말하듯 이른바 ‘노의 남자’가 아니었다면 과연 지금처럼 문제가 됐을지 의문이다. 경남 진해의 시행사업 부지와 관련, 고도제한이 해제된 것에 대해서도 근거 없는 의혹만 난무했다. 국내에서 시행사업 하는 사람이 아마 수천 명도 넘을 거다. 그런데 왜 박연차만 문제가 돼야 하는지 모르겠다.”

강 회장도 말을 거들었다. 그는 “과거 숱한 M&A가 있었다. 그중에는 언뜻 봐도 납득하기 어려운 인수합병이 많았다. 지금 정치권은 옳고 그름을 말할 소신 있는 정치인이 없다”고 했다.

박 회장을 흔히 ‘노의 남자’라고 하지 않나. 노 정권과 그만큼 가까웠던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는 추호도 박 회장을 ‘노의 남자’라고 생각해본 적 없다. 언론이 그렇게 만든 거 아니냐. 솔직히 말하면 우리 집안은 노 전 대통령 측근들로부터 피해를 많이 봤다. 1980년대 우리 5형제는 모두 신발관련 제조업을 하고 있었다. 그 당시 산업현장을 휩쓸고 다녔던 운동권 인사들로 인해 5형제 중 2명을 제외하고 모두 문을 닫아야 했다. 그때 운동권 인사 중 상당수가 참여정부에서 활동했다.”

노 전 대통령과 박 회장은 어떻게 인연을 맺었나. “노 전 대통령과 박 회장은 나중에 알게 됐다. 그에 앞서 노건평씨와 박 회장이 같은 지역에 살면서 오래전부터 가깝게 지낸 사이다. 동생이 정치를 하는데 자금이 없어 건평씨가 땅을 박 회장에게 팔기도 하고 그랬다. 노 전 대통령과 박 회장이 서로 안 지는 20년 정도 됐다.”

원래는 박 회장의 고향이 경남 밀양이라고 들었다. “찌만할(어릴 적) 때 부산으로 이사왔다. 우리 가족은 40여년 전에 밀양을 떠나 현재의 부산시 사상구 쪽으로 옮겨 왔다. 박 회장은 사상에서 조그맣게 신발사업을 시작했다. 천신일 고려대 교우회장과 앞뒷집에 살았는데, 당시 천 회장 집 담벼락에 슬레이트를 얹어 가내수공업을 시작했다. 그게 아마 1971년쯤일 거다. 그러다가 인접한 김해로 옮겨가 터를 잡았다.”

박 회장이 신발 사업을 하게 된 계기는. “5남1녀인 우리 형제들이 부모님께 물려받은 건 건강한 몸이 전부다. 모두가 고향을 떠나와 객지에서 스스로 자수성가했다. 밀양에 살 때는 전답과 임야가 있어 그럭저럭 먹고살 만했지만 부산에 오니 땅값도 다르고 집값도 달라 살림이 어려워졌다. 그 시절은 또 어려운 때였다. 형제들이 공부를 하기보다 사회생활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가장 먼저 맏형이 취업을 했는데, 진양화학이라고 신발사업을 하던 곳이었다. 거기서 큰형님은 신발디자인을 담당하는 개발과장을 하셨다. 그래서 둘째 형님도 그곳에 취업을 했다가 독립했다. 셋째 형인 박 회장은 일찍 창업을 했다. 태광실업의 전신인 정일산업은 이때 출발했다. 나 또한 형들을 따라 신발업을 하면서 형제가 모두 같은 업종을 하게 된 것이다.”

박 회장의 학력이 ‘국졸’이라고 들었다. “공식적인 학력은 국졸이 맞다. 하지만 나는 이 얘기가 나오면 조금 화가 난다. 일부 언론에서 학력이 짧다면서 깎아내리는 것을 보면 참 한심하다는 생각도 든다. 우리 사회가 언제부턴가 학벌을 중시해 그게 전부인양 내세우는 경향이 생겨났는데, 정주영 회장이 학벌이 좋아 사업에 성공한 것은 아니다. 형님은 비록 생업을 위해 진학을 포기해야 했지만 그 당시엔 어느 집이든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식한 사람으로 보면 그건 큰 오해다. 정말 그렇다면 지금처럼 수만 명의 직원을 거느린 회사 대표가 될 수 없다. 솔직히 말하면 대학원 나온 사람보다 더 경영학적 지식이 많고 영어와 일본어도 잘한다. 외국 바이어와 만나 미팅을 할 때 보면 알 수 있다. 타고난 자질이 중요하지 학력이 중요한 것만은 아니다. 형님은 오늘의 태광실업을 만들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해온 인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학력 콤플렉스 같은 것도 전혀 없다. 자신의 학력을 공개석상에서 스스로 말한다. 너무 담백해서 탈이지. 학식이 높다고 베풀고 선행사업을 하는 것도 아니다.”

박 회장은 경남대 등에서 최고경영자 과정을 이수했고, 2006년 6월 인제대에서 명예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은 바 있다.

박 회장이 정치인 등 지방 유력 인사에게 경제적 지원을 많이 했다고 들었다. “답변하기 어렵다. 단, 노무현만 지원한 게 아니라 한나라당도 후원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형님은 어떤 대가를 얻기 위해 그런 일을 하실 분이 아니라는 점이다. 공익을 위해 선행을 많이 했다는 점도 알아줬으면 좋겠다. 형님이 죄가 있다면 주변에 베풀어 준 것밖에 없다.”

기자가 정치인 후원과 관련된 질문을 계속하자, 강 회장은 “정치인 중에는 자기 바탕이 없는 사람이 많다. 박 회장은 경남을 위해, 그리고 지역 정치인을 위해 아무 대가 없이 후원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박 회장이 한 선행의 예를 들어봐 달라. “IMF가 잦아들던 1990년대 말부터 지금까지 사회공헌을 위해 200억원 이상을 썼다. 1992년 김해장학재단을 설립한 데 이어 1999년 정산장학재단을 만들어 지역 인재 발굴에 힘썼고 각종 사회복지사업과 문화, 스포츠 사업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2007년에는 세계 4대 뮤지컬 중 하나인 ‘미스사이공’의 김해 공연을 추진하기 위해 사재를 출연하기도 했다. 하나하나 다 따지기도 어려울 정도로 많은 일을 했다. 형님이 워낙 손이 큰 분이라 도움을 요청하는 곳에는 항상 지갑을 열곤 했다. 국내에서뿐 아니라 해외 공장이 있는 중국과 베트남 현지에도 학교법인을 설립하는 등 사회 환원을 계속해왔다.”

박 회장은 2002년 베트남 명예총영사로 임명된 이후 양국 간 무역 활성화를 위해 2003년 부산~호찌민 간 직항로 개설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정 기간 발생할 수 있는 운항 적자를 본인이 부담키로 하는 조건이었다. 박 회장의 둘째 형인 박연구 삼호산업 회장도 2000년 부산과 중국 청도 간 직항로 개설의 산파역을 맡았다고 한다.

박 회장이 그렇게 사회 공헌을 중시하게 된 계기가 있나. “내가 알기로 형님은 남이 도움을 요청해 오면 거절을 하지 못하는 성격이다. 부친의 영향이 컸다. 아버님께서는 밀양에 사실 때부터 집안일보다 남의 집 일에 관심이 많던 분이셨다. 언제나 찾아오는 손님을 마다하지 않고 밥과 술로 극진히 대접했다. 또 장날이 되면 꼭 읍내에 나가 어렵게 사는 사람들을 집으로 불러들여 음식을 나눴다. 어머님이 불평을 할 때마다 ‘할멈, 시끄럽다. 같이 먹고살아야지’하며 핀잔을 주곤 했다. 나중에는 밀양군수나 밀양 경찰서장도 인근에 오면 꼭 집에 들렀다. 부산에 와서도 행동에는 변함이 없으셨다. 그때는 그런 아버지가 정말 싫었다. 아버지를 이해하기는커녕 그저 무서운 존재일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 형제들은 모두 아버지를 닮아가고 있다. 세상 살아보니까 아버지 냄새가 그립다.”

노 정권 말기인 2007년 박 회장의 비행기 난동 사건이 불거진 바 있다. “원칙을 지키지 않은 형님의 잘못이다. 정중하게 사과하고 대가를 치렀다. 가슴이 아프다. 만취한 상태서 벌어진 일이라고 들었다. 그러나 만약 그가 박연차가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문제가 확대됐을까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박 회장이 어떻게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됐나. “결정적인 계기는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킨 IMF 시절이 아닌가 싶다. 당시 환율이 크게 올라서 3000억원 가까운 차익을 냈다. 800원대에 수출 주문을 받았는데, 당시 1800원까지 환율이 올랐기 때문이다. 그 돈으로 사업분야를 넓히는 등 사업 다각화에 고스란히 투자해 큰 수익을 냈다. 1980년대 후반 신발사업이 사양산업으로 몰렸음에도 불구하고 꾸준하게 첨단화에 투자한 게 좋은 결실을 맺었다. 그 결과 세계적 기업인 ‘나이키사’가 태광실업을 가장 신뢰할 만한 기업으로 꼽게 됐다.”

박 회장의 현 재산 규모에 대해서는 자세히 밝혀진 바가 없지만 업계에선 국내외 법인 주식과 부동산 등을 합쳐 1조원이 넘을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혹시라도 가족 중에 사업과 관련해서 노무현 정권의 혜택을 본 일이 없나. “우리 집안이 노무현 정권에서 받은 혜택은 전혀 없다. 오히려 고통을 당했다.”

박 회장이 노 전 대통령에게 보낸 돈을 두고 뒷말이 많다. 박 회장 돈이 맞나. “본인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모르는 내용이다. 새 정권이 들어선 뒤 이런 저런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는 정도의 얘기를 형님에게 몇 차례 드린 적이 있다. 가족들이 상당히 우려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너나 잘해라’며 핀잔을 들었다. 형님 입장에선 인연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과거 부동산 거래를 한 것도 어디까지나 노건평씨와의 인연 때문이었다. 솔직히 말해 누구도 그분(노무현)이 대통령이 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한때 국회의원도 떨어지는 아픔을 겪은 분이다. 그런데 무슨 대가를 노리고 관계를 맺었다는 게 말이 안 된다. 예를 들어 지금 누군가가 미래의 대통령이 될 사람이라고 그에게 로비를 한다면 아마도 미친 사람 취급을 당할 거다.”

박 회장의 가족들이 노 전 대통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마음이 아프다. 또 사람을 만나기가 두렵다. 노 전 대통령만큼은 공약을 잘 이행하고 비판받지 않는 대통령이 되기를 열망했다. 실망을 많이 했지만 내가 그분을 비판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같다. 내게는 그럴 자격도 없다. 그러나 대통령 주변에 사상적으로 병든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다.”

강 회장도 “노무현이는 가난하게 자란 탓에 한이 많긴 하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다. 취임 이후에 참모들이 제대로 보좌하지 못한 부분도 있다. 박 회장도 노 전 대통령에게 이런저런 진언을 했을 것으로 보는데, 그게 반영이 안된 것 같다”고 주장했다.

박 회장이 검찰에서 노 전 대통령 혐의와 관련된 진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노 전 대통령 측도 감정이 좀 상한 것 같다. “박연차가 분 것은 하나도 없다. 다이어리가 발견되는 바람에 그렇게 된 것이다. 형님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힐 사람이 아니다. 검찰과 언론에서 형님이 진술을 했다고 하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다.”

노 전 대통령은 대질신문도 거부했다. “그만큼 지금 두 사람 관계가 썩 좋아 보이지 않는다. 형수님은 언론과 접촉하는 것에 대해서도 많이 우려하셨다. 박연차라는 사람을 부정적으로만 보지 말아 달라.”